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현교회 설교,강의/주일예배

2015.05.03. 주일오전 - 그들은 소수이니(여호수아 11)



20150503SM (#1).mp3.zip





성경본문 : 여호수아 6장 22-25절




우리가 사는 이 시대를 일컬어 자기 PR의 시대라고 부릅니다. 그것은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최대한 자기를 드러내고 또 광고해야 살아갈 수 있는 그런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이 시대가 이런 별명을 얻은 지는 꽤 오래 되었지만 이런 경향은 사그라 드는 것이 아니라 점점 더 강해져 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겸손이나 겸양은 더 이상 환영받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겸손이란 약하고 무능한 사람들, 다른 사람들보다 장점이 부족한 사람들이 어쩔 수 없이 택하는 태도이지 선한 것도 아니고 가치있는 것도 아니라고 여겨지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생각할 때는 이렇게 생각하면서도 다른 사람들을 바라 볼 때는 자기 자랑이 많은 사람, 너무 자기를 드러내고 내세우는 사람은 정말 정말 싫어합니다. 참 이상하지요? 사람들의 생각대로 자기 PR이 꼭 필요하고, 자기 자랑이 선한 것이라면 다른 사람이 그렇게 할 때도 그걸 선하고 잘 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야 하는데 그렇지가 않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것은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그럴 듯한 이유를 가져다 붙여도 결국 자기 PR을 꼭 필요한 것으로 생각하고, 심지어는 선한 것으로까지 생각하는 생각의 밑바닥에는 인간의 ‘교만’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만이란 나를 높이려는 마음입니다. 정확하게는 나만 높이려는 마음이지요. 그러니 다른 사람은 자기 자랑을 해서는 안되고, 다른 사람이 자기를 드러내 그 사람이 높아질 때는 속이 편하지가 않은 것입니다. 


 사실 인간에게 교만은 마치 고칠 수 없는 만성질병과도 같습니다. 그래서, 완전하게 없앨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싸우고 애써도 그렇습니다. 왜냐하면 아담이 저지른 죄가 바로 교만이었고 그래서 그 때부터 모든 인간은 그 본성 속에 교만을 가지고 태어나는 그런 존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아담은 자신이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교만한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고 진짜로 하나님처럼 되려는 시도를 했습니다. 그 때부터 인간은 교만한 존재가 되었고 틈만 나면 스스로를 높여서 하나님처럼 되려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죄 중에서 교만을 가장 나쁜 죄로 보십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뭐라고 하든 성도는 교만과 싸우고 교만을 피하기 위해서 애써야  합니다. 교만을 미덕으로 여기는 세상의 사고방식을 따라가서는 안됩니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은 가나안에서의 첫번 전투인 여리고성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의 능력 덕분이었고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드린 온전한 믿음의 순종 덕분이었습니다. 그래서 사실 이스라엘이 승리를 위해서 직접 한 일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었지만 그 성을 거저 줍듯이 그렇게 쉽게 정복할 수 있었습니다. 이 일에 대한 소문은 순식간에 가나안 땅 전역으로 퍼져 나갔고, 이제 그 땅 원주민들 중에서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을 모르는 사람들은 없었습니다. 그 소문은 그 모든 사람들을 두려움과 절망에 빠지게 하기에 충분했습니다. 바로 이것 때문에 여호수와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기충천해졌습니다.  


