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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주일예배

2015.05.31. 주일오전 - 아이성 뒤에 복병을 둘지라(여호수아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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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여호수아 8장 1-9절




시대에 따라 사람들이 가장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들이 있지만, 요즘 사람들에게는 자율과 자유가 가장 중요한 가치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깨지고 침해 당하는 것을 제일 못 견디어 하지요. 그러다 보니 ‘믿음으로 순종하며 살라’는 것은 교회 안팎에서 별로 인기 없는 주제가 되어 버렸지만, 성경이 이것을 성도가 살아가는 방법이라고 가장 강하게 강조하며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자유를 강조하느라고 이 말씀의 중요성을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창세기에서 시작되는 하나님의 구원 이야기 자체가 인간의 불순종부터 시작됩니다. 그 뒤에 이어지는 족장들과 이스라엘의 역사 또한 믿음에 있어서 순종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고, 또 믿음과 순종이 얼마나 밀접한 관계에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지요. 이스라엘의 순종은 언제나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평강을 가져다 주었지만 불순종은 고통스런 징계나 고난으로 이어졌습니다. 신약성경으로 와 보면 가장 강조되고 있는 것 중의 하나가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성령님을 보내 주셨다는 것인데요, 성령님의 가장 중요한 역할이 바로 우리 마음에 할례를 주셔서 우리를 하나님의 뜻과 다스림에 기쁘게 순종하는 하나님의 친 백성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과 ‘순종’이라는 말을 들을 때, 마음이 시원해지고 풍성한 자유를 느끼는 성도들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믿음이라는 단어와 순종이라는 단어는 넓고 풍성한 자유를 보장하는 말로 여겨지기 보다는 좁은 길을 가리키는 말로만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런 생각이 아주 틀린 것은 아닙니다. 믿음으로 순종하며 사는 길은 믿지 않는 사람들, 또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지 않는 사람들은 전혀 가려고 하지 않는 길인데, 항상 참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훨씬 적게 마련이니까요. 그렇지만, 실제로 이 길은 그렇게 좁은 길은 아닙니다. 왜 그런지 생각해는 것이 오늘 설교의 주된 목적이지만, 그 전에 전에 우리가 꼭 한 번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믿음이나 순종과 상관 없이 사는 길은 과연 사람들의 생각처럼 정말로 넓고 자유로운 길인가 하는 것입니다. 저는 믿음이 없는 사람들이 걸어가는 가는 길을 볼 때, 도무지 그 길이 성도가 가는 길보다 넓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겉으로 보면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것 같습니다.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지요. 굉장히 넓은 길을 활개치며 걸어가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성도 여러분, 정말로 그렇습니까? 그들은 정말로 하고 싶은 대로 마음대로 하며 자유로운 인생을 살고 있습니까? 아닙니다. 속을 들여다 보면요, 오히려 그와 반대입니다. 사람들이 말하는 자유란 자기가 하고 싶은대로 선택하면서 살아가는 것을 말하는데, 사실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저 다른 사람들이 정해 놓은 기준을 따라 살아갑니다. 제대로 확실하게 검증된 적도 없는 길이고 스스로 심사숙고해 보거나 깊이 고민해 본 적도 없지만, 그저 많은 사람들이 가는 길이니 그 길을 따라 걸어갑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쪽이다’라고 말하면 그저 그 길을 따라가지요. 살아가는 목적도 그렇습니다. ‘즐김’이나 ‘쾌락’, 그리고 돈이나 권력, 그리고 자기 이름을 내는 것에다 목적을 두고 살아갑니다. 다른 사람들과 똑같지요. 사실 이것은 자유로운 삶이 아닙니다. 자기 자신에게, 그리고 다른 사람의 이목에 묶여 있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가끔씩 이 길을 거부하고 다른 길을 걷는 말 그대로 ‘난’ 사람들도 더러 있지만 그런 사람들은 아주 예외적인 사람들이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을 동경하면서도 그 길로 가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이런 삶의 방식을 택하는 이유는 다른데 있지 않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고 믿기 때문이고, 실제로 그들이 살아가는 모습은 그러한 자신들의 믿음에 순종하는 삶의 방식일 뿐입니다. 