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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주일예배

2014.12.14. 주일오전 - 유대인이 되는 자가 많더라(에스더 12)

 


에0801to17 - 유다인이 되는 자가 많더라(에12).pdf


20141214SM.mp3.zip




   

  성경본문 : 에스더 8장 1-17절




성경은 경건의 연습이 범사에 유익하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그저 경건의 연습 자체가 그렇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가 경건의 연습을 통해서 참된 신앙을 가지게 되면 평상시에도 그 믿음의 덕을 보지만 우리가 비상시라고 부르는 어려운 때도 크게 덕보는 삶을 살게 된다는 뜻입니다. 신앙이 평상시에 우리에게 주는 유익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굉장히 많습니다. 우리가 참 믿음 가운데 살면 근심, 걱정, 두려움, 열등감, 비교의식, 교만 그리고 분노처럼 우리를 끈길지게 괴롭히는 내면적인 문제들로부터 굉장히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참 믿음이 있는 사람들은 그 마음이 평안합니다. 가만히 자기 속을 들여다 보면 그 마음에 잔잔한 평안과 기쁨이 흐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정말 대단한 능력이고 유익입니다. 이것만으로도 우리가 참된 신앙을 추구해야 할 충분한 이유가 될 것입니다. 그렇지만 참 믿음의 진짜 능력과 유익이 얼마나 대단한가를 제대로 실감하게 되는 때는 우리가 비상시에 놓여 있을 때입니다. 이 때 참 믿음은 그 사람을 절망과 좌절로부터 지켜주고 그래서 삶과 신앙이 무너지는 것을 막아줍니다. 경험해 보신 분들은 이게 얼마나 대단한 능력인지 다 아실 겁니다. 그런데, 참 믿음이 비상시에 이렇게 큰 능력을 발휘하는 이유는 그 믿음 안에는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선하게 주관하신다는 믿음과 더불어 하나님은 뒤집기의 명수라는 것을 믿는 믿음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는 섣부른 결론이나 완전한 절망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끝이라고 하시기 전에, 그래서 진짜 끝이 나기 전에는 스스로 끝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또 그런 마음이나 생각이 생겨날 때 그런 마음이나 생각과 싸우려는 믿음과 의지가 생겨나게 됩니다. 또 한 가지 끝이 나더라도 그것이 진짜 끝은 아니라는 것을 압니다. 하나님은 언제든 어디서든 다시 시작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끝이라고 해서 절망하거나 포기하지 않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하나님은 역전의 명수십니다. 뒤집기가 전문인 분이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특별히 우리는 하나님의 언약백성들입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과 맺은 언약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을 최선의 방향으로 이끌어 가십니다. 뒤집으시고 바로 잡으시는 것도 바로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입니다. 하나님께서 에스더서를 통해 그렇게 일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보여주고 또 보여주고 계시는데, 그것은 우리가 이 에스더서를 통해 그런 하나님을 진짜로 믿게 되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열 일곱 절로 되어 있습니다. 성경의 한 장 치고는 별로 길지 않은 분량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성경의 아무리 긴 장도 오늘 본문만큼 많은 반전이 기록되어 있는 곳은 없습니다. 과연 반전이 몇 번이나 기록되어 있을까요? 여섯 번의 반전이 기록되어 있는데요. 그러니까 횟수로 치면 세 절마다 한 번씩 뒤집힌 상황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 셈입니다. 우선 첫번째 뒤집기가 나오는 곳이 2절입니다. 이제 하만의 손에 끼워져 있었던 반지가 모르드개에게로 넘어갑니다. 그런데, 이것은 단순히 반지의 주인이 바뀐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전에 그 반지는 절대로 그 반지를 지니면 안되는 사람의 손에 있다가 이제는 그 반지를 지니기에 가장 적합한 사람에게로 넘어 갔습니다. 아무리 큰 영광을 얻어도 제 자리에서  맡겨진 일을 묵묵히 감당하면서 나라를 섬겼던 모르드개야 말로 오히려 그 반지의 주인인 왕보다도 그 반지를 지닐 적임자임에 틀림 없으니까요. 마치 반지의 제왕이라는 영화를 보는 것 같습니다. 제 주인을 찾지 못해서 헤매던 절대권력의 반지가 드디어 자기 주인에게로 돌아갔습니다. 누가 권력을 가지게 되느냐 하는 것이 그 나라에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를 잘 아는 우리는 이제부터 바사제국을 비추게 될 밝은 빛을 기대해도 좋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하만 가문의 운명은 완전히 모르드개의 손으로 넘어갔습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모르드개와 그의 집, 유다인들의 운명은 하만의 손 안에 있는 파리목숨 같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 하만은 모르드개가 달리게 되어 있었던 장대끝에 매달리게 되었고, 그의 가문은 모르드개의 손에 쥐어져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첫번째와 두번째 뒤집기 입니다. 정말 완벽한 반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세번째 뒤집기는 9절에 나옵니다. 우리가 3장으로 되돌아 가보면 하만이 유다백성들을 멸절시키라는 조서를 꾸밀 때의 일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첫째 달 삼십일에 왕의 서기관이 소집되어 하만의 명령을 따라 왕의 대신과 각 지방의 관리와 각 민족의 관원에게 아하수에로 왕의 이름으로 조서를 쓰되 곧 각 지방의 문자와 각 민족의 언어로 쓰고 왕의 반지로 인치니라 이에 그 조서를 역졸에게 맡겨 왕의 각 지방에 보내니 열 두째 달 곧 아달 월 십 삼일 하루 동안에 모든 유다인을 젊은이 늙은이 어린이 여인들을 막론하고 죽이고 도륙하고 진멸하고 그 재산을 탈취하라 하였고…” 그런데, 그것이 모르드개의 손에서 이렇게 뒤집힙니다. “그때 시완월 곧 삼월 이십삼일에 왕의 서기관이 소집되고 무릇 모르드개의 시키는 대로 조서를 써서 인도로부터 구스까지의 일백이십칠 도 유다인과 대신과 방백과 관원에게 전할새 각 도의 문자와 각 민족의 방언과 유다인의 문자와 방언대로 쓰되 아하수에로 왕의 명의로 쓰고 왕의 반지로 인을 치고 그 조서를 역졸들에게 부쳐 전하게 하니 저희는 왕궁에서 길러서 왕의 일에 쓰는 준마를 타는 자들이라 조서에는 왕이 여러 고을에 있는 유다인에게 허락하여 저희로 함께 모여 스스로 생명을 보호하여 각 도의 백성 중 세력을 가지고 저희를 치려하는 자와 그 처자를 죽이고 도륙하고 진멸하고 그 재산을 탈취하게 하되…” 두 조서는 말까지 거의 똑같습니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단지 그렇게 멸절되고 도륙되는 대상이 달라졌을 뿐입니다. 첫번째 조서에는 유다인들을 무차별적으로 죽이고 약탈하라고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두번째 조서는 각 도의 백성 중에서 무장을 하고 조직적으로 유다백성을 공격하려고 했던 사람들만이 공격과 재산몰수의 대상이 되어 있습니다. 첫번째 조서가 유다백성들에 대한 무차별적인 살상과 약탈이 목적이었다면 두번째 조서는 유다백성들의 자기 방어가 목적이었고 또 아얘 무장을 하고 유다백성들을 공격하려고 했던 사람들에 대한 징벌이 목적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두번째 조서로 첫번째 조서를 뒤집으셨습니다. 그러나 단순히 뒤집으신 것이 아니라 가장 적절하고 선하게 뒤집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극단적인 악감을 가지고 끝까지 하나님의 언약 백성들을 멸망시키려고 했던 그 악한 사람들만 골라내어 처리하시는 방편으로 사용하셨던 것입니다. 