 여리고성 다음에 정복해야 할 성은 아이성이었습니다. 여호수아는 아이성을 치기 전에 그리로 정탐꾼들을 보냈습니다. 치르게 될 전쟁의 규모나 파병 규모를 가늠하기 위해서 였지요. 돌아온 정탐꾼들은 이렇게 보고했습니다. “백성들이 다 올라갈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저 2,3천명만 보내면 될 것 같습니다. 그들은 수가 많지 않습니다. 괜히 병사들을 많이 보내서 수고롭게 하지 않아도 좋을 것 같습니다.” 보고를 들은 여호수아는 두번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저 정탐꾼들의 보고만 듣고 그대로 따릅니다. 이스라엘 병사들은 의기양양하게 아이성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예상 밖의 일이 벌어집니다. 이스라엘 군대가 아이성의 군대에게 밀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전사자가 늘어가자 당황한 이스라엘 군대는 후퇴하기 시작했습니다. 전사자는 이미 성문에서 36명에 달했습니다. 아이성의 군대는 도망치는 이스라엘의 병사들을 산 위에서 부터 산 아래까지 추격하며 일방적으로 공격했습니다. 아마도 이 때 전사자가 꽤 많이 나왔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게 해서 첫번째 아이성 전투는 이스라엘의 대패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이 일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는 깊은 낙심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이 일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더 당황하게 하고 낙심하게 한 이유는 그들의 입장에서는 일이 이렇게 된 이유를 전혀 파악할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미 1절을 통해서 그 이유를 알고 있지만 말입니다. 그 이유는 바로 아간이 하나님께 온전히 바쳐진 물건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결국 하나님 앞에서 이스라엘 전체의 죄가 되었고, 그것이 전쟁에서의 패배로 이어졌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패배는 그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인 셈이었던 것이지요. 그렇다면 이것이 이스라엘이 아이성 전투에서 패배한 이유의 전부일까요? 물론 성경은 그 이유 하나 밖에 이야기 해 주지 않는 것 같습니다. 적어도 겉으로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전쟁이 치러진 과정을 가만히 들여다 보면 이미 그 과정 속에 이스라엘이 전쟁에 패배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들이 도사리고 있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이성을 공격하기 전, 이스라엘 백성들과 여호수아는 사기충천해 있었습니다. 전쟁하기 전에 사기충천한 것은 전혀 나쁜 것이 아닙니다. 꼭 필요한 것입니다. 사기가 떨어져 있으면 훨씬 유리한 조건에서도 전쟁에 승리하기가 힘드니까요.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히려 이것 때문에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그것 때문에 자신들이 치러야 할 전쟁이 자신들의 숫자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께 달려 있는, 본질적으로는 영적인 성격의 전쟁이라는 사실을 잊었던 것입니다. 걸어서 요단강을 건너고, 그 다음 손하나 대지 않고 여리고성을 무너뜨린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정말 엄청난 경험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일 때문에 자신들이 가나안 전역에서 아주 유명한 사람들이 되었고, 모두가 두려워 하는 그런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신이 나고 흥분했을까요? 그런 일들은 그 동안 어찌보면 광야를 전전하면서 무지랭이 같은 인생을 살던 그들을 얼마나 부풀게 했을까요? 마치 그들은 하루 아침에 농사짓던 땅값이 올라서 졸부가 된 사람들과 비슷한 마음이 되었을 것입니다. 


