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현교회 설교,강의/주일오후

2014.07.27. 전교인 기도회 - 라오디게아 교회에 보낸 편지2


16. 계0314to22 - 라오디게아 교회에 보낸 편지(1).pdf


20140727SE (#1).mp3.zip





본문 : 요한계시록 3장 14-22절



드디어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교회 중에서 마지막 교회인 라오디게아 교회에 주님께서 보내신 편지에 대해서 묵상할 차례가 되었습니다. 다른 교회들도 그런 점이 있었지만 특히 라오디게아 교회는 더욱더 요즘 교회의 모습과 많이 닮아 있습니다. 어떤 점이 그런지는 차근 차근 살펴보겠지만, 그래서 라오디게아 교회는 오늘날 특히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이 시대, 우리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많아진 이 시대를 사는 우리 성도들에게 주는 귀한 교훈들이 많습니다. 왜냐하면 라오디게아라는 도시가 이 시대를 많이 닮아 있고, 그 안에서 신앙생활을 하던 성도들이 오늘날 부유한 시대를 사는 성도들과 너무 비슷한 환경 속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라오디게아라는 도시는 자연스럽게 발달한 도시가 아니라 계획적으로 세워진 도시였습니다. 이렇게 세워지는 도시가 대개 그렇듯이 그래서 라오디게아는 경제와 교통, 그리고 군사적인 요충지에 세워졌습니다. 게다가 이 곳은 의학이 발달한 곳으로도 유명했는데요. 특히 눈과 귀와 관련된 의학 전문가들이 모여 들어서 이곳에서 만든 약들은 벌써 그 당시에 알약으로 만들어져 다른 지역으로 수출되기도 했습니다. 또 한 가지 양모 산업이 굉장히 발달되어 었는데, 그 당시 이 지역의 양모는 아주 유명한 고급 제품이었습니다. 로마의 플리니라는 사람은 이곳의 양모에 대해 ‘부드러울 뿐만 아니라 검고 윤이 나기까지 하여 단연 최고의 품질이라 할 수 있다’고 평가하기도 했습니다. 덕분에 라오디게아는 굉장히 부유한, 부족함이 없는 도시였고, 성도들 또한 그런 환경 속에서 부족함이 없이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가끔씩 보면 이렇게 보나 저렇게 보나 부족함이 없는 가운데 신앙생활하시는 분들을 만나곤 하는데요. 라오디게아 교회와 그 교회의 성도들은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바로 그렇게 복받은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사는 대구가 연 소득이 한 10만불 쯤 되고 우리가 그 안에서 걱정할 것 없이 부유하게 신앙생활 하고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렇게 된다면 정말 더 이상 부러울 것이 없는 이상적인 상태가 될 것입니다. 그 당시의 라오디게아 교회와 성도들이 바로 그런 상태였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주님이 보시기에 이 교회는 그렇게 바람직한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런 부족함이 없는 넉넉하고 복된 형편이 커다란 영적인 부작용을 만들어 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눈에 보이는 조건이나 그 조건들이 만들어 내는 상황 자체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대개는 그런 것들만을 기준으로 해서 모든 것을 판단하게 되지요. 그런데 우리의 이런 습관 때문에 우리가 빠지기 쉬운 착각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겉으로 보기에만 복되고 겉으로 보기에만 문제가 없으면 그것을 바람직한 상태라고 여긴다는 것입니다. 실제로는 그 안에서는 심각한 문제가 곪고 있는데 말입니다. 주님 보시기에 그 당시의 라오디게아 교회가 딱 이런 상태였습니다. 


