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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주일오후

2015.04.26. 주일오후 - 여호와 목전에 악을 행하여(사사기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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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 : 사사기 2장 11-15절

 


      지난 본문인 2장 10절을 보면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더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구절인 11절에서는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바알들을 섬기며...”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모르는 것은 거의 항상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지 못하는 일로 이어진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을 모르고,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들도 모르는 세대는 영적으로 타락할 수 밖에 없습니다. 물론 그들 중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그 은혜에 반응하여 올곧게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 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대개는 그 반대의 길로 가게 되어있습니다. 성경이 “힘써 여호와를 알라”고 하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확실할 수록 그 사람의 믿음도 확실하기 때문입니다. 


11절은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라는 말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성경은 이스라엘의 영적인 타락이 하나님의 눈 앞에서 이루어진 일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행하는 모든 일들이 하나님 앞에서 행해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게 선한 일이든 악한 일이든 말이지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목전에서 하나님의 눈 앞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행하는 모든 일들 또한 하나님이 보시는 앞에서 행하는 일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행하는 일들이 하나님 앞에서 악한 일이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항상 주님 앞에서 무엇이 선한지 하나님께서 무엇을 기뻐하실지 구별하고 분별하며 살아가려고 애써야 합니다. 


11절 뒤쪽을 보면,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한 일을 “바알들을 섬긴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12절로 넘어가면 이것을 구체적으로 “그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 곳 그 사방에 있는 백성의 신들을 좇아 그들에게 절한 것”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당시 가나안 땅에는 수많은 부족들이 여기 저기 흩어져 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부족들은 저마다 신을 섬기고 있었는데, 그들은 그 신들을 다 바알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 가나안 땅 안에는 수많은 바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알은 신의 이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남편’을 일컫는 말이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섬기는 바알을 자기 남편으로 섬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한 신을 섬긴다는 것은 그 신에 대해서, 아내가 남편에게 대해 정절을 지키듯이 신의와 충성을 지키며 사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떠나 하나님 대신 단지 한 바알을 섬긴 것이 아니라, ‘바알들’을 섬겼습니다. 이건 결혼관계로 말한다면, 한 여인이 동시에 여러 남자와 결혼을 하고, 여러 가정을 꾸리고 사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야 말로 여러 남편을 두고 동가식 서가숙한 것입니다. 이것은 영적으로 얼마나 더럽고 추한 모습입니까? 몸을 파는 여인이 결혼을 한다고 해도 이런 식으로 살지는 않을텐데, 그 당시 이스라엘은 영적으로 그런 자리까지 갔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언제나 하나님의 신부였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신부로 부르는 것은 그만큼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들과의 관계가 배타적인 관계라는 것을 알려주시기 위해서 입니다. 남편은 한 명이어야 하기 때문에, 다른 관계가 아니라 남편과 아내의 관계, 결혼관계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그 결혼관계를 깨뜨린 정도가 아니라 아예 수많은 남자들, 즉 자신을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다고 생각되는 모든 남자들을 남편으로 삼은 부정한 여인처럼 수많은 가나안의 바알들 중에서 자기에게 유리한 바알들을 모두 골라서 섬기는 그런 죄에 빠졌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면, 이스라엘이 “그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를 버렸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를 살펴보면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완전히 떠났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단지 하나님과 다른 신을 함께 섬겼습니다. 그런데도, 성경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버렸다”라고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왜 그렇게 말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은 다른 것으로 대체될 수 없는 것은 물론이고, 다른 것과 함께 더불어 섬길 수 있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하나님을 다른 신과 같이 섬기는 것, 그것은 하나님을 ‘버린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을 믿을 때 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신앙은 여러가지를 우선순위에 따라서 배열한 후, 하나님에게 50퍼센트, 그 다음에는 30퍼센트, 그 다음에는 10퍼센트…. 이런  식으로 관심과 사랑을 배분하여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하나님만을 참된 섬김의 대상으로 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리에 다른 것을 놓을 때뿐 아니라, 하나님과 다른 것을 같이 섬길 때, 우리는 둘 다 섬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우상숭배에 빠졌던 것은 비교의식 때문이었습니다. 광야에서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만으로 살 수 있었습니다. 그것으로 별 불편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가나안에 들어와 보니 모든 게 너무 달랐습니다. 이제는 자신과 하나님만이 아니라 주변의 나라들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잘 보니 그들에게는 자신들에게 없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풍부한 곡식과 군대였습니다. 이스라엘은 기가 죽고 불안해 졌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까 그들의 신은 자기들이 섬기는 하나님과 달랐습니다. 그들은 기후를 관장하는 농경신 바알과 전쟁과 풍요를 보장하는 이스다롯을 섬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밖에도 섬기면 득이 될 듯한 잡신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도 섬기면서 동시에 그 수많은 신들 중에서 바알과 이스다롯을 비롯한 작은 신들을 끌어들여 섬기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 우상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다른 신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습니다. 그러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우상들과 다른 신들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단지 인간 욕망의 표현이고, 그 욕망을 합리화하기 위해서 만들어 낸 것에 불과합니다. 왜 이 세상에 그렇게 신의 종류가 많겠습니까? 왜 바알이 필요하고 왜 이스다롯이 필요합니까? 왜 부처가 필요하고, 크리쉬나가 필요합니까? 그만큼 인간의 욕망이 다양하기 때문입니다. 그저 잘 살았으면 하고 만들어낸 신이 바알입니다. 또 성적으로 방종하고 싶으니까 그 아내인 아스다롯을 만들어 냈습니다. 전쟁이 자꾸 일어나니까 이스다롯에게 전쟁의 신의 지위를 주었습니다. 또 신에 의지하고 살기 보다는 신이 되고 싶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부처가 된 붓다를 신이 아닌 신으로 섬깁니다. 그게 불교입니다. 또 신이 되는 것을 허락해 주는 힌두교의 신 크리쉬나를 섬깁니다. 이렇게 세상에 존재하는 우상들을 보면, 그 각각이 인간이 가지고 있는 타락한 본성의 욕망들의 한 부분, 부분을 담당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그런 욕망들을 신이란 이름으로 합리화하는 것, 그것이 우상과 잡신들의 역할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러한 욕망들을 신으로 삼아 섬기기 시작할 때, 사탄은 그 틈새를 파고 들어와 그 사이에 기생하는 기생충이 되고, 결국 그래서 우상숭배는 인간 욕망의 숭배이며, 나아가서 사탄숭배가 되는 것입니다. 우상은 없습니다. 잡신들은 헛 것들입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사탄의 껍데기로 사용되기 때문에 우상숭배가 그렇게 위험한 것입니다. 

