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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금요기도회

2014.12.12. 금요기도회 -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사도행전 88)






본문 : 사도행전 14장 19–23절




먼저 지난 주 금요일 설교 중에 제가 착각해서 여러분에게 잘못 말씀드린 부분이 있어서 사과도 드리고 정정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제가 바울과 바나바가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란을 겪어야 할 것’이라고 설교했던 곳이 더베라고 했는데요. 두 사람이 이 메세지를 전한 것은 더베가 아니라 더베에서 복음을 전하고 다시 루스드라, 이고니온, 그리고 비시디아의 안디옥으로 돌아가서 였습니다. 제가 설교준비를 하면서 제 기억에만 의지해서 잠시 착각했던 것 같은데 거슬리셨다면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오히려 이렇게  바로잡아 놓고 보니 더베보다 그 도시들에서 이 메세지가 더 생생하고 절절했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 도시들은 두 사람이 복음을 전하다가 여러가지 어려움과 고통을 당하고 나서 떠났던 곳입니다. 그런데 이제 두 사람은 다시 성도들을 돌보기 위해서 그 도시들을 방문합니다. 두 사람의 복음에 대한 열정과 교회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깊고 간절했는지 참 놀랍습니다. 우리는 두 사람이 복음을 전하는 일에만 목숨을 걸었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이렇게 보면 두 사람은 분명히 그 복음의 열매인 교회들을 위해서도 위험을 마다하지 않았던 것이 분명합니다. 아마 처음 교회 지도자들의 이런 사랑과 헌신이 없었다면 어린아이 같았던 교회들은 쉽게 시험에 들고 또 무너졌을 것입니다. 우리는 처음 이 세상에 교회가 생겨난 이후부터 지금까지 누군가가 끊임 없이 이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애썼고 또 교회를 돌보기 위해서 애썼기 때문에 지금 나의 신앙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내 신앙을 좀 더 진지하고 귀하게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렇게 신앙의 선배들의 덕을 입어 오늘 믿음을 가지게 되었듯이 우리들 또한 우리 신앙의 후배와 자녀들을 위해서 교회와 복음을 잘 지켜내는 일에 더 많이 헌신하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지난 주에는 우리가 너무 쉽고 간단하게만 생각하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문’이 실제로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좁을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았는데요. 보화를 하늘에 쌓으라든가 좁은 길로 가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써야 한다는 주님의 말씀들을 생각해 볼 때, 이것이 이 말씀 한 구절에서 뽑아낸 우리의 추측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에 대해서 적어도 이렇게는 분명하게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과 복음을 위해 감당해야 하는 고난과 환란에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들은 분명히 그 나라에 들어가기가 매우 어려울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주변환경이 자꾸 더 편해지고 자꾸 더 화려해지고 교회도 성도들에게 최상의 환경에서 아무런 불편 없이 신앙생활 할 수 있도록 온갖 배려를 다 하고 있는데, 저는 과연 이것이 정말로 성도들을 위하는 것인지 확신이 서질 않습니다.  만약에 우리가 하늘나라를 생각하고 그 나라의 영광을 생각한다면 과연 그런 것을 찾고, 또 그런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오늘날의 영적인 풍토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심사숙고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모양으로 신앙생활을 하건 간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란을 겪어야 할 것이니라’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여전히 성경에 기록되어 있고, 바울과 바나바의 음성을 통해 우리 귓가에 울려 퍼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꾸 편해지고만 싶고 불편한 것들이 싫어질 때마다 이 말씀을 기억하시고 복된 자리를 떠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란을 겪어야 할 것이니라’와 같은 말씀들은 여전히 부담스러운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 입장에서 보면 참 하기 힘든 것을 하라고 요구하는 말씀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런 말씀들을 만날 때마다 이런 감정을 가지게 되는 것은 실은 우리가 이런 종류의 말씀들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오해 때문입니다. 세상에는 똑같아 보여도 전혀 다른 것들이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한꺼번에 뭉뚱그려서 묶어 버리면 안됩니다. 그러면 한 쪽은 심각하게 평가절하되거나 오해를 받게 됩니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특히 부담스럽게 여겨지는 하나님의 말씀들을 들을 때 그런 실수를 하곤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들은 많은 경우 겉으로 보기에는 도덕책에 나오는 좋은 말들과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겉모습은 비슷해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들은 그것들과는 근본이 다릅니다. 


