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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주일예배

2015.06.21. 주일오전 - 여호와로 맹세하였으니(여호수아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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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여호수아 9장 1-27절 





아이성 전투에서 승리한 후, 이스라엘 백성들은 에발산에서 제사를 드리고 하나님과 의 언약을 새롭게 했습니다. 그것은 이제 하나님만 섬기는 사람들이 되겠다는 결단이었습니다. 그런데, 에발산에서의 언약예식이 끝나자 마자 가나안 땅 안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반감이 노골화되기 시작했고 구체적으로 이스라엘을 가나안 땅에서 몰아내기 위한 연합군까지 결성되었습니다. 물론 이것은 가나안 족속들의 입장에서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오고 성을 하나 하나 정복해 들어오니까 당연히 취할 수 밖에 없었던 군사적인 대응이었지만, 실제로 이런 갑작스러운 움직임에는 영적이고 신앙적인 이유가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와 아이성을 정복하고 여호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기 전까지 가나안은 바알들과 앗세라의 땅이었습니다. 가나안 족속들이 자기들의 신인 바알과 앗세라에게 제사를 드리던 땅이었지요. 그런데, 갑자기 몰려 들어온 히브리인들이 굉장히 큰 축에 속하는 성 두 개를 차지하더니 그 땅의 입구인 에발산에서 자기들의 하나님인 여호와에게 제사를 드립니다. 그렇다면 이런 행동은 가나안 족속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졌을까요? 그것은 정치적으로 뿐만 아니라 영적으로도 심각한 도전이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미 주인이 분명한 땅에 들어온 근본을 알 수 없는 사람들이 그 땅이 자기들이 섬기는 신의 땅이라고 선언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섬기는 신을 절대적으로 생각했던 고대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굉장히 기분나쁜 도전이었고 그래서 그들은 그렇게 대규모의 연합군을 결성해서 이스라에 백성들과 싸우려고 나섰던 것입니다. 


성도들이 믿음을 지키며 사는 것, 그리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결단을 내리면서 사는 것, 이것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만 놓고 보면 지극히 당연한 것이고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렇게 사는 삶을 위해 결단을 내리고 실제로 그 길을 가기 시작하면 그 전까지는 잠잠했던 주변이 벌집 쑤셔놓은 듯이 들고 일어날 때가 있습니다. 물론 그것은 나의 그런 결정이 다른 사람들의 이익과 배치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그렇지 않아도 심각한 테클이 들어올 때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그런 역할을 할 때가 있구요. 또 어떻게 보면 아무런 상관이 없어야 하는 주변환경이 갑자기 장애가 될 때가 있습니다. 저는 목회를 하면서 그런 어려움을 경험하시는 많은 분들을 만나 보았는데요. 결국 성도들은 이런 테클에 대해서 크게 두 가지 모습을 보이는 것 같습니다. 한 부류는 그 테클에 걸려 넘어집니다. 자신의 선한 결단을 내려 놓고 예전의 삶으로 되돌아 갑니다. 나머지 한 부류는 그 테클에 당당하게 맞서 싸우고 결국 그 테클을 이겨냅니다. 오히려 그런 방해들을 영적인 뜀틀로 삼아 영적인 도약의 기회로 삼습니다. 그게 참 어렵지만 그래도 그렇게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바른 결단을 내리고 바른 길을 갈 때, 우리 앞에 대개의 경우 우리 기대처럼 탄탄대로가 열리지 않습니다. 항상 방해꾼이 나타나고 장애물이 놓여집니다. 우리는 항상 그것을 예상해야 합니다. 사탄은 절대로 앉아서 자기 땅을 빼앗기지 않습니다. 


하나님만을 섬기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로 결단을 내린 후, 갑자기 대규모의 저항에 부딛히게 된 이스라엘 백성들은 당연히 당황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때 갑자기 이스라엘의 지도자들 앞에 얼핏 보기에도 아주 먼 길을 여행해 온 듯이 보이는 몇 명의 초췌한 여행객들이 찾아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이스라엘과 조약을 맺기 위해서 아주 먼 곳에서 찾아온 사신들이라고 밝히면서 자신들과 조약을 맺자고 제안합니다. 아무리 보아도 가까이 있는 사람같다고 의심하자 그들은 ‘우리들은 당신들의 종’이라고 스스로를 낮추면서 그 조약이 이스라엘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한 조약이 될 것이라는 뜻을 넌지시 내비칩니다.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누구이며 어디서 왔는지를 물었지만 그들은 그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고, 자신들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행하신 놀랍고 두려운 일들을 듣고서 정말 그저 살기위해서 찾아 온 사람들이라고 말하며 먼 곳에서 온 증거로 이미 준비해 온 낡은 부대와 곰팡이가 쓴 떡, 그리고 다 닳은 신발을 내놓았습니다.


