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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금요기도회

2015.01.23. 금요기도회 - 서로 심히 다투어 서로 갈라서니(사도행전 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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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사도행전 15장 30–41절




그게 무엇이든 어떤 것은 항상 그것 ‘다운 것’이 가장 바람직합니다. 개인이나 집단, 정부나 국회 등등…. 이 세상에 있는 좋은 것들, 그리고 좋은 역할을 하게 하기 위해서 만들어 지고 세워진 모든 것들은 그것이 가진 목적을 이루기에 합당한 모습을 지니고 있어야 합니다. 실제로 이 세상에 많은 아픔과 어려움이 있는 것은 바로 그런 ‘무엇 다움’에 대해서 아얘 관심이 없거나 아니면 그것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생겨난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모든 것이 그것 다워야 하지만, 그 중에서도 그 ‘다움’을 생명처럼 여기고 꼭 지켜내고 또 가꿔가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교회’입니다. 사람들은 ‘절은 절 다워야 한다’는 말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또 ‘성당은 성당다워야 한다’는 말도 쓰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유독 교회에 대해서는 ‘교회다워야 한다’고 말하며 그렇지 않았을 때는 굉장히 실망하고 비난하며 화를 냅니다. 이것은 단순히 절은 이미 절답기 때문에, 성당은 이미 충분히 성당답기 때문에 생겨나는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 ‘교회는 교회다워야 한다’는 기대가 있고 아직은 그 기대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에 생겨나는 일들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욕을 먹는 것보다 더 심각한 상황은 교회가 어떤 모습으로 서 있고, 또 얼마나 망가지든 사람들이 전혀 거기에 대해서 관심을 두지 않는 경우입니다. 이런 일이 벌어지면 이미 사람들은 교회의 교회다움에 대해서 기대를 걸지 않고 포기한 상태라는 뜻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상황이 이렇게 되기 전에 이 땅의 교회들이 정말 교회가 무엇인지를 깨닫고 제자리로 천천히라도 되돌아 오기를 소망하며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 땅의 교회들이 이렇게 교회다워지는 일, 자기 자리로 되돌아 가는 일은 성도들과 교회들이 성령충만을 회복하는데 그 열쇠가 있다고 믿습니다. 물론 지난 주 금요일에 말씀드렸던 것처럼 이 성령충만을 은사중심, 능력중심으로 이해하고 추구한다면 그런 것을 통해서는 교회는 교회답게 회복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 것을 주시든 그렇지 않든 그런 눈에 보이는 결과들은 하나님께 맡기고 성도들과 목회자들이 성령님의 생각을 헤아리고 성령님의 마음에 자신의 생각과 마음을 맞추어 가게 되는, 그러한  성령충만함이 교회의 참된 교회다움을 회복시켜줄 수 있을 것입니다. 예루살렘 초대교회는 그랬습니다. 그들에게는 물론 은사도 있었고 능력도 있었을 테지만, 성경은 예루살렘 교회의 그런 모습보다는 그 교회의 성령충만한 내면에서 흘러 나오는 성숙하고 인격적이며 아름다운 모습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저는 지난 금요일에는 말씀드리지 않았지만 사실 지난 본문에서 아주 충격적인 말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28절 맨 앞에 나오는 ‘성령과 우리는…’이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누군가가 혹은 어떤 교회 전체가 자신들이 어떤 문제에 대해서 내린 결론을 이야기 하면서 ‘성령과 우리는…’이라는 말로 시작하고 있다면 지금 이들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일까요? 지금부터 자신들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단순히 교회가 의논해서 결정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과정을 거치기는 했지만 그 과정에서 이들은 자기들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찾으려고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옳다고 하시는 것을 찾으려고 했고, 그래서 지금 이야기하는 것은 바로 성령님의 뜻과 일치한다는 뜻입니다. 지금부터 이야기하는 것은 자신들의 뜻이고 하지만 우선적으로는 성령님의 뜻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함께 신앙생활을 하고 또 함께 일을 하다가 보면 서로 이런 저런 의논이나 회의를 하게 됩니다. 그러다 보면 생각의 차이 때문에 이런 저런 의견충돌이 있게 마련이지요. 그런 것은 불완전한 우리가 피할 수 없는 일이고 더 나은 방법을 찾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일이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그럴 때, 항상 우리가 기억하고 또 전제로 삼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우리의 의견이 받아 들여지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지를 찾아내고 그렇게 찾아낸 의견을 중심으로 마음과 생각을 하나로 모으는 것과 거기에 자신을 복종시키기 위한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에게 ‘나 자신’이라는 것은 정말 떼어버리기 힘든 끈질긴 관심사입니다. 무슨 일을 하든 우리는 우선 자동적으로 우리 자신부터 생각하게 됩니다. 어떤 상황이든 이런 경우 과연 나에게 가장 편한 것은 무언인가, 나에게 가장 유리한 것은 무엇인가, 나에게 가장 많은 영광이 주어지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등등의 생각이 저절로 떠오릅니다. 이것은 이기적인 우리들, 죄인인 우리들의 어쩔 수 없는 모습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나’를 주장하고 나의 이익을 먼저 챙기는 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바로 그런 죄성을 다스리고 복종시키기 위해서 예수를 믿고 있는 것이니까요. 


