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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주일예배

2014.08.03. 주일오전 - 우리가 증인이 되나니(룻기 7)


룻0401to12 - 우리가 증인이 되나니(룻7).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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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룻기 4장 1-12절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이 말은 우리는 다른 신이 아니라, 그런 신들과는 전혀 다른 여호와 하나님을 우리 믿음의 유일한 대상으로 삼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뜻인데요.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 때, 그리고 그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얻는 복에 대해서 생각할 때, 분명히 하고 넘어가야 할 내용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과연 나는 지금 신앙 안에서 어떤 삶을 원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의미있고 가치있는 삶인가, 아니면 그저 풍족하고 안락하기만한 그런 삶인가? 나만 유익하면 그만인 삶인가, 아니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삶인가? 과연 나는 진실로 어떤 삶을 원하는가? 우리는 일단 이 질문에 자신의 답을 내놓아야 합니다. 그리고 나서 과연 나의 답이 성경이 들려주는 정답과 일치하는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만약 두 가지가 일치하지 않는다면 성경이 들려주는 정답에 내가 내놓은 답을 맞춰가는 과정을 꼭 거쳐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바른 길을 가는 참 신앙의 사람이 될 수 있고, 신앙이 주는 진짜 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참 성도는 이런 사람입니다. 참 성도는 자신의 삶을 생각할 때, 항상 하나님을 자신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분으로 생각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참 성도는 무엇보다도 자신의 인생을 바라보는 기준이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습니다. 나의 삶이 하나님 앞에서 의미있고 가치있는 삶이 되는 것을 소망하며 그런 삶을 살기 위해서 헌신합니다. 그리고 나에게 유익이 되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삶을 살기를 소망하며 그런 삶을 살기 위해서 기꺼이 대가를 치릅니다. 이런 삶이 굉장히 힘들어 보이지만 참된 성도들에게는 이것보다 더 큰 복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참된 성도는 하나님을 그 무엇보다도 사랑하는 사람들인데, 가장 사랑하는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고 기쁘게 하는 것보다 더 행복한 일은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 의미있고 가치있는 삶을 살고 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사는 것이 가장 복되다고 말하며, 우리에게 그런 복된 삶을 살게 해주겠다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우리의 인생의 바른 방향과 그 인생의 참된 복에 대해서 알려주는 정답입니다. 만약 우리가 내놓은 대답이 이 답과 틀린 다면, 조금씩 조금씩 이 정답에 우리가 내놓은 답을 맞춰가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바로 그런 과정이 되어야 합니다. 이 둘 사이의 거리가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우리는 성도의 참된 행복과 영광이 무엇인지 알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이 복을 알고 또 누리는 그 큰 은혜를 허락해 주시기를 축원합니다. 


이른 새벽, 동도 트기 전에 룻은 다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는 간 밤에 보아스와의 사이에서 있었던 일을 나오미에게 보고했습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듣자 마자 나오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 딸아 이 사건이 어떻게 될 지 알기까지 앉아있으라 그 사람이 오늘 이 일을 성취하기 전에는 쉬지 아니하리라.” 그 동안 나오미는 룻과 보아스의 결혼을 성사시키기 위해서 첩보 작전을 방불케 하는 주도면밀한 계획을 세우고 또 진행시켜 갔습니다. 그만큼 이 일을 이루고 싶었던 것이죠. 그런데, 그 바통이 보아스에게로 넘어가자 오히려 완전히 마음을 놓습니다. 나오미가 이런 평안을 얻을 수 있었던 이유는 그의 말 속에 고스란히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 사람이 오늘 이 일을 성취하기 전에는 쉬지 아니하리라.” 나오미는 보아스가 허튼 소리나 하면서 공수표를 남발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확실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룻이 전해준 이야기를 듣고는 곧바로 그렇게 평안하게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누군가가 다른 사람이 한 이야기에 대해서 이렇게 전적인 신뢰를 보낼 수 있다는 것이 참 대단한 일이지만 저는 이 부분을 묵상하면서 사실 이 말은 모든 성도들이 다른 사람들로 부터 들어야 하는 말이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과연 다른 사람들은 나를 보고 이런 평가를 내리고 있을까 하는 질문도 던져 보았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대한민국이라는 사회는 말의 무게가굉장히 가벼운 사회입니다. 자신의 말에 가장 큰 책임을 져야 할 사람들이 자신의 말에 너무도 무책임한 모습을 그것도 아무렇지도 않게 내보이고 있고, 그런 풍토는 일반 국민들에게로 그대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이제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마저도 자신의 말에 대해서 크게 책임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자기 입장에 따라서 이렇게 저렇게 말을 바꾸고, 또 자신을 합리화 하기 위해서 이렇게 저렇게 둘러대고… 심지어는 자기 말대로 하지 않으면서도 아무런 문제도 느끼지 못하는 그런 분들도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나 온 세상이 그렇게 행동한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을 믿는 참된 성도들은 그럴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신앙의 특성 때문입니다. 


