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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주일예배

2015.06.14. 주일오전 - 에발산에 한 제단을 쌓으니(여호수아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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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여호수아 8장 30-35절




아이성과의 두 번의 전투가 모두 끝이 났습니다. 첫번째 전쟁은 이스라엘의 패배였고, 두번째 전쟁은 이스라엘의 완승이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아이성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수중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이 승리는 자신들의 죄와 교만함 때문에 경험했던 쓰라린 패배 뒤에 찾아온 것인지라 더 뜻깊고 값진 것이었는데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 승리가 더 기쁘고 신났던 것은 이번에는 하나님께서 사람과 성 자체를 제외한 성안의 모든 귀한 것들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선물로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전쟁에 참가했던 3만명의 군사들은 저마다 아이성에서 취한 값진 전리품들을 손에 들고 이스라엘 진영으로 개선행진을 하며 돌아오고 있습니다. 나머지 모든 백성들은 그들이 그렇게 되돌아 오는 것을 환호하며 맞아 주었구요. 그 날 밤 이스라엘의 진영 안에서는 승리를 축하하는 성대한 파티가 벌어졌습니다. 전리품으로 가져온 짐승들을 잡아서 마음껏 먹고 마시며 즐거워 했고, 또 서로 서로 그 귀한 것들을 나누고 또 전쟁의 경험을 나누느라 하루 밤이 모자랄 지경이었습니다. 


사람들의 상식대로라면 이야기는 이렇게 이어져야 할 것입니다. 큰 승리 뒤에는 항상 승리를 자축하며 전리품들을 나누는 성대한 파티가 이어지는 게 상식이니까요. 그런데, 여호수아는 그렇게 전쟁을 기뻐하고 축하하기 전에 사람들을 모두 모으고 굉장히 엄숙하고 진지한 예식을 하나 행합니다. 꽤 멀리 떨어진 에발산까지 사람들을 전부 데리고 가서 하나님 앞에서 제사를 드리고 또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의 언약을 다시 세웠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여호수아서를 통해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걸어온 길을 따라 왔습니다. 요단강을 건너고, 여리고성을 정복하고, 그 다음에는 아이성 전투에서 패배했다가 다시 커다란 승리를 거두고... 이것이 우리가 뒤따라 온 이스라엘의 여정이었지요. 물론 그 각각의 사건은 따로 떨어진 별개의 사건이었지만, 그 모든 사건의 흐름이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에게 주는 분명한 메세지 하나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은 언제 하나님이 주시는 승리를 얻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 순종할 때는 흘러 넘치는 요단강을 걸어서 건너고 손 하나 대지 않고 그 엄청난 여리고 성을 정말 싱겁게 얻을 수 있었지만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고 교만과 욕심에 빠졌을 때는 이길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한 전쟁에서도 패했고 그 작은 패배로 완전히 절망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또 다시 하나님께 순종하였을 때는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이런 경험들은 예전에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맺었던 언약이 그저 하나의 형식적인 약속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그들의 구체적인 삶의 모습과 현실을 좌우하는 가장 중요한 것임을 몸으로 배우게 해 주었던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들, 그러니까 아직 하나님과 직접 언약을 맺어본 적이 없는 출애굽 2세대들을 하나님과의 언약관계 안으로 집어 넣는 일이 그 무엇보다도 급하고 중요하다는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그래서, 전쟁이 끝나자 마자 모든 백성들을 소집해서 하나님과 언약을 체결하는 예식을 맺었던 것입니다. 원칙적으로라면 언약은 자동적으로 대대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버지와 맺은 언약은 그 아들에게도 효력이 그대로 유지됩니다. 그래서 이 일은 어찌보면 불필요한 일처럼 보입니다. 같은 언약, 그것도 효력이 사라지지 않은 언약을 한 번 더 맺는 것이니까요. 그런데도, 여호수아는 온 이스라엘을 불러 모아서 언약을 새롭게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우리 신앙에 대한 중요한 사실 하나를 배우게 됩니다. 뒤에서도 다시 생각해 보겠지만 우리가 교회 안에 있다는 것, 그리고 믿는 부모의 자녀로 태어났다는 것은 정말 중요하고 복된 일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는 이미 언약 안에서 우리를 보고 계신다는 뜻이고 그래서 교회 바깥에 있는 사람과는 전혀 다르게 특별대우를 하고 있다는 뜻이니까요.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앙이 참 신앙이 되려면 결국 그 사람이 직접 하나님 앞에서 뜻을 정하고 개인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일이 꼭 필요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교회의 하나님, 우리 가정의 하나님으로 뿐만이 아니라 바로 내가 섬기고 순종해야 할 나의 하나님으로 받아들이고 인정하며 개인적으로 헌신하는 일이 꼭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다 함께 교회 안에 있지만, 그것이 우리 모두를 저절로 하나님의 참된 백성으로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 일을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님과 나 사이의 개인적이고 인격적인 관계가 필요합니다. 혹시 우리 중에 아직도 개인적으로 복음을 통해서 스스로 하나님의 백성됨을 분명히 하지 못하신 분들이 있다면 꼭 그 과정을 거치시기 바랍니다. 도움이 필요하시다면 언제든지 개인적으로 도와 드리겠습니다. 그냥 계시지 마시고 꼭 저를 찾아오시기 바랍니다. 얼마나 오래 예수를 믿었고 또 무슨 직분을 가지고 있던 간에 있는 그대로의 복음을 듣고 개인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과정을 거치지 않았다면 꼭 한 번은 그렇게 하셔야만 합니다. 