그렇게 그 조약이 이스라엘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한 불평등조약이 될 것이라는 것과 그들이 먼 곳에서 왔다는 증거까지 확인한 여호수아는 더 이상 깊이 생각하지 않고서 그 제안을 받아들이고 그들과 조약을 맺습니다. 그런데 아주 황당한 일이 일어납니다. 그 다음 날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을 행군해 갔는데, 사흘째 되는 날 도착한 곳에서 다시 그들을 만난 것입니다. 원래는 그 지역의 성읍들도 아이성과같은 정복대상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성을 공격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미 그들과 맺은 언약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백성들은 그런 조약을 맺은 족장들을 비난하기 시작했습니다. 경솔하게 그런 언약을 맺어서 하나님의 일을 그르치게 했다고 말이지요. 그렇지만 족장들의 뜻은 분명했고 또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여호수아와 지도자들은 그렇다고 해도 그 약속은 여호와 앞에서 맺은 것이니 깨뜨릴 수는 없다고 백성들을 설득합니다.  결국 그렇게 해서 기브온 사람들은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 다음에 이어지는 이야기는 이 일의 후처리에 대한 것입니다. 이 일로 여호수아는 기브온의 지도자들을 소환합니다. 그리고는 그들의 거짓말에 대한 잘못을 추궁하고, 그 잘못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자신들의 종이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기브온 사람들은 그 벌을 달게 받아들입니다. 바로 이런 연유로 해서 그 때부터 원래는 히위족속이었던 기브온 사람들은 이스라엘 사람들 중에서 살면서 제단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이 되었던 것입니다.


사실 여호수아 9장은 일종의 삽화입니다. 이야기의 흐름상 빼 버려도 전혀 지장이 없는 그런 하나의 짧은 이야기이지요. 그렇지만 이 이야기는 이스라엘처럼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 믿음을 지키고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성도가 살아가는 방식에 대한 귀중한 이야기를 들려 줍니다. 우리가 이 이야기를 큰 틀에서 보면 조금은 앞뒤가 바뀐 느낌을 받게 됩니다. 이 이야기는 사실 마치 하나님께서 가해자의 편을 드시고 피해자를 비난하시는 그런 모양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기브온 사람들은 처음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을 속일 작정을 하고서, 그것을 위한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서 이스라엘 지도자들의 심리까지 능숙하게 이용해 가면서  거짓으로 자기들의 목적을 이룹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것이 기브온 사람들의 꾀였다고, 지혜로운 행동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렇지만 어떻습니까? 그러한 그들의 꾀에 속아 넘어가 그들과 조약을 맺은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의 족장들을 향해서는 ‘어떻게 할지를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고...’ 그렇게 했다고 정확하게 잘못을 지적해 주고 있습니다. 


