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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주일오후

2014.11.30. 전교인 기도회 - 이스라엘의 조건2(사사기 4)





   본문 : 사사기 1장 16-26절




제가 신대원에 다닐 때, 한 교수님께서 구원에 대해서 강의를 하시면서 “구원은 100퍼센트 하나님의 주권과 100퍼센트 인간의 노력으로 이루어집니다. 수학적으로는 100더하기 100은 200이지만, 구원에 관한 한 100더하기 100은 100입니다.”라는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저는 그 말씀을 듣고서 제가 그 이전까지 품고 있었던 구원에 대한 궁금증이 많이 해소 되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에 의해서 이루어 진다고 배워왔습니다. 틀림이 없는 진리이지요. 그런데, 이렇게 되면 질문이 따라 붙습니다. “그렇다면, 전도도 필요 없고, 사람이 열심을 내는 일도 필요 없지 않은가? 그냥 가만히 있어도 결국 모든 일이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대로 다 될 것 아닌가?”라는 질문입니다. 그냥 단순하게 생각하면 그렇습니다. 그러나, 이런 질문과 이런 대답은 이루어가는, 완성으로 향해 가는 구원이라는 측면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지만,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실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역사에 인간을 개입시키십니다. 때로는 이 인간들이 하나님의 계획의 방해물이 되기도 하고, 지연시키도 하고, 오히려 너무 앞서나가 월권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그렇게 일하시는 방법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불편하고 손해를 보는 길을 고집스럽게 가시는지 우리가 그 이유를 전부 다 알 수는 없지만, 한 가지 틀림없는 것은 그런 모든 상황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영적으로 훈련시키시는 과정이 된다는 것입니다. 만약 그런 과정이 없다면 우리는 스스로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고 거기 자신을 맞추어 나가는 법을 배울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성숙해 가는 복된 경험을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은 철저히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일입니다. 그 일에 있어서는 그 누구도 참견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가 구원받은 자로서 어떤 삶을 살아가게 되느냐 하는 문제는 그가 얼마나 하나님께 자신을 맞추어 나가는 일에 헌신하고 있는가 하는데 달려 있습니다. 성도가 살아가는 삶의 차이는 바로 이 부분의 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신앙인으로 어떤 삶을 살 것인가 하는 것은 내가 책임있는 한 사람의 인격체로서 하나님께 대해서 어떻게 그리고, 얼마나 성실하게 응답하느냐 하는 것에 달려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본문에는 세 부류의 이방인들이 나옵니다. 에돔족속에서 이스라엘로 온 갈렙과 옷니엘, 모세의 장인 이드로를 따라왔다가 이스라엘에 정착한 겐 족속 사람들, 그리고 베들레헴 사람으로써 이스라엘에게 벧엘 성으로 들어가는 비밀통로를 알려준 후 헷 사람의 땅에 가서 살았던 이름 모를 한 사람과 그 가족들이 그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다 이방인이었고, 어떤 경로를 통해서든 이스라엘과 접촉하였는데 그 다음에 그 운명이 달라진 사람들입니다.


이 세 종류의 이방인들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대해서, 그리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의 기회에 대해서 보일 수 있는 반응과 그 결과들이 어떻게 달라질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가정 적극적인 반응을 보인 사람들이 갈렙과 그 동생 옷니엘입니다. 성경은 1장 10절부터 15절까지 이들의 승전에 대해서 기록한 후에, 다시 20절에서 와서 10절에서 말한 헤브론에서의 승리가 유다 지파 자체의 승리가 아니라, 갈렙의 승리였다는 것을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20절은 갈렙의 승리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무리가 모세의 명한 대로 헤브론을 갈렙에게 주었더니 그가 거기서 아낙의 세 아들을 좇아 내었고…’ 거기 사는 사람들이 평범한 사람들이라고 하더라도 산지의 성에 거하고 있다면, 그들을 공격하는 것은 난공불락의 성을 공격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헤브론의 거민들은 일반적인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거기 살던 사람들이 ‘아낙의 세 아들’로 대표되는 거인족이었습니다. 처음 이들을 보고 이스라엘이 보인 반응이 민수기 13장 33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거기서 또 네피림 후손 아낙 자손 대장부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의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 갈렙과 옷니엘이 아낙 자손을 공격한 것은 메뚜기가 사람을 공격한 것입니다. 그런데, 메뚜기가 이겼습니다. 메뚜기 수가 훨씬 더 적었는데 그 메뚜기들이 사람을 이겼습니다. 이것이 갈렙이 헤브론에서 이루어낸 신앙의 기적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의 기회는 소명의 모습으로 주어질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어떤 일을 맡기시면서 그 일을 행하고, 처리하면서 우리가 보이는 반응에 따라서 우리에게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크든 작든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무슨 일인가를 맡길 때,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소명을 주실 때, 소명만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 소명에는 항상 복된 약속이 묶여져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 소명에 순종과 믿음으로 반응할 때,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 가시는 도구가 될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놀라운 복을 주시는 통로가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모세가 갈렙에게 산지를 주겠다고 약속했던 것, 그것은 그에게 맡겨진 어려운 일인 동시에 복이었으며 또 영광이었습니다. 그 약속을 믿고 갈렙이 산지의 거인들과 싸웠을 때, 그는 그 땅을 차지할 수 있었고, 그 일이 어려웠던만큼 큰 영광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갈렙이 결국 이런 영광스러운 승리를 얻게 된 것은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이리 저리 흔들리고 실패할 때도 40년 동안이나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소명과 약속을 꼭 붙들고 흔들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40년 동안의 신실함이 드디어 기회가 왔을 때, 그를 그 부르심에 헌신하게 했으며, 또 승리하게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방인이었으면서도 그 어떤 이스라엘 사람들보다 먼저 약속의 땅을 차지한 복된 사람들이 되었던 것입니다. 


