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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주일예배

2014.08.10. 주일오전 - 그가 아들을 낳은지라(룻기 8)


룻0413to22 - 그가 아들을 낳은지라(룻8).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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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룻기 4장 13-22절



사랑의 하나님, 인내하시는 하나님, 엄격하신 하나님,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 기뻐하시는 하나님, 슬퍼하시는 하나님, 복을 주시는 하나님… 이 세상에 수많은 색깔들이 있고, 또 저마다 좋아하는 색깔이 있듯이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모습도 굉장히 다양합니다. 그리고 성도들에게는 그런 하나님의 모습 중에서 저마다 더 좋아하는 하나님의 모습이 있게 마련입니다. 여러분도 그러시겠지만 저도 그런데요. 성경에서 발견되는 하나님의 모습 중에서 저를 가장 깜짝 깜짝 놀라게 하면서도 제가 가장 좋아하는 하나님의 모습이 있다면 그것은 갑자기 모든 것을 뒤집어 버리시는 역전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첫째 아들 보다는 둘째를, 그리고 누구도 거들떠 보지 않는 막내를 선택하시는 하나님, 다 갖춰진 사람보다는 때로는 정말 엉망진창인 사람을 선택하셔서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고 가장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 가시는 하나님, 전혀 엉뚱한 곳으로 튀시는 것 같지만 결국 모든 일을 가장 아름답게 이루시는 하나님…. 저는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모습 중에서 이런 하나님의 모습을 가장 좋아합니다. 사실 하나님이 이런 역전의 하나님이 아니시라면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것은 소망이 없는 일이 되어 버리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도 여전히 능력있고 똑똑하고 가진 것 많은 사람만 좋아하시고, 그런 사람들만 이기게 하시고, 그런 사람들을 통해서만 일하시는 분이시라면, 그리고 한 번 잘 된 악인이 계속해서 승승장구하도록 내버려 두시는 분이시라면, 한 번 망가진 인생은 끝까지 그렇게 내버려 두시고, 가장 큰 죄인도 은혜로 뒤집어 엎으셔서 구원하시는 분이 아니시라면 세상에 하나님을 믿는 일처럼 의미 없는 일도 또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특기가 이렇게 앞과 뒤, 위와 아래를 뒤집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고난과 역경 가운데서도 기뻐할 수 있고, 또 악이 승리하는 것처럼 보여지는 순간에도 소망을 잃어버리지 않고 믿음의 길을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저는 놀이 동산에 가서 청룡열차를 타지 않습니다. 바이킹을 세웠던 전력을 지닌 저로서는 태워준다고 해도 탈 수 없겠지만 저로서는 청룡열차를 탈 필요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 자체가 청룡열차인데 뭐하러 돈 내고 그것을 타겠습니까? 하나님 안에서의 저의 삶이 얼마나 변화무쌍한지 달리 그런 스릴을 구할 필요가 없기도 합니다. 혹시 삶이 덤덤하고 지루하다고 여겨지시는 분이 계시거든 하나님표 청룡열차에 몸을 실어 보시기 바랍니다. 

‘이에 보아스가 룻을 맞이하여 아내로 삼고 그에게 들어갔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임신하게 하시므로 그가 아들을 낳은지라' 오늘 본문은 이 구절로 부터 시작되는데요. 바로 이 구절이 룻기 전체의 결론이 시작되는 구절이기도 하고 또 모든 이야기의 클라이맥스에 해당하는 구절이기도 합니다. 이 구절, 정확하게는 이 구절의 뒤쪽 절반이 그 동안의 룻기의 모든 이야기를 정반대로 뒤집어 버리는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제까지 룻기는 하나님에 대해서는 철저히 침묵하고 있었습니다. 누군가가 이 앞 부분만 뚝 떼어서 따로 읽는다면 이게 성경에 있는 이야기라는 것 조차 모를 정도로 하나님은 단 한 번도 직접 전면에 등장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룻기는 갑자기 하나님을 등장시켜서는 정말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을 하나님께서 하셨다고 이야기 합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임신하게 하시므로 그가 아들을 낳은지라’ 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등장은 그 동안의 모든 이야기를 180도 뒤집어 놓게 됩니다. 


