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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주일예배

2015.08.02. 주일오전 - 그 땅에 전쟁이 그쳤더라(여호수아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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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여호수아 11장 16-23절





“여호수아가 이같이 그 온 땅 곧 산지와 온 네겝과 고센 온 땅과 평지와 아라바와 이스라엘 산지와 평지를 점령하였으니 곧 세일로 올라가는 할락 산에서부터 헤르몬 산 아래 레바논 골짜기의 바알갓까지라 … 이와 같이 여호수아가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 온 땅을 점령하여 이스라엘 지파의 구분에 따라 기업으로 주매 그 땅에 전쟁이 그쳤더라” 오늘 본문 중에서 16절과 17절의 앞 부분, 그리고 23절을 다시 한 번 읽어드렸는데요. 우리가 이 말씀들을 그냥 읽으면 마치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을 전부 점령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여호수아서의 바로 다음 책인 사사기를 읽을 때, 굉장히 당황하게 됩니다. 사사기는 그렇지 않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여호수아서와 사사기가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여호수아서를 선입견을 가지고 읽기 때문입니다. 여호수아서는 여호수아 시대에 이루어진 가나안 정복전쟁에 대한 기록입니다. 그리고 이 전쟁들은 모두가 다 여호수아서 1장에 나오는 조상들에게 약속한 땅을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의 손에 넘겨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니, 여호수아서를 읽다가 ‘온 땅’이라는 말만 나오면 어떻게 받아들이기가 쉬울까요? ‘아!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을 전부 차지했구나!’하고 생각하게 되기가 쉬운 것입니다. 그렇지만, 11장 16절과 17절에 나온 모든 지역을 합쳐서 지도에 표시해 보면 이렇게 됩니다. (지도를 띠운다) 이 지도에서 오렌지 색으로 표시된 곳이 오늘 본문에 나오는 곳입니다. 그나마도 요단강 동쪽은 모세시대에 점령했으니까 여호수아 시대에 점령된 곳은 바로 요단강 서쪽의 반쪽 지역이었고, 나머지 녹색으로 표시된 지역은 나중에 다윗 시대에 가서야 정복을 끝내게 됩니다. 물론 여호수아가 차지한 지역도 그리 좁은 지역은 아닙니다. 그 지역에 살던 가나안 족속들의 세력으로 보면 그 곳을 다 차지한 일도 정말 대단한 일이었지요. 그렇지만 그래도 그가 가나안 온 땅을 차지한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도, 성경은 여호수아가 ‘그 온 땅’을 정복했다고 말합니다. 마치 가나안 땅 전부를 차지한 것처럼 말이지요. 그렇다면 ‘그 온 땅’이라는 말은 정확하게 어떤 뜻일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와 여호수아 세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점령하도록 맡기신 땅 전부를 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는 본문에서 그들이 그 일을 제대로 잘 감당했다고 평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을 바라보시는 시각을 하나 배우게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과 우리 세대에 맡기신 일이 있고, 또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 일만을 제대로 해내기를 바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 혹은 우리에게 맡기신 일’ 우리는 이것을 흔히 소명이라고 부르는데요. 이 ‘소명’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우리는 크게 두 가지로 반응하는 것 같습니다. 첫번째는 소명은 나와는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소명에 무관심하고 무감각한 것이지요. 물론 성도 개인이나 교회가 특정한 시대에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가를 깨닫는 일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시대를 초월하고 개인의 상황을 넘어서서 하나님께서 모든 교회와 모든 성도들에게 맡기신 소명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이 사는 시대에서 하나님 앞에서 거룩함과 순결함을 지켜내며 하나님을 향한 영적인 열정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그 시대의 믿지 않는 세상을 향해서 하나님의 성품과 거룩함을 드러내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소명만큼은 시대가 아무리 변하고 환경이 아무리 달라져도 바뀌지 않는 소명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에게 이 소명을 주셨고, 그래서 우리는 교회적으로나 개인적으로 이것을 위해서 헌신하며 살아가는 일에 대해서 무관심하면 안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인생 전체를 바로 이것을 기준으로 평가하시기 때문입니다. 


