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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새벽예배

2014.11.12. 새벽예배 - 네가 히브리 종을 사면2(출애굽기 76)






본   문 : 출애굽기 21장 1-11절




어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을 주실 때, 다른 것보다 먼저 주인이 노예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말씀하신 이유에 대해서 묵상해 보았습니다. 그 이유는 두 가지였는데요. 첫째는 하나님께서는 그게 누구라고 하더라도 모든 사람은 전부가 다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에 인격적으로 대해야 한다는 것을 알려 주시기 위해서 였고, 두번째는 비록 우리가 불완전하고 이미 악이 스며들어 있는 세상에 살지만 그 안에서도 최선을 다해서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알려 주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오늘은 다시 한 번 이 구절들의 의미를 구체적으로 살피면서 하나님의 뜻을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어제는 인간의 죄성과 관련해서 왜 하나님께서 노예제도를 없애지 않으셨는가 하는 이유를 살펴보았지만, 하나님께서 노예제도를 원천적으로 금하지 않으신 또 하나의 이유는 그것이 스스로 노예가 되는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제도였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옛날에 우리나라에도 머슴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노예제도 중에서 동족을 종으로 삼는 경우는 이것과 비슷한 경우였습니다. 처음에 이스라엘 민족 중에서는 노예인 사람도 없고 동족을 노예로 부리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사람들 간의 경제력에 차이가 생겨나게 되고, 결국에는 자기 몸 밖에 남지 않는 사람들도 생겨날 수 밖에 없습니다. 물론 조건 없이 가난한 동족을 그저 도와주면 되겠지만  모두가 다 그렇게  선한 사람들일 수는 없습니다. 이런 경우에 만약에 노예제도 자체가 없다면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될까요? 가난해진 사람은 꼼짝 없이 죽고 맙니다. 최소한의 식량조차 구할 길이 없으니까요. 그래서 그 옛날 노예제도는 거의 유일한 노동력 시장 역할을 했고, 가장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꼭 필요한 제도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이 정말로 그것을 원하시지는 않으셨지만 노예제도를 그냥 내버려 두실 수 밖에 없으셨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러면서도 하나님께서는 만약 동족인 남자들 중에서 종을 삼는 경우가 생기면 그 관계는 최장 6년을 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칠년째 되는 해에는 조건 없이 그 종을 내보내 주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살다 보면 긴급한 사정 때문에 종이 되고 또 종으로 삼는 일이야 있을 수 있어도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완전히 소유하거나 혹은 영원히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그런 상황이 있어서는 안된다고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비록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서의 일이었기는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요구하시는 인간관계의 원리를 하나 더 배울 수 있습니다. 타락한 인간은 스스로 왕이 되려는 욕구를 모두가 다 가지고 있습니다. 자기 자신에게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왕이 되고 싶어하는 것이 타락한 인간의 본성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항상 그렇게 할 수 있으면 다른 사람을 자기 손 안에 넣고 마음대로 하고 싶어 합니다. 그리고 한 번 자기 손 안에 들어왔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놓아주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이 다른 사람을 어떤 이유로든 영원히 마음대로 하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그것은 그릇된 욕심을 따라 사는 것일 뿐만 아니라 스스로 그 사람에게 하나님이 되려는 것이니까요. 그리고 그렇게 되었을 때는 그 대상이 되는 사람은 인간이하의 인간이 될 수 밖에 없으니까요. 


그리고 또 한 가지 그 남자 종이 자기에게로 올 때, 결혼한 상태로 왔다면 그 종을 내보낼 때, 그 가족들도 함께 내보내야 하지만 홀몸으로 왔다가 그 집에서 결혼을 했다면 홀몸으로 나가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얼핏 보면 참 잔인한 말씀같지만 이것은 그럴 수 밖에 없습니다. 그 남종과 결혼한 여종은 여전히 주인에게 속해 있고 그 자녀들은 그 여종이 낳은 아이들이니까요. 하나님은 분명히 주인들이 종들과의 관계에서 지나친 욕심을 부리고 죄를 범하는 것은 막으셨습니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적인 희생이나 손해를 감수하라고 하시지는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만약 그 남종이 주인이 좋아서, 그리고 그렇게 얻은 아내와 자녀들을 사랑해서 자유인이 되지 않기를 원한다면 재판장에게로 가서 자신의 의사를 분명히 밝히고 귀에 구멍을 뚫어 그 집안에 속한 종이 될 수 있는 규정도 말씀해 주셨습니다. 여기에서도 계속해서 종이 되는 일의 선택권은 종이 된 사람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여기서도 우리는 약자를 보호해 주시고, 또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처럼 행하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읽을 수가 있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살펴 보겠지만 하나님께서 주신 법들 속에는 하나님의 성품과 마음이 그대로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율법을 볼 때도 그것을 그냥 의무로만 볼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과 성품을 담은 그릇으로 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그 율법도 사랑할 수 있고 또 그 율법의 원리에 기꺼이 순종하는 사람들이 될 수 있습니다. 