룻이 아이를 낳았다는 소식을 들은 예루살렘의 여인들은 나오미에게로 달려 왔습니다. 그리고는 “찬송할지로다 여호와께서 오늘 네게 기업무를 자가 없게 하지 아니하셨도다 이 아이의 이름이 이스라엘 중에 유명하게 되기를 원하노라 이는 네 생명의 회복자이며 네 노년의 봉양자라 곧 너를 사랑하며 일곱 아들보다 귀한 네 며느리가 낳은 자로다”라고 진심으로 축하하며 축복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성도 여러분 이 여인들은 누구인지 잘 아시지요? 이 여인들은 이미 룻기에 한 번 나왔던 등장인물들입니다. 나오미가 처음 룻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인데요. 그 때 빈털털이가 되어서 돌아온 나오미를 보고서 “이 여인이 나오미일 수 있느냐?”라고 당황스러워하고 슬퍼했던 그 여인들이 바로 이 여인들입니다. 


베들레헴에 흉년이 들자 나오미의 남편이었던 엘리멜렉은 가족들을 데리고 모압 땅으로 이주했습니다. 아마도 베들레헴 보다는 그 곳이 더 풍족했기 때문이었겠지요. 그런데 그렇게 모압으로 이사한 후에 얼마 안되어 엘리멜렉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다행이 두 아들인 기룐과 말론이 장성한 터라 모압여인들과 결혼하여 텅 비어가는 나오미의 가정은 다시 채워지는 듯 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모압에서 살게된 지 10년 만에 결혼한 지 얼마 안된 두 아들마저 후손도 남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홀로 된 시어머니와 그 시어머니처럼 또 다시 홀로 된 두 며느리 밖에 없습니다. 나오미의 인생은 텅 비어버린 제로상태가 아니라 완전히 마이너스로 돌아섰습니다. 결국 나오미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갈 결심을 합니다. 그리고는 고향으로 향했습니다. 그렇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아직도 충분히 새 출발이 가능한 두 며느리를 데리고 함께 돌아가는 것은 할 짓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두 며느리에게 너희들은 집으로 돌아가라고 모진 말까지 하면서 강권합니다. 그렇게 해서 첫째 며느리 오르바는 자기 집으로 돌아가고, 그래도 끝까지 고집을 부린 룻은 나오미와 함께 베들레헴으로 돌아옵니다. 이런 나오미의 모습을 본 이웃 여인들은 “이 여인은 나오미 일 수가 없다.”라는 말 밖에 달리 할 말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나오미도 그 말을 받아 자신을 나오미가 아니라 마라라고 부르라고 말합니다. 자신은 기쁨이라고 불릴 수 없으니 고통이라고 부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나오미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징벌하셨고 자신을 괴롭게 하셨다고 말합니다. 