소명에 반응하는 두번째 방식은 소명이라는 것을 자꾸 어떤 ‘크고 거창한 일’과 동일한 것으로 생각한 나머지 그 소명을 이루어 갈 때 너무 지나치게 그리고 그릇된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사실 이 경우가 소명에 무관심한 경우보다 더 위험할 수가 있는데요. 큰 일과 큰 결과만에 집중하는 나머지 거룩하고 순결한 삶, 하나님만을 사랑하는 삶을 향한 부르심이라는 성도와 교회를 향한 가장 근본적인 소명을 등안시한 채로, 하나님의 이름으로 오히려 하나님을 불명예스럽게 하는 일들이 이런 경우에 더 많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 동안 한국교회가 가장 심각하게 탈선한 곳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열정과 열심이 없지 않았습니다. 열정과 열심은 정말 대단했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문제는 그 지나친 열정이 우리 민족이 가지고 있는 겉모습을 중시하는 문화와 맞물리면서 그저 큰 일을 통해서 큰 결과를 크게 만들어 내는 일에만 집중되었고, 그래서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하나님의 방법을 무시하는 잘못을 많이 저지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나 성도 개인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목회자들도 그랬구요. 저는 이 세대가 다 가기 전에 하나님의 소명을 위한 깊은 관심과 헌신도 회복되어야 하겠지만, 소명에 이런 오해와 그릇된 열정이 교정되는 일이 더 시급하게 일어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각 세대에는 하나님께서 각 세대에 맡기신 소명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리고 성도 개인에게는 그 사람에게 맡기신 역할이 있습니다. 각 세대와 그 세대에 속한 성도들은 하나님 앞에서 그 일만 충실하게 해 내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우리 열정을 대단하게 발휘해서 우리에게 맡겨지지 않은 일까지 해 내는 것은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성도로서의 기본적인 소명에 충실하면서 그 때 그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시는 우리 몫의 일을 잘 감당하면 그것으로 기뻐하시고 영광을 받으십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일에 대한 열정도 반드시 있어야 하겠지만 반대로 그 열정을 잘 다스리고 조절하는 절제와 지혜도 꼭 필요합니다. 


오늘 본문은 이제까지 이스라엘이 치러온 모든 전쟁과 그 전쟁에 대한 요약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이제까지 살펴본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이 치른 모든 전쟁들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창문의 역할을 해 줍니다. 이미 살펴 보았듯이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와 여호수아 세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합격점을 주셨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가나안 땅 전부를 차지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기 위해서 자신들에게 맡겨진 그 역할을 충실하게 해 냈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그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는 본문을 통해 우리가 몸된 교회로, 그리고 개인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칭찬받는 자리에 있고, 마지막에 그 분 앞에서 합격점을 받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교훈을 듣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은 요약적인 기록이기 때문에 본문 속에 나오는 하나 하나의 언급들은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선택하여 집어넣은 것들이고 그래서 그만큼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오늘 우리 삶의 자리에서 영적인 전투를 벌이며 우리 삶의 자리를 약속의 땅으로 만들어 가는 우리들에게도 중요한 내용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찌보면 단순한 것들이지만, 그래서 기본적이고 가장 중요한 것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꼭 기억해 놓으셨다가 여러분을 위한 영적 전쟁의 승리의 비결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우선 성경은 여호수아의 전쟁이 아주 오랫동안 계속되었다고 밝히면서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사실 여호수아서는 우리에게 모든 전쟁의 이야기들을 시시콜콜하게 다 들려주지 않습니다. 아주 굵직 굵직하고 중요한 전투를, 그것도 굉장히 빠른 템포로 전해 줄 뿐입니다. 