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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주일오후

2015.01.25. 전교인 기도회 - 고소하시는 하나님(사사기 6)



20150125SE.mp3.zip





    본문 : 사사기 2장 1-5절





 우리는 우리가 믿는 하나님을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을 부를 때, 하나님은 할 수 없는 일이 없고, 모르는 것이 없는 분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전지전능하심이야 말로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는 하나님만이 가지시는 능력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믿는 하나님께서 이런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마음 든든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할 수 없는 일이 있으시다거나, 혹은 모르는 일이 있으시다면 우리는 그런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할 수 없을 것입니다. 만약에 내가 하나님이 모르는 곳에서 하나님이 하실 수 없는 일에 대해서 도움과 구원을 구한다면, 그 분은 우리에게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할 수 없을 만큼 어려운 일이나, 모르실 만큼 복잡하고 난해한 일은 없습니다. 모든 것이 그 분의 손 안에 있기 때문에 우리가 그 분을 그렇게 든든하게 신뢰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런 능력들이 우리를 지키고 보호해 주며, 우리를 돌보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도구가 될 때, 우리는 그 안에서 말할 수 없는 든든함과 평안함을 누리고 실제적인 능력을 얻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러한 능력, 특별히 전지하심이 우리의 삶을 지켜보시는 하나님의 눈이 될 때는, 오히려 우리는 긴장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하는 모든 일, 내가 걸어가는 모든 길, 내가 선택하는 모든 선택을 알고 계신다는 사실은 두려운 일이 될 수 밖에 없으니까요. 그런데, 사실은 그런 긴장, 그런 두려움이야 말로 우리의 신앙을 신앙되게 하는 원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미 살펴보았듯이 이스라엘의 정복전쟁은 총체적인 실패로 끝났습니다. 겉으로는 어느 정도 성공한 것처럼 보여도 하나님의 눈에는 완전한 실패였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 대한 신뢰의 부족때문이었습니다. 이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전지하시고 전능하시다는 것이 하나의 죽은 교리였을 뿐, 스스로의 삶에 적용할 수 있는 ‘사실’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 하나님을 진짜로 믿지는 못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 1절은 여호와의 사자가 길갈에서부터 보김으로 여행하였고, 거기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달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길갈은 여리고성 옆에 있는 곳으로 이스라엘에게 큰 의미가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곳은 예전에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와서 처음 도착한 곳이기도 하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로부터 애굽 종살이의 굴욕과 수치를 벗기신 곳이었습니다. 또 그 곳은 여호수아가 전쟁을 처음 시작한 곳이기도 했고, 사사기 1장의 정복전쟁도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사건 이후로 보김이라고 불리웠던 곳은 벧엘로 처음 야곱, 그러니까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곳인 동시에 정복전쟁에서 하나님과의 언약을 깨뜨린 반역의 장소이기도 했습니다. 여호와의 사자는 길갈에서부터 보김까지 여행하면서 이스라엘이 그 길을 따라가면서 행했던 불순종의 흔적들을 확인했던 것입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전한 메시지는 하나님께서 그런 불순종에 대해서 이스라엘을 고소하시고, 판결하시는 내용이었습니다. 보김에 도착하자 하나님의 사자는 마지막 메시지를 전합니다. “내가 너희로 애굽에서 나오게 하고 인도하여 너희 열조에게 맹세한 땅으로 이끌어 왔으며…”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과거에 이스라엘에게 해 주신 일들을 상기시키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요지는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베풀어 주신 일들이, 이스라엘의 경험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신뢰하게 하는 데에는 차고 넘칠 정도의 엄청난 경험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스라엘의 불신앙과 불순종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믿기에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보여주신 증거가 부족했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계속해서 주님은 주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언약을 상기시키십니다. “또 내가 너희에게 세운 언약을 영원히 어기지 아니하리니 너희는 이 땅 거민과 언약을 세우지 말며, 그들의 단을 헐라 하였거늘”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성품을 걸고 이스라엘과 하신 약속을 보증해 주셨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그들에게 그 땅의 거민들과 언약하지 말 것, 그리고 그들의 신을 완전히 몰아낼 것, 이 두 가지를 요구하셨습니다. 이스라엘도 그 요구를 받아들이고 전쟁에 임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이 전쟁을 수행해 나가면서 생각이 달라지고 마음이 변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그들에게 묻습니다. “너희가 내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였도다 그리함은 어찜이뇨?” 