성도 여러분, 나오미의 이야기가 맞을까요? 과연 나오미의 말처럼 하나님께서 그를 징벌하셨고 그를 괴롭게 하신 것일까요? 그래서 나오미의 삶은 이렇게 비극적이고 비참한 인생이 된 것일까요? 성경은 나오미의 인생이 이렇게 마이너스 인생이 되어 버린 정확한 이유를 설명해 주지 않습니다. 그저 엘리멜렉 집안이 현실적인 이유 때문에 약속의 땅을 떠나 이방 땅으로 이주했고 그 결과가 이렇게 되었다고만 말합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나오미의 인생은 하나님을 떠난 인생이 결국에 맞닥뜨리게 되는 삶의 결과가 어떤 지를 보여주고 있다고 말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생은 허무할 수 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많은 것을 가져도 참된 평안과 만족을 모릅니다. 그 어떤 것으로도 채울 수 없는 빈 구멍을 지닌 쓰디쓴 인생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왜 인간은 끊임 없이 전쟁을 벌이고 또 다른 사람들이 가진 것을 빼앗으며 커다란 창고를 지어 썩어나갈 정도로 많이 쌓아 놓았으면서도 여전히 욕심을 부리는 그런 삶을 살게 되는 것일까요? 다른 사람들은 나를 부러워 하는데 정작 나 자신은 만족하지 못하는 끊임없이 더 좋은 것, 더 많은 것을 갈구하는 그런 삶을 살아갈까요? 인간이 온 세상을 다 가진 들 그것만으로 만족할까요? 그 다음에는 달을 탐내고 그 다음은 태양을 탐내서 태양을 가지려고 하다가 그 열기에 스스로를 태우고 마는 것이 인간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그 안에 계시고 그가 하나님으로 자신의 존재와 삶을 채운다면 그는 정말 아무 것도 없어도 만족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온 세상을 다 가져도 그 안에 하나님이 없고, 하나님께서 그 빈 곳을 채워주시지 않는다면 결국 그는 텅 빈 존재가 되어서 텅빈 인생을 살아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텅 빈 인생, 마이너스 인생이 되어서 베들레헴으로 되돌아온 나오미는 예수님의 비유 속에 나오는 탕자를 너무나 많이 닮아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 아버지를 떠난 인생이 결국 맞닥뜨리게 되는 운명입니다.


나오미는 탕자처럼 그저 밥이나 얻어 먹으려고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나오미의 삶을 그냥 내버려 두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시 나오미의 삶을 채우시기 시작합니다. 이삭을 주우러 나간 룻을 통해 넉넉한 양식을 주시고, 가장 선하고 부유한 기업 무를 자를 만나게 하시고, 그 사람을 룻과 결혼하게 하셔서 가문을 이을 수 있게 만들어 주시고, 또한 그 둘 사이에서 아들이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그 아이를 나오미의 아들로 주셔서 그 가문을 일으켜 세우셨습니다. 우리가 이야기의 처음으로 되돌아가 보면 나오미는 자신을 따라가겠다고 떼를 쓰던 며느리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딸들아 돌아가라 너희가 어찌 나와 함께 가려는냐 내 태중에 너희 남편 될 아들들이 아직 있느냐 내 딸들아 되돌아 가라 나는 늙었으니 남편을 두지 못할지라 가령 내가 소망이 있다고 말한다든지 오늘 밤에 남편을 두어 아들들을 낳는다고 하더라도 너희가 어찌 그들이 자라기를 기다리겠으며 어찌 남편 없이 지내겠다고 결심하겠느냐” 나오미의 말은 하나도 틀린 것이 없었습니다. 그 당시 그런 일들이 일어난다는 것은 전혀 불가능한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지금 일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방법은 전혀 다르지만 나오미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일들이 모두 다 이루어 졌습니다. 나오미를 따라 온 룻은 결국 결혼을 했습니다. 그리고 아이를 낳아 그 아들을 나오미의 기업 무를 자, 그러니까 그의 아들이 되게 해 주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절대로 채워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빈 구석들이 모두 가득 채워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텅 빈 나오미의 인생을 채우시기 위해서 모든 것을 반대로 뒤집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역전의 명수이십니다. 그 분의 특기는 사람들이 이럴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을 정반대로 뒤집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에게는 끝이라고 생각되어지는 일들도 끝이 아닐 때가 훨씬 더 많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손 안에 있는 한 우리의 인생은 언제든지 새로워질 수 있고 회복될 수 있습니다. 텅 비어서 이제는 더 이상 채울 수 없다고 생각하는 그 인생도 얼마든지 가득 채워져서 흘러 넘치는 인생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면 스스로 자기 인생의 결론을 내려서는 안됩니다. 그 대신 하나님을 향한 믿음으로 자신의 인생을 하나님께 활짝 열어 드려야 합니다. 지금 비어 있다고 항상 비어 있을 것이라고 지레짐작하지 말고, 그 지레짐작 때문에 낙심하지 말고 사람들의 생각을 뛰어 넘어 은혜를 베푸시고 당신의 뜻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을 기대해야 합니다. 그것이 언제든지 나의 빈 구석을 채우실 수 있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어울리는 삶의 모습입니다. 


