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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금요기도회

2015.06.05. 금요기도회 -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7(사도행전 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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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사도행전 17장 24-29절




지난 주에도 살펴본 것처럼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은 다 하나님이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의 충만하게 흘러넘치는 사랑과 선하심에서 나온 것이지요. 이렇게 보면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아 존재하며 살고 있다는 것은 얼마나 은혜롭고 가슴벅찬 일인지 모릅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자꾸 우리 주변에 덧붙여 지는 것으로 우리 자신의 가치를 평가하려고 하고 또 그런 것들로 하나님의 은혜를 평가하려고 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의미 없고 어리석은 일입니까?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흘러넘치는 사랑과 선하심 덕분에 이 땅에 있게 된 존재들인데 말입니다. 우리가 그 풍성한 사랑과 선하심이 만들어 낸 작품들 중에서도 가장 훌륭하고 아름다운 작품인데, 여기 무엇이 더 덧붙여진다고 한들 그게 어찌 우리의 가치를 높이며, 그렇게 덧붙여지는 것들이 어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진짜 은혜를 평가하는 기준이 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는 우리에게 덧붙여 지는 것은 마치 이런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여기 모나리자 그림이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렇게 보니까 그 모나리자의 얼굴 코 오른 쪽에 점하나를 찍으면 더 아름다워질 것 같아서 아무도 모르게 그 그림에 점 하나를 찍었습니다. 그러면 그 가치가 올라갈까요? 그럴리가 없지요. 오히려 저는 그 그림을 망가뜨린 것입니다. 또 여기 끝이 보이지 않고 깊이를 알 수 없는 커다란 호수가 있습니다. 제가 거기에 물 한 컵을 더 붓는다고 해서 그 호수가 갑자기 더 풍성해지고 또 그 호수의 가치가 올라가겠습니까? 그런 일은 있을 수가 없지요. 우리 자신의 가치와 아름다움, 그리고 온전함에 비한다면 우리에게 무엇이 덧붙여 진다고 한들 그것은 바로 이렇게 모나리자 코 옆에 찍은 점이나, 거대한 호수에 부어진 물 한 컵에 불과합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들은 너무나 귀한 것입니다. 또한 그렇게 덧붙여 주시는 것들도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들이구요.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우리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가치에 비한다면 그런 것들은 정말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런 것들의 있고 없음 때문에 우리 가치가 변하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이것을 알고 이것을 붙들고서 자신을 보고 또 세상을 보는 사람들이 성도들입니다. 성도들만이 이런 복된 눈을 가질 수 있지요. 참된 신앙이 우리에게 참 자유를 주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참된 신앙은 하나님의 눈으로 자신을 보게 만들고 또 이 세상을 바라보게 만들어 줍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만하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참된 가치를 깨달을 수 있게 해 주고,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의 가치도 정확하게 보게 만들어 줍니다. 주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한 영혼이 온 천하보다도 귀하다”고 말입니다. 하나님께 진짜로 귀한 것은 이 세상이 아니라 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 진 것은 사람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정말 얼마나 감사하고 얼마나 귀한 일입니까? 하나님께서 이렇게 부족하고 못나 보이는 나를 그렇게 어마 어마한 가치를 지닌 존재로 만드셨고 또 그렇게 귀하게 바라보고 계신다니 말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것을 알고 믿고 누리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바로 저와 여러분, 성도들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이 특별한 복을 놓치지 않고서 살아가기를 진심으로 소원합니다. 제 경험으로 보면 우리가 아무리 예수를 믿어도 이렇게 달라진 눈으로 우리 자신과 세상을 바라보지 못한다면 믿음 안에 있는 참 자유가 무엇인지 알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가 다른 사람이 여러분에게 조금 뭐란다고 해서 발끈하고 파르르하고 마구 화를 내는 그런 자리에 머물러 있다면 우리는 아직 이 은혜를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그렇게 엄청난 가치와 귀함을 지닌 사람인데, 누가 뭐란다고 해서, 누가 조금 무시한다고 해서 그게 뭐가 그렇게 큰일입니까? 그 가치를 제대로 알아주지 않으니 조금 속이야 상하는 게 사실이지만 그런다고 우리 가치가 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아주 약간 속 상해 한 다음에, 피식 웃어 넘길 수 있습니다. 