결국 무엇을 믿고서 무엇에 순종하며 살아가느냐만 다를 뿐이지 믿는 바에 따라 살아간다는 점에서는 그들이나 우리나 다르지 않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라고 하고 싶은 대로 마음대로 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이 좁고 답답하게 느껴지는 것은 그 사람이 믿음으로 순종하는 삶 속으로 확실하게 들어와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상과 하나님 사이에서 양다리를 걸치고서 눈은 세상을 바라보면서, 세상을 동경하면서 살고 있기 때문에 믿음으로 순종하며 사는 삶을 좁아 보이고 그렇지 않은 반대편의 삶은 넓게만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일단 믿음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면서 살아가는 삶 속으로 성큼 걸어 들어와 보면 거기에는 억압과 답답함이 아니라 정말 어마 어마한 자유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드디어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패배가 아닌 승리를 위해서 아이성과의 전투를 준비하는 장면을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이야기 속에 우리가 하나님의 뜻 안에서, 믿음으로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는 아주 훌륭한 그림이 들어 있습니다. 먼저 우리는 이 두번째 아이성 전투가 하나님의 ‘아이성 뒤에 복병을 두라’는  명령으로 부터 시작되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어지는 싸움과 하나님의 명령을 보면서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어차피 하나님께서 이미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싸울 때마다 도와 주셔서 그저 이기게 해 주시면 안되었겠느냐고 말입니다. 사실 그렇지요. 어차피 넘겨 주실 거라면 그렇게 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입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싹 쓸어 버리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옛다!”하고 던져 주시면 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땅을 넘겨주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유일한 목적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분명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 약속은 분명히 지키실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이 약속 자체가 이루어지는 것 못지 않게 중요한 것 하나가 있습니다. 그 약속이 이루어지는 과정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믿음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훈련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이나 은혜를 생각할 때, 놓치기 쉬운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또 우리에게 특별한 은혜를 주시겠다고도 약속하셨습니다. 그렇지요? 그런데, 왜 우리는 약속된 복과 은혜를 제대로 누리지 못합니까? 우리가 복과 은혜라는 약속의 결과는 생각할 줄 알면서도 그 약속을 이루시는 과정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고 계시는가, 그 과정에서 우리를 어떤 사람으로 빚어 가고 싶어하시는가 하는 것을 잊고 있기 때문입니다. 약속은 분명히 성취될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성취의 과정 속에는 우리가 믿음으로 순종하는 사람이 되어 가는 과정이 필수적으로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분명히 큰 약속이 있고, 그 약속의 성취가 보장되어 있다고 해도 우리가 하고 싶은 대로 우리 계획대로 움직이면 안됩니다. 그 언약이 이루어질 것을 믿고 하나님께 순종해야 합니다. 아무리 약속이 있어도 우리가 우리 마음대로 하려고 하면 그 약속이 우리를 위한 것이 되는 일은 자꾸 뒤로 늦춰지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번에는 매복작전을 사용하라고 하셨습니다. 아이성 뒤에 복병을 두었다가 성이 빈 틈을 타서 성을 공격하는 방식으로 아이성을 차지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뿐이었습니다. 더 이상은 어떻게 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지요. 그런데, 여호수아는 움직입니다. 우선 용사 삼만명을 뽑았습니다. 교만의 껍질을 벗고 보니 아이성의 크기가 제대로 보이기 시작했고 그래서 처음처럼 그냥 백성들 중에서 아무나 3천명을 골라서 보낸 것이 아니라 최소 이정도는 되어야 하겠다라고 심사숙고하여 용사 3만명을 선택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밤에 보냈습니다. 군사들이 움직이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할만한 시간을 택한 것입니다. 매복장소는 하나님께서 말씀해 주신 대로 아이성 뒤로 정했습니다. 그리고, 아주 세세한 단서를 달았습니다. 너무 멀거나 가까이 매복하지 말고 적당하게, 이 쪽에서는 저 쪽이 보이지만 저 쪽에서는 이 쪽이 보이지 않을 정도의 거리에 매복해 있으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그 작전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나와 나를 따르는 모든 백성은 다 성읍으로 가까이 가리니 그들이 처음과 같이 우리에게 쳐 올라올 것이라 그리할 때에 우리가 그들 앞에서 도망하면 그들이 나와서 우리를 추격하며 이르기를 그들이 처음과 같이 우리 앞에서 도망한다 하고 우리의 유인을 받아 그 성읍에서 멀리 떠날 것이라 우리가 그들 앞에서 도망하거든 너희는 매복한 곳에서 일어나 그 성읍을 점령하라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성읍을 너희에게 주시리라” 이제서야 여호수아는 제 정신으로 되돌아 왔습니다. 여리고 성의 승리로 한껏 부풀려진 자아의 바람이 빠져서 제 크기가 되었습니다. 그것과 함께 상황을 판단하는 예민한 감각도 되살아 났습니다. 이미 한 차례의 승리로 이전의 이스라엘처럼 한껏 부풀어 오른 아이성 사람들의 심리를 정확하게 파악했고 그것에 따라서 가장 적절하고도 세밀한 세부작전을 세웠던 것입니다. 우리가 여호수아의 말을 잘 살펴보면 그 속에는 일반적으로는 함께 하기 힘든 두 가지가 함께 들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의 말 속에는 하나님에 대한 확실한 믿음과 사람이 세운 세밀한 계획이 함께 들어있는 것입니다. 