두번째 사람들은 겐 사람들입니다. 이미 살펴본 대로 이 사람들은 단지 이스라엘 안에 거했을 뿐 한 일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중심되는 사람들도 아니었고, 전쟁에 참여해서 공을 세운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떳떳한 이스라엘로 받아들여 졌고, 그들 중에서 약속의 땅의 일부를 상속받는 복을 누렸습니다. 비록 이들이 한 일은 아무 것도 없었지만, 이들도 40년 넘는 세월을 신실하게 하나님을 붙들고 살았다는 데는 전혀 차이가 없습니다. 40년이라면 한 세대가 넘는 시간입니다. 1세대는 그렇다고 해도, 다음 세대로 그 신실함을 상속시킨다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겐 사람들은 늦게 하나님을 섬기는 자리로 들어왔지만, 그 자리의 소중함과 복됨을 알고는 그것을 다음세대까지 물려주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고, 그 일은 이제 열매로 나타난 것입니다. 겐 속족은 그 전체가 온전한 하나님의 언약백성 안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제가 아는 후배 중에 이런 아이가 있습니다. 지금은 저처럼 목사가 되었지만, 그 후배가 10대 때에는 참 많이 방황했습니다. 믿는 부모 밑에서 태어났습니다. 부모는 하나 밖에 없는 그 아들이 목사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하나님께 그렇게 기도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 후배는 계속해서 부모가 원하는 것과 어긋나게 살았습니다. 교회는 다녔지만,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기타만 치고, 놀러 다니기만 했습니다. 그러다가, 정상보다 몇 년 늦게 그 아이가 신학대학에 들어갔습니다. 수련회를 갔을 때로 기억됩니다. 서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 후배는 저에게 자신의 과거에 대해서 조금은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려 주었습니다. “형, 제가 이렇게 늦게 신학교에 들어온 데는 이유가 있어요. 사실 그렇게 다른 일에 마음을 쏟은 것도 마찬가지 이유에요. 제가 목사가 되기 싫어서 반항한 것은 아니예요. 우리 아버지는 경찰로 성공한 사람이고, 교회에서도 믿은 좋다고 소문난 사람이지만, 제가 보기에는 전혀 아니었어요. 교회에서의 모습은 아버지의 진짜 모습과는 너무나 달랐어요. 저는 그런 아버지가 너무 싫었어요. 그래서, 아버지가 원하시는 것을 일부러 하지 않은 거예요.”라고 말입니다. 


우리 신앙의 가장 가깝고 정확한 증인은 나의 가족입니다. 그 모습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영향이 미쳐 질 수 밖에 없습니다. 특히 자녀들에게는 그 모습이 그대로 전해질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믿는 부모들에게 자녀의 인간적인 양육뿐만 아니라, 영적인 양육의 책임도 일부 맡기셨습니다. 일부라고는 하지만 사실 굉장히 중요한 역할이기도 합니다. 그 역할 중 가장 중요한 역할은 자녀들에게 그리스도인 답게 사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보여주는 것보다 더 강력한 교육은 없습니다. 겐 족속들은 비록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이었지만, 하나님의 사람으로 사는 것과, 그런 삶을 자녀들에게 보여주어야 한다는 두 가지 책임을 잘 수행해 내었고, 그래서 자기 뒷 세대가 복된 세대가 되도록 해 주었던 것입니다. 이 일은 분명히 쉽지 않습니다. 정말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그 부르심에 제대로 응답했을 때는 그만큼 큰 복을 얻습니다. 우리들 뿐만 아니라 우리 자녀들까지도 말입니다. 