어차피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니 말입니다. 꼭 이 능력있는 복, 말 그대로 세상을 이길 수 있는 이 복을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 졌다는 것은 이렇게 복되고 영광스러운 것이지만 이것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중요한 특권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계시지 아니하도다”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에 누릴 수 있는 특권입니다. 물론 이 말은 우리가 거리상으로 하나님과 가까이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우리의 상태가 그렇다는 것입니다. 이 말을 로마서 1장 19절에서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바울은 분명히 말합니다.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은 우리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다고 말입니다. 물론 이것은 이 세상이 지어진 순간부터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통해서 보여주신 하나님을 보여주는 증거들을 말하는 것이 분명하지만 그 증거들 중에서 가장 분명한 증거는 바로 우리 자신인 것이 분명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인 자기 자신을 볼 때마다 그 안에서 하나님을 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명확하게 느껴지지 않으실 때가 있다면, 다른 증거들을 찾지 마시고 가만히 여러분 자신에 대해서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죄로 망가지고 흐려진 부정적인 부분들이 아니라 그래도 여전히 아름답고 신비한 부분에 대해서 차분하게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어떻게 하나님에 대해서 고민할 수 있을까? 내가 어떻게 하나님을 믿을 수 있었을까? 여전히 부족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어떻게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반응하며 순종하려고 하는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었을까? 이런 생각을 하다가 보면 그것이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두신 하나님을 알만한 것, 하나님의 형상 덕분이라는 것을 알게 되실 것입니다. 그것보다 더 명확한 하나님에 대한 증거는 없을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에게서 멀리 있지 않습니다. 아니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멀리 계시지 않습니다. 정직하게 말씀드려서 때로 우리가 그렇게 느끼는 것은 우리가 너무나 하나님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고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분의 은혜에 대해서 무감각하게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하나님은 우리가 가만히 우리 자신만 잘 들여다 보아도,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만 가만히 생각해 보아도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로 우리와 아주 아주 가까이 계십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그를 힘 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 너희 시인 중 어떤 사람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이 말은 사도 바울이 하나님이 우리 생각처럼 우리와 멀리 떨어져 계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을 설명해 주기 위해서 인용한 그리스 철학자 두 사람의 말인데요. 실제로 이것은 그 당시 사람들이 신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공통된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성경에도 그대로 나타나 있습니다. 무엇을 뜻합니까? 인간 속에는 본래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모든 사람이 이미 알아차리고 있다는 뜻입니다. 신을 믿는 사람들이라면 자신이 존재하고 살고 움직이는 모든 것들이 자기 힘으로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신을 힘입고서야 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있고, 심지어는 자신들을 그 신의 자녀로 까지 생각하고 있으니까요. 물론 그 안에 있는 죄 때문에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제대로 알아차리지는 못했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어떻습니까? 성도 여러분. 우리는 너무나 잘 압니다. 우선 우리는 우리가 우리 하나님 덕분에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었고, 지금도 살아가고 있고 또 이렇게 저렇게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압니다. 믿는 사람들은 말하지요.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입니다. 정말 그 말이 맞습니다. 그렇지만 이 말을 진실된 의미에서 그 말을 제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면서 믿음 가운데서 고백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정말 하나님이 나의 삶에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실 뿐 아니라, 그 분께 내 존재가 빚져있고 또 내 생명과 심지어는 나의 움직이는 일까지도 그 분께 빚져있다는 것을 확실히 인정하고 인식하면서 살아간다면 그 사람의 삶은 하나님 앞에서 어떤 모양이 될까요? 