사람의 불완전함은 자신이 부족하다고 여길 때도 부정적인 결과를 만들어 내지만, 그 반대의 상황에 있을 때에도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칩니다. 실패와 가난, 혹은 질병 같은 것들도 사람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주지만 성공과 부유함, 그리고 때로는 건강 또한 그런 역할을 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이 얼마나 어리석은가 하면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 이전에는 없던 것이 덧붙여 지면 그 모든 것이 자신의 크기라고 착각합니다. 없던 돈이 생기면 그 돈의 액수만큼 자신이 커지고 자기 능력이 커진 줄로 생각합니다. 좁은 집에서 큰 집으로 이사가면 그 집의 크기만큼 자신이 커진 걸로 생각합니다. 명예를 얻으면 그 명예만큼, 성공을 거두면 그 열매와 명성만큼 자기 자신의 크기와 능력이 커졌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이 그저 여기서 멈춘다면 그래도 괜찮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그 다음에는 반드시 이런 눈으로 자신과 주변의 모든 것들을 평가하기 시작합니다. 어떤 사람을 볼 때, 그 사람의 진짜 크기는 상관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이 가진 재산이나 사는 집, 학벌이나 지위, 성공의 정도만을 기준으로 그 사람을 평가하게 됩니다. 자신을 보듯이 남도 그렇게 보게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게 자신이든 남이든 제대로 볼 수 없게 만들어 버리고 맙니다. 자신에게 덧붙여진 것들 때문에 이미 한 껏 부풀려진 사람에게는 자기 자신만 크게 보일 뿐 다른 모든 것은 다 원래보다 작게 보이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람을 이렇게 만드는 것은 비단 세속적인 성공이나 혹은 부유함들 뿐만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심지어 너무 커다란 은혜를 경험하게 될 때도 이와 비슷한 상태가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잔뜩 부풀려져 있었습니다. 요단강을 건너고 여리고성을 무너뜨렸으니까요. 그런데, 사실 그 모든 것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능력과는 전혀 상관없이 벌어진 일이었습니다. 그저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일방적인 능력과 은혜로 주어진 선물이었죠.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 심지어 여호수아까지도 이 은혜가 너무 커서 자신에 대한 착각에 빠지기 시작했습니다. 그 은혜의 크기가 바로 자신들의 크기라고 생각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당연히 그들을 한 껏 부풀게 만들었고 그래서 아이성의 크기를 과소평가 하는 잘못을 저지르는 동시에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과대평가하게 만드는 일로 이어졌습니다. 돌아온 정탐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백성들을 다 올라가게 하지 말고 이삼천 명만 올라가서 아이성을 치게 하소서. 그들은 소수이니 모든 백성을 그리로 보내어 수고롭게 하지 마소서” 이 말만 보면 이 보고에 별다른 문제가 없어 보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뒤쪽으로 넘어가서 아이성이 등장하는 두 구절을 보면 이 보고가 완전히 틀린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선 8장 25절은 두번째 아이성 공격의 결과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날에 엎드러진 사람들은 남녀가 모두 만 이천 명이었더라” 남녀라고 하면 성인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인남녀만 만 이천 명이 사는 성이 작은 성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또 10장 2절을 보면 기브온이 이스라엘과 화친했다는 소식을 듣고 당시 예루살렘 왕이었던 아도니세덱이 그 일을 우려한 이유가 기록되어 있는데요. 거기서는 기브온을 왕도와 같이 큰 성이라고 소개해 놓고 아이성보다도 큰 성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아이성이 작은 성일리가 없습니다. 상당히 커다란 성이었기 때문에 기브온을 아이성과 비교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정탐꾼들은 아이성을 작은 성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저 이삼천 명만 올라가서 공격하면 충분히 정복하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보고가 말이 되는 보고입니까? 남녀만 만 이천 명이나 되는 성이, 큰 성인 기브온과 비교될만한 규모의 성이, 그것도 산 꼭데기에 자리잡고 있는 성이 이삼천 명이 공격한다고 쉽게 함락되겠습니까? 그렇다면 왜 정탐꾼들은 그런 첩보를 전한 것일까요? 그것은 잔뜩 부풀려져 풍성처럼 되어 버린 자신의 거만한 눈으로 아이성을 바라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신들은 너무 크고 대단하게 평가하고 아이성은 지나치게 과소평가하는 우를 범한 것입니다. 그런데, 더 애석한 것은 여호수아도 그런 상태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당시 여호수아라는 이름은 가나안 족속들에게는 마치 저승사자처럼 여겨지고 있었습니다. 이것 때문에 여호수아도 교만해 지게 되었고, 그래서 아이성을 그렇게 간단하게 차지할 수 있는 작은 성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눈 앞에 그렇게 큰 성을 놓고도 말이죠. 그러니 그렇게 잘못된 정보를 토대로 세워진 작전이 성공할리가 만무합니다. 결국 전쟁의 패배는 이미 정해져 있었던 것입니다. 


제가 이렇게 말씀드리면  그렇지만 어차피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싸우는 사람들이니 숫자는 전혀 문제가 될 수 없지 않겠느냐고 하실지도 모르겠는데요. 물론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그 싸움에 개입하셨다면, 하나님께서 싸우셨다면 그랬을 것입니다. 여리고 성에서처럼 한 사람도 다치거나 죽지 않고 전쟁은 승리로 끝났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애석하게도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이 아직 모르고 있는 아간 때문만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 심지어는 여호수아조차도 이 전쟁에서 하나님을 전혀 생각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첫번째 아이성 공격은 그저 인간적인 생각으로만 저질러진 실수였습니다. 우선 여호수아는 그저 아이성을 공격해야 하겠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정탐꾼들을 보냈습니다. 물론 절차상 그렇게 하기 전에 하나님께 물어야 했지만 그래도 여기까지는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아이성에 대한 첩보를 듣고 나서 부터는 적어도 그 때부터는 하나님께 물어야 했습니다. 다음에는 아이성을 공격하는 것이 맞느냐고, 공격해야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하나님께서 대답해 주실 때까지 묻는 것이 정상입니다. 하나님이 하라시는 대로 해서 요단을 건너고 여리고를 무너뜨렸으니까요. 그런데, 여호수아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정탐꾼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아무 생각 없이 따랐습니다. 사실 여호수아가 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면 정탐꾼들을 나무랐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전쟁인데 무슨 그런 인간적인 생각만 하느냐고 말입니다. 그런데, 여호수아는 그렇게 하기는 커녕 그저 정탐꾼들이 하자는 대로 따랐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언제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의 편을 들어주시고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하시는지를 여호수아가 여호와의 군대사령관을 만난 일을 통해서 배워 알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언제 하나님은 이들과 함께 하시지요? 언제 대신 싸우시고 승리를 선물로 주시지요?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자신들의 진짜 대장으로 인식하고 하나님을 의지할 때입니다. 자신들이 싸우는 전쟁은 단순한 전쟁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거기 순종하는데 본질이 있는 그런 싸움이라는 것을 잊지 않을 때입니다. 하나님의 함께 해주시고 이기게 해 주시는 것은 이런 조건을 달고 있는 약속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첫번째 아이성 공격에서는 이런 모습이 전혀 보이질 않습니다. 백성들은 자기 능력으로 이기려고 하고 있고, 여호수아는 스스로 이스라엘의 대장이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발에서 벗었던 신을 다시 신고서 다들 자기 힘만 믿고 싸우려 들었던 것입니다. 이런 상태에 있는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함께 하시고 여호수아와 함께 하실 수가 있을까요? 이미 하나님을 거부하고 다시 자신을 의지하는 상태로 되돌아가 있는데 말입니다. 


