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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주일예배

2014.07.13. 주일오전 - 유력한 자가 있으니(룻기 4)



룻0201to16 - 유력한 자가 있으니(룻4).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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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본문 : 룻기 2장 1-16절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죄를 용서받고 구원을 얻은 성도들 입니다. 우리가 이런 복된 사람들이 된 것을 표현하는 말 중에서 ‘은혜’라는 말만큼 좋은 말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죄를 용서받고, 또 구원을 얻기 위해서 우리 쪽에서 한 일이나 자격을 갖춘 것이 하나도 없으니까요.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실 의무를 가지고 계신 것도 아니었고 우리를 구원하시고 하나님의 자녀 삼으셔야 할 의무는 더더욱 없으셨습니다. 게다가 우리들의 반복되고 또 반복되는 죄와 불순종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를 그런 은혜 안에 두실 이유는 더더욱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용서를 받고 그 분의 백성이 된 것, 그리고 지금도 그 은혜 안에서 살고 있다는 것은 그저 그 분의 넘치는 사랑 덕분이라고 밖에는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 은혜를 허락하실 때, 아무런 댓가도 지불하지 않고서 그냥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일을 위해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내놓으셨고 또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셨습니다.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엄청난 댓가를 치르신 것이죠. 이것은 그렇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사용하실 수 있는 단 하나 밖에 없는 방법이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지불하셔야 할 값을 차고도 넘치게 아주 넉넉하게 지불하시기 위해서 이기도 했습니다. 원래 100원짜리 물건을 살 때는 100원만 지불하면 됩니다. 아무리 넉넉하게 값을 치른다고 해도 200원 정도만 내면 됩니다. 그러면 그 누구도 지불된 값에 대해서 토를 달지 못합니다. 그런데, 비유하자면 하나님께서는 100원짜리를 구입하시면서 백지수표를 지불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넉넉한 값을 지불하신 이유는 오고 오는 모든 세대의 하나님의 자녀들을 전부 구원한다고 해도 치르신 댓가가 전혀 부족하지 않게 하시기 위해서 입니다. 그래서 죄 있는 우리의 유한한 생명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죄 없는 성자 하나님의 무한한 생명을 값으로 지불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것 때문에 우리의 구원이 변함 없이 안전할 수 있습니다. 이미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한 없이 넉넉한 값을 지불해 놓으셨기 때문에 그 누구도 우리를 다시 하나님의 손에서 빼앗아 갈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들리지 않은 구원을 얻은 것은 바로 이러한 넉넉한 은혜와 헤픈 사랑 덕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그 헤프게 낭비하시는 넉넉한 사랑 덕분에 이 구원을 얻을 수 있었고 또 지금도 그 안에서 안전하게 거하며 살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또 한 가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런 구원의 사랑과 은혜를 주신 것은 어느 날 갑자기 즉흥적으로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이 생기기도 전에 우리를 구원할 계획을 세우셨고, 이 계획을 이루시기 위한 가장 완벽한 시간이 오기를 기다리시면서 인간의 역사 속에서 이 일을 이루어 가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이루어 가셨다는 것은 곧 그것이 사람들이 사는 이야기 속에서, 그 이야기를 통해서 이루어져 갔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이야기들이 기록되어 있는 책이 바로 이 성경입니다. 그런 점에서 성경은 하나님의 구원 이야기가 사람들의 이야기 속에 들어 있는 그런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구원은 하나님께서 이루어 가십니다. 