    

    지금도 돈이라고 이름 붙여진, 인맥과 권력이라고 이름 붙여진 현대의 우상들은 우리 주변을 둘러싸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뺀 다른 사람들은 다 그들 중 하나를 섬기고 있거나, 그들 모두를 자신의 남편으로 삼아 섬기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어느 정도는 우리들 보다는 그런 것들을 많이 소유하고 누리고 있는 듯이 보입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성공이라고 부르며, 그 반대는 실패라고 부릅니다. 문제는 우리가 사는 삶의 자리에는 이런 사고방식이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 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가운데서 영적으로 살아남아야 할 뿐만 아니라, 승리를 일구어 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가 가장 먼저 연습하고 배워야 할 것이 무엇이냐 하면, 나 자신을 내 주변과의 관계에서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볼 수 있는 능력입니다. 또 하나님을 믿고 인생을 걸고 모험해 볼 수 있는 용기입니다. 이스라엘이 실패한 것이 바로 이 부분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통해 자신을 본 것이 아니라, 주변의 족속들의 모습을 통해 자신을 보았습니다. 그리고는 곧 열등감과 비교의식에 빠졌고, 그래서 하루라도 빨리 그들과 같아질 수 있는 길을 택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어느 순간, 어느 환경 속에서라도 내가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며 존귀한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환경이 아니라, 주변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을 통해서, 그 분이 보시는 눈으로 우리 자신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을 열등감과 비교의식이라는 덫에서부터 빠져나오게 할 수 있습니다. “저들은 저걸 가지고 있는데, 저들은 저렇게 살고 있는데…”라고 생각하면 그 다음 따라오는 생각은 뻔합니다. “그런데, 나는…”이라는 생각에 빠져서 하나님 앞에서 사는 우리 자신의 삶에 대한 가치를 잊어버리게 됩니다. 그러면, 그 다음에는 그들이 섬기는 것을 나도 섬겨서 그들이 가지고 누리는 것을 나도 가지고 누리려고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더 많이, 더 크게”를 외치며 오늘의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기게 되는 것입니다.


