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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주일예배

2015.05.24. 주일오전 - 탈취한 물건과 가축은 스스로 가지라(여호수아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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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여호수아 8장 1-2절




아이성에 대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첫번째 공격은 완패로 끝났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이미 살펴본 대로 자기들 속에 숨겨져 있었던 죄를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고, 또한 여리고 성에서의 승리에 도취되어 교만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모든 성도들이 승리하기를 원합니다. 시험을 이기고 시련을 이기고 승리하기를 원하지요. 그렇지만 이 승리를 위해 먼저 챙겨야 할 것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고 그것 때문에 당황스럽고 실망스러운 패배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런 패배가 계속 반복되면 영적으로 자포자기한 상태가 됩니다. 시험이 오든 시련이 오든 그것과 싸워서 이기려고 하기 보다는 그냥 되는 대로 흘러가지요. 저는 교회 안에서 이런 상태에 있는 분들을 꽤 많이 보았습니다. 그런 분들이 아얘 처음부터 시험이나 시련에 대해서 무관심하고 무기력했던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싸우고 지고, 또 싸우고 다시 지고 하는 경험이 반복되다 보니까 결국 영적으로는 아얘 싸움의 의지조차 잃어버린 채로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예전에 저도 어떤 부분에서는 이렇게 되었던 경험들이 있기 때문에 잘 압니다. 싸워봐야 또 질 것이 뻔하니 아얘 처음부터 죄와 시험과 싸우려 하지 않고 시험이 오면 미리 손들고 항복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 말이지요. 그런데, 이런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이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당연한지 몰라도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는 가장 비참하고 안타까운 방식으로 사는 것입니다. 이렇게 살면 성도의 참 능력이 무엇인지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주신 영광이 무엇인지 그전혀 경험할 수가 없을 뿐 아니라, 매순간 힘있게 함께 하시며 우리를 도와주시는 하나님의 강력한 은혜와 멀어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욥에게서 죄를 대하는 태도를 배워야 합니다. 욥은 자녀들이 모여 생일파티를 한 다음 날이면 어김 없이 아이들을 불러 모아놓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왜 그랬지요? 간 밤에 파티를 하느라고 자녀들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저질렀을지도 모를 죄를 속죄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그렇다면 욥은 왜 이렇게 죄에 대해서 철저했을까요? 그것은 죄가 용서받고 처리되지 않은 상태로 있으면 그것이 하나님과의 교제를 방해하며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가로 막는 장애물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스스로 지은 죄를 모른다고 해서 죄가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죄도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가로 막는 장애물이 되기에는 충분하기 때문에 그런 죄라고 하더라도 꼭 처리하고 넘어가야 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모르는 채로 넘어가기 쉬운 죄 중의 하나가 바로 교만입니다. 교만함은 우리 마음 속 깊이, 어떻게 보면 우리와 가장 가까이 있는, 우리와 가장 친밀한 죄이고 실제로 가장 즐거워 하는 죄이기도 하니까요. 그래서, 우리는 항상 우리 안에 있는 교만한 마음이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를 잘 살펴야 합니다. 내가 인정받는다고 해서, 내가 하는 일이 조금 잘 된다고 해서, 또 내가 힘이 있다고 해서 내 마음이 자꾸 높아지고 또 그것을 자랑하면서 내가 이렇기 때문에 다른 사람보다 낫다는 생각이 고개를 들고 있지 않은지 잘 살펴야 하고, 계속해서 겸손한 자리로 가기 위해서 애써야 합니다. 그런 노력이 바로 하나님과 우리의 교제를 열어주고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이 흘러들어오는 길을 열어 주기 때문입니다. 