얼핏보면 참 어울리지 않는, 함께 할 수 없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하나님을 향한 절대적인 신뢰를 요구합니다. 그런데, 세밀한 작전은 사람이 세우고 사람이 행하는 것입니다. 서로 배치되는 성격을 가지고 있지요. 그런데, 바로 여기에 균형있고 자유로운 신앙의 비밀이 놓여져 있습니다. 모두가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믿음이 좋다는 많은 사람들을 보면 그저 별생각 없이 믿음으로만 행하려고 하는 모습이 두드려져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 알아서 다 알아서 하실 것이니까 자신은 다른 것은 전혀 생각하지 않겠다고 생각하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복병을 두라는 하나님의 명령처럼 정확하게 정해져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다면 무조건 믿음으로 순종하는 것이 최선이 될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런 경우라고 하더라도 믿음은 절대로 게으름과 무감각함의 이유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또한 상황이나 주변을 전혀 인식하지 않고서 자기 고집대로만,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만 하는 이유가 되어서도 안됩니다. 믿음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나 자기가 믿음대로 따르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항상 이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자신의 믿음이 무분별함과 무례함, 그리고 게으름과 완고한 고집의 이유가 되지 않도록 말이지요. 때로 어떤 경우에는 그 어떤 것보다 우선적으로, 그리고 무조건적으로 하나님 편을 들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는 조금 무분별하게, 그리고 고집스럽게 게으르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상황을 보고 그 상황에 가장 적절한 것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물론 그렇다고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원리 자체를 변경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세밀한 작전을 세우고 그 작전대로 행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이성 뒤에 매복하라’는 하나님 명령 자체를 바꾸지는 않았던 것처럼 말이지요.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면서도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지도자로서의 판단력과 지혜를 마음껏 사용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분명한 확신이 있었지만 그렇게 자기 자리에서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노력도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이 지녀야 할 균형이라고 생각합니다. 성도는 믿음을 핑계로 무책임해 지고 게을러지면 안됩니다. 또한 현실을 핑계로 인간적인 수단이나 지혜에만 의지해서도 안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말씀에 대한 순종이라는 바운더리 안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재능과 은사를 마음껏, 최선을 다해 사용해야 합니다. 이 균형을 유지하기 위한 연습을 열심히 해야 합니다. 