기독교는 말씀의 종교입니다. 이것은 기독교가 하나님의 말씀을 절대적으로 중요하게 생각하는 종교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 신앙은 이렇게 말씀을 중요하게 생각할까요?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믿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그것을 전혀 불안해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너무도 확실하기 때문입니다. 이사야서 55장 10절과 11절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비와 눈이 하늘로부터 내려서 그리로 되돌아 가지 아니하고 땅을 적셔서 소출이 나게 하며 싹이 나게 하며 파종하는 자에게는 종자를 주며 먹는 자에게는 양식을 줌과 같이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이와 같이 헛되이 내게로 되돌아 오지 아니하고 나의 기뻐하는 뜻을 이루며 내가 보낸 일에 형통함이니라.” 비가 하늘에서 내려왔다가 이 땅에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고서 그저 하늘로 돌아가는 법이 없듯이 하나님의 말씀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그 말씀에 상응하는 결과를 남깁니다. 반드시 말씀 그대로 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 가지고 있는 놀라운 능력이고 또 우리가 그 말씀을 확실히 믿을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자체가 보증수표인 그런 말씀을 주신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말 또한 우리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닮아있어야 하며, 또 닮아가야 마땅할 것입니다. 사람들이 우리의 말을 들으면 나오미가 보아스에게 보였던 그런 반응을 보일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보아스의 말은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닮아있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말은 다른 사람들을 안심하게 하며 치유하는 그런 말이 될 수 있었습니다. 우리들의 말도 이렇게 사용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말하면 그저 믿어지고 다른 보증이 필요 없는 말, 그래서 다른 사람들을 평안하게 하며 안심하게 만들어 주는 말, 그렇게 다른 이들을 치유하는 그런 말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성도는 자신의 말에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과연 그 말을 어떤 방법으로 이루어 갈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의 말에 대한 참된 신뢰는 단순히 그 사람이 자기 말에 책임을 진다고 해서 주어지지 않습니다. 거기에 그 말에 어울리는 바른 방법과 절차가 동반될 때 주어집니다. 보아스가 사람들의 견고한 신뢰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하겠다고 한 일을 반드시 해내는 사람이었기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그 일을 이루어가는 과정에 있어서도 바르고 정직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보아스는 룻을 돌려 보낸 후 일찌감치 성문으로 가서 그 위에 앉았습니다. 그것은 자기 보다 기업 무를 자가 될 우선권을 가진 사람을 만나 그 일에 대한 담판을 짓기 위해서 였는데요. 당시에는 성문이 그 성읍의 법정의 역할을 했었기 때문에 보아스가 그렇게 했던 것은 이 일을 공식화 시키기 위해서 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보아스는 우선권을 가진 친척을 성문 위로 불렀고, 백성들과 장로 열 사람을 그 일의 증인으로 세워서 일을 진행시켰습니다. 그러나, 사실 이렇게 일을 공식화하는 것은 보아스 자신에게도 굉장히 불리해 질 수 있는 일입니다. 그렇게 하면 그 결과를 자신도 뒤집을 수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사람들은 자신이 꼭 이루어야 하겠다고 생각하는 일을 이루려고 할 때는 그 일을 공개적으로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물 밑에서 정치적인 방법을 동원해서, 소위 꼼수라는 것까지 섞어 가면서 진행시켜 나가지요. 일의 성사만 놓고 본다면 보아스에게도 그렇게 하는 것이 훨씬 더 효율적이고 확실한 방법이었을 것입니다. 먼저 영향력 있는 사람들을 보내서 물밑 거래도 하고, 또 이런 저런 거짓 정보도 흘려서 그 사람의 판단력도 흐려놓고 말이죠. 그렇지만 보아스는 그런 방법을 쓰지 않았습니다. 사전 작업도 하지 않았고, 꼼수를 쓰지도 않았습니다. 그 친척을 만난 것도 그 때가 처음이었고 증인들을 불러 모은 것도 그 때가 처음이었습니다. 보아스는 룻을 아내로 맞아들이는 것을 정말로 원했지만 그 일을 이루어 갈 때에도, 공개적이고 투명하게 행동합니다. 자신에게도 불리해 질 수 있었는데 말입니다. 그것은 그렇게 하는 것이 선한 일을 끝까지 선한 일로 지켜내기 위한 첫 단추였기 때문입니다. 