꾀라는 말을 긍정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중립적인 뜻으로 보아도 결과는 비슷합니다. 성경은 속인 기브온 사람들의 잘못은 따로 지적하지 않으면서도 속아 넘어간 이스라엘의 족장들과 여호수아의 잘못은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먼저 기브온 사람들의 경우에 하나님께서 이런 반응을 보이시는 이유는 상황이 생사를 결정하는 전쟁이 눈 앞에 놓여 있었고, 그 거짓말은 그들이 생각하기에는 살고자 하는 일념에서 나온 마지막 궁여지책이었기 때문입니다. 거짓말이 좋다거나 선하다는 이야기는 결코 아닙니다. 그렇지만 지도자로서 자기 백성들이 그렇게 일촉즉발의 위기와 어려움 앞에 있는 상황에서 그들을 살리기 위해 거짓말을 하는 것은 충분히 양해될 수 있습니다. 전에 라합의 이야기를 통해서도 생각해 보았지만 우리 삶에 절대선이란 없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선하다고 생각하고 선택하는 일들도 그 안에 악이 숨겨져 있을 수 있고, 실제로도 그럴 때가 굉장히 많습니다. 그리고 그 선은 우리의 의도와는 다르게 악을 위한 도구로 이용될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삶이란 사실 절대선을 선택하며 사는 것이 아니라 최대한 덜 악한 것을 찾고  또 그것을 선택하면서 살아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기브온 족속의 거짓말은 자기들이 살기 위한 것일 뿐, 다른 사람들에게는 피해를 주지 않는 그런 거짓말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속에 적어도 다른 사람들을 향한 악의는 없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굳이 그들을 나무라지 않았던 것이고, 비록 히위족속인 그들이 진멸을 멸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은 아니었지만 하나님께서 그 약속을 존중해서 더 이상 그 일을 문제삼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족장들과 여호수아의 잘못은 정확하게 지적하셨습니다. 만약 여호수아와 족장들이 오늘 본문을 읽는다면 참 억울하지 않겠습니까? 자기들은 속아 넘어간 죄 밖에 없는데 하나님께서 속인 사람들이 아니라 속아 넘어간 자신들을 나무라시니 말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들이 속아 넘어갔다고 나무라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조약을 맺을 때, 전혀 하나님께 묻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나중에 자신들을 비난하는 백성들 앞에서 그래도 조약은 깨뜨릴 수 없다고 말하면서 ‘우리가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로 맹세하였기 때문이라고 그 이유를 말하는데요. 그렇다면 이들이 기브온의 사신들과 조약을 맺을 때, 여호와의 이름을 걸고 맹세를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그 권위에 걸고, 만약 조약을 어기면 하나님께 저주를 받게 될 것이라고 말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그런 조약을 맺기 전에 하나님께 묻지 않았습니다. 족장들도 여호수아도 단 한 사람도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이야기만 듣고 또 증거만 보고 성급하게 결정을 내렸습니다. 마치 첫번재 아이성 전투를 벌일 때의 실수를 그대로 옮겨 놓은 것 같습니다. 그들은 그 때도 여호와의 전쟁을 치르면서 하나님의 뜻을 묻지 않았으니까요. 


바로 이것 때문에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와 족장들을 나무라신 것인데요. 생각해 보면 상황이 참 이상합니다. 여호와의 이름으로, 그 분의 저주를 선포하면서 언약을 맺으면서도 그 여호와 하나님께 그 조약에 대해서 한 마디도 묻지 않았다니 참 이해하기 힘듭니다. 그렇지만 이런 잘못은 실은 우리 믿는 사람들이 자주 저지르는 잘못들 중의 하나입니다. 우리들은 개인적으로나 교회적으로나 하나님의 이름을 자주 사용합니다. 사실 기독교 신앙의 테두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일들 중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등장하지 않는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리고 그 일들이 끝나고 나서도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말은 마치 노래의 후렴처럼 덧붙여 지지요. 