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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주일오후

2015.05.31. 전교인 기도회 - 그들이 어디를 가든지(사사기 9)



20150531SE (#1).mp3.zip





본문 : 사사기 2장 11-15절

 



지난 번에는 출애굽 3세대가 왜, 그리고 어떻게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실패하였는가 하는 것을 살펴보면서, 우상 숭배가 무엇이며 우상숭배에 빠지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스라엘이 자꾸 하나님을 떠나 우상숭배에 빠진 이유는 그들이 현실 속에서 믿음을 사용하는데 두 번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첫번째 실패는 보이는 현실을 기준으로 해서가 하나님의 눈으로 자신을 보는 일에 실패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미 가나안 땅에 자리잡고 떵떵거리고 살고 있는 이방인들과 이제 갓 그 땅에 들어온 자신들을 비교함으로써 열등감에 빠졌던 것입니다. 세상에는 사람들의 심리를 알아본답시고 만들어낸 이상한 심리테스트들이 참 많습니다. 그런 문제들 중에서 이런 기괴한 문제가 있습니다. “물가에 놀러 갔는데, 어머니하고 아내하고 타고 있는 보트가 뒤집혀서 둘 다 물에 빠졌다. 너는 누구를 먼저 구하겠느냐?” 이런 질문에는 섣불리 대답하면 안됩니다. 특히 남성 동지들은 더 그렇지요? 성도 여러분은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저는 이런 질문에는 결코 둘 중에 하나를 택해서 답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 “그 때 가 봐야 안다”고 대답합니다. 


원래 이 질문은 질문 자체가 말이 안됩니다. 아내가 둘이고 둘 중에 누구를 구하겠느냐고 묻는다면 그건 또 질문이 되겠지만 어머니와 아내는 절대로 서로 비교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닙니다. 그런데 두 가지를 비교하고 있으니 이 질문은 질문 자체가 말이 안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우리 삶 속에서 이런 실수를 종종 하는 것 같습니다. 서로 비교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것들을 비교하면서 쓸데 없는 비교의식에 빠지게 되는 것이지요. 


성도 여러분, 우리들과 믿지 않는 사람들은 처음부터 비교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일단 소유의 문제부터 생각해 볼까요? 세상에 속한 사람은 아무리 많이 가지고 있고, 많이 누리고 살아도 세상에 속한 것으로만 그럴 수 있을 뿐입니다. 그들의 소유와 풍성함은 그게 아무리 많고 풍성해도 이 땅에서 모두 끝이 납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의 진짜 풍성함은 이 땅에 속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진짜 재산은 여기에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 재산은 기껏해야 몇 십 년 누리다 말 것들,잠시의 만족만 주고 나중에는 더 큰 갈증만 남기고 끝나는 것들이 아닙니다. 참된 만족하게 해 주고 영원히 누릴 수 있는 것들, 그것이 바로 성도의 소유만이 가지고 있는 특징입니다. 이렇게 가진 것만으로도 믿지 않는 사람들과 우리들은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신분은 또 어떻습니까? 세상에 속한 사람들은 겉모습은 어떻든 그들은 사탄의 종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이 두 가지가 애초에 비교대상이나 되겠습니까? 삶의 질이나 아름다움, 그리고 영광은 애초에 비교대상이 되질 않습니다. 또 그들은 세상에 속해 있기때문에 세상에서 승부를 봐야 합니다. 그래서 그렇게 무리해서 살고 때로는 악하게 살기도 하지요. 그러나 여기서 살아가는 우리들의 삶에는 전혀 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들의 이 땅에서의 삶은 오히려 하늘나라에 알맞는 사람으로 훈련되어져 가는 적응훈련기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기서 승부를 내려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 열매는 땅이 아니라 하늘에서 맺혀지고 있으니까요. 


이렇게 성도들과 믿지 않는 사람들, 이 둘은 원래부터 비교대상이 아닙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비교해서는 안될 두 가지를 비교하면서부터 생겨납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만 보고 자신과 자신의 삶을 평가절하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꾸 그들이 가진 것을 가져다가 나의 가치를 높이려 하게 되고, 오히려 그런 일 때문에 우리의 진짜 가치를 잊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절대로 하나님의 자녀인 여러분을 그렇지 않은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지 마십시오. 그 비교가 여러분의 삶을 망가뜨리고 마음을 망쳐 놓으며, 신앙을 흔들어 놓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 그 어떤 일보다도 정말 자존심 상하는 일입니다. 썩어도 준치라는 말이 있죠? 우리가 그렇습니다. 아무리 자신이 못나 보여도 그렇지 어찌 하나님의 자녀를 세상의 종에다가 비교하겠고, 게다가 그 앞에서 자신을 평가절하하겠습니까?