그것도 확실하고 분명하게 이루어 가십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일을 사람들을 통해서, 그리고 사람들의 이야기 안에서 이루어 가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역사 안에서 사람들이 차지하는 역할이 절대로 작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것 때문에 때로는 별로 중요하고 가치 있어 보이지 않는 우리의 삶이 하나님 앞에서는 정말 영광스러운 삶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이야기가 하나님의 구원 이야기를 담아내는 좋은 그릇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룻기는 사사시대의 이스라엘 그것도 지방 한 구석에서 일어났던 하나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는 아주 작은 책입니다. 사사기가 330년이 넘는 기간 동안의 이스라엘 전체 역사를 기록하고 있는데 반해서 룻기는 그 330년 중에서 그게 어느 시대였는지도 정확하지 않은 겨우 7주 동안에, 그것도 시골 한 구석에서 일어났던 하나의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사사기는 그 당시 재판관과 군 사령관, 그리고 하나님께서 보내신 구원자의 역할을 감당했던 사사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사사기는 하나님께서 그런 사사들을 보내셔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고 또 다스리셨던 영웅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반면에 룻기는 어떤 책입니까? 룻기는 그저 몇 명 안되는 평범한 사람들의 만남 속에서 일어난 사건 하나를 기록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것도 별로 재미없는 아침 드라마 같은 이야기를 말입니다. 마치 이스라엘 판 신데렐라 이야기 같아 보일 정도입니다. 이 둘 을 비교한다면 둘 중에서 어떤 것이 더 중요한 책인지는 너무도 자명합니다. 어느 모로 보나 룻기 보다는 사사기가 훨씬 더 중요할 수 밖에 없겠죠. 그런데, 우리가 이 두 책의 결론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 두 이야기를 바라보는 시각이 전혀 다르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사사기 마지막 장인 21장, 마지막 절인 25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한 마디로 그 330년 동안의 세월 동안 온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대해서 반역하면서 살았다는 것이 사사기의 결론입니다. 그러나, 룻기의 마지막 구절들은 룻이 보아스와 결혼해서 아이를 낳았는데, 그가 바로 다윗의 할아버지인 오벳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신약의 마태복음은 결국 이 다윗의 혈통에서 온 세상의 왕이요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셨다고 말해 줍니다. 그러니까 룻기의 결론은 룻과 보아스의 만남을 통해서 이 세상에 메시야가 오셨다고 이야기 해 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구약 성경 모두를 가지고 있는 우리들이 성경 속에서 발견하게 되는 룻기의 위대한 결론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 모든 일이 시작되었던 두 사람의 만남은 정말 중요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2장 처음 부분은 이 두 사람이 처음으로 만난 장면을 그리고 있습니다. 다행히 이제 막 보리추수가 시작되는 때 베들레헴에 도착한 나오미와 룻, 이 두 사람은 그 덕분에 굶지 않고 최소한의 먹을 것을 구할 수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율법 안에 넣어 놓으신 헤세드 덕분에 이삭줍기를 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따뜻한 율법이 있다는 것은 너무나 다행스러운 일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방인인 젊은 여인이 이삭을 주우려고 혼자 나선다는 것이 쉽지 만은 않은 일이었습니다. 자칫 위험할 수도 있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룻은 차비를 하고서는 혼자서 이삭줍기에 나섭니다. 사실 룻의 입장에서는 혼자 가는 것보다 나오미와 함께 가는 것이 훨씬 더 유리합니다. 손도 한 사람보다는 두 사람이 나을 것이고, 사람들과 안면이 있는 것도 룻이 아니라 나오미이니까요. 게다가 안전문제까지 생각한다면 룻은 혼자가 아니라 나오미와 함께 가야만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룻은 그저 혼자 길을 나섭니다. 그렇다면 룻은 왜 이런 무리한 선택을 했던 것일까요? 그것은 그가 자신 보다는 시어머니를 더 많이 배려했기 때문입니다. 이유야 어쨋든 이방 땅인 모압에 갔다가 재산이며 남편, 그리고 아들들까지 모두 잃어버리고 텅 빈 인생이 되어 고향으로 돌아온 나오미가 다른 사람들 앞에서 이삭을 주우면서 또 한 번 부끄러워 하고 절망스러워 하는 것을 막아 주기 위해서 였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런 어리석은 선택을 할 리가 없겠지요. 룻은 이 일에 있어서도 변함없이 나오미에게 헤세드를 베풀고 있었던 것입니다. 