아이성에서의 패배는 여리고성에서의 승리가 영광스러웠기 때문에 그만큼 더 쓰라리고 실망스러운 경험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미 아간의 죄를 처리하고 난 다음이었지만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좀처럼 마음을 추스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숨겨진 죄 때문에 그런 일을 당했으니 또 다른 숨겨진 죄는 없는지 그것에 대해서 극도로 예민해져 있었고, 다시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을까 두려워 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그렇게 하셨던 하나님도 두려워하고 있었지요. 그 때 하나님께서 여호수아를 찾아 오셨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두려워 하지 말라 놀라지 말라 군사를 다 거느리고 일어나 아이로 올라가라 내가 아이 왕과 그의 백성과 그의 성읍과 그의 땅을 다 네 손에 넘겨 주었으니...”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가 두려워 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아간 사건 때문에 많이 놀란 상태라는 것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여호수아에게 두려워하지 말고, 놀라지 말라고 여호수아를 위로하고 그를 힘주셨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얼마나 자비롭고 풍성한 분이십니까? 하나님은 비록 우리가 우리의 죄 때문에 실패하고 넘어져서 낙심하고 있을 때에라도,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죄를 적절하게 처리하기만 하면 다시 우리를 찾아 오셔서 힘을 주시고 위로해 주십니다. 그런데, 사실 “두려워하지 말라, 놀라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은 모세가 죽은 후에, 여호수아가 모세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되었을 때, 그 일 때문에 두려워하고 있는 여호수아에게 찾아오셔서 해 주셨던 말씀과 똑같은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의 죄와 자신의 교만, 그런 것들이 어우러져서 만들어 낸 쓰라린 패배와 슬픔. 그것 때문에 처음처럼 두려워하고 있는 여호수아에게 하나님께서는 처음처럼 다시 찾아오셔서 처음에 주셨던 격려와 위로의 말씀을 다시 한 번 전해 주셨던 것입니다. 무슨 뜻일까요? 하나님은 이 말씀을 통해 무슨 메세지를 전해주고 싶으셨던 것일까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 보자는 말씀입니다. 내가 처음에 너에게 주었던 그 약속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니까 그렇게 거기 주저 앉아 있지 말고 다시 시작하자는 말씀입니다.  


여호수아에게 찾아오셔서 힘을 주시고 다시 시작하자고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 속에는 이미 이전의 죄에 대한 추궁이나 진노는 다 사라지고 없습니다. 하나님은 오히려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여호수아를 찾아오셔서 그를 위로하시고 힘주시며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일을 맡겨 주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하나님은 이런 분이십니다. 우리에게 죄가 있을 때, 우리가 죄를 숨기고 있거나 혹은 죄를 고집하고 있을 때, 그 분은 우리와 능력있게 함께 하실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죄를 깨닫고 하나님께 고백하면, 그리고 그 죄에 대해서 책임있는 태도를 보이면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십니다. 비록 우리는 그 죄와 죄로 인한 실패의 경험 때문에 낙심하며 슬퍼하더라도 하나님은 그런 우리를 찾아와 다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있는 약속을 말씀해 주시면서 우리를 위로하시고 다시 회복시켜 주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언제나 이런 분이십니다. 