왜 하나님의 요구를 듣지 않았느냐고, 하나님과 약속을 왜 신실하게 지키지 않았느냐고 물으신 것입니다. 게다가 하나님은 분명히 미리 경고까지 하셨던 것을 다시 상기시키십니다. “내가 그들을 너희 앞에서 쫓아내지 아니하리니 그들이 너희 옆구리에 가시가 될 것이며, 그들의 신들이 너희에게 올무가 되리라 하였노라” 만약에 이스라엘 백성이 이방인들과 이방신들을 그 땅에서 쫓아내기를 싫어한다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소원대로 이방인들로 하여금 이스라엘을 계속 괴롭히도록 할 것이고, 그들의 신들은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진노를 몰고 오는 통로가 되게 할 것이라고 분명히 선언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은 그들이 가서는 안될 길로 들어섰고, 계속 그 길을 걸어갔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의 법정에 세워놓고 그들을 꼼짝 못하게 몰아 붙이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는 여전히 타락한 본성이 있습니다. 이 본성이란 본질적으로 하나님을 믿고 따르기 싫어하는 성향을 말하는데요. 바로 이 본성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줄타기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세속적인 것들과 영원하고 거룩한 것들 사이에서, 세상과 하늘나라 사이에서, 신앙과 불신앙 사이에서 줄타기 하는 일에 대해서 매력을 느끼고 그렇게 줄타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일에 대한 하나님의 직접적인 진노의 표시가 나타나지 않는 동안에는 그것을 증거삼아 “하나님께서 모르고 계신다. 이 일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일이다. 그래서 괜챦다.” 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오해이고 착각입니다. 줄타기 하는 것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일도, 하나님이 모르시는 일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로보트로 만드시지 않으셨고, 그렇게 대하시지도 않으십니다. 물론 양심을 통해서 우리에게 계속해서 말씀하시지만, 우리가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선택하도록 우리를 조작하지는 않으십니다. 어느 순간까지는 그저 계속해서 지켜보십니다. 우리가 걸어가는 길과 그 길에서 우리가 서는 장소, 그리고 우리가 결정하는 선택…… 그 모든 것을 묵묵히 지켜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어떤 결정을 내리고, 어떤 길을 갈 때, 우리가 하는 것이 다 하나님 보시기에 옳고 좋아서 놓아두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냥 두시는 시간들이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참고 기다리시는 시간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의 침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헤아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침묵 속에서 들려오는 하나님의 시계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불순종의 과정을 지켜보던 하나님은 드디어 움직이시기 시작하십니다. 이스라엘의 불순종이 한계를 넘어섰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사자를 보내셔셔 이스라엘의 불순종을 고소하고 하나님의 판결을 전달하십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절대로 일을 여기까지 가도록 놓아두어서는 안됩니다. 무엇이 옳은지, 무엇이 그른지 분명히 알면서 하나님의 눈치를 보며 줄타기를 해서는 안됩니다.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계속 그 길을 가서는 안됩니다. 우리로서는 하나님께서 최종적으로 움직이시는 시점을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움직이시면, 그 분의 최종판결이 내려지면 때로는 더 이상 그 일을 결과를 되돌릴 수가 없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판결을 듣고 이스라엘은 크게 울었습니다. 그리고는 그 곳의 지명을 ‘우는 자들’이라는 뜻의 보김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 제사를 하나님께서 받으셨을까요? 받지 않으셨을까요? 놀랍게도 받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판결을 무효로 하시거나 유예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그야 말로 이스라엘의 후회는 때늦은 후회였고, 그들의 울음은 듣는 이 없는 울음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하나님의 뜻을 시행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판결을 주의 깊게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그들을 너희 앞에서 쫓아내지 아니하리니 그들이 너희 옆구리에 가시가 될 것이며, 그들의 신들이 너희에게 올무가 되리라 하였노라”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크게 두 가지 모습으로 신앙생활 할 수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면서 신앙생활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은 항상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에 관심을 가집니다. 명백한 뜻은 물론이고, 드러나지 않는 뜻까지 하나님의 성품과 자신의 양심을 잘 살피면서 분별하고 그 뜻대로 따르려고 노력합니다. 이렇게 사는 것이 더 어려울 것 같지만, 훨씬 쉽고 평탄합니다. 신앙도 순탄하게 성장합니다. 깊이도 계속 깊어집니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게 되고, 하나님의 사랑도 더 많이 받습니다. 해보신 분들은 이게 얼마나 재미있는 일인지 잘 아실 것입니다. 일단 이렇게 하는 것이 몸에 익으면요. 신앙생활을 하는 일이 얼마나 행복하고 즐거운지 모릅니다. 