네번째 뒤집기는 15절에 나옵니다. 모르드개가 드디어 왕과 백성들 앞에 나옵니다. 온 수산성 백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모르드개는 푸르고 흰 조복을 입고 큰 금관을 쓰고 자주색의 가는 베 겉옷을 입고 왕 앞에 섭니다. 이 날은 모르드개가 바사의 국무총리로 공식적으로 취임하는 날이었습니다. 그는 최고의 영광으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하만의 계획이 발표되었을 때, 그는 자기 옷을 찟고 굵은 베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 쓰고서 대성통곡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의 몸에는 굵은 베옷 이 아니라 자색의 가는 베로 만들어진 최고의 옷이 입혀져 있고, 그의 머리에는 회색의 재가 아니라 빛나는 금관이 쓰여져 있습니다. 또 그 때는 그런 몰골 때문에 왕궁으로 들어갈 수조차 없었지만 이제는 당당하게 왕 앞으로 나가고 있습니다. 그의 통곡과 슬픔은 이제 기쁨과 영광으로 바뀌어 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3장 마지막 부분을 보면 왕과 하만이 왕궁에서 파티를 벌이는 동안 수산성 안은 하만의 조서 때문에 굉장히 어수선하고 비통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모르드개가 왕과 함께 있는 것을 보는 수산성의 주민들은 노래를 부르며 그 기쁨을 함께 하고 있습니다. 


