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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새벽예배

2015.06.05. 새벽예배 - 성경읽기와 묵상(룻기 1-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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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일 : 2015년 6월 5일 금요일




오늘부터 룻기로 넘어가게 되는데요. 룻기는 우리가 주일예배를 통해 이미 한 번 함께 공부하며 은혜를 나눈 그런 책이라서 훨씬 익숙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 룻기는 ‘인애’ 혹은 ‘인자’라고 부르는 ‘헤세드’의 책입니다. 이 헤세드란 ‘언약적인 사랑’을 말하는데요. 이 사랑이 그저 감정이나 자기 의지에만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절대로 깨질 수 없는 언약에 묶여 있기 때문에 헤세드는 항상 도에 넘치는 사랑이 되고, 넘치도록 후히 베푸는 사랑이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자연적인 사랑이 아닌 헤세드이고 또한 성도들 사이의 사랑도 헤세드인데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은 물론이고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랑도, 그리고 우리가 서로를 사랑하는 사랑도 모두가 다 이렇게 도에 넘치는 풍성한 사랑이고 좀처럼 끊어지지 않는 언약적인 사랑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성도들에게 ‘하나님을 사랑하라’라고 명하고 있고 또한 ‘서로 사랑하라’고 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일이 언약을 지키는 일이니 언약을 가운데 놓고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사랑하는 것이 의무에 속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참으로 하나님의 헤세드를 아는 사람들에게 언약적 사랑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일은 절대로 그 일을 의무로만 여겨지지 않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과하게 사랑하고 또 사람을 과하게 사랑하는 일을 기뻐하고 즐거워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 안에 하나님의 사랑을 닮은 사랑이 뚜렷해지고 진해지는 것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룻기가 기록된 시기의 이스라엘은 말 그대로 최악의 상태였습니다. 커다란 흉년이 나서 예루살렘에까지 식량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엘리멜렉이라는 사람이 가족과 함께 이방 땅인 모압지방까지 이사를 가야 할 형편이었지요. 그런데, 이사한 지 십년 만에 엘리멜렉이 죽고 말론과 기룐이라는 두 아들이 모두 모압여인과 결혼을 하게 되지만 얼마 가지 않아서 두 아들마저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그렇게 세 여인만이 대책없는 인생으로 덩그러니 남겨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드디어 예루살렘에 풍년이 찾아왔다는 소식이 들려옵니다. 긴 흉년 끝에 찾아온 풍년은 단순한 풍년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제 드디어 세 미망인들처럼 아무런 소망이 없었던 이스라엘에 희망이 싹트기 시작했다는 그런 뜻이었습니다. 그렇지요? 하나님께서 소망을 갖게 해 주셔야 사람들은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참 소망은 인간이 만들어 낼 수 없는 것입니다. 


중간에 맡며느리 오르바는 자기 가족에게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둘째 며느리인 룻은 끝까지 시어머니를 좇아갑니다. 그것은 시어머니에 대한 헤세드의 표현인 동시에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자 하는 의지의 표현이었습니다. 며느리를 돌려 보내려는 시어머니의 아름다운 마음씨, 그리고 그 시어머니를 끝까지 따르려는 며느리의 아름다운 사랑에 하나님께서도 응답하셨습니다. 두 사람의 헤세드에 하나님께서도 헤세드로 응답해 주셨던 것입니다. 두 사람이 베들레헴에 도착하는 때와 딱 맞춰서 보리추수가 시작되게 섭리하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마음으로 사는 사람들을 결코 모르는 척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서 하나님을 닮은 마음을 보는 것을 가장 기뻐하시는 분이시니까요.  

  

하나님의 두 사람에 대한 사랑은 계속 이어집니다. 룻이 이삭을 줍다가 우연히 엘리멜렉의 먼 친척이면서 동시에 유력한 사람이었던 보아스를 만나게 해 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뭐 우리가 흔히 말하는 대로 우연을 가장한 필연이나 그런 것이 아니라 두 사람의 입장에서는 순전히 우연이지만 하나님의 섭리에 속하는 일이었습니다. 보아스는 룻에게 특별한 배려를 해 주었고, 룻은 보아스의 배려에 몸둘 바를 몰라 합니다. 그 때 보아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네 남편이 죽은 후로 네가 시어머니에게 행한 모든 것과 네 부모와 고국을 떠나 전에 알지 못하던 백성에게로 온 일이 내게 분명히 알려 졌느니라” 말인 즉, 그럴만 하니 내가 그렇게 해 주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네가 시어머니에게 베푼 헤픈 사랑이 나를 감동시켜서 나도 너에게 이렇게 해 주는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유유상종이라는 말은 좋은 경우에도 쓸 수 있나 봅니다. 헤세드의 사람이 헤세드의 사람을 알아봅니다. 그리고 그에게 풍성한 헤세드로 갚아 줍니다. 우리가 살다가 이런 헤픈 사랑, 넉넉한 사랑을 베풀기 힘들어 하는 이유는 이 세상에 그렇게 사는 사람이 많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살면 나만 손해라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도 여러분, 이 세상에 좋은 사람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좋은 사람들은 이 세상의 대다수의 사람들과는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는 삶의 가치를 알아 봅니다. 그렇게 선한 사람이 선한 사람을 자극하고, 선함은 또다른 선함의 이유가 되고.... 그렇게 이 세상에는 선한 순환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 경험을 보면 분명히 내가 그렇게 뿌린 씨앗은 언젠가 열매가 되어서 자신에게로 되돌아 오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살아계셔서 그렇게 섭리하시기 때문입니다. 아니면 어떻게 하느냐구요. 그래도 우리는 괜찮지 않습니까?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계시고, 또 하늘의 상이 있으니 말이지요. 그리고, 우리가 행하는 그런 선함과 헤픈 사랑이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을 조금이라도 밝고 향기롭게 만든다면 그것으로 족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어차피 우리가 얻고 누리는 모든 것들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렇게 쓰라고 주신 것이니까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세상의 원리와 논리를 따라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헤픈 사랑을 받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 무엇도 받으신 것이 없지만 아들도 주시고, 생명도 주시고, 또한 모든 것을 다 주셨습니다. 지금도 주고 계시구요. 성도는 그래서 ‘받은 만큼 준다’는 세상의 계산 방식을 잊어버려야 합니다. 받지 않아도 주고, 적게 받아도 많이 주고... 그렇게 우리 하나님의 사랑을 흉내내면서 살아야 합니다. 요한사도는 하나님이 사랑이시기 때문에, 아들을 내어 주시는 헤픈 사랑이시기 때문에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 그렇게 하나님을 흉내내어 헤프게 사랑하는 사람들만이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이라고 말했습니다. 부정적으로는 서로 사랑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모른다고 말했구요. 하나님께서는 참으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사랑 안에 숨겨놓으셨습니다. 서로 사랑할 때, 사랑이신 하나님을 세상에 드러내 보여주고 자신도 정말로 하나님을 아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복을 얻도록 말이지요. 


많이 사랑하십시다. 조금 받아도 많이 주고, 받지 않아도 주면서 인색하게 움켜쥔 손을 조금 더 넉넉하게 펴서 하나님께 받은 사랑을 다른 이들에게도 나눠 주면서 그렇게 사십시다. 그러면 우리 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이루어질 것이고, 우리는 진실로 하나님을 알고 더 풍성히 아는 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오늘도 먼저  사랑하고 또 더 많이 사랑하는 하루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