이제 보아스는 그 친척과 본격적인 담판에 들어갑니다. 증인들이 보는 앞에서 보아스는 먼저 이렇게 말합니다. “모압지방에서 돌아온 나오미가 우리 형제 엘리멜렉의 소유지를 내게 팔려 하므로 내가 여기 앉은 이들과 내 백성의 장로들 앞에서 그것을 사라고 네게 말하여 알게 하였노라 만일 네가 무르려면 무르려니와 만일 네가 무르지 아니하려거든 내게 고하여 알게 하라 네 다음은 나요 그 외에는 무를 자가 없느니라” 보아스는 증인들 앞에서 나오미가 자신에게 엘리멜렉의 기업무를 자가 되어 달라고 했지만 자기 보다 그 사람이 기업을 무르는 일에 우선권이 있다는 사실을 먼저 말해 주었습니다. 엘리멜렉의 기업을 무르는 자가 되면 원래는 엘리멜렉의 소유였던 그 땅을 사서 다시 그 가문에 돌려주어야 합니다. 아들이 없는 경우에는 아들을 낳아서 그 자식까지 주면서 말이죠. 그렇게 완전히 한 가문을 모든 면에서 일으켜 세워 주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얻는 것 하나 없이 손해만 보면서 말입니다. 그런데, 이번 경우에는 그렇게 해야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나오미는 이미 아이를 낳지 못하는 나이가 되었고, 나오미가 죽고 나면 그 땅은 자동적으로 그 친척의 소유가 되는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나오미만 놓고 보면 그 친척이 손해 볼 일이 없는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그 친척은 이야기를 듣자 마자 자신이 기업 무를 자가 되겠다고 합니다. 


이 대답을 들은 보아스는 그제서야 그에게 불리할 수 있는 조건을 말해 줍니다. 그것은 나오미에게 이방인 며느리인 룻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지금까지의 거래조건을 완전히 뒤집는 변수였습니다. 보아스의 말처럼 나오미에게 젊은 며느리가 있다는 것은 곧 아이를 낳아서 엘리멜렉 가문을 이어주어야 한다는 뜻이었고 나아가서 자기 돈을 들여 산 땅을 다시 그 가문의 소유가 되도록 넘겨 주어야 한다는 뜻이었으니까요. 이 말을 들은 그 친적은 신발까지 벗어 주어 가면서 갑자기 말을 바꿉니다. “나는 내 기업에 손해가 있을까 하여 나를 위하여 무르지 못하노니 내가 무를 것을 네가 무르라 나는 무르지 못하겠노라.” 


원래 말이라는 것이 어떤 순서로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다른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사실 보아스의 목적은 그 친척이 기업 무를 자가 되는 일을 스스로 포기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야 자신이 룻과 결혼할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만약 이 목적만 생각한다면 보아스는 말의 순서를 뒤집어야 합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포기하게 만들려면 좋은 이야기 보다는 나쁜 이야기를 먼저 하는 것이 훨씬 더 유리하니까요. 그러니까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것이 훨씬 좋습니다. ‘엘리멜렉의 아내 빈털털이 나오미가 나에게 자기 가족의 기업 무를 자가 되어 달라고 찾아왔다. 그런데, 그에게는 모압에서 함께 온 젊은 며느리가 있다. 그래서, 만약 기업 무를 자가 되려면 이 여인을 취해서 아이를 낳아주어야 하고 또 그 아이에게 구입한 땅도 물려 주어야 한다. 그러면 얻는 것이 하나도 없고 손해만 보게 된다. 그런데 내가 생각해 보니 기업 무를 자의 의무를 행할 우선권이 내가 아니라 너에게 있더라. 그러니 네가 먼저 선택해라. 어떻게 하겠느냐?’하고 말입니다. 만약 이렇게 말했다면 보아스는 자기 목적을 이루기가 훨씬 더 수월하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보아스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먼저 있는 사실을 최대한 객관적으로 이야기 해 주고, 그 다음에 그렇게 했을 때 감당해야 할 짐에 대해서 말해 주었습니다. 사실 보아스는 자칫하면 이것 때문에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는 일에 실패할 뻔 했습니다. 만약 끝까지 이 친척이 자기 체면 때문에 처음 선택을 고집했더라면 보아스는 룻과 결혼할 수 없었을 테니까요.