우리는 죄를 지으면 안됩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죄를 지을 수 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서로 상반되는 두 가지 사실 사이에 끼어 있는 것이 바로 저와 여러분들입니다. 그래서, 죄를 짓지 않으려고 애쓰고 또 애쓰지만 그래도 죄를 짓게 될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그럴 때 우리는 우리가 죄를 지었다는 사실 자체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어떻습니까? 우리에게는 우리가 저지른 죄에 대해서 모든 것을 책임질 능력이 없습니다. 우리에게 자기 죄를 용서할 권한이 없는 것은 물론이고 그 죄가 만들어 낸 어두운 결과들을 처리할 능력도 전혀 없으니까요. 그래서 우리가 지은 죄에 대한 집착은 우리에게 아무 유익도 주지 못합니다. 오히려 우리를 그 죄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게 만듭니다. 성도 여러분, 이미 우리가 저지른 죄에 대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그 죄를 하나님 앞에 진실되게 고백하며 용서의 은혜를 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떻게든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그 죄에 대한 책임있는 태도를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그 죄를 용서해 주십니다. 그리고 그 죄에 대해서는 다시 책임을 묻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오히려 우리를 위로하시고 힘을 주시며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워 주십니다. 다시 한 번 하나님과 더불어 믿음으로 살아갈 기회를 주십니다. 요즘 청년들이 ‘쿨하다’는 말을 사용하는데, 우리 하나님만큼 쿨하신 분은 세상에 없습니다. 이미 고백되어지고 처리되어진 죄에 대해서는 절대로 다시 그 책임을 묻는 일이 없는 뒤끝이 없는 분이시니까요. 우리 모두가 죄를 이렇게 다루시고 우리를 죄에서 풀어주시며 다시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의 쿨하신 은혜를 누리며 살기를 바랍니다. 그 은혜 안에서 포기하거나 좌절하지 말고 또 다시 제 자리로 돌아가서 담대하게 우리를 무너뜨린 그 죄와 다시 싸우는 그런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내가 이미 너와 너의 백성들에게 아이성을 넘겨 주었으니 아이성으로 올라가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여리고와 그 왕에게 행한 것 같이 아이와 그 왕에게 행하되...” 하나님께서는 아이성도 여리고성처럼 헤렘이 되게 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 뒤에 이런 단서를 하나 붙이셨습니다. “오직 거기서 탈취한 물건과 가축은 스스로 가지라” 헤렘은 때로는 그 성 안에 있는 모든 물건까지 불태워서 없애는 것과 그렇게 하는 대상이 되는 것들이 지정되는 경우가 있는데, 아이성의 경우에는 하나님께서 두 번째를 요구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은 모두 죽이고 성은 헐어버리고 불태워야 하지만 그 안에 있는 물건들과 짐승들은 전리품으로 가져도 좋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제가 이 부분을 읽는데, 너무나 안타까운 나머지 제 입에서 저절로 “아이고!”하는 소리가 흘러 나왔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순간, 이 말씀이 제 마음 속에서 아간의 범죄와  연결되어져 생각되었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아간이 왜 여리고 성에서 손을 대서는 안되는 ‘온전히 하나님께만 속한 것’에 손을 댔을까요? 아간은 ‘보고 탐이 났기 때문’이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단순히 그것이 탐이 났기 때문일까요? 단순히 그 탐심을 채우기 위해서 말이지요. 물론 그랬을 것입니다. 그 엄청난 값어치를 지닌 그렇게 좋은 물건이 나를 좀 집어가슈하고 떡하니 눈 앞에 놓여져 있는데, 그것이 탐나지 않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테니까요. 그러나, 아간이 ‘하나님께 온전히 바쳐진 물건’에 손을 댄 진짜 이유는 탐심 때문이 아니라 아간에게 그 탐심을 통제할 수단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아간은 욕망으로 치닫게 하는 악셀레이터는 있는데 그것을 제어할 브레이크가 없는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런 상상을 해 보았습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나중에 아이성에 가면 내가 다 알아서 좋은 것으로 챙겨줄테니까 여리고성에서는 절대로 거기 있는 물건에 손을 대면 안된다고 미리 말씀하셨다면 상황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래도 아간은 탐심 때문에 그렇게 쉽게 하나님께서 금하신 물건, 만약에 그 물건에 손을 대면 너희들 또한 그 물건과 같은 운명이 될 것이라고 하나님께서 분명하게 경고하신 그 물건에 손을 댔을까요? 저는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그런 말씀을 하셨고 아간이 그 말씀을 믿었다면 아간은 그런 죄를 짓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하나님께서 미리 그 사실을 알려 주시는 것이나 그렇게 하지 않으시는 것이나 결론에는 전혀 차이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아이성의 물건들과 가축들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선물로 주시는 것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계획에 포함되어 있었던 일은 아니었을까요? 