주님은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또 행위가 나옵니다. 주님은 여기서 믿음이 아니라 그들의 행위를 문제 삼고 계시는데요. 믿음만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우리들에게는 여전히 익숙하지 않습니다만, 사실 주님이 교회나 성도들을 평가하실 때, 최종적으로 보시는 것은 바로 ‘행위’입니다. 그것은 행위 속에 그 사람의 모든 것이 다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행위라는 것을 바라보는 사람들과 주님의 시각차이가 분명합니다. 사람들은 행위의 양과 크기 그리고, 결과로 그 행위의 가치를 평가합니다. 그렇지만 주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 세상을 판단할 때는 물론이고 예수를 믿는 우리의 행위를 볼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행위를 보시되 그 안에서 꼭 들어있어야할 것을 찾으십니다. 원래 오늘 본문에 ‘행위’로 번역되어 있는 말은 원래 ‘행위들’이라고 번역해야 정확합니다. 이렇게 보면 라오디게아 교회는 이런 저런 행위들을 많이 하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요즘으로 표현하면 교회에서는 사업을 많이 하고, 성도들은 봉사를 많이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것만 보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른 무언가를 찾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많은 경우 이 말씀을 주님이 교회와 성도들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뜨거움이라고 해석해 왔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뜨거움, 그러니까 열정을 요구하시는 것은 분명합니다. 신앙생활에는 반드시 하나님과 자기 자신의 영혼을 향한 열정이 필요하니까요. 그렇지만 주님이 오늘 본문에서 문제 삼고 계신 것은 단순히 성도와 교회에 뜨거움이 있는가 없는가 하는 것보다 더 근본적이고 더 중요한 것입니다. 본문에서 주님은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덥지도 않다고 나무라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차든지 덥든지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차가워도 괜찮고 뜨거워도 괜찮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정확하게 무슨 뜻일까요? 이 말씀에는 배경이 있습니다. 라오디게아는 다 좋은데 물이 부족한 도시였습니다. 그래서 다른 곳에서 물을 끌어와야 했죠. 이 도시는 물을 두 곳에서 구했는데요. 근처에 있는 산과 온천이었습니다. 거기서 부터 수로를 통해 물을 끌어왔습니다. 물이 어떻게 되었을까요? 거기까지 오는 동안 찬물은 덥혀져서 미지근해졌고 온천수는 식어서 미지근해졌습니다. 온천물이면 뜨거워야 목욕하기에 좋고, 냉수면 차가워야 마시기에 좋은데 라오디게아에 도착하는 물은 둘 다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것 때문에 라오디게아의 주민들은 불만이 많았습니다. 미지근한 물이 여기에도, 그리고 저기에도 사용하기가 적당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 다음 구절을 보면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주님의 마음을 라오디게아 사람들이 물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불만에 빗대어 말씀하신 것입니다. “너희들도 너희 도시에 흘러들어오는 물이 차지도 않고 덥지도 않다고 불만스러워 하면서 투덜거린다. 그런데, 그런 물처럼 미적지근한 너희를 나라고 좋아라 하겠느냐? 나도 그런 물같이 미지근한 너희들은 싫다. 나는 그런 너희를 토해 버릴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차가워도 좋고 뜨거워도 좋다는 주님의 말씀은 온도에 관한 말씀이 아닙니다. 온도의 차갑고 뜨거운 것에 대한 말씀이 아니라 그 온도의 분명함에 관한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신앙에 적용해 보면 이 말씀은 주님과 신앙에 대한 분명한 태도를 요구하는 말씀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은 주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주님께 대한 태도를 분명히 하기를 원하십니다. 사람들은 미지근함을 적당함이라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일에 있어서 적당함이란 미지근함이 아니라 분명함을 말합니다. 주님에 대한 태도를 분명히 할 때, 그것도 긍정적인 면에서 분명히 할 때, 그것이 바로 주님께는 적당한 것입니다. 


차든지 덥든지 하라는 주님의 말씀, 주님께 대한 신앙의 태도가 분명해야 한다는 주님의 말씀은 오늘날 주님을 믿는 우리들이 가장 주의 깊게 귀를 기울어야 할 말씀입니다. 오늘날 기독교는 미지근한 종교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교회나 성도나 색깔이 분명치가 않습니다. 정말 믿는 것인지 아닌지, 그리고 주님 편에 선 건지 아닌지 그게 분명치가 않습니다. 오히려 그렇게 애매한 상태를 선호하는 것 같습니다. 그게 세련된 것이고 고상한 것이라고 여기고, 그게 균형잡힌 것이라고 생각하지요. 그래서 그렇게 적당한 위치에 머물러 있습니다. 너무 정직하게 말씀을 전해도 싫어하고 그렇다고 너무 너무 현실적이어도 싫어합니다. 너무 뜨겁게 기도해도 싫어하고 또 너무 냉냉해도 싫어합니다. 마치 미적지근한 물에 기분 좋게 몸을 담그고 있는 듯한 그런 상태를 좋아합니다. 성도들도 교회들도 조금씩 조금씩 이렇게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들 그렇게 되어가고 있기 때문에 그 안에 있는 성도들도 그것이 어디가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잘 느끼지 못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것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시죠.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사람들은 미지근한 것을 좋아하지만 주님은 그 미지근한 것을 못 견디어 하십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주님께 대한 태도가 미지근 했습니다. 무엇 때문에 그러했는지 그리고 그것은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지는 다음 시간에 살펴보기로 하고, 오늘은 도대체 주님께 대해서 미지근 한 것이 무엇을 말하는지만 생각해 보겠습니다. 성도 여러분, 어떤 상태가 되면 주님께 대해서 미지근한 상태이고, 그래서 주님이 결국에는 너무 싫어서 토해 버리실만한 그런 상태일까요? 그 설명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말씀 속에 들어 있습니다. 20절로 가서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여기까지입니다. 이것은 주님이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주는 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 주신 말씀인데요. 해결책이기 때문에 뒤집어 보면 그 속에 문제가 들어 있기도 합니다. 여러분, 이 구절에 나타나있는 라오디게아 교회가 가진 근본적인 문제가 무엇이죠? 그렇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문 밖에 세워 놓고 있는 상태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참 이상하지 않습니까? 교회입니다. 그리고 그 교회의 성도들입니다. 그런데도 주님을 문 밖에 세워 놓고서 신앙생활 할 수 있을까요? 네. 충분히 그럴 수 있습니다. 주님은 문 밖에 서 계시고 문 밖에 서서 두드리고 계시는데, 주님은 그렇게 문 밖에 세워 놓은 채로 안에서 자기들만 쾌적하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일도 아주 많이 하면서 말이죠. 