시어머니의 허락을 받은 룻은 일단 밀밭으로 나갔습니다. 룻은 지혜롭고 사려 깊은 여인이었기 때문에 먼저 밭들을 살폈을 것이 분명합니다. 가장 낟알이 많이 떨어져 있는 밭, 그리고 자신과 같은 여인들이 가장 많이 이삭을 줍는 그런 밭을 찾았겠지요. 그리고는 추수꾼들을 따라서 이삭을 줍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 밭이 바로 보아스의 밭이었습니다. 그리고, 결국 그것 때문에 보아스와 룻은 거기서 만나게 되었고, 그 만남으로 인해서 룻기라는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하나님 나라의 역사가 성경에 기록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은 이 두 사람의 만남이 그저 어쩌다 보니 우연히 이루어진 일이라고 말합니다. 룻이 이삭을 줍게 된 곳이 공교롭게도 보아스의 밭이었고 그래서 그 두 사람이 만날 수 있었으니까요. 그렇지만 성도 여러분, 정말 이 만남이 우연일까요? 그래서 이 두 사람은 그 우연 덕분에 결혼을 할 수 있었고, 그 우연 덕분에 온 세상을 구원할 구원자의 조상이 되는 영광을 얻게 된 것일까요? 혹시 하나님께서는 이 우연이라는 말을 통해 우리에게 따로 들려주시고자 하시는 말씀이 있는 것이 아닐까요?


어떤 사람들, 특히 훌륭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어 보면 그들의 이야기 속에는 아주 묘한 공통점이 있습니다. 우리가 대개 어떤 훌륭하고 위대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으면 그 사람 자체에 집중을 하기 쉽지만, 정작 그 이야기 속에서 발견하게 되는 중요한 사실은 그 사람 혼자서 그렇게 훌륭한 사람이 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그렇게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었고, 또한 역사 속에 의미있는 업적을 남길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거의 항상 그들이 만났던 어떤 사람들 덕분입니다. 그 사람들과의 만남 덕분에 그들의 삶에는 커다란 변화가 생겨났고 그래서 그런 사람들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도 여러분, 그들 앞에 그런 영향을 줄 수 있는 사람들이 나타난 것은 과연 그저 우연히 길을 가다가 어떤 사람을 만나게 되는 것처럼 그렇게 우연히 되어진 일일까요? 그 일 하나만 따로 떼어놓고 보면 그렇게 보입니다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들에게는 누구나 자기 삶의 방향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은 그 방향에 따라서 자신의 길을 걸어 갑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다른 사람들을 만나는 것은 바로 그 방향으로 난 길 위에서 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을 만나게 되는 것은 그렇게 만나는 사람들이 같은 방향으로 나 있는 같은 길 위에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정말 우연히 자신을 훌륭하게 만들어 줄 수 있는 그런 사람을 만난다고 해도 그 사람이 그런 가치가 있는 사람인 줄 알아보아야 하고 그 사람에게 기꺼이 배우려고 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만난 사람이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그저 한 번 쯤 인사하고 지나치는 사이 밖에 되지 못합니다. 기독교 역사 속에서 바울 다음으로 중요한 사람으로 여겨지는 어거스틴이라는 분이 있습니다. 정말 훌륭한 분이죠. 많은 사람들은 이 분이 회심을 하기 이전에 굉장한 탕자였다고 알고 있습니다. 물론 그는 굉장히 오랜 시간을 방황했습니다. 그러는 중에 영적으로, 그리고 도덕적으로 탈선을 한 적도 있었지요. 그렇지만 그의 방황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방황이 아니었습니다. 그 분의 방황은 진리를 찾기 위한 긴 여행이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그러한 방황을 끝날 수 있었던 것은 암브로시우스라는 교부를 만난 덕분이었는데요. 어거스틴이 암브로시우스를 만나 자신의 방황을 끝내고 정말 위대한 사람으로 거듭날 수 있었던 것은 암브로시우스가 어거스틴이 찾던 그 진리를 가르쳐 주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어거스틴의 방황이 진리를 찾기 위한 방황이 아니라, 그저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한 방황이었다면 어거스틴이 암브로시우스를 만나고 그의 설교를 들었다고 해도 그냥 지나쳐 버리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는 진리를 찾기 위해서 여행을 했기 때문에 암브로시우스를 통해서 기독교의 진리를 듣고서 거기서 기독교 역사상 가장 위대한 회심이라고 하는 그런 회심을 경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어거스틴이 이미 암브로시우스와 같은 길을 길 위에 있었기 때문에 두 사람의 만남은 그렇게 위대한 열매를 맺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어떤 만남이 의미 있는 만남이 된다는 것은 결코 우연히 이루어지는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렇게 만나는 사람들이 이미 같은 방향으로 여행하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얻게 되는 복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정말 의미 있고 가치 있는 만남을 얻는 귀한 복을 누리려면 내가 그런 길을 가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런 사람들을 만날 수 있고 또 그런 사람을 만났을 때, 정말 그 사람 때문에 삶이 바뀌고 존재가 풍성해 지는 그런 복을 얻을 수 있습니다. 