다섯번째 뒤집기는 16절에 나옵니다. 그 날 모르드개의 영광을 보며 기뻐한 것은 수산성의 주민들만이 아니었습니다. 기쁨 뿐만이 아니라 모르드개의 영광까지도 함께 누린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이 바로 유다백성들이었습니다. 16절과 17절은 그 일을 이렇게 기록합니다. “유다인에게는 영광과 즐거움과 기쁨과 존귀함이 있는지라” 하만의 조서가 반포된 후 그 날 아침까지 울며 금식하며 기도하며 또 두려워하던 그들의 모습은 다 어디로 사라졌습니까? 또 다른 민족들에게 무시를 당하고 멸시를 당하던 그들의 설움과 아픔은 어디로 갔습니까? 이제 그들에게는 멸시대신 영광이 슬픔대신 기쁨과 즐거움이 그리고 비천함과 멸시대신 존귀함이 있습니다. 설교를 준비하면서 그 날의 유다백성들의 기쁨이 상상이 되어 저도 잔잔하게 전해 오는 기쁨을 누리고 있었는데, 그 때 문득 정말 은혜로운 말씀 한 구절이 떠올랐습니다. 그 말씀은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이 의의 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라는 이사야서 61장의 말씀이었습니다. 저는 이 말씀과 하나님의 일하시는 것이 어떻게 그렇게 복사해 놓은 것처럼 똑같은지 정말 하나님의 정확함에 정말 놀랐습니다. 


