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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주일예배

2015.05.17. 주일오전 - 너희 가운데 온전히 바친 물건이 있나니2(여호수아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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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여호수아 7장 6-26절(16-26절까지 읽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쓰라린 패배를 가져다 준 아이성 전투가 있기 전,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리고성을 정복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여리고성을 이스라엘에게 주시면서 분명하게 명령하신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여리고성을 ‘하나님께 온전히 바친 것’이 되게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은 ‘헤렘’이라는 히브리어를 번역한 것인데요. 원래 ‘헤렘’이라는 말은 하나님께 한 번 드렸기 때문에 절대로 다시 무를 수 없는 헌물이나 제물을 뜻합니다. 그런데, 이 말이 전쟁과 관련해서 사용되면 한 성 안의 모든 것들이나 혹은 대부분을 죽이고 불태우고 무너뜨려 버려야 한다는 뜻으로 쓰이는 말이 됩니다. 아마 여러분도 구약성경을 읽을 때, ‘진멸’이라는 무시무시한 단어를 읽으신 적이 있으실텐데요. 사실 그 진멸이라는 말도 이 ‘헤렘’이라는 말을 문맥에 맞게 번역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여리고성을 진멸함으로써 그 성이 하나님께 온전히 드려진 것이 되게 하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조금은 이상하게 여기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진멸되는 것은 다 없어지고 사라지는 것인데 어떻게 그것이 하나님께 온전히 드려진 것이 될 수 있는가 하고 말입니다. 그건 이렇게 이해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모든 것은 죄를 지니고 있거나 죄로 더럽혀진 상태에서는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수가 없습니다. 죄가 처리된 이후라야 하나님께서 받으실 수 있지요. 그런데, 여리고성 사람들은 그 죄가 너무 크고 깊어서, 그리고 그런 죄를 고집하는 고집이 너무 완고해서 용서와 속죄라는 방법을 통해서는 도저히 죄를 처리하실 수가 없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을 모두 진멸하실 수 밖에 없으셨던 것입니다. 여리고성은 그렇게 진멸을 당하는 일을 통해서, 그 이후에야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한 그런 것이 되었던 것입니다. 


원칙적으로만 본다면 여리고성 안의 모든 것은 다 파괴되고 불태워져야 했고, 거기 사는 사람들은 예외 없이 다 목숨을 잃어야 했습니다. 그래야만 여리고성이 하나님께 온전히 드려진 것이 될 수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그 원칙에서 제외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바로 여리고 성의 성전기생이었던 라합과 그의 가족들이었습니다. 여리고성의 성벽이 무너지고 나서 그리로 치고 들어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여호수아는 두 가지를 신신당부합니다. 하나는 여리고 성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완전히 진멸하여 하나님께 온전히 드려진 것이 되게 하라는 것이었고 나머지 하나는 그렇지만 기생 라합과 그와 함께 사는 모든 사람들게는 절대로 손을 대면 안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첫번째 당부는 다른 사람들은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아간에 의해서 깨져 버렸지만, 두번째 당부는 그대로 지켜 졌습니다. 22절 이하를 보면 그 일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호수아가 그 땅을 정탐한 두 사람에게 이르되 그 기생의 집에 들어가서 너희가 그 여인에게 맹세한 대로 그와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이끌어 내라 하매 정탐한 젊은이들이 들어가서 라합과 그의 부모와 그의 형제와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이끌어 내고 또 그의 친족도 다 이끌어내어 그들을 이스라엘 진영 밖에 두고 ... 여호수아가 기생 라합과 그의 아버지의 가족과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살렸으므로 그가 오늘까지 이스라엘 중에 거주하였으니 이는 여호수아가 여리고를 정탐하려고 보낸 사자들을 숨겼음이었더라” 