분명히 정말 조심스럽고 겸손하며, 그러면서도 감사와 감격이 넘칠 것입니다. 그저 오늘 하루를 나에게 주시고, 그 하루를 살게 하신 것만으로도 풍성한 마음이 되어서 살아갈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자신이 하나님께 무엇을 드린다고 한들 그것조차도 하나님께 빚져 있는 것임을 알기 때문에 무엇을 드리고 바친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을 것입니다. 적어도 그렇게 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또한 그런 모습으로 살기 위해서 기쁘게 헌신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 생명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선물이라고 말하면서도 여전히 자기 자신에 대한 세상의 사고방식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말은 그렇게 하지 않아도 여전히 ‘내 인생은 나의 것’이라는 노래를 자신의 주제가처럼 부르면서 살아갑니다. 자기 인생의 계획을 자기가 세우고, 자기 능력에 의지해서 그 계획을 이루어 가며, 필요할 때는 세상의 불법과 편법도 슬쩍 끼워 넣지요. 그렇게 얻은 것은 내가 내 힘으로 얻은 것이니 내 마음대로라는 생각에 따라 마음대로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 사용하구요. 그러다가 인생이 조금이라도 뒤틀리기 시작하면 못 견디어 합니다. 세상이 무너진 것처럼 좌절하고 온 세상을 원망하면서 화를 내기도 합니다. 부족함이 느껴지면 안달복달하고 불평으로 일관합니다. 너무 극단적인 이야기 같지만 정말 많은 성도들이, 자신의 생명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라고 말하는 성도들이 오늘 그런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말로는 그리고 생각으로는 하나님을 믿고 의지해서 살아간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그 마음 속에는 하나님을 은과 금으로 만든 우상처럼 여기는 그런 마음이 남아있고, 생각의 힘이 너무 강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가 하나님께 단순히 우리 생명을 빚지고 있는 정도라면 그럴 수도 있습니다. 살아가고 존재하고 또 움직이는 것까지 모두 하나님 덕분에 가능한 정도라면 그래도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분명히 말합니다. 우리가 그 분의 소생이라고 말입니다. 소생이 무슨 뜻입니까? “소생, 장유진이옵니다” 할 때, 그 소생이 아닌 것은 다 아시겠지요? 자녀라는 뜻입니다. 아들과 딸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단순히 하나님께 우리의 생명을 비롯한 모든 것을 빚지고 있다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이야기입니다. 단순히 의존되어 있는 상황이라면 불안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그렇게 의지하고 빚지고 있는 사람이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라면 어떨까요? 그것은 오히려 가장 든든한 일이 됩니다. 아버지가 어머니가 생명만 줘 놓고 나 몰라라 하실 리는 없으니까요. 생명을 주었으니 그 생명의 유지와 자라남에 필요한 모든 것을 끝까지 변함없이 책임지는 존재, 그것이 바로 어머니와 아버지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우리가 하나님의 소생, 그러니까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만큼 든든한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만약 우리가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확신하게 된다면, 그것은 곧바로 우리의 평안과 든든함의 이유가 됩니다. 이 마음 속에 그 흔들리지 않는 확신이 자리잡게 됩니다. 나는 흔들려도 우리 아버지는 흔들리지 않으시고, 정말 말 그대로 모든 것을 끝까지 책임지신다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말의 가장 중요한 의미 중 하나는 바로 하나님을 이런 나의 아버지로 안다는 뜻이고 또 나를 그런 하나님의 자녀로 인식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하나님을 얼르고 달래야 나에게 무언가를 주시는 그런 분으로, 금이나 은으로 사람이 만든 마음도 생각도 우리를 향한 지극한 사랑도 없는 그런 분처럼 생각하고 믿는다면 그것은 얼마나 커다란 비극이며 손해입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우리의 생명과 존재, 그리고 움직임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하나님께 빚지고 있습니다. 그만큼 하나님은 우리와 가까이 계시지요. 그러나, 그렇게 우리가 빚지고 있는 분은 어떤 신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런 점에서 이 관계는 빚쟁이와 채무자 사이의 불안한 관계가 아니라 너무나 인격적이고 든든한 사랑의 관계입니다. 항상 이 하나님을 더욱 더 가까이 하며 사십시다.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하나님께서 나를 바라보시는 그 아름다운 눈을 닮아가며, 나에게 생명과 존재, 그리고 모든 움직임을 주시며, 거기 필요한 모든 것을 책임지고 공급해 주시는 아버지를, 그 분의 자녀로서 신뢰하면서 이 세상 가장 확실하고 든든한 길, 가장 복된 이 길을 기쁨으로 가십시다. 


멀리 계시지 않고 가까이 계시는 우리 아버지 하나님을 더욱 더 가까이 하면서 살아서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복을 제대로 누리고 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