사실  성도의 자유는 바로 이 속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 자유는 절대로 우리가 답답하다고 생각할 정도로 작은 자유가 아닙니다. 이 자유는 우리가 다 누리기도 벅찰 정도로 크고 능력있는 자유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너무 좁게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항상 ‘이것은 이것이다’라고 정해져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니까요. 그렇게 생각하니까 저절로 하나님의 뜻 안의 자유를 좁게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만히 하나님 앞에서 살아온 우리 인생을 살펴 보면 이게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 생각보다 ‘이것은 이거다’라고 명확하게 제시되어 있는 것이 그렇지 않은 것보다 훨씬 적습니다. 우선 우리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는 결혼문제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제가 지금은 저희 집사람과 살고 있습니다만, 그렇다면 성도 여러분, 이게 하나님께서 영원전부터 저에게 ‘너는 김지영이라는 사람과 결혼해야 한다’고 정해놓으셨는데, 제가 그것을 알아차리고는 집사람을 보자 마자 ‘아. 저 사람이 하나님께서 영원 전에 나와 짝지어 놓으신 사람이구나’하고 그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 위해서 집사람과 결혼한 것일까요? 아닙니다, 여러분. 저 그렇게 결혼하지 않았습니다. 저도 여러분하고 비슷합니다. 저도 저희 집사람 잘 꼬셔서 결혼했습니다. 이렇게 보니 마음에 들었고, 사람도 괜찮아 보였고, 저 정도면 목사 마누라로 살아도 별 지장이 없겠다 싶어서 별로 마음도 없어하는 사람 잘 꼬셔서 결혼한 것입니다. 그래도 어떻습니까? 제가 우리 집사람과 결혼한 것은 하나님의 뜻이 분명합니다. 제가 저의 결혼에 대해서 확신하는 것이 있습니다. 제가 저희 집사람과 결혼한 것은 제가 저희 집사람을 고를 때, 다른 것이 아니라 사람 자체만 보려고 노력했기 때문에, 그래도 하나님께서 ‘이 정도면 괜찮다’고 지정해 놓으신 범위 안에서 아내를 고를 수 있었고 그래서 이만큼 행복하게 하나님을 함께 섬기며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말입니다. 성도 여러분, 만약 제가 다른 여인과 결혼했다면 그것은 과연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한 일이 되었을까요? 저는 그렇지 않다고 믿습니다. 만약 제가 하나님의 눈으로 사람을 보고 알맞는 배우자를 고르려고 최선을 다해서 노력했다면 굳이 김지영이라는 여인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게 불신앙에서 나온 불순종이 될 수는 없다고 믿습니다. 저만 그런가요? 우리 우진형제. 잘 대답해 봐요. 우진형제는 지금 최고의 아내와 살고 있지요? 그렇게 된 것이 다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지요? 그렇다면 우진형제가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아내될 자매를 고르고 또 골랐는데, 지금 옆에 있는 그 여인이 아니었다고 한다면 그러면 그건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한 것이 될까요? 그래서, 그 여인은 하나님께서 우진형제와 짝지어 주신 사람이 될 수 없을까요? 그렇지 않지요? 그 여인도 하나님께서 우진형제에게 짝지워 주신 사람이 될 것이고, 그 때도 우진형제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 것입니다. 


저는 직장을 선택하는 일, 그리고 자녀를 낳고 기르는 일 같은 인생의 다른 일들도 똑같다고 믿습니다. 우리가 이런 일들을 내 욕심과 세속적인 가치관과 사고방식에 따라서 결정한다면 그것은 무엇을 선택하고 어떻게 하든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 하는 일이 됩니다. 그렇지만 성도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고 최대한 존중하면서 선택하면 저는 그것은 항상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된다고 믿습니다. 자녀가 몇이 되든, 또 직업이 무엇이 되든 말이지요. 그러니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뜻 안에서 누리는 이 자유가 작은 것입니까? 믿음으로 순종하면서 살아가는 우리의 삶은 우리가 답답하다고 여길 정도로 좁고 답답한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사실 이 안에 참 자유가 있고 가장 놀라운 자유가 있습니다. 이 안에 세상을 이길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자유 안에 세상을 이기게 하는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아직 가진 것이 적어서, 충분히 많지 않아서 자기에게 자유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꾸 더 많은 것을 가지려고 하지요. 그렇지만 말입니다, 성도 여러분. 소유라는 것은 사실 꼭 필요한 선을 넘어가게 되면 그 다음에 더해지는 것은 엄밀하게 자유와는 전혀 상관 없습니다. 필요이상의 것이 우리 삶과 존재에 덧붙여 지게 될 때, 그것들은 분명히 우리를 들뜨게 하고 부풀려지게 합니다. 그래서 감각적으로 그것이 나를 자유롭게 해 준다고 느끼지요. 먹고 싶은 것 마음대로 먹을 수 있고 사고 싶은 것 마음대로 살 수 있고, 또 그것 때문에 많은 사람들 보다 우위에 서게 되니까요. 그렇지만 그 때부터 오히려 우리는 우리의 자유, 정확하게 말씀드리면 참 자유가 아닌 그 자유조차도 그런 것들에 의존하며 살게 됩니다. 그래서 그런 것들에 묶이게 됩니다. 그것이 없어질까 두려워 하게 되고, 그런 것들이 충분치 못한 상태가 될까봐 불안해 하고 이미 꼭 필요한 만큼은 있는데도 여전히 더 많은 것을 갈구하게 되고... 그런 감정들이 생기는 것은 사실 사람들이 이미 자신의 자유를 그런 것들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겪는 증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온 세상을 다 가진다고 한들 그런 불안함과 두려움이 완전히 사라질까요? 그렇지가 않습니다. 사람의 영혼은 지금은 내 손에 있는 것들이 언제든지 나를 떠날 수 있는 불완전하고 불안한 것들이라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으로는 자신이 온전한 자유를 누릴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을 다 가져도 사람은 결코 그것으로 안식할 수 없습니다. 