우선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요구는 모든 사람들에게 주시는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고 또 자녀들이기 때문에, 우리의 소속이 여기 이 곳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이기 때문에 주시는 말씀입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사랑하라’는 명령은 누구나 옳은 명령이라고 생각합니다. 굳이 예수를 믿지 않아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믿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사랑해야 하는 이유는 전혀 다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사랑하면서 살려고 하는 것은 사랑이 좋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세상을 풍성하고 아름답게 만드니까요. 그렇지만 예수 믿는 사람들이 사랑해야 하고 또 사랑하는 이유는 다른 데 있습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 졌는데 하나님의 성품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이 사랑이니까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것이 가장 우리다운 것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입니다. 또 모두가 다 똑같은 너무나도 귀한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들 속에는 하나님의 형상이 있기 때문에 귀하게 여기고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명령을 하실 때는 항상 우리에게 그 명령에 따를 수 있는 동기와 힘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시고서 그 명령을 주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것들에 관심을 가지지 않고 그 명령을 듣자 마자 곧바로 그 명령에 따르려고 합니다. 이런 태도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려고 할 때 꼭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들은 그렇게 하려고 한다고 해서 할 수 있는 일들도 아닐 뿐 아니라,  또 그렇게 내 힘으로만 하게 되면 반드시 ‘자기 의’라고 하는 심각한 부작용이 따라오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무언가를 하라고 요구하실 때는 우리가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와 능력 안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해 놓고 그렇게 하십니다. 오늘 본문을 보아도 그것이 분명하게 나타나 있는데요.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란을 겪어야 할 것이니라”라는 말씀은 사실 아무런 맥락이 없이 갑자기 주어진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 22절을 함께 읽어 볼까요?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란을 겪어야 할 것이니라 하고…” 분명히 일의 순서가 있지요? 두 사람은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면서 이제까지 그랬던 것처럼 십자가의 복음은 온전히 붙드는 믿음을 계속 지켜내도록 용기를 주면서, 마지막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란을 겪어야 할 것이니라”라는 말씀을들려 주었던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환란을 감수하려면 마음이 굳건해야 합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복음을 믿는 믿음이 흔들려서는 안됩니다. 분명히 그 환란은 그 믿음을 지키려면 반드시 견디어 내야 하는 것이지만 역으로 그 믿음이 없으면 절대로 하나님 나라를 위한 환란을 견디어 낼 수가 없습니다. 그 믿음이 바로 마음을 강하게 해주고 또 그 믿음 때문에 당하는 환란을 견뎌 내도록 해 주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들의 이중적인 성격이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라고 하시는 것은 반드시 해야 하는 것들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명령하시는 것이니까요. 그렇지만 둘째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그저 우리의 힘과 의지만으로는 행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믿음이 있어야 하고 은혜가 있어야 하며 우리의 마음이 충분히 강건해졌을 때에만 순종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우리가 그동안 그렇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려고 해도 실패하고 또 실패했던 이유, 그러다가 실망하고 좌절하고 지쳐서 때로는 하나님의 요구에 무감각해지까지 했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명령이 주어지면, 그 명령을 행할 은혜와 믿음을 챙기고 그 다음에 강건해진 마음을 가지고 결단을 내리고 순종을 향해 가야 하는데 그저 해야한다는 생각만으로 내 힘으로 앞서 나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하나님의 쉽지 않은 말씀에 순종하려면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야 하고 또 그 은혜를 잘 지켜야 합니다. 그리고 그 은혜로 우리의 믿음을 잘 지켜야 합니다. 그래야 그것이 우리의 마음을 강하게 만들어 주고 그 힘으로 순종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한 환란이나 손해를 감당해 내는 일도 그냥 그래야 한다고 말씀하신다고 해서 우리가 그냥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말씀을 듣기 전에 이미 은혜 안에 있어야 하고 또 강건한 믿음으로 마음이 든든해져 있어야 합니다. 적어도 그러는 과정 중에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절대로 하고 싶어도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이 소중한 교훈은 두 사람이 교회들을 떠나 밤빌리아로 가기 전에 두 사람이 했던 행동들과  그 다음에 이어지는 이야기 속에도 그대로 들어 있습니다. 