원칙적으로 본다면 이런 일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되면 여리고 성은 하나님께 온전히 바쳐진 것이 될 수 없으니까요. 그런데, 라합은 물론이고 그의 가족과 친척들 그리고, 그 가족의 소유였던 가축이나 재산 등 모든 것들을 안전했습니다. 이런 이례적인 일이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은 비록 모든 것을 진멸하라고 명령하시는 그 순간에도 하나님의 자비의 문은 어떤 사람들을 향해서는 활짝 열려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구원과 은혜의 문은 그 문으로 들어오기를 거절하는 사람이 아니면 누구나 들어갈 수 있도록 항상 열려져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믿음생활을 할 때, 꼭 기억해야 할 진리입니다. 하나님은 참 성도들을 향해서 열려진 구원과 은혜의 문을 닫으시는 법이 없으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두려움이나 불안함 없이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온 세상이 무너져도 이 문이 닫히는 법은 없으니 그런 염려는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한 가지 더 생각하고 기억해 놓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 일로 인해 라합 뿐만이 아니라 라합의 가족과 친척들도 모두 살게 되었고, 심지어는 그에게 속한 모든 짐승들과 재물들까지도 무사히 지켜질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 앞에서 한 사람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라합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하나님 앞에서 한 사람의 태도와 결단이 얼마나 귀하고 풍성한 열매가 될 수 있는지를 깨닫게 해 줍니다. 성도 여러분, 내 믿음은 단지 내 믿음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나의 모습은 단지 하나님께서 나에게 베풀어 주실 하나님의 은혜만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한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바로 서기로 결단을 내리고 그 길을 갈 때, 그 일로 인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유익을 얻고 또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게 될 지 모릅니다. 하나님 앞에서 변함 없이 믿음을 지키며 살아가려는 마음이 흔들릴 때마다 이 두 가지를 항상 다시 떠올리시기 바랍니다. 첫째, 하나님은 절대로 신실한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해 은혜와 구원의 문을 닫지 않으십니다. 둘째, 내 믿음은 내가 맺는 나의 열매이기도 하지만, 또 하나의 씨앗이기도 합니다. 내 가족을 위해, 그리고 이 세상을 위해서 심겨지는 믿음과 은혜의 씨앗입니다. 때가 되면 분명히 그 열매로 많은 사람이 배부르게 될 것입니다. 


반면에 아간은 어떻습니까? 그는 라합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선택을 했습니다. 라합은 있는 그대로 본다면 여리고성 사람들 중에서도 가장 큰 죄인이고 가장 천한 사람이었습니다. 조건으로만 보면 진멸 일순위인 그런 사람이었지요. 그런데도 그렇게 크고 특별한 은혜를 얻었습니다. 자기 뿐만 아니라 온 가족과 소유가 건짐을 받게 되는 그런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런데 아간의 경우는 완전히 반대였습니다. 그는 사실 이스라엘 지파 중 가장 큰 지파인 유다지파에 속해 있었고 본문에도 4대 위 할아버지까지의 족보가 소개되고 있을 정도로 정도로 영향력 있는 집안 출신의 정통 이스라엘 사람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가 결국 어떤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까? 15절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 온전히 바쳐진 것에 손을 댄 사람이 찾아내거든 이렇게 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온전히 바쳐진 물건을 가진 자로 뽑힌 자를 불사르되 그와 그의 모든 소유를 그리하라.” 그 당시 소유라는 말은 그가 가장으로 있는 집안 식구들까지를 포함하는 말이었기 때문에 결국 이 말씀은 그의 소유물 뿐만 아니라 직계가족 전체가 불살라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24절 이하는 아간 사건의 결말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모든 사람과 더불어 세라의 아들 아간을 붙잡고 그 은과 그 외투와 그 금덩이와 그의 아들들과 그의 딸들과 그의 소들과 그의 나귀들과 그의 양들과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이끌고 아골 골짜기로 가서 ... 온 이스라엘이 그를 돌로 치고 물건들도 돌로 치고 불사르고 그 위에 돌무더기를 크게 쌓았더니...” 정말 참담한 비극입니다. 아간은 물론이고 그의 가족 전체가 목숨을 잃었습니다. 또 이스라엘은 백성들은 바로 직전까지 자신의 형제요 이웃이었던 아간가족을 돌로 쳐서 죽여야 했습니다. 