이스라엘의 두 번째는 실패는 신앙에 현실을 맞추어 가는 일에 있어서의 실패였습니다. 그들에게도 분명히 믿는 바가 있었지만, 그렇게 믿는 내용이 현실에서 구체적인 힘과 영향력이 되게 하는 데는 실패 했던 것입니다. 신앙이 나에게 참으로 의미가 있는 일이 되려면 신앙이 현실의 필요를 채우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현실 앞에서 현실을 끌고 가는 엔진이 되게 만들어야 합니다. 믿음이 내가 사는 현실의 방향을 정하고, 그 현실이 하나님의 원하시는 현실이 되게 할 만큼 나에게 구체적이고 강력한 영향력을 미칠 수 있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신앙을 계속해서 현실을 위한 수단으로 밖에 사용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우상숭배가 훨씬 더 현실적으로 유익하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그 유혹을 이기지 못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현실 속에서 하나님 아닌 것을 택하게 되는 이유는 하나님보다 현실이 더 크게 보여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보다 현실이 더 능력 있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도 그랬습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보다 가나안 족속들의 현실이 더 크게 보였습니다. 그래서 빨리 그들 속에서 그들과 같아져야 한다는 현실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현실을 보장해 줄 듯이 보이는 바알과 아스다롯을 따라가서, 아무 것도 아닌 것들에게 영광을 돌리며 절하게 된 것입니다. 


위에서 우리는 믿지 않는 사람들과 너무 다르기 때문에 서로 비교하면 안된다고 했는데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도 우리들과 믿지 않는 사람들을 비교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적용하시는 기준과는 전혀 다른 기준을 사용하시고 전혀 다른 방식으로 우리를 다루어 가십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우상을 섬길 때,그들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방법이 있습니다. 그리고, 믿는 우리가 하나님 아닌 다른 것을 의지하게 되면 그런 우리를 다루시는 하나님의 또다른 방법이 있습니다. 저는 오늘 믿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말씀을 드리지는 않겠습니다. 우리는 믿는 사람들이고 그래서 하나님께서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 아닌 것을 선택하게 될 때 어떻게 하시는 가 하는 것이 중요하니까 그것만 다루겠습니다. 


13절은 “곧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고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겼으므로” 라고 이야기 하면서 곧 바로 14절과 15절에서 그 결과를 말해 줍니다. 우선 14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사 노략하는 자의 손에 붙여 그들로 노략을 당케 하시며 또 사방의 모든 대적의 손에 파시매 그들이 다시는 대적을 당치 못하였으며...” 악인은 항상 하나님의 백성의 주변에 있습니다. 대개 그들은 강자이고 우리들은 약자이기가 쉽습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을 보내시면서 “이리 가운데로 양을 보내는 것 같다”라고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둘이 일대일로 붙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양이 백전 백패입니다. 심지어 양보다 이리들이 더 많으면 결과가 또 어떻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놀랍게도 이런 상황에서도 살아남고 때로 크게 승리하기도 합니다. 오합지졸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정복해 갔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런 이상한 일들이 일어날까요? 그 이유는 다른데 있지 않습니다. 순전히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의 편에 서서 보호해 주시며 싸울 일이 있으면 대신 싸워주시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노략하는 자의 손에 붙이고 사방 모든 대적의 손에 파셨고, 그래서 그들은 노략을 당하고 다시는 가나안 민족을 당해내지 못하게 되었다”고 이야기하고 있지만, 사실 하나님 편에서 하신 일은 이제까지 이스라엘의 편을 들던 일을 잠시 멈추신 것에 불과합니다. 하나님께서 슬쩍 빠지시니까 그 동안 하나님 때문에 이스라엘에게 당하고만 있던 그들이 그 모든 악함과 원래의 힘을 동원하여 이스라엘을 마음껏 괴롭혔던 것이고, 이스라엘은 일방적으로 얻어터질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의지해서는 안 되는 첫번째 이유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기로 작정한 순간 우리는 이제부터는 오로지 하나님만 섬기기로 결단을 내린 것이고, 하나님과의 배타적이고 의존적인 관계 안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그래서 만약 우리가 자꾸 하나님이 아닌 다른 데로 눈을 돌리고, 그런 것들을 쫓아다니며 그것을 우리의 능력으로 삼으려고 하면, 하나님은 우리 삶에서 슬쩍 빠지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과 보호하심이 없는 상태에서 세상의 실력자, 그것도 악한 실력자들과 맞붙어야 합니다. 이런 상황이 되는 것만으로도 정말 큰 일이지만 더 큰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을 믿기로 작정하는 순간 이미 우리는 하나님께 의존하고 있고 그 분의 보호하심을 받지 않고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 있다는데 있습니다.  그래서 만약 성도의 삶에서 하나님이 빠져나가시면 성도는 더 이상 아무 것도 의지할 수 없게 됩니다. 보호도 인도도, 그리고 대신 싸워주시는 것도 기대할 수가 없어집니다. 영적으로는 여전히 하나님의 자녀일지 몰라도 현실 속에서는 고아처럼 버려진 그런 상태가 될 수 있습니다. 


