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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주일예배

2015.05.10. 주일오전 - 너희 가운데 온전히 바친 물건이 있나니(여호수아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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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여호수아 7장 6-26절





지난 주일에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이성 전투에서 질 수 밖에 없었던, 아주 중요한 이유 한 가지를 살펴 보았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기억하고 계시지요? 그것은 바로 교만이었습니다. 요단강을 걸어서 건너고 여리고 성을 손 한 번 대지 않고서 무너뜨린 후, 자아가 잔뜩 부풀려진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모든 일들이 은혜로 주어진 선물이라는 것을 잊어버리게 되었고, 결국 그 런 교만 때문에 판단이 흐려지고 하나님의 도움을 스스로 저버리게 되어 전쟁에 지게 되었습니다. 참 안타깝게 여겨지는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백성들 중에 왜 단 한 사람도 여수아의 그런 결정에 대해서 브레이크를 걸지 않았고  장로들 중 한 사람도 여호수아가 그 전쟁을 그렇게 쉽게 생각했을 때, 그 전쟁의 승패는 온전히 하나님께 달려 있다는 것을 일깨워 주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랬었다면 아이성의 패배는 없었을텐데 당시에는 백성들 중에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에게 부탁드립니다. 한 교회 안에 이런 사람들이 하나도 없을 때, 교회는 반드시 넘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저는 여호수아는 아니지만 목회를 통해 우리 교회의 방향을 제시하고 또 그 방향으로 이끄는 일을 하는 여호수아와 같은 역할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제가 어떻게 하느냐 하는 것은 우리 교회 전체의 하나님 앞에서의 일어서고 넘어짐을 결정하는 아주 중요한 요소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저도 인간이기 때문에 때로는 판단 미스를 할 때가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저 눈에 보이는 상황이나 여건들만 보고서 교회를 위한 이런 저런 일들을 계획하고 여호수아와 같은 결정을 내릴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제가 그렇게 하는 것을 보시거든 그럴 때는 꼭 말해 주십시오. 목사님 그건 성경적이지 않은 것 같다고, 또 그건 하나님을 향한 믿음에서 나온 결정이 아닌 것 같다고 말입니다. 꼭 그렇게 브레이크를 걸어 주십시오. 그렇게 하셔서 적어도 제가 그 일에 대해서 다시 한 번 돌아보도록 저를 도와 주십시오. 그것이 저와의 관계 속에서 여러분이 교회를 지킬 수 있는 꼭 필요한 역할입니다. 저는 제가 공인인 것은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공적인 일로 저한테 뭐란다고 해서 그 사람을 미워하거나 마음에 앙심을 품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런 건 걱정마시고 꼭 그렇게 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저를 지켜 주시고, 또 여러분을 지키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아이성 전투를 패배로 끝나게 한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던 아간의 범죄를 살펴보려고 하는데요. 사실 아간 사건의 뒷처리에 대한 성경의 이야기는 요즘 우리들이 받아들이기에는 어려움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너무 지나친 것이었다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성경에 기록된 사건들을 보면서 때로는 부당하다고 생각하고, 때로는 지나치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은 죄를 바라보는 하나님의 기준과 오늘 우리들의 기준에 커다란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일단 큰 틀에서 보면 하나님이 사람들보다 죄를 훨씬 더 무겁고 심각한 것으로 생각하십니다. 죄는 그 모양이라도 버리라고 말씀하실 정도로 죄를 심각한 눈으로 바라보십니다. 반면에 우리들은 역사상 그 어떤 사람들보다 훨씬 더 죄를 가볍게 생각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 시대는 인간이 무언가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최고의 가치로 봅니다. 그래서 심지어는  내가 남자냐 여자냐 하는 자신의 성도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고, 자기 목숨을 버리는 일도 자기 권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이것은 죄다’라고 하는 정해진 생각이 희미해져 가고 있고 그래서, 내 선택이 다른 사람들에게 직접적인 피해를 주지만 않으면 그것은 절대로 죄가 될 수 없다고 확신하는 사람들이 늘어만 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들도 이 시대에 속해 있기 때문에 이런 사고방식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에서 죄 때문에 하나의 성읍이 몰살을 당하고 멸망하거나 오늘 본문처럼 사람이 형벌을 받아 목숨을 잃게 되는 이야기를 만나면, 그것을 이해하기 힘들어 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오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아간 사건은 우리들에게 많은 유익이 됩니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중요한 관점들을 배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선 7장 1절을 보겠습니다.