그런데, 아간과 그의 가족들이 이런 안타까운 일의 주인공이 된 것,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런 아픔을 경험해야 했던 것은 아간이 ‘하나님께 온전히 바쳐진 것’에 손을 댔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르면 하나님께 온전히 바쳐진 것에 손을 대면 자신이 하나님께 온전히 바쳐진 것과 똑같은 상태가 되고, 그래서 그 또한 진멸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께서 ‘하나님께 온전히 드려진 것’, 그래서 ‘하나님께만 속한 것’에 손을 대는 것을 얼마나 큰 죄로 생각하시는 지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하나님의 물건을 훔쳤기 때문에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것에 손을 대지 말라고 하신 데에는 다 이유가 있습니다. 제가 성경을 보니 하나님께 온전히 바쳐질 수 있는 것, 그래서 하나님께만 속할 수 있는 것이 두 가지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레위기에 나오는 것처럼 어떤 사람이 헌신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드린 제물이나 물건, 그래서 온전히 거룩해진 것이고 나머지 하나는 죄로 너무 심하게 더럽혀진 것이었습니다. 하나는 너무 거룩한 것이기 때문에, 그리고 또 하나는 너무 심하게 죄로 오염되었기 때문에 손을 대면 안됩니다. 너무 거룩한 것에 손을 대면 그 거룩한 것이 더럽혀지기 때문에 벌을 받습니다. 또 죄로 너무 심하게 오염된 것에 손을 대면 그것 때문에 손을 댄 사람이 죄로 더럽혀지기 때문에 벌을 받습니다. 이것이 ‘여호와께 온전히 바쳐진 것’에는 손을 대면 안되는 이유입니다. 


사람은 이 쪽에서 보나 저 쪽에서 보나 다 완전하지 않습니다.  완전히 거룩하지도 않고, 완전히 더럽지도 않지요. 그래서, 사람은 항상 이 쪽 저 쪽에 영향을 받고 또 영향을 줍니다. 거룩한 것을 만지면 그것을 더럽힙니다. 그리고, 반대로 부정한 것을 만지면 그것 때문에 스스로 더럽혀 집니다. 사람이란 마치 적당히 더러워진 손과도 같습니다. 그래서 흰색을 만지면 그것을 더럽히게 되고 검은 색을 만지면 그것 때문에 더러워집니다. 우리는 무언가에 손을 대고 취하려고 할 때, 우리가 이런 사람들이라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거룩한 것, 그래서 하나님께만 온전히 속한 것에 손을 대면 안되는 것은 물론이고 죄로 더럽혀진 것에도 함부로 손을 대면 안됩니다. 그러면 거룩한 것을 더럽히고 더러운 것 때문에 자신이 더러워 집니다.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거룩한 것과 속된 것, 그리고 죄된 것과 그렇지 않은 것 사이의 경계가 점점 더 흐려져 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도들 조차도 하나님 앞에서 무엇에는 손을 대도 좋지만 어떤 것에는 손을 대면 안되는지 그것을 헤깔려 하고 있습니다. 제가 목사이다 보니 제가 사용하는 페이스북이라는 SNS에서 읽게되는 글들이 대부분 예수 믿는 사람들이 올린 글들인데요. 저는 그 글들을 읽을 때, 때로 정말 마음이 답답해 질 때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저마다 신앙적으로 옳다고 생각하며 올리는 글들 속에 손을 대도 좋은 것과 그렇지 않은 것 사이의 바른 분별이 보이지 않습니다. 어디까지가 자기 영역이고 어디서 부터는 하나님의 영역인지, 또 어디까지는 허용될 수 있고 어디서 부터는 넘어서면 안되는지 그 경계를 지켜내지 못하고 있고 심지어는 그 경계가 필요하다는 것 조차 모릅니다. 그러나, 죄라는 것은 본디 금지된 선을 넘어가는 것입니다. 너무 거룩하거나 너무 더럽거나 해서 사람이 손을 댈 수 없는 어떤 것에 손을 대는 것이 죄입니다. 그래서 선이 모호하다면, 그리고 그 선이 필요 없고 그 선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한다면 바로 그 생각 때문에 우리는 자기 삶 속에 죄를 끌어들일 수 밖에 없습니다. 때로는 자기도 모르게 말이지요. 