15절에는 더 무시 무시한 표현이 나옵니다. “그들이 어디를 가든지 여호와의 손이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시매 곧 여호와의 말씀하신 것과 같고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맹세하신 것과 같아서 그들의 괴로움이 더하였더라” 하나님의 징계는 악한 사람들로부터 괴로움을 받는 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들이 어디를 가든지 여호와의 손이 그들에게 재앙을 내렸습니다. 원래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는 이스라엘이 어디를 가든지 하나님께서 동행해 주시면서 그 동행이 아름답고 풍성한, 부족함이 없는 동행이 되게 주시는 그런 관계였습니다. 그것이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맺은 언약의 주된 내용이었습니다. 그 언약이 가장 분명한 현실로 나타난 가장 분명한 예가 바로 이스라엘의 광야생활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어디를 향하든지 주님은 그들을 인도하셨고, 그들을 따라다니면서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비록 광야였지만, 그들에게는 항상 물이 있었고, 먹을 것이 있었습니다. 옷도 신발도 떨어지거나 헤진 적이 없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주변의 적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건드리지도 못했습니다. 여전히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하셧습니다. 그러나, 상황은 완전히 반대였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그들이 어디를 가든지 그들을 따라다니면서 그들에게 보호가 아닌 재앙을 주셨습니다. 쉽게 말해서 되는 일이 없게 하신 것입니다. 농사를 지어도 흉년입니다. 열심히 일해도 소득이 없습니다. 질병에 걸리고 약탈을 당합니다. 이미 그들은 약속의 땅에 들어와 있었지만, 그 땅을 자신들을 대적하는 저주의 땅 삼아 살아갈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똑같은 하나님의 손이 이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내리 누르는 고통과 고난의 손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도 우리는 우리의 선택에 따라서 전혀 다른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순종할 수도 있고, 불순종할 수도 있습니다. 주님을 따를 수도 있고, 세상의 이치를 따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섬길 수도 있고, 내 힘과 소유를 우상처럼 섬길 수도 있습니다. 사실 어떻게 하든, 어느 것을 택하든 그것은 전적으로 우리의 자유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어디를 가든, 무엇을 하든 우리가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할 사실은 우리가 한 번 구원받은 백성이 되면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실은 변경될 수도 취소될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 말이 뜻하는 바는 한 번 구원받은 백성의 신분은 하나님 앞에서 변하지 않고, 그래서, 우리가 불신자들이 사는 방식으로 산다고 해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불신자들처럼 대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을 다루시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자녀를 기르시는 방식으로 다루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불신자들을 보면서 왜 쟤는 맨날 죄짓고 악하게 사는데, 욕심부리며 사는데 저렇게 하는 일마다 잘 되고 건강하고 행복하냐고 묻는 일은 아무 소용 없는 질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과 우리를 다루시는 방식이 다른데 왜 똑같이 다루지 않으시느냐고 묻는다고 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절대로 믿는 여러분을 그렇지 않은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지 마십시오. 약속있는 여러분과 약속이 없는 다른 사람들을 비교하지 마십시오. 서로 길이 다르고 신분이 다르며 그래서 소망과 영광이 다른 사람들입니다. 우리에게는 우리의 길이 있고 우리는 그 길만 가면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하나님의 약속을 지키실 것입니다. 우리를 지켜주시고 우리를 위해서 싸워주실 것이며 예기치 못한 승리의 기쁨으로 우리를 위로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어디를 가든지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의 모든 것이 되어 주실 것입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자신을 생각하면서 다르게 가야할 길, 다르게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