그렇지만 참 놀라운 것은 막상 그 일을 하는 것 자체와 그 일을 이루어 가는 과정 속에서는 그다지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많은 고민을 하지 않고 또 하나님의 뜻을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원래 하나님을 위해서 무언가를 하고, 그 일이 끝나고 나서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말하려면 그 일은 시작부터 하나님께 묻는 일로 시작되어야 하고 중간에도 무엇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뜻인지를 찾고  묻는 작업이 계속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을 때가 더 많습니다. 전혀 묻지를 않습니다. 그저 현실과 상황에 따라서 움직입니다. 상식과 효율이 선택을 좌우합니다. 그래놓고서, 심지어는 편법과 악한 것까지 끼워 넣고도 나중에는 ‘하나님이 다 하셨습니다’라고 말하니 참 기가찰 노릇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이름만 말한다고 좋아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은 겉모양이 아니라 중심을 보신다는 말씀에 적잖은 위로를 받곤 하는데요. 하나님이 그런 분이시기 때문에 하나님께 중요한 것은 형식이 아니라 내용이고 실제입니다. 우리가 정말로 하나님께 묻는 삶을 살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때,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기뻐하시고 칭찬하십니다. 그렇지 않고서 그저 하나님의 이름만 부르는 것은 전혀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정말로 하나님을 믿고 따르며 그 분의 인도하심 속에 사시기를 원하십니까? 그러면 우리는 무엇보다도 하나님께 열심히 묻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어떤 일을 시작하기 전에 그 일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묻고, 말씀을 통해 그 일을 위한 바른 원리를 찾아보고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합니다. 항상 하나님께 많이 물으시기 바랍니다. 시작하기 전에 묻고 중간에 물으면서 살고 또 일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인도하심 속에서 살아가면서 정말로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물론 살기 위해서 그런 것이지만 기브온은 이스라엘의 장로들과 여호수아를 속였습니다. 그리고 여호수아와 장로들은 하나님께 묻지도 않고 거기에 속아 넘어가 그들과 언약을 맺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 언약은 어느 쪽에서 보든지 정당한 것도, 잘 한 것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양자 모두 그 언약을 맺은 이후에 한 행동들은 참 바람직했습니다. 우선 이스라엘의 장로들과 여호수아는 경솔하게 언약을 맺은 일 때문에 백성들의 비난을 받았습니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끝까지 언약에 충실했습니다. 그 언약은 하나님 앞에서 맺은 언약이니 끝까지 지켜야 한다고 백성들을 설득했습니다. 사실 이렇게 할 필요는 없습니다. 애초에 속아서 맺은 언약이니 무효를 선언한 후에 오히려 그 책임을 기브온 사람에게 돌리고 자신들은 살짝 빠져 나갈 수 있었습니다. 사실 오늘 우리가 보고 보고 또 보는 지도자들의 모습은 사실 이런 모습이 아닙니까? 필요와 이익에 따라 자신의 말을 정반대로 뒤집어 버리고서도 그 일에 대해서 아무런 사과 조차 없고, 자신이 수장이면서도 자신은 책임에서 쏙 빠져나가고, 그 책임을 아랫사람들에게 돌리고 또 국민에게 돌리고... 여호수아를 비롯한 이스라엘의 지도자들도 그렇게 할 수 있었습니다. 모든 책임을 기브온 사람들에게 돌리고 쏙 빠져 나갈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그것응ㄴ 그 언약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이었지만 어차피 그 이름이야 형식적으로 부른 이름인데, 그것 때문에 끝까지 약속을 지킬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래도 그들은 나중에라도 하나님의 이름으로 맺은 언약에 신실하려고 했고 끝까지 책임을 지는 쪽을 선택했습니다. 