미지근한 상태는 주님을 문 밖에 세워 놓은 상태를 말합니다. 그래서 그 안에 주님이 계시지 않는 상태를 말합니다. 교회 안에, 그리고 성도들 안에 주님이 계시지 않는 상태가 주님께 대한 태도가 미적지근한 상태입니다. 아얘 주님과 관계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문 밖에서 주님이 그 문을 두드리고 계실 정도로, 그 정도로는 가까이 계시니까요. 그렇지만 주님이 아무리 가까이 계시고 또 가깝게 느껴진다고 하더라도 주님을 향해 교회의 문이, 그리고 우리 개인의 삶과 존재의 문이 열려 있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밖에 계신 분이 주님이시니 그 분이 열린 문으로 들어오셔야 할 분은 손님이 아니라 주님입니다. 그 분은 들어오시되 주인으로 들어오셔야 합니다. 들어 오셔서 교회의 주인이 되시고, 우리 개인의 존재와 삶의 주인이 되시고 왕이 되셔야 합니다. 주님과의 관계를 그렇게 설정하고 그 관계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 바로 우리가 주님께 문을 열어 드리고 그 분을 안으로 모셔들인다는 말의 의미입니다. 


우리가 주님과의 관계가 회복된다는 말을 자주 사용하는데요. 그렇게 회복되어야 할 관계 중에서 가장 시급하고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주님을 우리의 주인과 왕으로 삼는 것입니다. 어떤 목사님은 설교 중에 이렇게 도전하신 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믿으면서 과연 한 번이라도 마음을 주님께 온전히 내어드린 적이 있었느냐고, 그 분을 우리 마음의 왕으로 인정한 적이 있느냐고 말입니다. 


신앙적으로 볼 때는, 아무런 문제가 없이 쾌적하게 느껴진다고 해서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주님이 내 인생과 존재의 주인의 자리, 왕의 자리에 계시지 않다면, 내가 내 마음의 중심을 주님께 내어드리지 않는다면 적어도 그런 참된 결단을 내린 적이 없다면 그런 쾌적함은 오히려 라오디게아 교회의 경우처럼 그 쾌적함과 편안함 자체가 영적으로 큰 함정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 주님은 정말 주인이 되어 계십니까? 우리의 인생을 다스리시고, 우리의 신앙생활의 모양을 결정하시는 왕이 되어 계십니까? 지금 우리 교회는 우리 주님을 온전히 교회 안에 모셔 들여서 우리 교회의 움직임과 신앙생활을 결정하시는 왕으로 섬기고 있습니까? 나의 삶 속에는 하나님의 다스리심이 충만합니까? 


성도 여러분, 우리는 절대로 미지근 해서는 안됩니다. 주님께 대한 태도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주님을 더 이상 문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시도록 놓아두어서는 안됩니다. 교회와 인생, 그리고 영혼의 문을 활짝 열고 그 분을 나의 주인으로, 그리고 우리의 왕으로 모셔들이고 그 관계 안에 머물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이 기뻐하시고 주님 또한 우리를 토해 버리지 않으시고 기쁘게 받아 주십니다. 


우리 모두가 주님을 향해 닫아 놓은 문 하나 없이 모든 문을 활짝 열어 들여서 주님을 우리의 참된 주인이요 참 왕으로 모시고 살아가는 태도가 확실한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라오디게아 교회는 부자 교회였고 하는 일도 많았던 그야 말로 ‘좋은 교회’였습니다. 그렇지만 주님은 이 교회와 성도들이 주님께 대해서 분명한 태도를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크게 책망하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의 주님께 대한 태도는 분명합니까? 지금 주님은 우리의 어디에 계십니까? 내 마음과 삶의 중심에 들어와 계십니까? 왕으로 주인으로 영향을 끼치고 계십니까? 이 시간 그렇지 않다면 회개합시다. 그리고 이제는 주님을 내 주인과 왕으로 모시고 살겠다고, 우리 교회의 참 주인으로 모셔들이겠다고 결단하며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