이제까지는 나오미를 중심으로 말씀드렸지만 사실 하나님께서 채워주신 것은 나오미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룻과 보아스의 삶도 꽉 찬 인생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 이방여인이며 젊은 미망인이었던 룻은 가장 훌륭한 남편을 얻었고 자녀를 얻었습니다.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진심어린 축복을 받는 참으로 복된 인생이 되었습니다. 보아스는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지만 사실 보아스에게는 그의 재산과 집안을 물려 받을 후계자가 없었습니다. 가장 중요한 부분이 비어있는 그런 사람이었던 것이죠. 그런데, 보아스는 느지막하게 룻을 아내로 얻었고, 룻을 통해 아들을 얻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 누구도 채워주지 못했던 마지막 빈 곳이 채워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세 사람 모두의 삶을 꽉 찬 인생으로 바꿔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일은 사실 세 사람은 그저 가만히 있는데 하나님께서 어느 날 갑자기 요술 부리시듯이 그렇게 이루신 일이 아니었습니다. 세 사람은 서로가 서로의 삶의 빈 구석을 채워 주려고 애썼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하나님의 헤픈 사랑을 닮은 그런 사랑으로 섬겼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런 섬김 속에서 계속해서 세 사람의 삶을 섭리하셨고, 결국 결정적인 순간에 보아스와 룻 사이에 아들을 주셔서 그 아이로 하여금 세 사람 삶의 빈 구석을 완전히 채우는 그런 역할을 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오늘 룻기의 결론을 묵상하면서 꼭 붙들어야 할 중요한 메세지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서로의 삶 속에서 서로의 빈 구석을 채워주기 위해 헤픈 사랑으로 서로를 섬기려고 애쓸 때, 하나님은 그 사이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해 주시고, 그것을 통해 그들의 삶을 꽉 찬 삶이 되게 해 주십니다. 사실 우리가 몸 담고 있는 교회는 그러라고 있는 곳이고 우리가 이 교회에 몸 담고 함께 신앙생활 하는 것도 그것 때문입니다. 온 세상이 스스로 자신의 허기만 채우려고 서로 다투는 때에도 서로가 서로의 배를 채워주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행복을 알고 또 그런 세상의 허기를 채워주는 사람들이 되라고 하나님은 우리를 교회로 부르신 것입니다. 텅 빈 인생을 채우는 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결정적인 은혜가 없이는 그 구멍이 온전히 메워질 수 없으니까요. 그런데, 그 과정에서 우리의 삶 또한 그러한 하나님의 은혜를 담는 중요한 그릇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낭비하시는 사랑으로 우리의 텅 빈 삶을 채워 주시듯이 우리들도 그 사랑을 흉내내어 사랑하게 될 때, 우리는 비로소 서로가 서로의 빈 구석을 채워주는 넉넉하고 풍성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서로가 서로에게 마음을 활짝 여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서로에게 활짝 열린 마음이란 어떤 마음일까요? 그것은 ‘나는 절대로 다른 사람들에게 신세지지 않을꺼야.’라는 생각, 그리고 ‘난 이 정도면 충분히 하고 있어. 더 할 필요가 없어.’라는 생각이 없는 마음이 바로 서로에게 활짝 열린 마음입니다. 


성도 여러분, 교회는 몸입니다. 몸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몸 안의 지체들 사이의 관계가 절대로 일방적이지 않다는 것입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주고 또 받는 것, 그런 풍성한 일이 일어나는 곳이 바로 몸입니다. 또한 몸 안에서는 한 지체가 다른 지체에게 무엇을 받을 때, 그것 때문에 자존심 상해 하지 않으며, 무엇을 줄 때는 이것이면 충분하다고 난 더 이상 할 것이 없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교회 안에서 마음의 문을 단단히 걸어 잠그고 있거나 혹은 이 이상은 절대로 열지 않겠다고 고집 부리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 안에만 두신 그 풍성함이 흘러가지 못하게 막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 나도 그렇고 다른 이들도 그렇고 교회 가운데만 두신 하나님 나라의 풍성함을 누리지 못하게 됩니다. 