룻은 분명히 가장 많은 여인들이 이삭을 줍는 밀밭, 그리고 낟알이 가장 많이 떨어져 있는 밀밭을 찾았을 것입니다. 그게 가장 안전하고 또 많은 이삭을 주울 수 있을테니까요. 그렇다면 여러분, 그 밀밭은 어떻게 해서 가장 많은 가난한 여인들이 이삭을 줍는 밀밭, 그리고 가장 많은 낟알이 떨어져 있는 밀밭이 될 수 있었을까요? 그 밭에서 이삭을 줍는 여인들은 이미 베들레헴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어떤 밭에 가면 제일 편안하게 이삭을 주울 수 있을지, 그리고 많이 주울 수 있을지 잘 알고 있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성도 여러분, 이것이 바로 그 밭의 주인의 성품이 어떤 것인지를 알려주는 중요한 단서는 아닐까요? 저는 분명히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그 밀밭은 어떤 성품을 지닌 사람의 밭일 가능성이 가장 높을까요? 그 지역에 밀밭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중에서는 그래도 가장 사랑이 많고 너그러운 사람의 밭이 될 수 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이 밭이 보아스의 밭이었던 것이 과연 우연이었고, 룻이 이 밭을 찾아온 일이 과연 우연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당연히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는 일이었습니다. 


우연이 있다면 그것은 그 밭에서 룻과 보아스가 만난 그 일일 것입니다. 보아스가 그 밭에 나와 보지 않았다면 두 사람은 서로를 만나지 못했을 테니까요. 그러나 이 두 사람이 그 밭에서 마주쳤다고 하더라도 두 사람이 사는 길이 전혀 달랐다면, 그 만남은 의미있는 만남, 그리고 서로에게 영광이 되고 복이 되는 그런 만남이 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두 사람의 만남이 의미있고 가치있는 만남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직접적으로 보면 열심히 이삭을 줍고 있던 룻을 보고 보아스가 그를 불러서 특별한 친절을 베풀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보아스는 룻을 다른 여인들 보듯이 그저 지나칠 수가 없었을까요? 그것은 보아스가 이미 룻이 시어머니에게 베풀었던 헤세드를 알고 있었고, 그것이 보아스를 감동시켰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모든 사람이 전부 다 착한 사람을 보고 감동할까요? 모든 사람들이 다 가치를 추구하고 의미를 찾는 사람들을 좋아할까요? 남들은 잘 가려고 하지 않는 길 가면서 묵직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을 보면 모든 사람들이 다 칭찬할까요? 그럴 것 같지만 실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착한 사람을 보고 진짜로 감동하는 사람은 그 사람이 착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의미를 찾고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에게 끌리는 이유는 그 사람이 이미 그런 것들을 찾는 사람이기 때문이구요. 남들 가지 않는 묵직한 삶을 사는 사람에게 매력을 느끼는 이유 또한 이미 그 사람도 어느 정도는 그 길을 걷고 있기 때문입니다. 보아스가 룻의 헤세드에 그렇게 깊이 마음이 움직이고 그래서 그 날 그렇게 커다란 친절을 베풀 수 있었던 것, 그래서 그  두 사람의 만남이 결국에는 그렇게 복되고 영광스러운 만남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이미 보아스가 누구보다도 풍성한 헤세드를 가진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룻이 보아스의 밭을 찾게 된 것은 보아스가 헤세드의 사람이었고, 보아스가 룻에게 깊고 따뜻한 친절을 베풀었던 것 또한 룻이 헤세드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보면 이 두 사람의 만남은 절대로 우연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두 사람 중에 한 사람이라도 이런 사람이 아니었다면 그 둘은 만날 수 없었을 것이고, 만났다고 하더라도 두 사람의 삶과 영광을 바꾸고, 이 세상을 섬기는 그런 만남은 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우리 인생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 우리가 우연히 일어났다고 생각하는 그런 일들의 진짜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보게 하는 것 같습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알려 주는 것은 이 세상에서 우리가 가치있고 의미있는 일들을 경험하고 또 그런 만남을 가지게 되는 것은 절대로 우연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그런 것들이야 말로 우리가 가치있고 의미있는 삶을 살아가려고 할 때, 그러한 삶 속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특별한 복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일들을 통해서 그런 사람들의 삶을 아름답고 풍성하게 만들어 가시며 그 삶 속에 하나님의 중요한 이야기를 기록해 가신다고 말합니다. 