바울이 그 도시들을 떠나 밤빌리아로 가기 전에 바울은 각 교회의 장로들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금식기도를 합니다. 금식기도란 하나님 앞에서 정말 절실하고 간절하게 은혜를 구하는 행동인데요. 그렇게 하면서 두 사람은 이 장로들을 ‘그들이 믿는 주께 위탁했다’고 말합니다. 이제 떠나니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정말 간절하고 절실하게 하나님께서 이 장로들을 맡아 달라고, 하나님의 은혜로 견고하게 붙들어 달라고 기도하는 것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 간절한 소원과 절실함이 바로 금식기도로 표현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를 떠나 두 사람은 처음 그들을 선교사로 파송했던 시리아의 안디옥으로 돌아가는데요. 그 도시에 대해서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 곳은 두 사도가 이룬 그 일을 위하여 전에 하나님의 은혜에 부탁하던 곳이라” 이 이야기는 13장 3절에 나옵니다. 거기 보면 안디옥 교회는 바울과 바나바 두 사람을 세우고 두 사람이 비시디아 지역의 장로들에게 그렇게 했던 것처럼 그들을 위해서 금식하며 기도했고, 또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냈습니다. 이 구절과 오늘 본문을 연결해서 보면 그 장로들이 두 사람에게 안수하면서 했던 일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두 사람에게 교회가 안수했던 것은 그들을 하나님의 은혜에 의탁하는 행위였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는 두 사람이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을 제대로 감당해 낼 수 없기 때문에 안디옥 교회도 두 사람을 그저 하나님의 은혜에 맡겼던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어떻게 되었습니까? 두 사람을 하나님의 은혜에 의탁했고, 그렇게 하나님께서 두 사람을 하나님의 은혜 안에 붙들어 주시니 어떻게 되었습니까? 두 사람은 모든 험난한 여정과 오해와 핍박, 심지어는 돌에 맞아 죽을 뻔한 위기를 당하면서도 하나님께서 주신 소명을 버리지 않았고 믿음을 지켜 냈습니다. 그리고, 정말 놀라운 열매들을 거둬 들였고 승전보를 가지고 다시 안디옥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성경은 그 결과를 이렇게 소개합니다. “그들이 이르러 교회를 모아 하나님이 행하신 모든 일과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신 것을 보고하고 제자들과 함께 오래 있으니라” 얼마나 감사했을까요? 그들이 거기서 머물며 제자들과 함께 보낸 시간은 얼마나 기쁘고 행복했을까요? 그 교제가 얼마나 영광스럽고 은혜로웠을까요? 그러나, 이 모든 일은 개인의 능력이나 대단한  물질적인 자원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이 모든 일들은 바로 하나님께서 두 사람에게 은혜를 주셨고, 그 은혜 안에서 두 사람이 믿음으로 마음을 굳게 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들이었습니다. 


우리는 은혜라는 말을 들으면 자꾸 받는 것만 생각합니다. 받기만 하면 다 되는 줄 압니다. 물론 은혜는 주셔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은혜는 받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우리는 은혜 받는 일을 항상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를 붙들고 그 은혜에 스스로 붙들리는 일과 세트로 생각해야 합니다. 은혜가 우리를 붙들어 주듯이 우리들은 주시는 은혜에 우리 자신을 의탁해야 합니다. 항상 은혜를 붙들어야 하며, 그 은혜 안에 거하면서 그 은혜로 우리 믿음을 강건케 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믿음은 능력있는 믿음이 됩니다. 그래야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치러야 할 댓가를 담대하게 치르는 하나님 나라의 영광스러운 시민이 될 수 있습니다. 


교회를 교회답게 하는 것, 성도를 성도답게 하는 것은 은혜의 능력과 그 능력을 붙들고자 하는 우리들의 헌신에 달려 있습니다. 항상 은혜를 구하십시오. 그리고 그 은혜에 여러분 자신을 의탁하여 사십시오. 그럴 때 여러분은 사탄의 방해와 세상의 벽을 넘게 하는 믿음의 참된 능력을 경험하며 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우리 모두의 삶이 이렇게 능력있고 영광스러워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