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온전히 바친 물건으로 말미암아 범죄하였으니 이는 유다지파 세라의 증손 삽디의 손자 갈미의 아들 아간이 온전히 바친 물건을 가졌음이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진노하시니라” 이제 11절로 가보겠습니다. 여기도 함께 읽겠습니다. “이스라엘이 범죄하여 내가 그들에게 명령한 나의 언약을 어겼으며 또한 그들이 온전히 바친 물건을 가져가고 도둑질하며 속이고 그것을 그들의 물건들 가운데에 두었느니라”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완전히 불태워 버리라고 하신 것에 손을 댄 사람이 누구죠? 아간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서 아간이 그렇게 한 것을 알았던 사람이 있었나요? 없었습니다. 아마도 가족들 중에서는 나중에 알게된 사람들이 있었겠지만 다른 사람들은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그 일에 함께 동조하고 가담한 사람은 더더욱 있을 리가 없었겠지요. 그런데, 하나님은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계속해서 이스라엘이 범죄하였다고 하십니다. 도둑질을 하고 하나님께 온전히 바쳐진 것에 손을 댄 사람은 아간 한 사람인데,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온전히 바친 물건으로 말미암아 범죄하였다고, 이스라엘이 온전히 바쳐진 물건을 도둑질 했다고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진노하실 수 밖에 없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어찌보면 앞뒤가 맞지 않는 말씀 같습니다. 이스라엘이 범죄하였다고 하셨다가 아간이 그렇게 했다고 하셨다가를 반복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 죄를 바라보는 우리들과 하나님 사이의 근본적인 시각차이가 드러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지극히 개인적인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개인이 우주의 중심인 시대에 살고 있지요. 모든 선택이 ‘개인’하고만 연관되어 있고 그래서 거의 모든 사람들이 잘 하면 그 ‘개인’이 그 유익을 독차지 하고, 잘못하면 그 ‘개인’이 그 책임을 지면 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애석하게도 이런 사고방식은 성도들의 죄에 대한 생각에도 그대로 반영되고 있는데요. 이런 사고방식 때문에 오늘 성도들은 죄를 짓고 그 죄에 대해서 책임을 지는 일도 그저 개인적인 것이라고만 생각할 뿐 그것이 교회 공동체와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지 좀처럼 생각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왜 하나님께서 아간 개인의 죄를 너무나 당연하게 이스라엘 백성들 전체의 죄라고 말씀하고 계시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이스라엘 백성들은 또 그 말씀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란 나라는 그저 한 지역에 살던 사람들이 그 지역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생겨난 한 나라가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맺은 영원한 언약을 통해 생겨난 언약 공동체입니다. 그리고 그 언약 안에서는 이스라엘은 그저 아무 상관 없는 여러 사람이 모인 모임이 아니라 한 사람처럼 여겨지고 다뤄집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아간의 범죄는 곧 이스라엘 백성 전체의 죄였고, 그래서 아간 한 사람이 아니라 이스라엘에 속한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진노 아래로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그대로 인정했구요. 


요즘 성경을 볼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저에게 이런 메세지를 자주 자주 들려주십니다. ‘교회는 하나다. 내가 보기에는 네가 교회다. 그래서 나는 너를 통해 교회를 본다’고 말입니다. 사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저 역시 아직까지 주님의 교회와 제가 한 몸이라는 것이 몸으로 느껴질 정도로 사실이 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그런 깨달음을 주실 때마다 이렇게 개인화되고 파편화된 교회가 어떻게 다시 한 몸처럼 하나가 될 수 있을지, 그 일을 위해서 이렇게 부족한 내가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정말 무거운 고민을 하게 됩니다. 때로 너무 갈 길이 멀어 보여서 그냥 이런 건 무시하고서 목회하고 싶을 때가 많습니다. 그렇지만 교회가 하나가 아니면 교회는 더 이상 교회가 아니라는 분명한 하나님의 말씀이 있으니 그럴 수도 없는 일이지요. 그런 생각으로 목회를 하면 저는 더 이상 하나님의 교회를 섬기는 사람이 될 수 없으니까요. 하나님께서 아간 개인의 죄를 주저없이 이스라엘 백성들 전체의 죄라고 말씀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언약 안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저 한 몸을 이룬 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결코 개인이 아닙니다. 교회 안에서는 내가 교회이고, 그래서 주님은 나를 통해 교회를 보십니다. 우리가 좀 더 한 몸다움을 회복하고, 그러기 위해서 스스로 좀 더 조심스럽고 거룩한 삶을 살게 될 때,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나 개인을 통해서 우리 교회를 달리 보아 주실 것이고, 그 때 우리 교회에는 정말 놀라운 일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성도 개인의 죄는 교회의 죄이듯이 성도 개인의 아름다움과 온전함은 우리 교회의 아름다움이 될테니까요. 여러분, 우리 꼭 이런 신앙생활을 하십시다. 나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 교회를 더 아름답게 생각하시고 귀하게 여기시도록 꼭 그런 삶을 사십시다. 