룻기의 배경이 되는 사사시대는 저마다 자신이 자신의 왕이 되어 살아가는 그런 시대였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고 제 멋대로 살았다는 뜻도 되지만 다른 측면에서 보면 모두가 다 밖으로는 문을 꽁꽁 걸어 잠그고 자기 자신 밖에 모르는,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그런 시대였다는 뜻도 됩니다. 그래서 사사시대는 성경 역사상 가장 어두운 시대가 되었습니다. 영적으로나 현실적으로나 가장 궁핍하고 비참한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 때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전히 성경이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이라고 말하는 가나안 땅에서 살아가고 있었는데 말입니다. 그러나, 그런 시대에도 그 땅 한 구석에서는 정말로 젖과 꿀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베들레헴에는 여전히 하나님의 헤픈 사랑을 흉내내며 살아가는 그런 하나님의 백성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생은 조금씩 조금씩 비워져 가다가 결국 텅 비어 버린 인생, 마이너스 인생이 되어 버립니다. 만약 물질적인 면만 생각한다면 인생은 하나님을 떠나도 알마든지 더 잘 될 수 있습니다. 비록 그것 때문에 자기 영혼의 빈 곳을 보지 못하는 안타까운 일이 벌어지게 되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영적인 면에서 보면 하나님을 떠난 인생은 반드시 텅 비게 됩니다. 우리가 사는 이 사회는 우리로 하여금 무엇을 가지고 무엇을 얻으면 그것이 나의 가치를 높이고 그것이 내 삶을 꽉 채워줄 것이라고 믿게 만듭니다. 특별한 집에 살고, 특정한 차를 타며 심지어는 아이에게 특정한 분유를 먹이면 아이도 부모도 행복해지고 그 존재의 가치가 올라간다고 선전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정말 그런 줄 알고 살아가죠. 그러나 여러분 정말 그렇습니까? 우리의 존재와 삶이 그렇게 단순한 것들로 채워질 수 있습니까? 우리는 그런 것들로도 채워질 수 있는 그런 형편없는 존재로 지음 받았습니까?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듯이 우리의 삶은 물질만 충분히 채워진다고 다 채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물질이란 채워져야 할 것 중에서 가장 기본적인 것에 불과하고 게다가 가장 중요한 것도 아닙니다. 우리나라의 자살율이 OECD 국가 중에서도 최고라는 것은 이미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물론 겉으로 보면 물질적인 문제라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대중매체가 그렇게 말하니까요. 그러나, 진짜 문제는 영혼의 허무입니다. 사람들에게 자신의 마음과 영혼을 채워줄 것이 전혀 없는데 거기다가 물질마저 빠져 나가 버리니 삶은 더 이상 지탱할 힘이 없어져 일순간에 무너져 내리는 것입니다. 멀쩡하던 길 한 복판이 뻥 뚤려 수십미터 짜리 씽크홀이 생기듯이 인생이 그렇게 뻥 뚤려 일순간에 무너져 버리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여러분의 삶과 영혼을 가만히 정직하게 들여다 보시기 바랍니다. 혹시 여러분의 삶에는 커다란 구멍이 없습니까? 혹시 여러분의 영혼에는 허무라는 메꿀 수 없는 구멍이 뚫려있지는 않습니까? 여러분은 가끔씩 불안해지고 두려워지며 헛헛한 마음이 되지는 않으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나오미처럼 꼭 하나님께로 돌이키셔야 합니다. 확실히 돌아가셔서 아버지 집으로 돌아간 탕자처럼 하나님의 넓고 넉넉한 품에 온전히 안기셔야 합니다. 그래야 그 불안함과 허무함은 해결되고 채워질 수 있습니다. 그 구멍은 원래 처음부터 하나님만이 채우실 수 있도록 디자인되어졌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교회는 참으로 복된 공동체입니다. 텅 비어 버린 인생들, 그 무엇으로도 채울 길 없는 영혼의 구멍을 가진 인생들이 모여, 서로가 서로를 섬기고 사랑하며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꽉 찬 인생이 되어져 가도록, 인생의 충만함이 무엇인지를 알고 또 누리도록 부름받은 복된 공동체 입니다. 물론 현실 속의 교회 공동체는 이미 그런 역할을 너무나 많이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누구도 교회가 자신에게 그런 역할을 해 줄 것을 기대하고 있지 않을 정도로, 그럴 수 있다고 믿지 않을 정도로 말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그래서 이 땅에 존재합니다. 그리고 교회는 무엇보다도 모든 것을 뒤집으시는데 선수이신 전능하신 하나님을 그 속에 모신 공동체 입니다. 도대체 어디부터 시작해야 할지, 그리고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지 알지 못하지만 그래도 우리 안에 우리의 영혼과 인생을 채워주시려고 우리 하나님이 함께 계신다는 것을 믿는 믿음으로 서로가 서로에게 마음을 열고 나오미와 룻, 그리고 보아스가 되어 주기 위해서 조금씩 조금씩 헌신하기 시작한다면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곳으로부터 우리의 텅 빈 곳을 채워시기 시작하실 것이고 하나님으로 우리 영혼을 가득 차게 해 주실 것입니다. 