사람이 교만해 지면 눈부터 고장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은 너무 부풀려서 크게 보는 반면에 다른 사람들이나 이 세상은 너무나 얕잡아서 작게 보게 됩니다. 자신은 맹신하게 되고 다른 사람들은 다 무시하게 됩니다. 시간이 흐를 수록 점점 더 그렇게 됩니다. 우리가 가만히 지켜보면 교만한 사람들의 결정적인 실수와 실패는 바로 여기서 비롯됩니다. 자기가 하나님이 되니 항상 자기가 기준이 되고, 그래서 자기를 통제할 수 없게 됩니다. 잘못된 판단을 내리고 잘못된 방법을 사용하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 교만한 사람의 삶은 그 끝이 아름답지가 못합니다. 오히려 성공 때문에, 승리와 복 때문에 자기 삶을 무너뜨리게 됩니다. 사람들은 교만이 미덕이라고 생각하고 살아가지만 결국 그 교만이 자신의 삶을 망가뜨리게 된다는 사실을 모를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런데, 교만이 예수믿는 우리에게 진짜로 위험한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교만은 결국 하나님을 바라보는 눈을 멀게 만들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에게는 정말로 위험한 것이 됩니다. 사실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에게는 이것보다 위험한 일은 없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알아야 할 일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제대로 믿는 순간부터 우리는 하나님이 없으면 안되는 사람들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믿게 되는 그 순간부터 우리가 싸우고 또 이겨야할 싸움이 달라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 때부터 우리가 싸워서 이겨야 할 진짜 싸움은 현실의 싸움이나 생존경쟁이 아니라 영적인 싸움이 됩니다. 끝까지 믿음을 지켜야 합니다. 악한 유혹으로부터 자신을 지켜내야 합니다. 지킬 뿐 아니라 선으로 악을 이겨야 합니다. 또 세상이 아무리 악하고 험해도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고 정직한 삶을 살기 위해서 헌신해야 합니다. 온 세상이 욕심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며, 그 욕심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어도 우리는 욕심을 부리며, 그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살면 안됩니다. 탐심은 결국 우상숭배이니까요. 또 온 세상이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살아도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먼저 구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땅에서 살고 있지만 땅이 아니라 하늘을 준비하는 그런 삶을 사는 싸움을 싸워야 합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여러분, 우리 힘으로 이런 싸움을 계속해서 싸울 수 있고, 이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을까요? 안됩니다 우리 힘만으로는 절대로 안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순간부터 우리는 하나님이 없으면, 하나님의 함께하심과 도와주시는 은혜가 없으면 절대로 안되는 그런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만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 삶에서 몰아내는 역할을 합니다. 그러니 교만은 그저 죄일 뿐만 아니라 우리의 실제의 삶 속에서도 얼마나 악하고 또 악한 것입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도는 교만하면 안됩니다. 그러면 우리 존재는 참 유치해 집니다. 자기만 알고 자기가 최고인 줄 아는 그런 존재가 되어 버립니다. 그리고 그러면 하나님 앞에서는 영원한 패배자가 되고 맙니다. 스스로 하나님과 하나님의 은혜에서 떠나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교만해 지는 것을 막으려면 첫째로, 우리는 절대로 우리 자신의 크기를 부풀리는 것을 목적삼아 살아가는 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사실은 부풀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착각입니다. 풍선에 바람이 들어간다고 해서 그것이 원래 풍선의 크기는 아닌 것처럼 우리 자신의 크기나 가치는 그런 식으로 정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제대로 받아들이지 않아서 그렇지 저와 여러분은 더할 나위 없이 큰 사람들이고 또 더할 나위 없이 존귀한 존재들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사신 하나님의 자녀들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이것보다 영광스러운 사실은 없습니다. 이렇게 보잘 것 없어 보이고 불완전한 우리들이지만 이 속에 하나님의 형상이 숨쉬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것을 포기할 수가 없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우리를 대속하셨습니다. 여기에 이 세상에 있는 어떤 것을 덧붙인다고 한들 우리들이 더 커지고, 영광스러워질 수 있을까요? 더 값진 존재가 될 수 있을까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무엇을 덧붙인다고 더 가치있고 커지는 그런 하찮은 존재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비록 죄인이지만 그리스도 안에서는 너무 너무 귀한 존재들이 되기 때문에 하늘에 속한 것, 영원한 것을 바라보고 살 때만 더 영광스러워지고 더 큰 사람들이 될 수 있습니다. 