그 다음 이어지는 노예에 관한 율법은 여종에 대한 것입니다. 여종에 대한 규정치고는 조금 이상한데요. 그것이 이 율법이 그냥 여종에 대한 것이 아니라 후처로 데리고 온 여종에 대한 규정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여종은 분명히 종이지만 애매한 경계에 있는 사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데리고 온 경우에는 그 아버지가 그 여종을 다시 돈을 주고 되살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그 여종과 주인은 부부관계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경우 그 여종의 부모라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게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막상 그렇게 데리고 온 여종이 주인의 마음에 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는 다른 원칙이 적용됩니다. 그럴 때, 이 주인은 그 여종을 팔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경우에라도 그 여종을 동족이 아닌 이방인들에게 팔 수는 없게 하셨습니다. 주인의 변심 때문에 그 여종의 인생이 엉망이 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되니까요.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만약에 그 여종을 아들에게 주려고 데리고 온 경우에는 그 여종을 자기 딸처럼 대해 주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에는 만약 자기 후처로 데리고 왔다면 아내처럼 대해 주어야 한다는 의미가 이미 포함되어 있겠지요. 그 다음에 이어지는 말씀에는 그것이 분명히 나타나 있습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이 일부다처제 사회였으니 그렇게 한 여인을 사서 자기 후처로 데리고 온 상전은 후에 또 다시 다른 여인을 처로 맞아들일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 경우에 그 상전은 이전에 데리고 온 여인을 종이라고 해서 함부로 하기가 쉬웠죠. 그래서 하나님은 상전은 앞서 데리고 온 여인에 대해서 최소한의 남편의 의무를 다하게 하셨습니다. 심지어는 부부생활에 대해서까지 정확하게 규정해 놓으셨습니다. 그리고 만약 언제든지 상전이 이 규정을 어기면 그 때는 여인은 속전을 내지 않고 자유를 얻을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참 놀랍지 않습니까? 우리 하나님은 얼마나 인격적이신가요? 또 그  분의 사랑은 얼마나 세심한가요? 이것이 다른 사람들 사이의 법이 아니라 주인과 종, 특히 주인이 자신의 종에게 해 주어야 할 의무에 대한 법이라는 것이 정말 놀라울 따름입니다. 사람들 사이의 관계는 이런 저런 이유로 일그러지고 망가질 수 있습니다. 사실 그것을 원천적으로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없지요. 그렇지만 그래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그런 가운데서도 서로 서로를 최소한의 인격체로, 책임을 가지고 대하며 살기를 원하십니다. 때로는 진짜 사랑할 수 없을 수도 있습니다. 정말 아끼는 마음이 없을 수도 있지요.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람으로서 사람에게 해야 할 의무를 저버릴 수는 없습니다. 종도 그렇게 대해야 한다면 다른 사람들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도 그랬지만, 특히 오늘을 사는 우리 성도들은 더욱 더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다함 없는 사랑을 받고 그 은혜 가운데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으로 부터 받은 인격적인 대우는 정말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황송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종도 아닌 죄의 종이었는데, 하나님께서는 그런 우리를 풀어주시고 또 자녀삼으시기 위해서 독생자의 목숨을 내어 주셨으니까요. 


우리는 우리가 어떤 사람을 인격적으로 대하기 힘들 때마다 이 은혜를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오늘 주님이 주신 말씀을 생각하며 그럴 마음이 없더라도 그 사람을 최선을 다해서 인격적으로 대해 주려고 애써야 합니다. 그것이 은혜로 속량받은 우리들에게 있어야 할 마땅한 모습이니까요. 오늘도 많은 사람들을 만나실 텐데 그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오늘 말씀을 생각하시고 최선을 다해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대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그 일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기쁨이 될 것입니다. 언제나 내가 만나는 그 누구라도 귀한 하나님의 형상임을 잊지 않아서 세상을 화평의 자리로 만들어 가는 우리 모두가 되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