교회가 이런 곳이 되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교회 안에서 우리는 이런 복을 누려야 하는 것. 이것이 오늘 예수를 믿는 우리들에게 얼마나 현실감이 떨어지는 이야기인지는 저도 잘 압니다. 저도 룻기를 통해 교회의 소명과 복을 다시 깨닫게 되면서 기쁘고 기대되기 보다는 오히려 당황스럽고 좌절스러웠습니다. 우리가 떠나온 곳이 너무 멀어서 과연 거기로 돌아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솔직한 저의 심정이었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그렇게 복된 곳이라면, 교회가 그래서 모인 성도들의 공동체라면, 그리고 성도는 서로에게 그렇게 복된 역할을 하기 위해서 부름받은 사람들이라면 그렇다고 해서 이 좋은 복들을 그냥 포기할 수는 없다는 억울한 감정이 들었습니다. 교회 안에 넣어 놓으신 세상이 알 수도, 누릴 수도 없는 영광스러운 복을 그냥 내버려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어쩌라는 말이냐? 저도 잘 모릅니다. 안다고 한들 곧바로 그렇게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당장 나오미와 룻, 보아스처럼 서로를 사랑하라고 말한다고 해서 우리가 당장 그렇게 할 수는 없으니까요. 그러나, 그래도 저와 여러분이 이 복을 되찾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있습니다. 그것은 우선 그 복을 누리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그리고 나를 이 광현교회로 모으신 이유라는 사실을 믿음으로 고백하며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이 교회로 보내신 이유가 하나님께서 여러분 인생의 빈 구석을 채워주시기 위해임을 믿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서로 서로에게 그 복된 역할을 하라고 여기에 부르셨다는 것을 믿습니까? 그 다음에는 그 믿음을 가지고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서로가 서로에게 마음의 닫힌 문들을 하나씩 하나씩 여는 일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우리들을 향한 그 복된 부르심에 순종하며 그 복을 누리기 위해서 닫힌 문이 있나 살펴보고 그 문을 조금씩이라도 열어 주시겠습니까? 힘이 들겠지만 그렇게 하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만약 우리가 한 걸음 한 걸음 포기하지 않고 이 길을 걷는다면 하나님께서는 그 걸음마다 우리를 채워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광현교회가 서로 덕분에 서로의 인생의 빈 구석들이 채워지고, 하나님이 온전하게 채워주시는 복을 경험하는 복된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우리 힘으로 안 될 것 같고 불가능하게 여겨질지라도, 모든 상황을 반대로 뒤집으시듯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뒤집어 엎으시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이 복된 길을 함께 걷는 우리 광현교회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