또 반대로 하나님의 뜻을 알면서도 순종하지 않고 요리 조리 될 수 있는 대로 피해다니면서 신앙생활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이유는 자기 고집 때문일수도 있고, 작은 유익 때문일수도 있고, 익숙해져 있는 것들을 떠나기 싫어서 일수도 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이렇게 적당한 수준에서 신앙생활 하는 것이 훨씬 더 편할 것 같지만, 실은 훨씬 더 괴롭고 힘이 듭니다.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영적인 분별력이 생기지 않고, 더 무뎌져 갑니다. 신앙은 자라지 않고 퇴보하며, 마음은 더욱 단단해져만 갑니다. 가장 두려운 것은 하나님의 정하신 때가 지나도록 깨닫고 돌이키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그냥 놓아두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께서 직접 움직이실 때, 하나님은 정말 무섭도록 정확한 방법을 통해서 움직이시고, 징계하십니다. 그가 그렇게 줄타기하면서 만들어 놓은 그 결과물이 결국 징계의 도구가 되게 하십니다. 제가 이렇게 말씀드리니 조금 놀라셨습니까? 믿어지지 않으십니까? 그러나 그것이 오늘 말씀이 보여주는 하나님에 대한 진실입니다. 


이스라엘은 여러가지 이유로 자신들의 임무를 완수하지 않았습니다. 그 땅 거민과 타협하여 언약을 맺었으며, 그들이 섬기던 신의 단을 다 허물지 않았습니다. 아마 원주민들과 함께 살아야 하니 굳이 그들이 섬기는 신상이나 그 신의 제단을 허물어서 필요없는 갈등을 만들 필요가 없다는 판단에서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오히려 이스라엘이 살려준 그 원주민들에게 힘을 주셔서, 결국 이스라엘을 심각하게 괴롭히는 옆구리의 가시가 되게 하셨습니다. 사사기의 역사는 바로 이 가시로 인해 괴로움을 당했던 이스라엘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또 처음부터 그럴 마음은 아니었겠지만, 결국 허물지 않고 내버려 두었던 신상은 그들에게 영적으로 커다란 유혹거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결국 그 유혹에 넘어가서 그 신들을 섬기게 되었고, 그것은 또 다른 하나님의 진노와 징계로 이어지는 무서운 형벌의 근원이 되었습니다. 


죄의 열매는 당장은 매우 달콤합니다. 우리의 타락한 본성의 입맛과 딱 맞아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죄악의 열매가 주는 달콤함은 우리 속 사람에게는 치명적인 독이 됩니다. 우리의 속 사람을 망가뜨리고, 양심을 무감각하게 마비시킵니니다. 그래서, 한 번 두 번, 그런 선택을 할 때마다 우리의 영적인 감각은 무뎌지고, 결국 하나님께서 움직이시는 그 순간까지 아무 생각없이 가던 길로 가게 합니다. 이것은 하나로 연결된 쇠사슬과도 같습니다. 처음 것만 취하고 나머지 것들과 상관 없이 살 수 있는 방법은 전혀 없습니다. 우리가 죄악된 선택을 할 때, 우리는 우리가 그 선택의 마지막 결과까지 함께 선택하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다루시는 방법입니다. 저지른 죄의 결과를 고스란히 돌려주어 그것을 감당하게 하심으로써 우리를 가르치시는 것이지요. 이스라엘은 약속의 땅에 들어갔습니다. 그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약속의 땅, 그 풍요의 땅을 우는 자들의 땅으로 바꾸었습니다. 통곡의 땅으로 바꾸었습니다. 이것은 예견된 것이었습니다. 분명히 그들은 경고를 받았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하나님의 요구와 경고를 무시했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완전하지는 않지만, 이미 약속의 땅에 들어와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 땅에 살아도 천국의 삶을 누리는 것이 허락된 사람들입니다.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나오게 하셔서 가나안 땅에 들여놓으셨듯이 여기까지는 모두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은혜로 하신 일입니다. 그러나, 약속의 땅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남아있게 하느냐, 아니면 보김과 같은 통곡의 땅이 되게 하느냐 하는 것은 전적으로 우리 자신에게 달려 있습니다. 때로 우리는 실수할 수도 있습니다. 원치 않는 죄를 지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계속 그 길을 가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지만 언제까지라도 참고만 계시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가만히 계신다고 해서, 하나님이 정해놓으신 한계를 넘어서는 안됩니다.  


따라 해 볼까요? “알아서 기는 성도가 평안한 성도다. 눈치보는 성도가 행복한 성도다.” 먼저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고 그 뜻을 존중하는 성도가 되어서 하나니의 전지하심과 전능하심이 나를 다루시는 하나님의 매가 되게 하지 마시고 나를 편들어 주시고 나에게 복이 되게 해 주시는 그런 은혜로운 삶을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