‘성령과 우리는!’ 정말 정말 멋진 말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자유롭고 당당한 말이 아닐까 합니다. 우리가 교회 안에서 무언가를 선택하고 결정할 때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얼마나 기쁘고 아름답고 조화로울까요? 또 하나님은 얼마나 기뻐하시며 우리를 칭찬해 주실까요? 조금은 교만해 보이지만 그래도 언제나 이렇게 말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령님’이라는 이름은 꼭 직통계시를 받거나 뭔가 마음에 특별한 느낌이 들 때만 거론하는 분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우리가 우리 자신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선택하고 행동할 때, 내 유익이 아니라 교회의 유익과 다른 성도들의 유익을 위해서 섬기기로 결정했을 때, 그 때 불러드려야 하는 이름입니다. 성령님께서는 이런 의미에서라면 당신의 이름이 얼마든지 불려지고 또 불려져도 기뻐하실 것입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그런 결정을 내려서 그 결과를 이방인들의 교회에 전했을 때, 교회들은 다 기뻐했습니다. 예루살렘의 결정과 권면을 다 기쁘게 받아들였습니다. 그렇게 해서 유대인인 성도들과 이방인인 성도들은 서로의 입장 때문에 부딛히고 갈등할 필요가 없어졌고, 서로가 서로를 편안한 눈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교회들이 훨씬 더 화목해 졌고 또 든든해 졌을 것은 말할 필요도 없었겠지요. 그래서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에서 너무나 평안하게 안디옥의 성도들을 가르치며 돌볼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안디옥에서 성도들을 돌보던 어느 날 바울은 바나바에게 이제 이전에 복음을 전했던 다른 도시들을 순회하며 거기 사는 형제들을 돌아 보아야 하지 않겠느냐고 제안했고 바나바는 기꺼이 그렇게 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둘 사이에 그 여행에 마가 요한을 동행해야 할 것인가 말아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 때문에 커다란 갈등이 생겨났습니다. 바울은 극구 반대했습니다. 마가가 예전에 버가에서 바울과 바나바를 떠나 어떻게 보면 무단으로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38절에서 마가에 대해서 ‘함께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라고  말하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서 마가가 바나바와 바울의 첫번째 선교여행에 동행했다가 중간에 아마도 힘들었거나 아니면 그리 중요하지 않은 이유로 두 사람을 떠났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일에 있어서 그렇게 가볍게 행동한 마가와 동행할 수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이전에도 제 멋대로 하는 바람에 선교에 지장을 초래했었으니까요.