여러분도 보셔서 아시겠지만 저는 아주 율법적인 사람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 교단의 기준을 보면 굉장히 자유분방한 축에 속하는 사람이지요. 그렇지만 저는 성도들에게는 성도이기 때문에 꼭 지켜야 할 것들이 있고, 또 그것만큼은 꼭 지켜야 한다고 믿습니다. 제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들이 여러가지가 있지만 그 중의 하나가 바로 ‘주일을 지키는 일’입니다. 오늘날 주일은 엄밀하게 구약성경의 안식일은 아니지만, 오히려 안식일의 본래 의미를 회복한 진짜 안식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옛 성도들이 안식일을 지켜야 했다면 오늘 성도들은 주일을 지켜야 합니다. 그것도 형식적으로가 아니라 참되게 말입니다. 성경에서 안식일에 대한 이야기가 처음으로 나오는 곳은 창세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6일 동안 천지와 만물을 지으신 후 7일째 되는 날에는 안식셨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그 날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2장 3절입니다.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 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일곱 째 날을 복되게 하시고 거룩하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안식일의 진짜 의미인 셈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나중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십계명을 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의 안식일인 즉,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그런데, 한 번은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서 안식일에 함부로 이 말씀을 어기고 나무를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백성들은 그 사람을 붙잡아서 모세에게로 데리고 왔지요. 그 때 하나님께서는 그 일에 대해서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사람을 반드시 죽일지니 온 회중이 진영 밖에서 돌로 그를 칠지니라” 정말 무시무시하지요? 그런데, 이 일의 결말은 오늘 본문의 결말과 완전히 똑같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왜 그럴까요? 왜 전혀 달라 보이는 이 두 사건은 이렇게 결말이 같은 것일까요? 그것은 아간이나 이 사람이나 저지른 죄의 본질에 있어서는 차이가 없기 때문입니다. 둘 다 온전히 하나님께 속한 것에 손을 댔기 때문에 그에 따른 결말도 같을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물론 율법에 기록되어 있는 방법대로 주일을 지킬 필요는 없습니다. 이미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께서 안식일을 참 안식일 되게 회복하셨으니까요. 그러나 말씀드린대로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한 주의 하루, 주일을 참 안식일로 지켜야 한다는 사실 자체가 변하지는 않습니다. 그 때나 지금이나 사람은 하나님의 피조물이고, 하나님께서 그런 우리에게 주신 삶의 원리, 그러니까 엿새 동안에는 열심히 자기 일을 하지만 나머지 하루는 자신을 위한 일을 그치고 하나님을 깊이 생각하며 예배드리는 날, 그렇게 하나님 백성의 자리로 되돌아 가는 날로 보내야 한다는 원리에는 변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선 이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는 거룩한 날, 온전히 하나님께 속한 하나님의 것을 더럽히게 됩니다. 그렇지만 그게 전부가 아닙니다. 이 날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면 우리 삶도 함께 더럽혀지고 온전한 자리를 이탈하게 됩니다. 우리가 아간의 일로 되돌아가 보면요. 아간은 자신이 그런 일을 저지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21절입니다.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내가 노략한 물건 중에 시날 산의 아름다운 외투 한 벌과 은 이백 세겔과 그 무게가 오십 세겔되는 금덩이 하나를 보고 탐내어 가졌나이다” 아간은 자신이 왜 그 물건들에 손을 댔다고 말하고 있지요? 그 물건들을 보고 탐이 났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 유혹을 이기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의 것이 아닌 것, 하나님께만 속할 수 있는 것에 손을 댔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죄의 본질입니다. 세상에 수많은 종류의 죄가 있지만 그 모든 죄는 내 것 아닌 것, 나에게 허락되지 않은 것을 보고 탐이 나서 그것을 취하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일’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일’을 통해서 자기 삶의 필요를 채워가고 있습니다. 우리 삶의 필요들은 우리가 하는 일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참 감사한 일이지요. 그런데 사람은 누구나 이 과정에서 피할 수 없는 유혹을 당합니다. 그 유혹이란 더 많은 소유에 대한 유혹입니다. 우리는 몸을 가지고 있습니다. 몸이 있다는 것은 그 몸이 유지되고 그 몸을 가지고 살아가는 일에는 또다른 물질들이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아무런 공급 없이 스스로를 채울 수 있는 몸은 없으니까요. 그런데, 몸은 그렇게 외부에서 자기에게 주어지는 것을 통해 자신의 필요가 공급되는 것을 경험하면서 그것이 많으면 많을수록 자기가 안전하고 또 든든할 수 있다는 생각에 빠지게 됩니다. 그리고, 그런 생각에 빠지게 되면 사람은 결국 눈에 보이는 것을 탐내게 되어 있고, 그렇게 탐낸 것을 취하려고 하게 되어 있습니다. 나에게 허용된 것이 아닌데도 말이지요.  