기브온 사람들도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고 책임을 졌습니다. 원래 나라와 나라 사이의 언약은 이런 식으로 주인과 종의 관계가 아니라 약한 쪽에서는 공물을 바치고 강한 쪽에서는 보호를 약속하는 그런 형식으로 이루어지게 되어 있었습니다. 나중에 기브온 사람들이 거짓말을 한 것을 안 이후에야 여호수아가 이들에게 거짓말을 한 것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자신들 종이 되라고 한 것을 보면 둘 사이의 언약도 그런 조건으로 이루어졌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기브온의 지도자들은  비록 살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것이지만, 그래도 거짓말을 한 것은 분명하게 인정하고 그 책임을 지기 위해서 여호수아의 말대로  이스라엘 사람들과 함께 살면서 성막과 관련된 허드렛 일을 해 주는 사람들이 됩니다.


우리가 살다 보면 이스라엘 같은 실수를 할 수도 있고, 또 기브온처럼 어쩔 수 없이 거짓말을 하거나 이런 저런 죄를 짓게 되기도 합니다. 그러면 안되지만 현실적으로 이런 일을 아얘 피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상황이 이렇기 때문에 그만큼 더 중요해 지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이런 일들이 만들어 낸 결과에 대한 사후처리를 제대로 하는 것입니다. 모든 일들이 다 마찬가지이지겠지만 오늘 말씀에만 한정지어서 생각해 본다면 우리는 우리가 한 약속들을 무겁게 생각하고 끝까지 그 약속에 대한 책임을 지기 위해 애써야 합니다. 이것은 일반적으로도 상식에 속하는 일이지만 우리 믿는 자들은 더욱 더 그래야 합니다. 우리의 약속은 단지 우리의 약속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우리가 하는 모든 행동은 하나님 안에서 하는 것이고, 그래서 우리의 약속 또한 하나님 앞에서 하는 행동이 됩니다. 우리가 비록 약속을 어기는 일을 너무 쉽게 생각하고 자기 이익에 따라 이리 저리 말을 바꾸고 행동을 뒤집는 것이 상식처럼 여겨지는 환경에서 살고 있지만 우리는 끝까지 우리가 맺은 언약에 충실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 하나님께서 언약에 신실하시기 때문입니다. 비록 이스라엘 백성들은 수 없이 하나님과의 언약을 깨뜨리고 또 깨뜨렸어도 하나님은 한번도 그 약속을 변경하시거나 그 약속을 포기하신 적이 없으십니다. 이것은 우리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얼마나 자주 언약을 깨뜨리고 세상을 사랑하는 자리로 갔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와 맺으신 언약 안에서 하나님의 자리를 떠나신 적이 없으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이나마 믿음을 지키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혹 우리가 다른 사람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손해를 보고 또 불편을 겪는다고 하더라도 그 약속에 충실하려고 애쓰는 것은 우리가 생활 속에서 하나님을 흉내내는 것이며 그 분의 성품을 우리 영혼 속에 새겨넣는 가장 중요한 선택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가 믿는 선하신 아버지 하나님의 성품을 온 세상에 보여줄 수 있는 소중한 기회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정말로 신실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안다면 우리는 우리의 신실함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을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로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또 우리는 우리의 선택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합니다. 때로 우리도 옳지 못한 선택, 그 안에 악한 마음과 생각이 포함되어 있는 그런 선택을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그런 선택들은 다른 이들에게 아픔과 손해를 주고 또 세상에 상처를 남기게 되지요. 이미 엎질러진 물을 다시 담지는 못할 지라도 적어도 그 물을 닦아내기위해 애라도 써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의 선택이 남긴 결과를 피하려고 하지 말고 할 수 있는 한 스스로 책임지기 위해서 애써야 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이 이렇게 믿을 수 없는 곳이 되고 또 상처가 많은 곳이 된 이유는 단순히 사람들이 저지른 실수와 잘못이 많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런 실수와 잘못에 대해서 책임을 지려는 사람들이 너무 드물기 때문입니다. 비록 기브온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들은 순순히 자신들의 잘못에 대한 책임을 받아들이고 책임을 지는 삶을 살아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자기들 사이에 더 이상의 아프고 힘든 일이 생기는 것을 방지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믿는 사람들입니다. 이 말은 우리가 영적인 중립지대에서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항상 영적인 전쟁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제대로 믿기로 영적인 결단을 내리면, 믿음을 따라 하나님 앞에서 살기 시작하면 세상은 우리를 편하게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그것을 자기들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이고 우리와 반대편에 설 때가 많습니다. 이런 상황이 우리를 두렵게 하기도 하고 또 당황하게 만들기도 하는데요. 그렇지만 우리는 이것이 참된 성도로 살 때 우리가 감당해야만 하는 우리의 짐이고, 바로 이 전쟁을 제대로 치러내는데 우리의 영광이 있음을 기억하고 이 전쟁에 잘 치러내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기브온 사람들 사이에 맺어졌던 조약을 둘러싼 이야기를 통해서 그 전쟁을 잘 준비하고 또 치러내는 방법을 살펴 보았습니다. 우선 우리는 열심히 하나님께 묻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저 하나님의 이름만 부르는 것으로는 부족합니다. 어떤 일을 하기 전에도 그 일을 해야할지 물어야 합니다. 그 일을 하는 방법도 물어야 합니다. 성경을 통해 해답을 얻고 기도를 통해 인도와 그 길을 갈 수 있는 힘을 공급 받으며  진중한 삶을 살아내야 합니다. 그래도 생겨나는 죄와 실수에 대해서는 그 책임을 회피하지 말고 끝까지 신실하게 책임을 다하는 모습을 지녀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범죄와 실수가 또 다른 죄와 아픔의 이유가 되지 않고 매듭지어질 수 있으며 때로는 상처나고 병든 이 세상을 치유하는 하나님의 도구가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러신 것처럼 항상 자신의 말과 약속에 신실하시기 바랍니다. 때로 그 말과 약속을 지키느라 손해를 보고 어려움을 당하게 되더라도 여러분의 말과 약속은 하나님의 이루어진 것임을 생각하시면서 그 약속을 하나님의 이름처럼 소중히 여기시기 바랍니다. 또한 자기가 한 일의 결과는 최선을 다해서 최대한 책임을 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들을 아름답다 하실 것이며 분명히 특별한 은혜로 도와주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이렇게 항상 하나님께 묻고 자신이 행한 일들에 대해서 끝까지 신실하게 책임을 지키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서 주님의 인도하심과 힘 주시는 은혜 가운데 다르게 살고, 또 멋지게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