그래서, 그 이야기들을 읽는 우리는 그 모든 전쟁들이 아주 짧은 기간에 끝난 것으로 그렇게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여호수아 세대의 사람들에게 그 전쟁은 상당히 긴 전쟁이었습니다. 비록 약간의 탈선은 있었지만 그래도 그들은 그 전쟁을 성공적으로 치러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면서 하나님께서 이기게 하시는 전쟁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 전쟁은 결코 하루 아침에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굵직 굵직한 전쟁들이 끝날 때까지 최소한 5년이 넘게 걸렸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도 여호수아가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작은 전쟁들이 계속되었을 것을 생각해 본다면 그 전쟁은 아마도 족히 20년은 넘게 이어진 길고 지루한 전쟁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여호수아가 요단강을 건너와서 점령한 땅들은 그렇게 긴 전쟁의 결과물이었던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한 방’을 기대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느 나라나 복권 사업이 성황을 이루고 있고, 아무리 금지해도 투기와 도박은 막을 길이 없는 것이지요. 성도들이 신앙을 생각할 때도 그런 마음은 있습니다. 한 방에 뭔가 대단한 영적인 결과를 얻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에 ‘한 방’은 없습니다. 때로는 ‘한 방’에 다 된 듯이 느껴질 때도 있지만 그런 것은 절대로 오래가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져 가고, 그래서 우리의 삶이 하나님 나라를 닮은 그런 곳이 되는 일은 절대로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인생 속에서 시간을 두고 천천히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자기 삶과 신앙에 대해서 조급해 하면 안됩니다. 조급해 한다고 해서 어느 날 갑자기 내 인생이 천국과 같아지는 것은 아니니까요.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랜 시간, 수많은 전쟁들을 하나 하나 치러냈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 하나의 전쟁은 모두 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순종했을 때만 승리로 이어질 수 있는 그런 전쟁들이었습니다. 전쟁의 규모나 군사력의 유불리함은 승리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지요. 그렇다면, 이들이 그렇게 오랜 기간동안 계속된 전쟁에서 승리하고 또 승리해서 하나님께서 자기들 몫으로 맡기신 ‘온 땅’을 차지하는 일에 성공했다는 것은 결국 그 오랜 기간 동안 그들은 전쟁을 치르는 일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일에 헌신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의 삶과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삶 속에는 우리가 믿음으로 순종해서 정복해야 할 수많은 ‘가나안 족속’들이 있습니다. 이 가나안 족속들은 아직도 하나님의 뜻대로 움직여 가고 있지 않은 우리 삶과 인격, 사고방식 그리고 신앙의 부분 부분들입니다. 우리는 그 모든 가나안 족속들과 모두 싸워서 그들이 차지하고 있는 땅 하나 하나를 모두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약속의 땅으로 회복해야 합니다. 그래야 ‘온 땅’을 차지하는 복되고 영광스러운 날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것 때문에 우리가 싸워야 할 우리의 믿음의 싸움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서 치렀던 전쟁처럼 오랜 시간이 걸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성도에게는 신실함이 가장 중요합니다. 길고 지루해도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서 끝까지 싸워내는 변함없는 성품을 갖추는 일이 제일 중요합니다. 그 신실함만이 우리가 변함없이 우리에게 맡겨진 싸움을 싸워내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이 이스라엘의 전쟁에 대해서 알려주는 두 번째 정보는 그들이 기브온 족속 이외에는 그 어떤 민족과도 화친하지 않았고, 그래서 나머지 모든 곳을 전부 정복했다는 것입니다. 원래 기브온 사람들은 히위족속에 속해 있었습니다. 진멸되어야 할 대상 중 하나였지요. 그런데 이들은 살기 위해서 꾀를 냈고 결국 이스라엘의 교만과 부주의함 덕분에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고 성 전체가 멸망을 면할 수 있었습니다. 이 일은 기브온 족속의 입장에서 보면 천만다행인 일이었지만 이스라엘의 입장에서 보면 뼈아픈 실수이자 실패였습니다. 그런데, 다행이 이스라엘 백성들은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았습니다.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다른 족속들과는 화친을 맺지 않았고 그래서 나머지 모든 땅을 진멸하여 하나님께 드릴 수 있었습니다. 