 에발산에 세워진 제단 위에서 번제와 화목제, 그러니까 참된 헌신과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를 위해서 제사를 드린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제 본격적인 언약예식에 들어갑니다. 우선 여호수아는 돌 위에 모세가 기록한 율법을 다시 기록하게 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그렇게 하도록 했습니다. 그렇다면 여호수아는 왜 그렇게 이미 있는 율법을 다시 기록했고, 또 백성들에게 그 지루한 과정을 모두 지켜 보게 했을까요? 그 이유는 분명합니다. 그것은 지금 옛 언약과 똑같은 언약이 새로운 돌판에 다시 새겨지듯이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에도 옛 언약이 새롭게 새겨져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회복이란 사실 전혀 새로운 무언가를 얻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항상  참된 옛 것으로 되돌아 가는 것입니다. 그 참된 옛 것을 다시 새롭게 나의 것으로 만드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 신앙의 회복입니다. 저는 이 일이야 말로 매주일 교회에서 일어나야만 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비록 모든 주일 날 드려지는 예배가 그 전 주일에 드려진 예배와 같다고 하더라도, 그리고 그 예배를 통해 똑같은 기도가 드려지고 똑같은 성경이 설교된다고 하더라도 그 옛 것들을 새롭게 내 마음에 새기고 영혼에 새겨넣는 일이 매주일 하나님 앞에 예배하는 일을 통해서 일어나야 합니다. 사람은 항상 동일한 존재가 아닙니다. 아무리 대단한 은혜를 경험한다고 하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기억이 흐려지면서 감정도 흐려지고 그러면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헌신도 흐려지게 마련이지요. 주일은 어떤 의미에서 그런 일을 막으려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옛 것을 새롭게 받아들여서 다시 새로워지고 또 새롭게 회복되게 하라고, 그렇게 항상 새 것으로 남아 있으라고 말입니다. 그렇게 해서 신앙이 구태의연해 지고 무미건조해는 일을 방지하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이 회복은 주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일어납니다. 모세에게 준 율법이 새 돌판에 다시 새겨진 것처럼, 우리 마음에 성경의 옛 진리가 새롭게 새겨질 때, 그 일을 통해서 우리는 다시 참 하나님의 백성의 자리, 또 자녀의 자리로 되돌아 가고, 우리 영혼은 다시 풍성한 생명을 회복하게 됩니다. 우리의 예배가 매주일 우리에게 이런 은혜의 기적이 일어나게 하는 놀라운 사건이 되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 말씀이 기록되고 있는 동안, 그리고 언약이 다시 세워지는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은 레위인들이 맨 언약궤를 중심으로 해서 절반은 에발산 쪽에, 그리고 나머지 절반은 그리심산 쪽에 서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오늘 본문이 아니라 신명기 27장 11절에 기록되어 있는데요. 사실 지금 새롭게 채결되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의 언약은 모세가 명령했던 것입니다. 그 때 거기서 모세는 나중에 가나안 땅에 들어 가거든 하나님과 다시 언약을 맺되 거기서 백성들의 절반은 그리심산 쪽에 나머지 절반은 에발산 쪽에 서게 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모세는 그렇게 하는 것은 그리심산에서는 복이 그리고 에발산에서는 저주가 선포되게 하기 위해서라고 분명하게 말합니다. 