마지막 등장인물은 베들레헴 사람으로 유다에게 벧엘을 침입할 수 있는 통로를 알려 준 대가로 목숨을 건지고, 헷 사람의 땅에 가서 한 성읍을 이루고 살았던 사람입니다. 성경을 보면, 처음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 이 사람과 비슷한 역할을 해 주었던 한 사람이 더 나옵니다. 그것은 정탐꾼들을 숨겨 주었던 라합입니다. 그 때 정탐들을 안전하게 숨겨준 라합은 정탐들에게 자신과 가족의 목숨을 보장하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런데, 라합은 단지 목숨을 건지는 일로 이 일을 끝내지 않았습니다. 라합은 결국 이스라엘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비록 이방의 기생이었지만, 보아스의 할머니, 다윗의 할머니, 그리고 예수님의 할머니가 되는 영광을 얻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똑같은 기회를 얻은 그 베들레헴 사람은 다르게 반응했습니다. 그는 정보를 주고 대가로 목숨을 건졌습니다. 그러나, 그는 전혀 하나님의 백성이 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본문을 보면 정탐들이 그에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 성읍의 입구를 우리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너를 선대하리라” 우리 성경에 ‘선대’라는 말은 단순히 호의를 베풀겠다는 말이 아닙니다. 원래 이 말은 성경에서 ‘인애’라로 표현되는 헤세드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정탐들은 그의 목숨만을 보장했던 것이 아니라, 그들을 자기 동족들처럼 언약으로 맺어진 형제처럼 대해 주겠다고 했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사람은 그 제안을 거절했습니다. 오히려 이방 땅으로 가서 자기의 성읍을 만들고 거기 거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언약백성이 될 수 있는 은혜의 기회를 놓친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가장 큰 은혜의 기회는 붙잡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구원의 기회를 붙들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도 수많은 사람들이 그 베들레헴 사람처럼 하나님의 백성 안으로 들어올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거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구원의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비록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 안에 들어와 있어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의 기회에 대한 태도는 정말 중요합니다. 그 태도가 이 땅에서의 우리가 누리는 은혜의 크기와 하나님 안에서의 우리 삶의 질을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그 예루살렘 사람은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얻었습니다. 그러나, 그 기회를 스스로 포기했습니다. 그는 헷 땅으로 가서 자기 성을 쌓고 거기서 살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사는 것보다 자신이 스스로 왕이 되어 살아가는 삶을 더 좋아했던 것입니다. 은혜의 기회가 내가 익숙해져 있는 내 생활이나 내 이익과 전혀 갈등을 일으키지 않을 때, 그 때 은혜의 기회를 붙잡는 것은 우리에게 아무런 고민거리가 아닙니다. 하지만, 은혜의 기회를 붙들기 위해서 내가 익숙해져 있는 삶이나 혹은 무언가를 내려 놓아야 할 때는 그것이 아무리 큰 은혜의 기회라고 하더라도 우리에게 고민을 줍니다. 그런데, 참된 은혜는 이런 갈등과 함께 우리에게 주어질 때가 많습니다. 무언가를 포기해야만, 내게 익숙해져 있고, 내가 더 좋아하고 끌리는 것을 내려 놓아야만 잡을 수 있는 은혜의 기회가 있습니다. 그 일에 실패한 사람이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그 베들레헴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자기라는 성의 벽을 허물지 못해서 결국 그 안에 갇혀 더 넓고 영광스러운 하나님 나라를 가질 수 없었던 것입니다. 

    

갈렙과 옷니엘, 겐 족속들, 그리고 이름 모를 베들레헴 사람…… 이 모두에게는 동일한 은혜의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그 은혜의 기회에 대한 전혀 다른 반응을 보였고, 그 반응에 따라서 그들의 운명은 영원히 달라졌습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은혜의 기회에 대해서 갈렙과 옷니엘처럼 모든 것을 걸고 적극적으로 반응할 수도 있고, 겐 족속 사람들처럼 소극적으로 보이지만 그래도 신실하고 변함없는 모습으로 반응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은혜에 관한 한 마지막 그 예루살렘 사람처럼 그렇게 반응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성도가 반드시 지켜내야 할 자리가 있다면 그것은 은혜의 자리입니니다. 갈렙과 옷니엘, 그리고 겐 족속이 4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두 세대가 지나도록 이스라엘 가운데 머물면서 믿음을 지키며 제 자리를 떠나지 않은 것처럼 우리도 진득하게 은혜의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제가 지켜보면 이것을 잘 못해서 자꾸 믿음의 능력과 유익을 놓치고 미끄러지는 분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저는 목회자로서 그런 모습을 보는 것이 얼마나 안타깝고 고통스러운지 모릅니다. 우리는 꼭 진득하게 은혜의 자리를 지켜야 합니다. 그리고, 은혜의 기회가 오면 꼭 그 기회를 붙들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항상 하나님께서 우리를 주신 은혜에 자리에 머무는 사람들이 되고, 또 거기서 주시는 은혜의 기회를 꼭 잡아서 참된 이스라엘로 살아가는 복을 누리는 성도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