그런데, 이렇게 눈으로 본 것을 취하는 통로가 되어 주는 것이 바로 ‘일’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보고 탐난 것을 취하기 위해서 계속해서 일을 하게 됩니다. 마치 탐욕을 연료로 해서 브레이크 없이 달려가는 기관차처럼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이 질주를 막으려면 브레이크가 있어야 합니다. 자신을 위한 일을 멈추게 할 수 있는 장치가 필요합니다. 그 브레이크가 바로 안식일이고 주일입니다. 오늘 우리가 주일을 꼭 지켜내야 하는 중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육일 동안만 일하시고 하루를 안식하셨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 지으신 세상이 무너지거나 그 온전함이 깨어져 나갔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사실 성경적으로 보면 그 안식이야 말로 그렇게 하나님께서 지으신 세상을 정말 완전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일주일 중에서 6일 동안을 일한 후에 하루를 주님과 더불어 깊이 교제하며 지낸다고 해서 우리의 세상이, 나의 삶이 무너져 내리고 망가져 버릴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사실 우리는 그런 불안함 때문에 더 욕심을 부리게 되고 그 욕심으로 내가 ‘일’을 통해 건설한 나의 세상을 더 견고하게 해 보려고 하지만, 그리고, 일주일의 단 하루도 온전히 하나님께 드리지 못할 때가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 삶이 정말로 더 풍성해지고 안전해 지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거꾸로 입니다. 우리가 그 하루를 우리 자신을 위해서 하던 일을 멈추고 온전히 하나님과 교제하며 자기 영혼을 돌보는 일로 보낼 때, 그 하루를 통해서 우리의 삶은 더욱 더 온전해 지고 풍성해 지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일을 꼭 참 안식일로 잘 지켜내야 하는 것입니다. 


요즘 세상에 직장에 따라서는 이 주일을 지키는 일이 얼마나 쉽지 않은 일인지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만 해도 성도들 중에서 주일을 지키기 힘든 분들이 꽤 많으니까요. 그렇지만 말입니다. 만약 내가 어떤 사정 때문에 주일을 그렇게 보내지 못했다면 꼭 다른 하루를 정해서 주일처럼 지내셔야 합니다. 하루를 온전히 그렇게 하지 못하실 그런 상황이라면 그 하루의 단 몇시간 동안만이라도 자신을 위한 일을 멈추고 하나님께 예배드리며 주님과 더불어 집중적으로 교제하셔야 합니다. 그래야 자칫하면 브레이크 없는 기관차 같이 되기 쉬운 우리의 삶이 하나님 앞에서 제 자리를 지킬 수 있고, 하나님이 손대지 말라고 하신 거룩한 것에 손을 대어 그것을 더럽히는 일을 피할 수가 있습니다. 상황을 핑계로 이런 노력조차 하지 않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이 금하신 것에 손을 대도록 유혹하는 탐욕의 횡포를 견디어 낼 수가 없고, 결국 그 죄가 나의 삶과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삶을 무너뜨리는 것을 보게 될 지도 모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 죄가 되는 것은 물론이구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제발 주일을 쉽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 날을 이런 저런 이유 때문에 전용하지 마십시오. 주일은 나를 위한 나의 시간이 아닙니다. 이 시간은 거룩한 시간이고 그래서 하나님께 속한 시간입니다. 그것을 지켜내야만 우리 자신도 지켜지는 영적인 안전선입니다. 정말 정말 피치못할 일이 아니라면 주일은 꼭 지키시기 바랍니다. 꼭 주일답게 지키십시오. 그렇지 못할 때는 다른 날이라도 여러분만의 주일로 만드시구요. 그것이 바로 여러분 자신과 여러분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키는 방법입니다. 


라합은 하나님을 얻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았을 때, 기대하지 못했던 더 많은 것들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간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하나님을 내려 놓았을 때, 모든 것을 잃게 되었습니다. 살면서, 성도로서 무엇을 붙들고 무엇을 지켜내야 하는지, 그리고 무엇에는 손을 대면 안되는지 온전히 분별하시고 하나님 앞에서 그 선을 분명하게 지켜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그런 삶을 살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참된 안식과 평안, 그리고 지킬 것을 지키는 자에게 주시는 복을 허락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이 복을 놓치지 않고서 사는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