이것이 이야기해 주는 바는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누구든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삶이 하나님이 주시는 복으로 채워지게 하느냐 아니면 하나님의 저주로 채워지게 하느냐 하는 것은 전적으로 자신의 선택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뜻과 세상의 길 중에서 무엇을 선택하느냐에 따라서 그 언약 안에서 사는 자기 자신의 구체적인 삶의 모양은 완전히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스스로를 그리심 산에 세울 수도 있지만, 반대로 에발산에 세울 수도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놀랍게도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들 사이에 있는 언약 자체가 하나님의 복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저주도 함께 이야기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언약은 애초부터 순종은 복으로 이어지고 반대로 불순종은 저주로 이어진다는 것을 분명하게 가르쳐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된다는 것은 이 두 가지 조건을 모두 받아 들이는 것을 말합니다. 애석하게도 복된 쪽만 선택하고 그렇지 않은 쪽은 받아들이지 않을 방도는 없습니다. 34절을 보면 그것을 분명하게 말해주고 있는데요. 지금 전쟁에 승리해서 한 껏 기쁨과 흥분 속에 빠져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모두 모아놓고 여호수아는 ‘율법책이 기록된 모든 것대로 축복과 저주하는 율법의 모든 말씀을 낭독’했습니다. 축복의 말씀을 듣는 일은 참 즐겁고 기쁜 일입니다. 그것은 승리의 기쁨을 더 높여주는 역할을 하겠지요. 그러나 저주의 말씀을 듣는 일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오히려 그런 기쁨과 흥분에 찬물을 끼얹는 일입니다. 여호수아도 이것을 몰랐을 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는 축복의 말씀 뿐만 아니라 저주의 말씀도 그대로 낭독했습니다. 그러면 여호수아가 백성들을 사랑하지 않아서 그렇게 했을까요? 아니면 일부러 심통이 나서 그랬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여호수아는 백성들을 사랑했습니다. 정말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가감 없이 율법에 기록된 모든 것들, 그러니까 축복의 말씀과 저주의 말씀 모두를 다 들려주고 그들이 그리심산과 에발산 둘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도록 했던 것입니다. 만약 이스라엘 백성들이 좋은 이야기만 듣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면 어떻게 될까요? 당장은 좋겠지요. 기분 상할 일이 전혀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나중에 심각한 부작용이 나타날 것입니다. 하나님의 복된 백성으로 살아가는 일에 대해서 오해하게 되고, 그래서 그리심산을 떠나 에발산 쪽으로 가게 되기가 훨씬 더 쉬울 것입니다. 


축복의 말씀은 그 말씀을 들려주는 쪽이나 듣는 쪽이나 모두 불편하고 힘들 것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저주의 말씀이나 경고의 말씀은 그렇지 않습니다. 말하는 사람도 좋아서 하는 사람이 없고, 듣는 사람도 그 말씀을 유쾌하게 듣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인지 성도들을 마치 소비자나 고객으로 생각하는 오늘날의 교회들 안에서는 죄에 대한 이야기, 저주에 대한 이야기를 듣기가 얼마나 힘든지 모릅니다. 위로와 축복의 말씀만 넘쳐나고 있지요. 그래서, 교회 안에는 항상 가벼운 웃음 소리와 부담 없는 걸음들로 채워져 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실 이렇게 하는 교회들이 그렇지 않은 교회들보다 훨씬 더 많고 또 그렇게 잘 하는 교회들일 수록 많은 성도들이 모여드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다 보니 그렇게 하는 것이 정답이라고 생각되어지게 되고, 잘 하는 것이라고 생각되고 있지요. 그러나, 우리는 정말 진지하게 그것이 과연 교회가 성도들에게 들려주어야 할 이야기이고, 또 그것이 성도가 교회에서 들어야 할 하나님의 말씀의 전부인지를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참으로 성도들을 사랑하는 교회라면 그 교회는 성도들을 그리심 산 앞에 뿐만 아니라 에발 산 앞에도 세울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축복의 말씀 뿐만 아니라 저주의 말씀도 들려주어야 합니다. 망하라고 그러는 게 아니지요.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절대로 망하는 길을 가면 안된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입니다. 복된 길을 선택하게 하기 위해서 입니다. 우리 때는 그런 것이 없었는데, 요즘 아이들은 오답노트라는 것을 만듭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정답노트는 없지요. 왜 그럴까요? 자기가 뭐가 틀린 지를 확실히 알아야 나중에 똑같은 실수를 하지 않게 되기 때문입니다. 학생들이 다시 자기가 틀린 문제를 보는 것이 그리 기쁘고 즐거운 일이 아니라고 해도 그렇게 해야 모르는 것을 알게 되고, 그래서 더 좋은 성적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에발산의 저주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완벽한 오답노트였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도 절대로 변하지 않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거룩하신 하나님이시고 거룩하신 하나님으로서 우리를 대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무리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뜻에 반대되는 길을 갈 때, 그것을 기쁘게 여기시고 그런 사람에게 복을 주실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이 그런 길을 가지 말라고 축복의 말씀 뿐만 아니라 저주의 말씀도 들려 주신 것입니다. 오해하면 안됩니다. 우리 하나님은 절대로 죄 지으면 벌 주시겠다고 협박하는 법관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항상 당신의 자녀들이 복된 길을 가기를 바라시는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그래서, 죄에 대한 말씀, 저주의 말씀도 하나님의 종들을 통해서 듣고 듣고 다시 듣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로 하나님의 자녀라면 하나님의 그런 심정을 헤아릴 줄 알아야 합니다. 