사람들은 어떤 일을 이루는데 있어서 말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말을 자신이 이루려는 목적을 이루는 아주 중요한 도구로 사용합니다. 자기에게 유리하도록 순서를 바꾸기도 하고 없는 것을 덧붙이기도 하고 있는 것을 빼기도 하면서 말을 자기 마음대로 사용합니다. 그러면서 그것을 말의 지혜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교묘한 것이지 지혜로운 것이 아닙니다. 말에는 커다란 힘이 있습니다. 요즘에는 사람들이 워낙 말을 함부로 가볍게 사용해서인지 지금은 그 힘이 예전만 못하지만 그래도 말에는 여전히 엄청난 힘이 있습니다. 특히 말의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힘만 본다면 그 힘이 오히려 점점 더 커져만 가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 힘이 있는 것들을 그렇게 대해야 하듯이 우리는 우리의 언어 또한 조심스럽고 바르게 사용해야 합니다. 때로는 그렇게 하는 것이 우리가 얻고자 하는 것을 얻고 이루고자 하는 것을 이루는 데는 효율적이지 않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렇게 좋지 않은 씨앗으로 뿌려진 말의 강력한 힘은 우리의 인생과 이 세상을 세우고 풍요롭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무너뜨리고 망가뜨리는 역할을 하는 쓴 열매로 돌아오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기업무를 자의 자격이 공식적으로 보아스에게 넘어왔습니다. 이제 보아스는 자기 자신에게나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나 아무런 하자 없이 룻과 결혼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보아스가 그 사실을 공식적으로 선포하자 이 모든 일의 전말을 지켜 본 장로들과 백성들은 저마다 보아스를 축하하고 축복해 줍니다. “여호와께서 네 집에 들어가는 여인으로 이스라엘 집을 세운 라헬과 레아 두 사람 같게 하시고 네가 에브랏에서 유력하고 베들레헴에서 유명하게 하시기를 원하며 여호와께서 이 젊은 여자로 네게 상속자를 주사 네 집이 다말이 유다에게 낳아준 베레스의 집과 같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정말 이례적인 축하이고 또 축복입니다. 먼저 룻에게는 이스라엘 열 두 지파의 어머니인 레아와 라헬처럼 되는 복을 빌어주는데요. 룻이 이방인이라는 점을 생각해 보면 이것은 이방인에게 이스라엘 민족의 어머니처럼 되는 복을 허락해 달라고 빌어준 준 것입니다. 그리고 보아스에게는 에브랏에서 유력하고 베들레헴에서 유명한 자가 되게 해 달라고 복을 빌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룻으로 인해서 그 동안 상속자가 없어서 옛날의 유다의 집처럼 미래를 기약할 수 없었던 보아스의 가문이 명맥을 잊게 되는 복을 얻게 되기를 빌어주고 있습니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옛말이 있습니다. 혹시 여러분도 이런 경험을 해 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이 속담은 시기와 질투를 대변하는 그런 속담입니다만 사실 이 속담은 대표적으로 잘못 사용되는 속담 중의 하나입니다. 이 속담의 기원은 이렇습니다. 옛날 참 지질이도 가난하던 시절 사촌이 땅을 삽니다. 그래서 그것을 축하해 주며 무슨 선물을 주고 싶기는 한데 가진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 때 갑자기 그 소식을 듣기 전까지 아무렇지도 않던 아랫 배가 살살 아파 옵니다. 여러분, 새로 산 밭에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비료입니다. 그렇다면 그 옛날 비료 중 최고로 쳤던 것은 또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우리가 ‘응가’라고 부르는 ‘인분’입니다. 옛날에는 다른 집에서 갑자기 배가 아프면 꼭 참고 자기 집에 돌아와서야 볼 일을 보았다고 하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니 옛날 사람들이 그것을 얼마나 귀하게 여겼는지 알 수 있습니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말은 시기가 나고 질투가 생긴다는 말이 아닙니다. 반대로 너무 기뻐서 그만큼 축하해 주고 싶다는 말입니다. 달리 선물할 것이 없을 정도로 가난한데 사촌이 땅을 샀다고 하니 그렇게 축하해 주고 싶은 마음에 하늘도 응답하셨는지 아무렇지도 않던 이동식 비료공장에서 갑자기 소식이 온다는 그런 뜻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의미와는 정반대죠. 