사람이기 때문에 우리도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지을 수 있고, 또 실수를 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현실적으로는 어떤 결과를 가지고 올지 몰라도 영적으로는 정말 뼈아픈 실패가 되지요. 그런데, 그런 실패가 반복되고 또 반복된다면 바로 그 부분 만큼은 온전히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그러면 바로 그 부분 때문에 결국 다른 부분도 다 영향을 받게 됩니다. 이스라엘에게 기브온과는 조금 다르지만 사실 우리의 영적인 실패와 신앙적인 침체는 한 번에 모든 곳에서 시작되지 않습니다. 그렇게 취약한 부분이 무너지면 그게 연쇄적으로 우리 삶과 신앙 전반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이런 실수와 범죄가 한 번, 두 번, 세 번…. 계속해서 반복되지 않도록 정신을 바짝 차리고 애써야 합니다. 


사실 우리들에게는 저마다 인격적이고 현실적인 부분에서, 그리고 신앙적인 부분에서 자꾸 부주의하게 되고, 더 자주 실패하게 되는 취약점들이 있게 마련입니다. 우리들의 대부분의 영적인 실패는 바로 이런 부분에서 일어나서 우리의 신앙 전반에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그래서, 이런 부분에서의 실수와 실패를 줄여가야 합니다. 제 경험으로 보면, 이런 부분에서의 실패를 줄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우선 자신의 취약점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어야 합니다. ‘나는 이 부분이 특히 약하고, 그래서 이 부분에서 자주 실패하고 넘어진다.’라고 항상 염두에 두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할 때마다 그 부분을 놓고 특히 더 간절하게 잊지 말고 항상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서, 또 똑같은 실수를 또 다시 반복할 수 있는 상황을 만났을 때 다시 실패하지 않도록 해야합니다. 그렇게 약한 부분에 주의를 기울이고 또 그 부분을 보강해 놓아야 그 부분 때문에 우리 삶과 신앙 전체가 흔들리고 무너지는 일을 막아낼 수 있고, 나아가서 우리 삶의 더 넓은 부분이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약속의 땅이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취약점을 그냥 내버려 두지 마십시오. 바로 그것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의 여러분의 삶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변해가는 일이 방해를 받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기브온 족속은 하나님께서 진멸하시기로 했던 사람들이었지만 구원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족속들은 그 결정을 뒤집지 못하고 모두 진멸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불공평한 것 아닙니까? 누구는 살려주고 누구에게는 다시 그런 기회를 주지 않고 말이지요. 오늘 본문 말씀을 보아도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으니까요. 멸망당한 족속들에 대해서 “그들의 마음이 완악하여 이스라엘을 대적하여 싸우러 온 것은 여호와께서 그리하게 하신 것이라 그들을 진멸하여 바치게 하여 은혜를 입지 못하게 하시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그들을 멸하려 하심이었더라” 분명히 가나안 일곱 족속에 속하는 모든 사람들은 진멸이 결정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와중에도 이스라엘과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스스로 돌이켜 하나님의 백성 안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 첫번째 인물이 누구였지요? 라합이었습니다. 라합은 여리고성이 진멸당할 때, 자기 가족들과 함께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나머지 여리고성 사람들은 끝까지 이스라엘과 싸우려고 들었습니다. 마음이 물같이 녹아있었지만 하나님께 끝까지 저항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멸망당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라합의 자리에 기브온이 들어가고 나머지 여리고성 사람들의 자리에 나머지 가나안 족속들이 들어가면 두 이야기는 완전히 같은 이야기가 됩니다. 


오늘 본문이 분명히 ‘그들의 마음이 완악하여 이스라엘을 대적하여 싸우러 온 것은 여호와께서 그리하신 것이라 그들을 진멸하여 바치게 하여 은혜를 입지 못하게 하시고 … 그들을 멸하려 하심이었더라’라고 말하고 있지만, 우리가 이 말씀을 마음을 돌이킬 의지도 있고 또 노력도 한 사람들의 마음을 다시 완악하게 만들어서 그들을 죽이셨다고 이해해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계속해서 기회를 주셨습니다. 라합과 같은 결정을 내리고 기브온과 같은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기회를 주셨고, 그들의 마음에 그렇게 하라는 신호를 계속해서 보내셨습니다. 사실 여리고성의 멸망은 가장 강력한 사인이었고, 아이성의 진멸도 그런 셈이었지요. 그렇지만 그들은 자기 마음의 완악함을 버리지 않고 계속해서 더 완강하게 고집을 부렸습니다. 이것이 어느 순간 도를 넘어섰고, 그것이 아얘 공격 받기도 전에 이스라엘과 싸우겠다고 세를 규합해서 쳐들어 오는 행동으로 나타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바로 그것 때문에 멸망을 당했던 것입니다. 


지난 수요일에 고린도 후서 성경공부를 하면서, 우리는 바울이 고린도의 성도들을 향해서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라는 굉장히 중요한 말씀을 살펴 보면서 바울이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는 이사야서의 말씀을 인용해서 “보라 지금은 은혜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라”고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향해 경고하는 내용을 보았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 안에서 은혜롭게 신앙생활을 하고자 하는 우리에게 굉장히 중요한 말씀인데요. 이 말씀 속에는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는 일에 대한 아주 중요한 원리 한 가지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그 원리는 바로 어느 시점이 지나가 버리면 하나님께서는 은혜 받을 기회를 거둬가 버리신다는 것입니다. 은혜에 풍성한 하나님은 계속해서 은혜받을 기회를 주시고 또 은혜를 주십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그 기회와 은혜를 계속해서 무시하고 무관심해 하면 어느 시점부터인가는 우리가 하나님을 찾는다고 해도 은혜를 주시지 않는 때가 올 수도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성도는 자신의 마음이 완악해지지 않도록 자신의 마음을 잘 돌봐야 합니다. 은혜의 기회를 헛되이 여기지 않도록, 또 주시는 은혜를 가볍게 여기지 않도록 자기 마음을 잘 돌봐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은 완악해지는 쪽으로 움직이기가 더 쉽고, 그래서 그냥 내버려 두면 스스로 은혜를 받을 기회를 모두 잃어버린 그런 상태가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들에게는 참 불편한 일이지만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의 기회는 무한정 계속되지 않습니다. 결정적인 시점이 되면 하나님도 은혜받을 기회를 거둬가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적어도 상당기간은 전혀 은혜 없이 살아가게 될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이 흔히 “있을 때 잘해”라고 말하는데요. 영적으로도 그래야 합니다. 은혜의 기회가 주어질 때, 그래도 우리 마음에 은혜를 사모하고 또 소망하는 마음이 남아있을 때, 그 때 마음도 잘 챙기고 주시는 은혜도 잘 챙겨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오늘 본문이 여호수아의 전쟁에 대해서 제공해 주는 정보는 여호수아가 아낙 자손들을 모두 정복했다는 것입니다. 아낙 자손이 어떤 사람들이지요. 이들은 거인족속들입니다. 창끝이 베짜는 베틀북채 만한 어마 어마한 거구들입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다윗과 싸웠던 골리앗이지요. 키가 한 3미터쯤 되는 사람들입니다. 민수기 13장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요. 거기는 처음에 모세가 가나안 땅에 정탐꾼들을 보냈을 때, 그들이 모세에게 돌아와서는 이렇게 보고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거기서 네피림 후손 아낙 자손의 거인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라” 우리가 기억하는 대로 이스라엘의 40년 광야 세월이 바로 이 보고 때문에 시작되었으니 아낙자손들이 느끼게 하는 공포심이란 얼마나 대단한 것이었는지 충분히 짐작이 갑니다. 그런데,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런 아낙 자손들을 상대로 전쟁을 벌였고 결국 그들까지도 모두 진멸했습니다.   