    두번째로 우리가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기고자 하는 유혹을 이기려면 우리는 우리의 신앙을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신앙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바알과 아스다롯으로 대표되는 가나안의 잡신들을 섬기는 자리로 빠졌던 이유 중 하나가 그들이 가지고 있는 믿음의 모양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구체적으로 믿고 현실적으로 신뢰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대부분의 출애굽 3세대에 속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단순히 ‘들어서 아는 전도’였습니다. 천지를 지으시고, 무소부재 하시며, 전쟁에 능하신 신이고, 전지전능한 분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그것은 그저 하나님이 그렇다는 것이지 그 사실을 자신들의 구체적인 현실과 전혀 관계짓지 못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변의 잡신들이 풍년을 약속하고, 전쟁에서의 승리를 약속해 왔을 때, 이스라엘은 그렇게 쉽게 그들에게로 달려갔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꼭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과연 내가 알고 있는 하나님이 나의 현실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말입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의 주인이라는 사실이, 그 분이 나의 머리털까지 세고 계신다는 사실이, 그 분이 모든 생명의 근원이시며 부활의 주라는 사실이, 이 세상의 모든 주권이 그 분께 있다는 사실이, 그리고 하늘나라에서 나를 기다리고 계신다는 사실이 나의 생각과 마음에, 그리고 내가 살아가는 모습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까? 우리는 우리의 신앙을 현실적인 신앙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현실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신앙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신앙은 무엇을 믿느냐도 중요하지만, 그 믿음이 어디까지 가는 믿음이냐도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합니다. 그 신앙이 참 신앙, 살아있는 신앙이라면 꼭 삶의 구석 구석까지 파고들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지 않은 신앙은 현실에서 힘이 없는 믿음이 될 수 밖에 없고, 유혹과 고난에 대해 저항력이 없는 믿음이 되기 쉽습니다. 결국 하나님과 더불어 다른 우상들도 겸하여 섬기는 그런 신앙으로 남아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이렇게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믿음이 되게 하려면 우리는 우리가 믿는 것이 진짜인지를 확인해 보는 수 밖에 없습니다. 정말 그렇게 진리를 따라 살아보는 것을 통해서 말입니다. 내가 믿는 믿음의 내용을 붙들고, 세상의 편이 아니라 그 쪽 편에 서 보았습니다. 하나님 편에 서 보았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에 모험을 걸었는데도, 살아지고, 오히려 더 풍성하고, 더 큰 능력이 나타나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면, 그 다음부터 우리는 조금 오래 걸려도 꼭 이전에 갔던 그 길로 가려고 할 것입니다. 이런 경험이 한 번, 두 번 쌓여갈 때 우리의 신앙은 비로소 현실적인 신앙이 됩니다. 나의 현실적인 삶을 위해서라도 하나님 편에 서고 진리를 따라 살게 되는 그렇게 지극히 현실적인 믿음이 됩니다. 그런데 참 애석한 것은 자기 믿음을 거기까지 끌고 가시는 성도들이 생각보다 그렇게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믿는대로 살아가는 자리까지, 믿음대로 살아보는 자리까지 가야 하는데 그 앞에서 주저앉고 만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려면 우리는 정말 하나님만 섬겨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에게 하나님께서 하시는 가장 중요한 요구이며, 그것이 우리를 능력있게 하는 믿음이 됩니다. 우리는 아무리 강력한 바알과 아스다롯이라는 현실의 신이 달려들어 협박하고 유혹하여도 하나님만 섬길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우리는 세상의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눈을 통해 나를 보는 영적인 시각을 회복하고 지켜야 하며, 나의 믿음이 나를 하나님의 편에 세울만큼 현실적이고 효과있는 믿음이 되게 해야 합니다. 거기까지 우리의 믿음을 밀고 가야 합니다. 

      

      어떤 믿음이 좋은 믿음입니까? 어떤 믿음이 끝까지 가고, 어떤 믿음이 하나님 앞에서 범죄하지 않는 믿음으로 남습니까? 어떤 믿음이 하나님만 섬기는 믿음으로 지켜집니까? 그것은 현실적인 믿음입니다. 내가 가장 현실적이라고 생각하는 그 일에까지 힘이 되고 능력이 되며 막강한 영향을 미치는 그런 믿음이 그런 믿음이 됩니다. 우리 모두 날마다 그런 믿음으로 우리의 믿음을 데리고 가서 거기서 참 믿음의 참된 힘과 거룩하게 하는 능력을 경험하며 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