그런데,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가자고 고집했습니다. 그래서, 둘 사이에 심각한 다툼이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성향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특히 어떤 일을 생각할 때,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일중심’으로 바라보는 반면에 어떤 사람은 ‘사람중심’으로 생각합니다. 이것은 어느 정도는 타고 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이 알려주는 것들을 토대로 두 사람의 성향을 생각해 보면 바울은 일 중심적인 성향이 강하고 바나바는 사람중심적인 성향이 강한 것이 분명합니다. 바울은 하나님을 섬긴다는 생각으로 눈 앞에서 사람이 돌에 맞아 죽는 것을 보아도 전혀 미동도 보이지 않던 사람입니다. 나서서 복음을 믿는 사람들을 색출하려 나섰던 사람이고, 회심 후에는 정말 복음을 전하는 일에만 너무 집중한 나머지 오히려 복음 전도의 방해가 되기도 했던 인물입니다. 반면에 바나바는 아무도 믿어주지 않던 바울을 위해 자신의 명예와 평판을 다 걸었고 그래서 그를 복음 전도자로 세워주었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바울을 자기보다 앞에 세우고 자신은 슬쩍 뒤로 물러나기도 했던 그런 사람입니다. 


마가 요한의 일로 두 사람이 부딪힌 것은 바로 이러한 서로 반대편에 있는 두 사람의 성향이 부딪힌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이 마가 요한을 거절한 것은 단순히 이전에 자신들을 떠난 마가 요한을 괘씸하게 생각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이전에도 그랬기 때문에 이번에도 그런다면 복음전도와 교회들을 돌보는 일에 장애를 줄 수 있기 때문에 그렇게 반대했던 것입니다. 반면에 바나바가 마가 요한과의 동행을 고집했던 것은 단순히 그가 자기 조카였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마가는 지금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다시 한 번 복음 전도에 헌신하려고 두 사람과 동행을 결정했습니다. 그런데, 과거의 잘못 때문에 동행을 허락하지 않는다면 마가가 얼마나 실망하겠습니까? 아마도 복음전도자가 되려는 그의 소망은 거기서 좌절될지도 모를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먼저 생각한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가자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결국 이것이 바울과 바나바 두 사람 사이의 커다란 싸움으로 번졌다는 것입니다. 성경이 ‘심히 다투었다’고 말할 정도로 말이죠. 결과적으로 두 사람은 함께 갈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고 바울은 실라와 함께 수리아와 길리기아 지역으로 가서 교회를 돌보았고 바나바는 마가와 함께 자기 고향인 구브로로 갔습니다. 물론 이 일 때문에 두 사람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지장을 받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당대 최고의 이방인 선교사들이 서로 하나가 되지 못하고 갈라서는 안타깝고 바람직하지 못한 일이 일어나고 말았던 것입니다. 두 명의 가장 탁월한 하나님의 종들에게도 이런 실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바울과 바나바는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이 걸었던 길을 반대로 걸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은 여러 마음과 여러 의견으로 시작했다가 하나의 마음과 생각으로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바울과 바나바는 한 마음과 한 생각으로 시작했다가 둘로 갈라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이 그렇게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성령님의 뜻에 자신들의 뜻을 맞추려고 했기 때문이었다는 것은 우리가 이미 살펴 본 것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조심스럽게 바울과 바나바의 경우에는 그 반대였다고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마가 요한의 일은 두 사람과 직접 관계된 일이었으니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의 경우보다는 복잡하고 민감할 수 있었지만, 그래도 이런 결정을 내리고 이렇게 갈라선 것은 결코 바람직한 일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사도행전이 이렇게 대조되는 두 개의 이야기를 나란히 기록하고 있는 것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과 도전이기도 합니다. 우리들에게 너희들이라면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하겠느냐? 이 차이와 갈등을 어떻게 해결하겠느냐? 너는 지금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이런 저런 차이들을 어떻게 극복하고 있느냐? 고 묻는 질문과 도전들 말입니다. 바울과 바나바 이야기 속에 ‘성령님’이 등장하지 않으시는 것은 두 사람이 이 일을 그저 서로 의견을 내세우고 주장하는 일로 끝냈고, 그래서 그 일에 성령님께서 개입하실 여지가 없었다고 본다면 무리일까요? 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성경은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두 사람 모두가 만약 자기의 입장이나 성향이 아니라 성령님의 뜻을 먼저 생각하고, 그 일 뒤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이 일을 바라 보았다면 아마 이 일은 전혀 다른 결과를 내놓았을 것입니다.