오늘 본문을 1절을 보면 성경이 보아스를 소개하면서 그가 “유력한 자”라고 말하고 있는데요. 이것은 단순히 그가 가진 것이 많은 그 지역의 유지였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런 의미도 들어 있지만 그 보다는 그가 주변에 선한 영향을 많이 끼치는 사람이었고 그래서 존경받는 사람이었고 가치있는 사람이었다는 뜻입니다. 그것도 사람은 물론이고 하나님 보시기에도 그렇게 여기실 만큼 말입니다. 그것이 성경이 유력하다는 단어를 쓸 때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룻 또한 “유력한 자”라고 불려도 될 자격이 충분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닮은 헤세드로 가득 찬 룻의 삶은 유력한 자였던 보아스를 깊이 감동시키기에 충분했으니까요. 하나님은 그렇게 두 사람의 “유력한 사람”들을 만나게 하시고, 그들을 통해서 이 세상에 가장 유력한 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나게 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 사람은, 그리고 그 사람들의 만남은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 가시고 기록하시는 아주 중요한 수단들 중의 하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닮은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또 다른 하나님을 닮은 사람을 만나게 하심으로써 그들의 인생을 그릇 삼아 거기 하나님의 은혜의 이야기를 담아 놓으십니다. 그리고 그들의 삶을 서로를 통해서 복되게 하십니다. 


누구나 한 구석 쯤은 자신의 삶에 빈 구석을 가지고 있게 마련입니다. 자신의 힘으로는 절대로 채울 수 없는 빈 구석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런 삶을 주신 것은 내가 누군가의 텅 빈 구석을 채워주고, 또 누군가가 나의 텅 빈 구석을 채워 주는 그런 풍성함을 경험하게 하시기 위해서 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채워줌 속에서 하나님이 우리들을 위해서, 그리고 이 세상을 위해서 일하시기 위해서 입니다. 우리가 누군가의 삶의 빈 구석을 채워주는 유력한 사람으로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는 내가 걸어가는 그 길에서 우리 삶의 빈 구석을 채워줄 수 있는 하나님이 준비해 두신 또 다른 유력한 사람들을 만나게 해 주실 것이며, 그렇게 우리는 이 세상과 하나님을 위한 유력한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이 세상에 하나님의 넉넉한 사랑 이야기를 들려주는 그런 사람들 말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수고스럽고 부담스럽더라도 조금 더 사랑하십시다. 그래서 우연으로 이어져 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우리의 삶과 그 삶 속에서 이루어지는 만남이 모두에게 복이 되고 채움이 되는 그런 삶이 되게 하십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평범한 삶에 하나님의 가장 중요한 이야기를 담아가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이 텅 빈 세상의 텅 빈 가슴들을 하나님의 헤픈 사랑을 닮은 사랑으로 채워가며 이 세상에 하나님의 헤픈 사랑 이야기를 들려주는 참으로 유력한 사람들이 되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