인생의 참 자유는 자유를 외치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산다고 해서 나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소유의 많음에 달려 있는 것도 아니지요. 인생의 참 자유는 하나님 안에만 있습니다. 역설적인 이야기이지만 사람은 하나님께 묶여 있을 때만 자유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그렇게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하나님 안에서만, 하나님께 묶에 있을 때에만 참 자유를 알 수 있도록 말이지요. 이상한 것 같지만 사실 이것은 너무 당연한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변함 없으시고, 하나님만이 영원하시며, 하나님만이 전혀 부족함이 없는 풍성하신 분이시니 우리 영혼은 그 안에서만 참 자유를 얻을 수 있으니까요. 


사람이 하나님께 묶이지 않으면 사람은 반드시 교만해 지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벗어난 인생은 자신을 믿고 살아갈 수 밖에 없으니 결국 교만해지게 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사람이 자기를 믿고 교만해지면 분별력이 흐려지고 감각이 무뎌져서 꼭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합니다. 그러면 상황판단을 못하게 되고, 묶이지 말아야 할 것에 스스로를 묶어 버리고 맙니다. 그래서 남들은 다 아는 해결책도 찾지 못하게 되고, 아무 것도 아닌 것이 집착하고 고집을 부리게 됩니다. 그러느라고 인생은 참 어리석어지고 좁디 좁은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요즘도 대중매체를 통해서 이런 사람들을 엄청나게 많이 만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사람이 하나님에게 묶이게 되면 죄는 물론이고 이 모든 부작용도 함께 피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자기 인생과 이 세상을 바라보게 되어서 가장 정확하게 본질을 꽤뚫어 볼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어려움 가운데서도 휠씬 쉽게 해결책을 찾을 수 있는 지혜를 가지게 됩니다. 또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에 대해서는 자유로워지니까 그런 것들이 만들어 내는 불안과 염려, 두려움을 이기게 되고, 올곧게 하나님 안에서 발견한 자기가 가야 할 길을 자유롭게 걸어가게 됩니다. 그렇게 인생은 가장 자기다운 인생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믿음으로 순종하면서 사는 인생’ 그것은 정말 좋은 것입니다. 그것이 가장 든든하고 안전하게 사는 인생이고, 또한 가장 큰 자유를 누리는 인생입니다. 그것은 영원한 말뚝에 인생의 배를 묶어 놓는 것이고, 무한히 넓으신 온전하신 하나님의 손 안에서, 그 분의 가장 정확한 눈 앞에서 살아가는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최선을 다해서 믿음으로 순종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자신이나 다른 어떤 사람에게 묶인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께 묶인 인생을 선택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 안에만 있는 참 자유와 든든함을 꼭 여러분을 위한 하나님의 선물이 되게 하십시오. 하나님의 뜻 안에 있는 그 넓고 큰 인생을 여러분의 것이 되게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가 한 번뿐인 이 소중한 인생을 믿음과 순종이 주는 넉넉한 자유와 확실함 속에 살며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내가 믿음으로 순종하며 사는 삶이 가장 자유한 삶이라는 것을 믿게 하소서. 내 눈을 새롭게 하소서. 
  2. 내가 작고 좁은 세상을 보지 말고 넓고 풍성한 하나님을 바라보며 살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