그런데,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이 속담은 사실 잘못 사용되는 경우에 조차도 사람들의 마음을 제대로 담고 있지 못합니다. 사람들이 아무나 복을 받는다고 해서 무차별적으로 배가 아파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정말 복 받을만한 사람이 복을 받고 잘 될만한 사람이 잘 되는 것은 함께 기뻐합니다. 내가 그 복을 받은 것처럼 기뻐하며 더 큰 복을 빌어 줍니다. 장로들과 백성들이 보아스를 진심으로 축하하며 복을 빌어주듯이 말입니다. 성도들은 그런 점에서 사람들에게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말의 원래 의미를 제대로 알려주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그렇게 기분 좋게, 기꺼이 배가 아픈 기쁨을 누리는 경험을 나눠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삶의 작은 조각들은 시기와 질투, 그리고 경쟁으로 상처 입은 이 세상과 이 땅의 교회들을 치유하는 치료약이 될 수 있습니다. 세상이 교회를 보면서, 또 성도가 다른 성도의 삶과 그 결과를 지켜보면서 눈을 찌푸리며 진심으로 축복하고 함께 기뻐할 수 없다면,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소명을 따라 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자신의 삶이 다른 사람들 보기에 도대체 어떤 모양일까를 잘 살피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자신의 인생이, 그리고 교회의 모습이 믿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믿지 않는 사람들도 박수 쳐 주며 복을 빌어줄 수 있는 그런 모습이 되도록 애써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세상을 향한 복으로 부름받은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보아스는 룻의 남편이 되고 엘리멜렉 집안의 기업무를 자가 되어주려는 참으로 선한 소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선한 것이었을 뿐만 아니라 보아스 자신이 깊이 소원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보아스는 그 일이 선한 것이었고 또한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오히려 그것을 이루기 위한 절차와 방법 또한 가장 선하고 바른 것을 선택했습니다. 심지어는 그 일을 이루기 위한 말을 주고 받는 과정 속에서도 가장 투명하고 정직하게 행동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보아스는 가치있는 일을 선택했을 뿐만 아니라 그 일을 이루기 위한 방법 까지도 하나님 앞에서, 또 사람들 보기에 가장 가치있는 것들을 선택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성도들이라면 누구나 이렇게 하는 것이 맞는 것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것이 바르고 바람직한 것이라고 여길 것입니다. 그러나, 막상 행동할 때는 그렇게 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그래도 가치있고 의미있는 목적을 선택하는데 까지는 잘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이루기 위한 방법을 선택할 때는 그저 상식적인 수준에서 법이나 윤리적으로 크게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되는 것이면, 굳이 더 정직하고 더 바른 것을 선택하지 않습니다. 더 심한 경우는 목적은 고상한데도 방법은 전혀 가려서 선택하지 않는 경우입니다. 결국에는 꿩 잡는 게 매라는 사고방식의 지배를 받습니다. 사람들이 이렇게 하는 것은 하나의 증명되지 않은 잘못된 고정관념 때문인데요. 그것은 바로 그렇게 해서는 선한 목적도 이룰 수가 없고 또 자신이 원하는 것도 얻을 수가 없다는 생각 아니, 믿음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거기에 대해서 꼭 한 번 질문을 던져 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성도 여러분, 정말로 그렇게 하면 선한 목적을 이룰 수가 없을까요? 또 정말로 원하는 것을 얻을 수가 없을까요? 거꾸로 바꾸어서 질문해 보겠습니다. 그렇다면 부정직한 방법과 수단을 선택한다면, 그러면 이루려는 목적을 이루고 원하는 것은 얻을 수 있을까요? 그럴 수 있다는 보장이 있을까요? 그렇지가 않습니다. 사실 정직하고 바른 방법을 선택하든 그 반대의 방법을 선택하든 실패할 수도 있고 성공할 수도 있습니다. 어떤 방식을 택하든 그 방식 자체가 성공과 실패를 보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원하는 것을 얻었다고 한다면, 그것은 그 사람을 정말로 기쁘고 즐겁게 해 줄 수 있을까요? 또 그 과정에서 그 사람은 정말 평안하고 자유로웠을까요? 