저는 분명히 그렇다고 믿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기분에 따라 즉흥적으로 움직이는 분이 아니시니까요. 성도 여러분, 우리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셔야 한다고 생각하시는 것은 주셔야 할 때에 반드시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인색하신 분이 아니시고 우리의 필요를 완전히 헤아리시는 우리들의 자비로운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확신할 수 있는 증거가 무엇입니까? 성경은 우리 하나님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로마서 8장 32절 말씀인데요. 제가 이미 몇 번 반복해서 인용했던 구절이지요? 여러분, 이 세상에 이 말씀보다 은혜롭고 풍성하며 우리가 현실적으로 분들고 살아가에 적합한 말씀이 또 있겠습니까? 저는 거의 없다고 믿습니다. 하나님은 죄인인 우리들을 살리시기 위해서 아들을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이미 그 아들을 우리를 위해서 아끼지 않고 내어 주셨습니다. 그냥 내어주신 것이 아니라 죽게 하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아까워서 주지 않으시는 것이 아직도 남아 있을까요? 자, 그러면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 중에서 하나님께서 아까워서 주시지 않는 것이 있을까요? 없지요. 없습니다. 있을 수가 없습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가 원하는 어떤 것을 주지 않으신다면 그건 이런 이유일 것입니다. 첫째, 우리 생각처럼 그것이 우리에게 꼭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거나 둘째, 오히려 그것을 가지면 우리에게 해가 되기 때문이거나 세째, 그것말고 꼭 주셔야 할 것이 따로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 사실을 믿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믿지 못할 때, 우리는 죄의 유혹, 특히 탐욕의 유혹에 쉽게 넘어갑니다. 이것을 믿지 못하는 사람은 반드시 내가 내 인생을 다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에 빠지게 되어 있고, 자기 힘으로 자기 인생의 안전을 다 세우려고 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빠져나간 인생에는 자기 자신만 남으니까요. 그래서 하나님이 금하신 것에도, 하나님께서 금하신 방식으로라도 손을 대서 자기 것으로 삼게되는 것이지요. 그것을 가져야만 자기가 더 안전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지금 그것을 가지지 않으면 나중에는 얻지 못하게 될 것이라는 두려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주셔야 하겠다고 생각하시는 것은 반드시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기다려야 합니다. 그런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붙들고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때에 주실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그러면 여리고 성의 물건에 손을 대지 않고서도 아이성의 물건을 선물로 받을 수 있으니까요. 아마 이렇게 말씀드려도 여전히 불안해 하시는 분들도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때에 주실 것을 기다려도 결국 내가 원하는 것, 내가 갖고 싶은 것은 가지지 못하게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해서 말입니다. 물론 그렇습니다. 분명히 내가 원하는 것은 얻지 못할 수도 있구요, 제 경험상 그렇게 되기가 훨씬 쉽습니다. 경험해 보신 분들은 이것을 다 알지요. 그래서 머리가 좋은 분들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이 주실 때까지 기다리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래 봐야 밑지는 것은 자기 자신이이까요. 그런데, 우리가 이런 생각을 할 때, 항상 그냥 넘어가게 되는 아주 중요한 질문들이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그러면, 우리가 그렇게 욕심을 따라 살면, 내 힘으로 내가 원하는 것 다 가지고, 내 힘으로 내 삶을 안전하고 든든하게 지켜내는 것을 목표로 해서 살면 정말 우리 삶이 우리가 원했던 그런 모양이 됩니까? 생각하던 것만큼 행복하고 그만큼 안전합니까? 만족스럽고 평안합니까? 그만큼 풍성해 집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일단은 그렇게 살아도 내가 가지고 싶은 것 다 가지지 못합니다. 내가 지키고 싶어하는 것 다 지키지 못하구요. 내가 붙들고 싶어하는 것 다 붙들지 못합니다. 간혹 그렇게 해서 내 손에 쥐어지는 내가 원하는 것도 있지만 바로 그것 때문에 내 삶은 많은 부작용을 경험하게 되고, 행복과 평안이 깨지기도 합니다. 내 존재와 성품의 아름다움, 그리고 신앙의 온전함이 망가져 버리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성도 여러분, 지금까지 우리의 삶은 도대체 어떻게 유지되고 이나마 안전하게 이어져 왔을까요? 그것은 때로 우리가 그렇게 탐내고 그렇게 얻기 위해서 몸부림 치며 살았던 그런 것들 덕분이 아닙니다. 그런 것들 중에서 정말로 내 손에 들어온 것이 거의 없고, 그런 것들은 우리 삶의 온전함을 방해할 때가 많았으니까요. 비록 그런 목록 속에 포함되어 있지는 않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 삶에 공급해 주시고 알아서 챙겨 주시는 것들, 바로 이런 것들 덕분에 우리 삶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지켜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결코 우리의 능력이나 우리 욕심 덕분에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니지요. 