여호수아가 그렇게 빠짐 없이 율법에 기록된 대로 축복과 저주의 말씀을 모두 낭독할 때, 모든 백성들은 그 모든 말씀들을 빠짐 없이 듣고 있었습니다. 축복의 말씀 뿐만이 아니라 저주의 말씀도 전부 귀 기울여 듣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설교자들이 왜 강단에서 축복의 말씀 뿐만 아니라 저주의 말씀도 함께 가감없이 전해야 하고 성도들은 왜 그 모든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할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 두 가지 말씀 모두가 성도들에게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안다면 우리는 우리 귀에 들려오는 설교들을 스스로 걸러내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물론 때로 설교자들도 인간인지라 틀릴 때가 있게 마련이고 그런 것들은 분별력있게 취사선택해야 하겠지만, 단지 그 설교가 나를 기분좋게 하거나 혹은 그 반대라는 이유로 취사여부를 내가 결정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은 그런 권한을 우리에게 주지 않으셨습니다. 그 권리를 우리에게 주면 우리가 그 권리 때문에 스스로를 망쳐버릴 것을 분명히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청중들은 너무 취향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그 취향을 따라 설교를 골라 듣는 일을 너무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단순한 것은 좋아하지만 복잡한 것은 싫어합니다. 재미있어야 좋아하고 재미 없으면 아얘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감성적인 것은 좋아하지만 논리적인 것은 싫어합니다. 짧으면 짧을 수록 좋아하고 길면 무조건 싫어해서 스스로도 길이가 곧 은혜라고 말할 정도입니다. 받는 것에 대한 설교는 좋아해도 드리는 것에 대한 설교는 기피합니다.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이것이 지금 한국교회의 큰 흐름이 되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물론 사람마다 취향이 있고 그 취향을 아얘 없앨 수는 없습니다. 그 취향은 때로 하나님의 귀한 도구가 되기도 하구요.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자기 권리처럼 사용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전혀 올바른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의 33절과 35절을 보면 그 때 에발산에서 하나님과 다시 언약을 맺은 사람들의 구성이 어떠했는지를 구체적으로 이야기해 주고 있는데요. 그 자리에는 온 이스라엘 그러니까 일반백성들과 재판장들뿐 아니라 놀랍게도 이방인들까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35절로 가보면 거기에는 여자들과 아이들과 이스라엘 백성들과 동행하고 있던 사람들까지 모두 포함되어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신분도 지위도, 성별도 나이도 모두 다르고 심지어는 이방인들과 거류민들까지도 그 자리에 함께 있었고 이들도 모두 하나도 생략되지 않고 낭독되는 축복과 저주의 말씀들을 듣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그 모든 차이점을 넘어서서 모두 한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오늘날의 교회입니다. 그리고 그 날 에발산에서 하나님의 율법이 낭독되었듯이 오늘날 교회 안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분명히 그 때처럼 오늘날도 교회 안에는 전혀 다른 사람들이 함께 모여 신앙을 가꾸어 가고 있습니다. 저는 분명히 압니다. 오늘 교회 안에는 이미 거듭나서 예수를 믿고 온전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된 사람도 있지만,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 섞여 있었던 이방인들처럼 아직 거듭나지 않았고 예수를 믿는 믿음도 확실치 않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또 어떤 분은 그 믿음이 많이 자라서 정말 하나님의 진리를 알아가고 또 믿는 재미와 능력을 아는 분들도 계시지만, 여전히 믿음이 너무 어려서 하나님 말씀이 뭐라고 말하는지에 대해서는 별다른 관심조차 없는 분도 계십니다. 그렇다면, 성도 여러분. 어떤 사람은 믿음이 확실하기 때문에 더 열심히 들려오는 주의 말씀에 귀를 기울어야 하고, 반대로 다른 사람은 믿음이 별로 없기 때문에 하나님 말씀에 귀를 덜 기울여도 괜찮을까요? 어떤 사람은 거듭났으니 말씀을 들어야 하지만 나는 아직 그렇지 않으니 그럴 필요가 없을까요? 