아낙자손들 앞에서 절망하며 불평을 늘어놓았던 출애굽 1세대, 그리고 그들과 맞붙어 싸워 완승을 거둔 출애굽 2세대. 이 두 세대 간의 차이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믿음’입니다. 1세대는 아낙 자손을 믿음이 없는 눈으로 바라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그저 공포의 대상이었고, 절대로 이길 수 없는 적이었으며, 결국 그 앞에서 좌절하며 하나님을 심하게 원망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2세대는 똑같은 거인들을 바라 볼 때, 자신의 눈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이라는 렌즈를 통해, 그렇게 회복된 믿음의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래서 좌절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겁먹을 필요도 없었지요. 믿음으로 싸우기만 하면 이기게 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고, 그 약속을 믿고 있으니 그저 싸우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게 다 입니다. 그래서 그 아낙자손들을 진멸시킬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믿음으로 메뚜기가 거인을 넘어뜨리는 기적을 만들어 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여호수아 세대의 정복전쟁을 요약해 주는 본문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우리에게 맡겨진 영적인 싸움에서 이기고 우리의 삶과 삶의 자리를 어떻게 하면 우리를 위한 약속의 땅으로 가꾸어 갈 수 있을까 하는 것을 다시 한 번 살펴 보았습니다. 우리는 분명히 모든 세대를 책임질 수 없고, 또 하나님 나라 전체를 책임질 수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적어도 우리에게 맡겨진 우리 몫의 땅, 그러니까 우리 삶의 자리와 우리 신앙만큼은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약속의 땅으로 만들어 갈 수 있습니다. 이것을 위해서 사는 일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우리의 소명이기도 하고, 나아가서 우리 자신을 위한 가장 복된 일이 될 뿐만 아니라 우리 자녀들을 위한 최고의 선물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소명을 마친 그 자리에서 우리 자녀들의 새로운 소명이 시작될테니까요. 그래서 우리는 우리 삶의 구석 구석, 그리고 우리 신앙의 모든 부분을 남김 없이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약속의 땅이 되게 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우리는 우리에게 맡겨진 믿음의 싸움을 계속해야 합니다. 여호수아의 전쟁이 오랫동안 계속되었고,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긴 시간 동안 반복되는 싸움에서 하나님께 순종하여 승리하였듯이 우리들 또한 끝까지 이 싸움을 싸워내야 합니다.  


세상은 분명히 거인입니다. 그렇지 않다고 하는 것은 거짓말이지요. 그렇지만 그렇다고 그 앞에서 기죽지 마십시오. 지레 겁을 먹고 뒤로 물러서지 마십시오. 우리에게는 우리의 믿음을 통해 일하시는 가장 크신 하나님이 계십니다. 긴 싸움과 눈에 보이는 거인같은 상황들 때문에 자신의 마음이 완악해 지지 않도록 잘 지켜 내면서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견지하시기 바랍니다. 싸움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싸움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싸움은 반드시 끝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끝까지 믿음의 싸움을 싸운 성도들에게 너희가 ‘온 땅’을 차지했다고 칭찬해 주시며, 영광스러운 안식을 허락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믿음의 싸움을 신실하게 싸워내서 내 삶의 온 땅이 하나님의 땅이 되는 복을 누리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