둘째는, 우리에게 무언가가 덧붙여 질 때, 우리는 그것이 우리가 아니라는 것을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돈이든, 명예든, 성공이든, 능력이나 명예나 사람들의 칭찬이든 그것은 단지 우리 옆에 잠시 놓여져 있는 것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참 좋은 것들을 많이 주십니다. 때로는 세상에서 성공하게도 해 주시고, 재산도 주시며, 좋은 자녀들과 훌륭한 배우자, 그리고 우리가 그토록 좋아하는 집도 주십니다. 그러나 그건 절대로 우리가 아닙니다. 그래서 그것이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어떤 사람이라는 것을 드러내 주는 증거가 될 수가 없습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가 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들입니다. 내가 좋은 선물을 받았다고 그것 때문에 내가 갑자기 훌륭해질 수 있겠습니까? 성도들 중에는 자꾸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선물이 아니라 보상으로 생각하시는 분들이 계시는데요. 그것은 전혀 복에 대한 성경적인 사고방식이 아닙니다. 모든 복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사랑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내가 잘 하고 공을 세워서 얻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복받기 위해서 예수믿는 것은 제대로 예수 믿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하나님은 상도 주시죠. 그러나, 그 상은 여기 이 땅 위에서 받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더 이상 우리가 받는 상 때문에 교만해 질 이유가 없어질 때, 저 하늘나라에서 얻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언가를 좋은 것을 주실 때마다 그것은 선물이지 상이 아니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 생각을 놓치면 안됩니다. 그것은 나를 향한 하나님의 칭찬과 격려가 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게 나의 크기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잊으면 안됩니다. 그런 바른 생각으로 우리의 불완전한 자아를 잘 컨트롤 해야 합니다. 그냥 내버려 두면 우리는 항상 선물을 상으로 착각하고 그래서 내가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아이성에서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패배는 이상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간의 범죄 때문에 생겨난 결과만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이전의 은혜와 승리 때문에 부풀려질 대로 부풀려진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의 교만 속에서 예견되고 있었던 당연한 결과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하나님께서 무엇을 주시든 항상 그 앞에서 더 겸손하십시다. 그것 때문에 나 자신을 높이지 말고 하나님을 높이며, 자격 없는 나에게 그런 은혜가 주어졌음에 더욱 더 감사하며, 하나님의 은혜에 더 많이 의지하십시다. 하는 일이 잘 될 수록, 내가 원하는 대로 될 때일수록 주님께 더 많이 아뢰며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하나님을 더 귀하게 여기십시다. 그 선물을 주시는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실 때, 그 선물 또한 계속 얻을 수 있고, 그래야 우리들 또한 제 자리를 지켜낼 수 있으니까요. 


내가 가진 것, 내가 누리는 것이 어떻게 변하든 항상 나의 나됨과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잊지 말고, 겸손과 은혜 가운데 우리에게 맡겨진 겸손의 싸움에서 승리하는 우리들, 그래서 항상 주님이 편들어 주시는 삶을 사는 우리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하나님, 나에게 덧붙여 주시는 것들이 하나님 앞에서 나 자신이 아님을 잊지 말게 하소서.
  2. 욕심을 동기로,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사는 삶을 내려놓게 하시고, 주님이 내 편을 들어주시는 겸손한 삶을 살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