우리는 그 날 에발산과 그리심산 앞에서 심지어는 이방인들과 거류민들, 그리고 아이들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들이 들려오는 하나님의 말씀을 빠짐 없이 듣고 있었다는 것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교회 안에 있는 사람이라고 해서 모두가 다 구원을 받은 사람인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일단 교회 공동체 안에 들어오면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들까지도 하나님의 백성들과 똑같이 대하십니다. 교회 바깥에 있는 사람들과는 다른 특별대우를 해 주십니다. 똑같은 은혜의 기회를 주시고 특별한 관심을 기울여 주십니다. 여러분이 나는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확실치 않는데도 하나님께서 복주시고 은혜를 주셨다고 느끼는 것은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저 교회 안에 있다는 것이 별것 아닌 것 같아도 하나님과의 관계를 생각해 보면 결코 작은 일이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모든 차이점들을 넘어서서 하나님 앞에서 행해야 할 의무도 생겨납니다. 그 중의 하나가 바로 들려주시는 하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말씀을 존중하고 최선을 다해서 그것을 따라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앙의 성숙도 여부나 심지어는 신앙의 유무와도 상관 없이 말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한 나라의 국민이 되면 누구나 그 나라의 법을 잘 알아야 하고 또 지켜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인데요. 하나님께서는 교회 안에 있는 하나님의 언약백성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스리시고 은혜주시고 복주시기 때문에 교회 안에 있는 우리는 그렇게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소중히 여기고 나를 위한 말씀으로 들어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신앙 안에서는 일단 모든 취향이나 입장, 그리고 자신의 영적인 상태라는 이런 저런 다른 개인적인 조건들을 내려놓을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누구를 막론하고 최선을 다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그것을 내가 하나님 안에 머물기 위해서 꼭 필요한 나를 위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여기고 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시고 우리는 듣는 것, 그것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가 생겨나고 또 깊어지기 위한 가장 중요한 기초이기 때문입니다. 


아이성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고, 수많은 값진 물건들을 전리품으로 취하고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이었지만 그들은 축하 잔치를 벌이기 전에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시 한 번 견고하고 확실하게 세웠습니다.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하나님의 언약백성이 되는 자리로 갔습니다. 그것을 위해서 그들은 그리심 산 뿐만 아니라 에발 산 앞에도 섰습니다. 그리고, 축복의 말씀 뿐만 아니라 저주의 말씀도 모두 듣고 또 받아들였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복된 백성이 되고 절대로 하나님의 징계와 저주의 대상이 되지는 않겠다고 스스로 하나님 앞에서 다짐했습니다. 신앙이 있건 없건, 깊건 얕건, 이스라엘 백성이건 아니건, 아이이건 어른이건 간에 모두가 말씀 앞에 자신을 세우고 새롭게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고, 여호와 하나님을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로 삼았던 것입니다. 그것은 이들이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하나님의 친백성이 되는 것이 그 무엇보다도 우선되어야 할 정도로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신앙은 그저 수동적으로 가만히 있으면 점점 더 능력을 잃게 되고 의미가 없어지게 됩니다. 어떻게 되겠지 하고 가만히 있으면 어떻게 되는 것이 아니라 아무 것도 않됩니다. 우리는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향해 움직여 가야 하고, 또 스스로 끊임 없이 자신을 하나님의 백성의 자리로 보내고, 하나님을 참 하나님의 자리에 모셔 들이는 일을 반복해야 합니다. 절대로 여러분의 신앙을 여러분의 취향이나 기분이 좌우하게 내버려 두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이 어떻든 언제나 여러분 자신을 하나님 앞에 세우는 일을 계속하시고, 여러분이 하나님과 맺은 그 귀한 언약을 확인하고 또 확인해서 더 분명하고 견고하게 만들어 가시기 바랍니다. 들려 주시는 모든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겸손하게 믿음을 더하면서 말이지요. 우리가 그렇게 말씀에 귀 기울이며 하나님의 언약 안에 머물 때, 하나님께서도 우리 여호와 하나님으로 항상 하나님의 자리에 계셔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사는 이 귀하고 복된 특권을 놓치지 마시고, 들려오는 말씀에 귀 기울이며 그 말씀을 붙들고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하나님, 내가 말씀의 판단자가 아니라 청취자가 되게 하소서.
  2. 항상 내가 하나님의 언약 가운데 있는 복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을 잊지 말게 하소서.
  3. 가만히 있지 말고 항상 새롭게 하나님 앞에 나를 세우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