전에도 한 번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만, 저는 제 인생을 생각할 때마다 참 신묘막측한 것이  인생이구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사실 제 인생에서 제 소원과 제 계획대로 된 것은 언젠가 막연히 “나는 평생 책 보면서 살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것 그것 하나 밖에 없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제가 지금 목숨 걸고 책을 보면서 살고 있지는 않습니다만 목회자가 되었고 그래서 싫든 좋든 책을 보아야만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저는 제가 목회자가 될 줄은 몰랐습니다. 아주 어렸을 때 뭣도 모르고 목회자가 되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지만 철이 들면서 그 생각을 아얘 접었었는데, 우여곡절 끝에 지금은 이렇게 목사가 되어 있습니다. 더 상상하지 못 했던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제가 대구에서 목회를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아이쿠야! 정말 대구라는 도시는 저와 거의 모든 면에서 기질적으로 정반대가 되는 곳인데 제가 여기에 있다니, 게다가 잘못하면 여기서 평생을 살게 될지도 모른다니, 이거 정말 큰 일 아닙니까? 또 제가 결혼한 나이나 가족구성,  경제적인 여건 등. 그 어느 것 하나 제가 막연하게라도 상상한 것과는 전혀 다릅니다. 그렇게 일찍 결혼하고 싶어서 안달을 했는데 서른 세 살이나 되어서 결혼했고 아이도 생각보다 빨리 생겼습니다. 큰 아이는 딸을 낳고 싶었는데 아들놈이 나와 버렸습니다. 또 형제라고 낳아 놓았더니 저렇게 서로 다른 두 놈이 나올 줄은 상상도 못했구요. 경제적인 여건은 어떤가요? 이건 갈수록 태산입니다. 아, 그러고 보니 강아지 한 마리 키우며 살겠다던 소박한 꿈 하나는 더 이루어졌네요. 보이는 것만 보면 그렇습니다. 보이는 것만 본다면 저의 바램대로, 그런 것이 있어야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대로, 그래서 제가 탐낸대로 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그래서 제가 불행할까요? 제가 지금 불만으로 꽉 찬 인생을 살고 있고, 또 내 인생은 실패한 인생이라고 생각하면서 살고 있을까요? 미래에 대한 근심과 걱정에 눌려서 살아가고 있을까요? 가진 것도 없고 이룬 것도 없이니 내 인생은 참 대책이 없는 인생이라고 생각하면서 살고 있을까요? 아닙니다, 여러분.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분명히 제 인생에는 뭐 하나 제가 바라던 대로 된 것이 없고, 또 제가 생각하던 만큼 넉넉하게 살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또 살아가는 곳조차도 제가 전혀 생각하지 못한 자리에서, 이렇게 하나님께서 던져 놓으신 곳에 살고 있지만 그래도 저는 평안하고 행복합니다. 적어도 개인적인 삶의 영역에 관한 한 저는 근심도 없고 불안함이나 두려움도 없습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사도 바울은 자신을 심문하는 아그립바 왕과 기라성 같은 권세가들 앞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를 원하나이다” 제 소원도 그렇습니다. 성도 여러분, 외람되지만 저는 여러분도 저와 같이 되기를 바랍니다. 저와 같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행복과 만족을 누리며 평안하고 든든한 삶을 살게 되기를 바랍니다. 내가 끙끙대면서 사는 것이 아니라 그저 은혜로 살아지는 그런 삶을 살면서 그 안에 숨겨져 있는 비밀스런 복을 누리면서 말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여러분의 모습을 보는 것이 저의 목회의 일차적인 목표입니다. 욕심이 많은지 모르지만 저는 이 욕심만큼은 버릴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제가 여러분에게 꼭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욕심부리지 않고 탐내지 않고 살면 내가 원하는 것 내가 원하는만큼 가지지 못하고, 내가 원하던 것보다 덜 좋아 보이는 것, 조금 떨어져 보이는 것을 얻고 누리면서 살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기가 더 쉽지요? 