두 사람이 상황이나 마가 요한만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눈으로 그 일을 바라 보았다면 자기 의견이 절대적이지 않다는 것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결국 자신들의 결정이 완벽하지 않아도 겸손히 하나님을 믿고 의지한다면 결국 하나님께서 그 모든 것들을 선하게 인도하실 것을 기대할 수 있었을 테니까요. 두 사람의 믿음이 그 누구보다도 강건했지만, 이 경우에 있어서 만큼은 두 사람 모두 다 그렇게 하지 못했던 것이고 그래서 두 사람이 그렇게 심하게 다투고 서로 갈라져 서로 다른 길을 가게 되는 정말 보기 좋지 않은 장면을 연출했던 것입니다. 이 일이 두 사람을 지켜보던 안디옥 교회의 성도들에게 좋은 영향을 끼쳤을 리는 만무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서로 옳다고 생각하는 방법을 택한 일이 과연 두 사람에게 기쁨을 주고 사역에 플러스가 되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공적으로나 혹은 사적으로나 서로 간의 의견이 다를 때,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으며 하나님의 뜻에 서로를 일치시켜 나가려는 노력이 없으면 결국 차이점은 심각한 갈등이 되고 교회에 크고 작은 금이 가게 하는 이유가 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는 내 유익과 내 의견을 주장하는 것, 그래서 그것을 관철시키는 것이 결코 잘 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성령님 안에서 자신의 성향을 다스리고 또 내려놓는 연습을 하는 곳입니다. 내 이익이 아니라 교회와 지체들의 유익을 먼저 챙겨주는 연습을 하는 곳입니다. 그렇게 여럿이 차이를 넘어서서 하나가 되어져 가는 곳, 그렇게 모두가 이기는 연습을 하고 모두가 이기는 것을 추구하는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때로 차이를 극복하지 못 해서 두 사람처럼 갈라설 수도 있습니다. 그게 좋은 것이 아니지만 그런 결정을 내려야만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태도를 끝까지 고집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면 악한 일에 악한 일을 하나 더 더하는 셈이 되니까요. 바울과 바나바는 다른 의견을 처리하는 좋지 않은 예가 무엇인지를 보여주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런 실수를 저질렀을 때, 어떻게 그것을 제 자리로 돌려놓아야 하는지를 보여주기도 합니다. 고린도 전서 9장 6절을 보면 바울은 바나바를 자신과 똑같이 수고하는 동역자로 소개하고 있고 골로새서 4장 10절을 보면 골로새 교회에 자기와 함께 있던 마가를 보내면서 그가 도착하면 그를 잘 영접해 달라고 특별히 부탁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이것은 세 사람이 나중에 완전히 화해하고 서로를 용납했다는 것을 알려 줍니다. 


우리는 다 완전하지 못합니다. 생각도 성품도, 성향이나 가치관도 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서로 언쟁을 벌일 수도 있고 서로 다툴 수도 있습니다. 심한 경우에는 일시적으로 결별을 선언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게 끝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서로 철천지 원수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자존심 때문에, 자만심 때문에 영원한 평행선이 되고, 영원히 미워하고 저주하는 그런 상태로 남아 있어서는 안됩니다. 그 모든 이유에도 불구하고 우리 모두는 주님 안에서 한 형제와 자매이고 또 한 몸의 지체이니까요. 


항상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을 중심으로 생각하고 성령님의 하나되게 하심을 생각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때로는 이런 저런 차이로 의견대립이 있고 일시적인 결별이 있더라도 또 다시 주님 안에서 하나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