제가 지인들과 교제 하기 위해서 페이스북이라는 SNS를 사용하는데요. 주중에 제 지인 중 한 분이 거기 올려 놓은 짧은 글이 있어서 소개해 드릴까 합니다. 이 분은 하나님 앞에서 그래도 바르고 정직하게 살려고 많이 노력하는 분이라고 생각되는 그런 분인데 이 짧은 글 속에 그 모든 삶의 흔적이 묻어 있는 것 같습니다. 그 분은 이렇게 썼습니다. “삶의 방향이 바르다는 것이 평안을 가져다 주는 것같다. 속도가 조금 느릴 수는 있지만 가는 길에서 만나는 기쁨과 만족이 큰 것 같다” 어떻습니까? 짧고 어찌보면 너무 평범한 글이지만 이 속에 자신이 걷고 있는 길에서 그 분이 얻은 행복과 확신, 그리고 평안과 희열이 그대로 묻어 나지 않습니까? 그 어떤 감각적인 즐거움이 이 보석같은 하나님의 선물들을 대신할 수 있겠습니까? 


사람은 바른 길로 가지 않을 때는 참된 평안과 기쁨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인간이란 원래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바르게 지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바른 길을 가야 그 과정에서 참 만족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 결과물도 마찬가지입니다. 결과가 조금 느리고 더디게 나타날 수 있고, 때로는 내가 원하던 것을 얻지 못할 수도 있지만, 그렇게 가야 할 길을 가다가 끝에서 얻게 되는 것은 항상 그 사람을 진실로 만족시키고 순전한 기쁨으로 인도해 줍니다. 그렇지만 자신이 가야 할 길로 가지 않고 있을 때 사람은 항상 불안해 집니다. 그 영혼 속에는 자신이 뿌려놓은 좋지 않은 씨앗들이 언젠가 자기 삶의 쓴 열매로 되돌아 올지도 모른다는 지울 수 없는 두려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보아스는 가기 힘든 길을 선택했고 끝까지 그 길을 갔던 사람입니다. 이제 그 결과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래서 이 보아스는 목적을 이루는데 실패했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는 일에 실패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답답하게 여겨질만큼 바른 것들만 선택했고 끝까지 그것을 고집했지만 결국 선한 목적을 이루고, 그가 가장 가지고 싶어하던 것을 얻었습니다. 또 사람들의 진심어린 축복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최고로 선한 씨앗을 뿌렸더니 거기서 최고로 선한 열매들이 맺혀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만약 우리에게 바르고 정직한 길을 가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고 목적을 이룰 수 없다는 고정관념이 있다면 우리는 그것부터 버려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 없이 인생을 생각하는 방식이고 또 하나님에 대한 오해 때문에 생겨나는 생각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오해하면 안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바른 길을 가게 해 놓고 진탕 고생만 시키시는 그런 분이 아닙니다. 뿌린 대로 거두게 하시는 분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선한 씨앗을 뿌리며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항상 선한 열매로 되돌려 주십니다. 이것이 저와 여러분이 믿는다고 고백하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정말로 복되게 하고 싶어 하십니다. 우리가 정직하고 바른 길을 걸어서 그 끝에서 상주시려고 기다리시는 하나님을 만나 가장 좋은 상을 받게 되기를 바라십니다. 하나님은 그런 우리들에게 세상이 알 수 없는 복을 주시고 상을 주시며 기쁨과 평강의 삶을 선물하실 것입니다. 비록 이 세상에서 선한 목적을 가지고 정직하게 말하며 바르게 살아가는 삶이 쉽지는 않지만, 그것이 하나님이 정하신 가장 복된 삶이고 또한 가장 큰 복을 얻는 삶의 방식임을 꼭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하나님과 사람에게 공히 귀히 여김을 받는 삶의 방식이라는 것도 꼭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가 이 믿음 안에서 이 세상을 향해서 하나님의 선하심과 정직함을 드러내며 살아가는 영광스러운 성도들이 되고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한 열매들로 채워가는 지혜로운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