마지막으로 여섯번째 뒤집기는 17절 마지막에 나옵니다. 모르드개의 조서가 각 성읍에 도착하자 모든 유대인들의 울음은 탄성으로 바뀌었고 슬픔은 즐거움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갑자기 뒤집혀 버린 상황 때문에 도저히 일어날 수 없었던 일이 일어납니다. 그 때 바사 제국 안에는 그 조서가 진짜로 시행될 때, 혹시 자신이 그 보복과 징벌의 대상이 되지 않을까 두려워 했던 바사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 사람들 중에서 많은 숫자가 스스로 유다인이 되는 결정을 내렸던 것입니다. 요즘도 다른 나라의 국적을 얻으려면 꼭 갖추어야 할 조건들이 있지만, 그 당시에는 다른 나라사람이 되려면 그 민족이 섬기는 신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만 했습니다. 이 조건을 만족시키지 못하면 절대로 진짜 그 나라 사람이 될 수 없었습니다. 본토 사람들이 유다백성들이 되었다는 것은 그들이 유다백성들처럼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것도 자발적으로 말입니다. 유다 백성들은 전에는 바로 그 신앙 때문에 무시를 당했고, 그 신앙을 지키느라고 위험에 처해 졌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 신앙이 그들의 능력이 되고 장점이 되고 영광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가만히 앉아서 열방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을 보았고, 이방인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을 보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멸망을 당할 수 밖에 없었던 일촉즉발의 위기 덕분에 그들을 멸시하던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었다는 것 ! 세상에 이것보다 더 놀랍고 희안한 반전, 이것 보다 더 복되고 영광스러운 뒤집기가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는 지금까지 에스더서를 생각하는 내내 하나님이 뒤집기의 전문가라는 사실을 반복해서 살펴 보았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특히 오늘 그 사실을 집중적으로 반복해서 보여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런 하나님을 알고 또 진짜로 믿고 살게 되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떤 분들은 하나님이 역전의 명수시고 또 뒤집기의 전문가라는 사실을 오히려 불편해 하고 불안해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것이 우리 삶의 안정을 깨뜨리고 불안하게 만들 수 있으니까요.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성품을 알고 일하시는 방식을 알며 또 무엇보다도 우리가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하나님의 언약백성이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전혀 그런 것을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늘 본문을 다시 한 번 되돌아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정말 많은 것들을 정반대로 뒤집으셨습니다. 그런데 성도 여러분, 그렇게 뒤집으신 것들 중에서 더 악화되고 힘들어 졌거나, 좋지 않은 결과를 남긴 뒤집기가 있었습니까?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불리한 상황으로 뒤집힌 것이 있었습니까? 놀랍게도 하나도 없었습니다. 물론 이야기의 처음으로 가 보면 딱 한 번 그런 뒤집기가 기록되어 있기는 합니다. 비록 타국 땅이지만 그래도 잘 살고 있던 유다백성들이 하루 아침에 몰살당할 날만 기다려야 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물론 이것은 하나님께서 직접 그렇게 만드신 것은 아니지만 이것도 분명히 뒤집기는 뒤집기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 이것은 마지막 뒤집기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모든 것을 다 뒤집어 제 자리로 돌려 보내기 위한 하나님의 첫 수, 결정적인 ‘신의 한 수’였습니다. 기억하고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성도의 삶에서 상황이 좋지 않게 뒤집히는 것은 절대로 하나님의 마지막 수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두시는 첫 수이거나 아니면 중간 과정의 한 수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우리 인생에 아무런 어려움도 슬픔도 아픔도 없기를 바랍니다. 저도 여러분을 위해서 그렇게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현실적으로는 그런 일은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이미 이 세상에는 악한 사람들이 있고, 그 사람들 때문에 악이 더해지고 있습니다. 또 이미 그렇게 들어온 죄 때문에 이 세상은 자연마저도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 때문에 아픔과 슬픔, 고통은 우리 인생의 일부분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하고 변하지 않는 진리는 그것이 도덕적인 것이든 자연적인 것이든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모든 악들을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선한 목적을 이루어 가신다는 것입니다. 때로 하나님께서는 그 선한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서 악이 악으로 드러나고 악인이 스스로의 자신의 정체를 드러낼 때까지 세상을 그냥 내버려 두기도 하십니다. 그러나 그런 상황이 끝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순간이 하나님이 진짜로 움직이시고 그래서 모든 것을 뒤집어 올바르게 만드시기 시작하시는 순간일 때가 많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도가 사는 인생의 결론은 죽음이 아니라 영광입니다. 이 세상 역사의 결론은 멸망이 아니라 새 하늘과 새 땅, 하나님 나라입니다. 믿습니까? 이것을 믿는 우리는 모든 참된 성도들의 인생, 그리고 이 세상 모든 역사의 마지막은 가장 위대한 해피엔딩이 될 것을 충분히 믿고 기대할 수 있습니다. 분명히 그렇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설교를 마치기 전에 저는 다시 한 번 여러분과 함께 이사야서 61장에 나오는 하나님의 위대한 약속을 묵상하고 싶습니다. 이 아름다운 하나님의 약속을 꼭 여러분의 영혼에 새기고 붙드시기 바랍니다. 뒤집힌 것같은 세상 때문에, 그리고 거꾸로 돌아가고 있는 여러분의 인생 때문에 낙심 되실 때마다 꺼내서 읽고 또 읽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리고 여러분에게 주신 약속입니다. 모두 이사야서 61장을 펴 보시기 바랍니다. 구약성경 1024페이지 입니다. 소리를 맞춰서 1절부터 9절까지만 한 절씩 묵상하면서 교독하도록 하겠습니다.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이 의의 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 그들은 오래 황폐하였던 곳을 다시 쌓을 것이며 옛부터 무너진 곳을 다시 일으킬 것이며 황폐한 성읍 곧 대대로 무너져 있던 것들을 중수할 것이며 /  외인은 서서 너희 양 떼를 칠 것이요 이방 사람은 너희 농부와 포도원지기가 될 것이나 / 오직 너희는 여호와의 제사장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 사람들이 너희를 우리 하나님의 봉사자라 할 것이며 너희가 이방 나라들의 재물을 먹으며 그들의 영광을 얻어 자랑할 것이니라 / 너희가 수치 대신에 보상을 배나 얻으며 능욕 대신에 몫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할 것이라 그리하여 그들의 땅에서 갑절이나 얻고 영원한 기쁨이 있으리라 / 무릇 나 여호와는 정의를 사랑하며 불의의 강탈을 미워하여 성실히 그들에게 갚아 주고 그들과 영원한 언약을 맺을 것이라 / 그들의 자손을 뭇 나라 가운데에, 그들의 후손을 만민 가운데에 알리리니 무릇 이를 보는 자가 그들은 여호와께 복 받은 자손이라 인정하리라” 