우리 모두가 다 이런 삶을 위해서 헌신하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여호수아 6장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무너진 여리고 성으로 들어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여호수아가 신신당부하며 말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너희는 온전히 바치고 그 바친 것 중에서 어떤 것이든지 취하여 너희가 이스라엘 진영으로 바치는 것이 되게 하여 고통을 당하게 되지 않도록 오직 너희는 그 바친 물건에 손을 대지 말라” 우리가 여기서 분명히 알 수 있는 원리 하나가 있습니다. 누군가 한 사람이라도 하나님께 온전히 바쳐진 것, 그래서 완전히 불태워 없애야 하는 것에 손을 대면 그것은 결국 이스라엘 전체를 그런 물건들과 똑같은 운명이 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원칙대로 한다면 아간 사건은 이스라엘 백성들 전체가 생명을 잃고 불태워지는 그런 일로 마무리 되어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간 사건을 그렇게 처리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저 아간의 직계가족들에게만 벌을 내리셨습니다. 그렇다면 이 형벌은 과한 것입니까, 가벼운 것입니까? 가벼운 것입니다. 너무 많이 감면된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우리는 절대로 이 일로 한 가족이 전부 벌을 받는 일을 과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혹시 그냥 모른 척 넘어가셔도 될 일이 아니었느냐고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감해 주시는 김에 아얘 면제해 주시면 안되었겠느냐고 말이죠. 그렇지만 그러면 안됩니다. 12절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잘못을 일깨워 주신 후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원수 앞에 능히 맞서지 못하고 그 앞에서 돌아섰나니 이는 그들도 온전히 바친 것이 됨이라 그 온전히 바친 물건을 너희 중에서 멸하지 아니하면 내가 다시는 너희와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이미 아이성의 패배로도 증명되었지만 죄가 처리되지 않은 채로 남아있으면 하나님은 절대로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하실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가나안 땅을 하나님의 백성들이 사는 하나님의 나라로 만들려는 계획, 그리고 그 일을 통해서 온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은 좌절되고 맙니다. 그러니, 아간의 범죄는 그냥 모르는 척 넘어갈 수는 없는 일이었습니다. 게다가 그냥 넘어가면 그게 전례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바쳐진 것에 손을 대는 일을 그다지 크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하나님께서는 죄가 절대로 죄인 한 사람만을 더럽히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결국 공동체 전체를 더럽히는 것이라는 사실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알려주셔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공동체의 최소단위가 직계가족이었고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 가족들을 그렇게 멸하실 수 밖에 없으셨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아간의 가족들이 아무 죄 없이 그저 아간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고 속단해서는 안됩니다. 죄는 이미 말씀드렸다시피 공동체에 관계된 일입니다. 공동체에 속한 한 사람이 죄를 지으면 그 죄는 전염병처럼 그 공동체 전체로 퍼져가 그 전체를 오염시킵니다. 그게 죄를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시각이고 그래서 하나님은 죄를 그렇게 심각하게 보시는 것입니다. 아간의 죄와 그 죄의 정신은 이미 그 가족들을 더럽혔다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판단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 가족 전체를 그런 식으로 벌 주실 수 밖에 없으셨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모든 과정을 지켜보고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나는 잘못이 전혀 없으니 상관 없다고 생각했을까요? 내가 저 꼴이 되지 않아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을까요? 그렇지 않았겠지요. 한 사람의 죄가 모두의 죄가 된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그들이 그런 생각을 품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제비를 뽑는 내내, 그리고 그 일을 통해 한 사람이 정해지고, 자신들의 손으로 그 가족에게 끔찍한 형벌을 내리는 역할을 하는 내내 그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먼저 하나님이란 절대로 속일 수 없는 분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온 백성 중에서 한 사람의 죄인을 정확하게 찾아내는 하나님을 직접 보았으니까요. 또 그들은 그것과 더불어 죄의 무서움을 깨닫게 되었고, 더불어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되었을 것입니다. 원칙대로라면 자신들도 아간이나 그 가족과 똑같은 운명이 되어야 마땅하다는 것, 그것은 누구보다도 이스라엘 백성들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었을 테니까요.