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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새벽예배

2015.06.30. 새벽예배 - 성경읽기와 묵상(사무엘상 28-29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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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일 : 2015년 6월 30일 화요일




     다윗이 블레셋으로 망명한 후에, 블레셋은 이스라엘과 전쟁을 벌입니다. 참 아이러니한 상황입니다. 다윗이 자기 동족과의 전쟁에서 블레셋의 아기스 왕의 친위대로 아기스 왕을 보호하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만약 아기스 왕이 직접 공격받는 상황이 되면 다윗과 그의 부하들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아기스를 살리자고 자기 동족들을 죽어야 합니까? 그렇게 되면 그것은 공입니까, 과입니까? 분명히 일은 다윗의 계산대로 되었습니다. 사울은 다윗을 더 이상 뒤쫓지 않게 되었고, 자신은 아기스 왕에게서 보호를 받을 수 있었으니까요. 참 지혜로운 선택인 것 같지만 적어도 성도는 지혜를 이렇게 사용해서는 안됩니다. 성도는 자기 지혜를 항상 믿음 안에서, 믿음이라는 울타리 안에서만 사용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지혜가 성도의 성도됨을 망가뜨리게 됩니다. 구체적으로 지혜를 믿음의 울타리 안에서 사용한다는 뜻은, 그 지혜가 성도를 자신이 있으면 안되는 자리로 데리고 가게 해서는 안된다는 뜻이고, 성도로서 하면 안되는 선택을 하도록 해서는 안된다는 뜻입니다. 얼마나 많은 성도들이 이것을 모르고 또 알더라도 지켜내지 못해서 현실적으로는 성공을 거두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심각한 실패를 하게 되는지 모릅니다. 


    블레셋 군대가 공격해 오자 사울은 그 군대의 규모를 보고 두려움에 사로 잡혔습니다. 그러나, 이미 그에게는 의지할 곳이 없었습니다. 아시다 시피 좋은 지도자 밑에만충신들이 있고 유능한 사람들이 있게 마련입니다. 지도자가 훌륭하지 못할 때, 그 믿에는 충신들은 사라지고 무능한 간신배들만 남게 되지요. 그래서 나라의 지도자가 참 중요합니다. 그 사람 하나의 역할도 중요하지만 그가 어떤 사람인가에 따라서 그와 함께 나라를 섬기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이 될지도 정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사울에게는 믿고 의지할 수 있는 든든한 수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미 사무엘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현실적으로 뿐만 아니라 영적으로도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울은 이미 자신이 다 없애 버렸던 영매를 찾았습니다. 그리고, 그 영매를 시켜서 사무엘의 영을 불러내게 했습니다. 물론 성경이 이 혼을 사무엘의 영이라고 말한다고 해서 진짜로 그런 것은 아닙니다. 항상 이런 일의 배후에는 진짜인 척하는 가짜, 사탄이 숨어 있습니다. 영매를 통해서 사탄은 사무엘을 가장하고 타나났습니다. 그렇지만 사울이 그 영에게 들은 것이라고는 자기 집안의 몰락에 대한 소식 밖에 없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만 자기 자신만을 믿고서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지만, 실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결국 하나님보다 훨씬 못한 것, 거짓된 것에 의지해서 살아가게 됩니다. 인간이란 무언가에 의지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도록 그렇게 지어졌기 때문입니다. 사울의 모습은 그러한 인간의 나약한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 주는데요. 그래서 사람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사는 것이 가장 현명하고 지혜로운 것입니다. 그 분처럼 완전하고 능력있는 분이 없고, 또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도 없으시니까요. 


    이제 블레셋과의 전투가 벌어집니다. 다윗은 호기 좋게 아기스 왕을 호의하고 전쟁에 나섭니다. 저는 이 부분에서 도대체 다윗이 뭘 하고 있는지를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사람이란 언제든지 이렇게 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은 괜찮아도 지금은 훌륭한 것 같아도 무언가에 집착하고 또 하나님을 망각하면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야 할 다윗이 오히려 적국의 왕의 측근과 보호자를 자처하고 있듯이 언제든지 도저히 성도가 해서는 안되는 선택을 하고 또 할 수 없는 행동을 하면서도 그것을 당연하게,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게 됩니다. 사실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얼마든지 보고 있지 않습니까? 이런 저런 추문을 퍼뜨리는 목회자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이 지금 무슨 일을, 얼마나 추하고 악한 일을 하고 있는지를 모릅니다. 


    그러나, 다윗의 이런 행동은 오히려 그를 못 미더워 했던 아기스 왕의 수령들에 의해서 제지당하게 됩니다. 이전에 블레셋의 전투에서 커다란 공을 세운 적국의 장수를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느냐고, 막상 전투가 벌어져서 이스라엘 편을 들게 되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반대를 했기 때문에 아기스 왕이 더 이상 자기 고집을 부릴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다윗은 자기 부하들과 함께 다시 블레셋 땅으로 되돌아 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물론 이것은 하나님이 다윗에게 주신 은혜입니다. 다윗이 두려움 때문에 전혀 분별력 없이 절대로 해서는 안되는 선택을 하자, 하나님께서 그 일을 막아 주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두 사람의 안타까운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이런 모습은 성도가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의지하거나 또 다른 것에 집착하게 되어서 하나님을 잊어버리게 되면 그 성도가 어떻게 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반면선생입니다. 사울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다윗도 그랬습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같은 모습입니다. 이것은 모든 인간이 다 불완전하기 때문에 가지고 있는 불안한 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서 겸손해 져야 하기도 하지요. 영적인 세계에 자만심이란 통하지 않습니다. 누구나를 막론하고 어디까지 망가질 수 있을 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가 꼭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눈을 하나님께 고정해서 눈에서 하나님이 사라지지 않게 하고, 손의 힘을 더해서 하나님을 더욱 더 단단히 붙드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무언가에 집착하게 되고, 또 무언가에 대한 두려움에 빠지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더 멀어지게 하며, 우리가 우리의 아름다운 모습을 잃어버리게 만드는 이유가 됩니다. 


    항상 내가 무언가를 의지하고 또 무언가를 두려워 하며 살 수 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생각하며 그 대상이 하나님이 되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 밖에 모든 것들에서 자유로운 삶을 살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능력있는 삶을 유지해 갈 수 있을 것입니다. 항상 눈은 주님께 고정하고 주님의 손을 단단히 붙들고 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