혹시 이 말씀이 너무 은혜롭고 너무 좋기만 해서 별로 현실성이 없는 말씀처럼 들리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성도 여러분, 이 모든 약속들은 이미 에스더와 모르드개를 통해서 바라사는 이방인의 나라에서 거의 글자 그대로 성취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의 삶이라는 현실 속에서도 이렇게 하실 것을 충분히 믿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이 약속은 이제 과거의 어느 때보다도 더 확실하고 분명한 약속이 되었습니다. 이 약속을 온전히 이루실 우리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고 이제 다시 한 번 오실 그 일만 남겨 놓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어쩌면 지금은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 우리가 참 유대인들이라는 것, 그리고 하나님의 교회라는 것이 그다지 영광스럽지도 않고 대단하게 여겨지지 않으실지도 모릅니다. 사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우리의 신앙을 그다지 의미 없는 것으로, 그저 몇몇 안되는 사람들만 붙들고 있는 어리석은 것으로 생각하게 몰아가고 있고, 우리는 그런 풍토와 사고방식의 피해자가 되고 있으니까요. 그렇지만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은 분명히 다시 오십니다. 그렇게 다시 오셔서 어그러지고 비뚤어진 모든 것들을 뒤집어 모두 제 자리로 되돌려 보내실 것입니다. 그 때가 되면 우리 모두는 바사제국의 유다백성들처럼 사는 지금 여기서의 우리의 삶과 하나님을 믿는 우리의 신앙이 얼마나 자랑스럽고 영광스러운 것인지를 확실히 보게 될 것입니다. 그 때가 되면 우리들처럼 되고자 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보게 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 여러분의 눈에 보이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무엇이든 우리는 지금 당장 보고 경험하는 것들에 붙들려 있어서는 안됩니다. 그게 우리의 삶이건, 이 땅의 교회의 모습이나 아니면 여러분 눈에 보이는 우리 교회의 현재의 모습이라고 하더라도 그게 전부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전혀 믿음으로 바라보는 방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이것이 전부다, 이것이 끝이다라고 정할 수 있는 권한이 전혀 없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마음을 활짝 열고 소망하는 일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뒤집으시고 바로 잡으실 그 영광스러운 시간을 소망하며 기다리는 일, 그 일이 우리에게 맡겨진 우리의 일입니다. 여러분은 아십니까? 사실 지금도 하나님은 계속 사람들이 바둑판에 올려놓은 검은 돌들을 하얀 돌로 바꾸고 계십니다. 우리가 검게 칠해 놓은 곳을 하얀색으로 다시 칠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그리고 우리의 인생이 그래도 아직도 소망이 있고 살만하다고 여겨지는 것은 하나님께서 지금도 인간이 둔 악수를 뒤집고 계시고 우리들이 잘못 그린 그림을 고쳐주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항상 어그러지고 비뚤어진 것들을 뒤집으셔서 선하고 아름답게 바꿔가시는 하나님을 기대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그 소망으로 여러분 속에 있는 뿌리깊은 절망과 분노, 그리고 냉소적인 마음을 잘 다스리면서 여러분의 믿음을 잘 지키시기 바랍니다. 언제나 이 세상과 우리의 삶 속에서 뒤집으시고 바로 잡으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하심이 충만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