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 실로암에 있던 커다란 망대가 무너져 열 여덟 명이 거기 깔려서 목숨을 잃은 일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두고 설왕설래 말이 많았죠. 사람들은 그 사람들이 거기서 목숨을 잃게 된 이유를 찾았고, 그래서 결국 그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죄가 많아서 그렇게 되었다는 그럴 듯한 설명을 찾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했구요. 그런데 주님은 그 일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 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다른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사람은 다른 어떤 사람이 커다란 불행을 당하면 그것을 안스러워 하고 동정하면서도 그 사람이 그런 일을 당하는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고 또 잘못이 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잘못된 씨를 심었으니 당연히 잘못된 열매가 열린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죠. 그런데, 문제는 이런 사고방식이 자신의 행복이나 평안의 이유를 찾는데도 사용된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불행과 고통의 이유가 그 사람이 저지른 죄에 있다고 생각한다면 지금 내가 누리고 있는 행복과 무사함은 내가 하나님 앞에서 그만큼 괜찮은 삶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으로 이어지게 마련이니까요. 그렇지만 이런 사고방식에는 커다란 구멍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구멍 때문에 그 생각은 틀린 생각이 되기 쉬울 뿐만 아니라 굉장히 교만한 생각이 될 수 있습니다. 그 구멍이란 바로 ‘하나님의 은혜’를 계산해 넣지 않기 때문에 생겨나는 구멍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런 불행을 당했는데, 내가 그런 불행을 당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내가 그 사람보다 더 거룩하고 의로운 삶을 살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또 내가 어떤 사람보다 많은 복을 누리고 있다고 해도 그것은 반드시 내가 하나님 앞에서 그 사람보다 더 멋진 삶을 살고 있기 때문에 주어진 상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 인생은 그렇게 간단하게 설명될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삶은 우리가 예측할 수 없고 헤아릴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흘러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자신의 삶에서 일어나는 일을 볼 때, 항상 자신의 인생이 하나님 은혜 안에서 이어져 가고 있다는 것을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타인의 고통이나 불행도 다른 눈으로 보게 되고, 자신의 행복이나 평안도 다른 눈으로 볼 수 있게 됩니다. 다른 사람들의 고통이나 불행을 함부로 그 사람의 죄 탓으로 돌리지 않게 되고 자신의 행복과 평안을 자신의 훌륭한 에 대한 상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게 됩니다. 다른 이들의 고통과 불행 속에서 자신의 죄악됨을 되돌아 보게 되고, 자신이 누리는 평안과 행복 속에서는 오래 참고 기다리시며 속히 벌주시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볼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결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오늘 말씀에서 배운, 죄를 바라보는 하나님의 눈을 우리 삶에 적용해 보면 우리는 항상 교회적으로든 아니면 개인적으로든 하나님 앞에서는 죄인이고 그래서 벌 받을 일 밖에 없는 그런 사람들이니까요. 그런데도, 우리는 벌을 받지 않고 있습니다. 여전히 우리 삶은 무사히, 아무 일 없이 흘러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때로 우리 삶에 하나님의 징계나 혹은 벌처럼 여겨지는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게 우리에게 과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에게 특별한 복이 주어지지 않는다고 해서 우리 하나님을 인색하신 분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성도 여러분, 하나님 보시기에는 내가 교회이고 교회가 나입니다. 하나의 언약 안에서 우리는 모두 한 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주의하고 조심해야 합니다. 내 믿음의 모습에 주의해야 하고 내 삶에 대해 조심스러워 해야 합니다. 그 안에 불순물이나 악한 것들이 끼어들지 못하게 말이지요. 그렇지만 그래도 우리는 온전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항상 부족하고 항상 불완전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은혜에 의지해서 살아야 합니다. 무난하게 흘러가는 우리의 삶 자체가 은혜의 선물이라는 것을 기억하면서 그 은혜에 감격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은혜의 은혜됨을 잃어버리지 않고 거룩하고 겸손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항상 나의 교회됨, 교회의 나됨을 잊지 말고 용서해 주시고 오래 참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거룩한 삶을 사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포기하지 않고 이 길을 갈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를 참 하나님의 백성으로 여기시며 더 크고 풍성한 은혜를 부어 주실 것입니다. 우리 교회와 우리 성도들 한 사람 한 사람 위에 이 겸손과 은혜가 충만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