그렇지만 성도 여러분 그렇다고 해서 그게 뭐가 대수겠습니까? 월급 좀 덜 받고, 돈 좀 덜 벌더라도, 남들처럼 크고 비싼 집에서 살아가지 못하더라도, 자식새끼가 다른 집안 애들보다 잘 나가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그게 우리가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서 진실되게 살면서 받은 것이고,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챙겨주신 주신 것이라면 우리는 그것으로 족한 인생이지 않겠습니까? 그것이 가장 영광스러운 우리의 분깃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그 은혜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 우리를 죄의 유혹으로부터 지켜주고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의 통로를 계속해서 열어주는 역할을 한다면 그것이 우리에게는 그 어떤 것보다도 유익하고 복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성도 여러분, 성도는 욕심을 따라 본능을 따라 살아가라고 죄에서 건짐을 받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름받은 것이 아닙니다. 성도는 오히려 그런 삶에서 자유하라고, 그런 유혹과 싸워 이기는 복되고 영광스러운 삶을 살라고 구원받고 부름받은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능력이고 성도의 영광이니까요. 아간은 하나님을 믿지 못했습니다. 가장 적절한 때에, 가장 적절한 것으로 채워주시는 하나님을 믿지 못했고, 그 하나님을 기다리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보고 탐내고 취했습니다. 믿음으로 죄의 고리를 끊어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결국 그것은 아간 개인과 가족,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 전체의 비극으로 이어졌던 것입니다. 


우리 아버지 하나님은 분명히 우리의 것을 챙겨 주십니다. 가장 좋은 것으로, 가장 적절한 때에, 가장 적절한 것으로 저와 여러분의 삶을 채워 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 여리고 성에서 손해 아닌 손해를 보면요, 하나님께서는 그 손해를 아이성에서 매꿔 주실 것입니다. 그렇게 저와 여러분을 가장 평안하고 영광스러운 삶으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이 영광스럽고 은혜로운 진리를 꼭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 믿음으로 죄의 유혹을 이기십시오. 이 믿음으로 손을 대면 안되는 금지된 것들의 유혹과 눈에 보여지는 것에 대한 탐욕과 싸워 이겨내셔서 하나님 앞에서 여러분의 삶을 순전하게 지켜내시기 바랍니다. 비록 우리가 아무리 애를 써도 때로 죄를 짓고 넘어지게 되겠지만, 그럴 때는 하나님께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시고, 지은 죄에 대한 책임있는 태도를 보이십시오. 그러면, 우리 아버지께서 용서해 주시고 다시 세워주시고 회복시켜 주시며 다시 기회를 주실 것입니다. 


항상 이렇게 우리를 용서해 주시고 회복시켜 주시며 다시 시작하게 하시고, 모든 것을 알아서 공급해 주시고 챙겨주시는 하나님 아버지를 믿는 믿음 안에서 지족하는 삶을 살아서, 우리 삶을 무너뜨리려는 탐심과 싸워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항상 하나님 앞에서 죄를 용서받는 은총을 누리게 하소서.
  2. 가장 적절하게 챙겨주시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지킬 것은 지키며 사는 인생이 되게 하소서. 
  3. 그 동안 욕심과 욕망을 따라 살았던 우리 삶을 회개하며 이제는 정말 공급하시는 하나님으로 만족하겠습니다. 고백하며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