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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새벽예배

2015.08.26. 새벽예배 - 성경읽기와 묵상(열왕기하 2331-25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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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일 : 2015년 8월 26일 수요일




어제 살펴 본대로 요시야는 정말 대단한 일을 한 사람입니다. 유다가 멸망하기 직전에 왕이 되어서 마지막으로 이스라엘을 영적으로 회복시킨 사람이었으니까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의 생전에는 이스라엘에 손을 대지 않으시겠다고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미 므낫세 시대에 므낫세와 백성들이 지은 죄가 너무 커서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을 돌이킬 수 없을 정도가 되었지만 말이지요. 우리가 성경의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징계는 아얘 취소할 수 없을 때가 있을지 모르지만 그 징계를 주시는 시기는 하나님께서 얼마든지 뒤로 연기시키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요시야 덕분에 이스라엘은 멸망하지 않고 적어도 한 세대 동안의 시간을 더 얻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회개와 기도를 들어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한 사람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만약에 유다에 계속해서 요시야 같은 왕들이 세워졌다면 유다는 영원히 멸망을 경험하지 않았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 세상도, 교회도 하나님 보시기에 충분히 거룩하고 문제가 없을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그래도 이 세상과 이 땅의 교회들을 여전히 바라보고 계시는 것은 그 안에 존재하는 하나님의 사람들 때문입니다. 물론 그런 하나님의 사람들 조차도 하나님 앞에 완전하지는 않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진심으로 그 중심을 하나님을 향하게 하면 그 사람을 기뻐하시며 그 사람을 보시고 한 가정과 교회, 그리고 한 나라를 향한 하나님의 진노를 누그러 뜨리기도 하십니다. 그런 점에서 성도들은 자기가 있는 곳이 어디이든지 유다의 역사 속에서 요시야 같은 역할을 감당하는 사람들이고 또 그런 역할을 잘 감당해야 합니다. 세상이 어떻고 다른 성도들이 어떻다고  해서 그들을 따라가면 안되지요. 그것은 함께 사는 길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함께 망하는 길이니까요. 그래서 성도들은 세상을 보고 한탄하고 투덜거리기 전에 세상과 구별되어야 합니다. 항상 자신을 성도답게 지켜가야 합니다. 


요시아가 그렇게 훌륭한 왕이었지만, 그 또한 어쩔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정치적인 관계 때문에 애굽 왕이 앗수르를 치려고 올라갈 때, 그 길을 막아섰다가 므깃도에서 죽고 맙니다. 그 다음에 왕이 된 것은 그의 아들인 여호아하스였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아버지와 전혀 달랐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 일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자기 아버지를 흉내낸 것이 아니라 흉내내면 안되는 악한 왕들을 흉내냈습니다. 그래서 여호아하스 왕 때부터 유다는 단 한 번의 회복의 기회도 얻지 못하고 멸망의 길로 치닫게 됩니다. 여호아하스 자신은 애굽으로 끌려가서 거기서 목숨을 잃어버리게 되고, 그 뒤를 이어 왕이 된 여호야김은 점점 그 지역의 패권을 장악해 가는 바벨론을 삼년간 섬기다가 배반했고 이것 때문에 유다는 결정적으로 패망의 길에 들어서게 됩니다. 시드기야가 왕이 되어 다스릴 때, 결국 예루살렘 성전과 성벽이 모두 무너졌고, 백성들은 바벨론으로 잡혀감으로써 유다의 역사는 막을 내리게 됩니다. 


요시아는 하나님 보시기에 바른 사람이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의 시대에는 유다의 멸망을 연기해 주셨지만 그가 죽자 무조건 유다를 멸망하게 만드신 것이 아닙니다. 요시야 다음에 왕이 된 사람들이 백성들과 함께 하나님 앞에서 범죄하였기 때문에, 그 범죄가 하나님이 더 이상 참을 수 없을만큼이 되었기 때문에,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고 점점 심해져 가기만 했기 때문에 유다는 서서히 무너져 내린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요시야가 죽고 나서도 정말로 유다를 멸망당하게 하실 때까지 오랫동안 참고 기다리셨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결과만 생각합니다. 그래서 어디선가 커다란 비극이나 재난이 생기면 금새 하나님을 원망하지요. 그러나 그 때까지 사람들이 쌓아올린 죄악들과 그 때까지 참고 인내하신 하나님의 기다리심은 생각하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상을 주시고 복을 주시는 일에는 신속하시지만 징계를 주시고 벌을 내리시는 일에는 최대한 더디게 움직이십니다. 그리고 결코 죄없는 시대의 죄없는 사람들을 벌주시고 징계하시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는 징계는 하셔도 결코 버리지는 않으십니다. 북쪽 이스라엘이 망하고 남쪽 유다까지 망하였지만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모두 완전히 버리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벨론으로 잡혀 가서도 여전히 그들을 하나님의 백성들이었고 또 사랑하시는 자녀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거기서 그들의 구원을 준비해 가고 계셨습니다. 


성도가 자신을 지키는 일은 자기 자신만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가족을 지키고, 교회를 지키는 일이며, 나아가서 사회와 나라를 지키는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성도는 항상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순결하게 살아가려고 힘써야 합니다. 세상이나 세상에 속한 것들이 아니라 하나님만 섬기기 위해서 거듭 거듭 헌신해야 하며 세상의 방식이 아닌 하나님의 방식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교회와 성도들이 사는 방식을 보면 이와는 많이 다릅니다. 평상시에는 믿지 않는 사람들과 별로 다르지 않은 목적을 가지고 세상을 닮은 삶의 방식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다가 삶이 어려워지고 사회에 어려움이 생기면 마치 그 동안 자신들은 세상과 구별되어 거룩하게 살아왔던 것처럼 호들갑을 떨며 무슨 집회를 하고 세상을 향해서 비난의 화살을 돌립니다. 


사회나 국가에 큰 어려움이 생기는 것은 무언가 좋지 않은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더 결정적인 이유는 그 사회 안에서 함께 살아가고 있는 교회와 성도들이 하나님 앞에서 그만큼 바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한 사회나 국가에 그런 벌을 내리시게 만든 똑같은 죄와 악이 교회와 성도들의 삶 속에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요시야를 보시고 징계를 연기하셨던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들을 보시고 그 사회와 그 나라를 지켜 주실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한 사회의 희망은 그 사회 자제가 아니라 교회와 성도들이 진실로 하나님께로 돌이킬 수 있느냐, 요시야 왕처럼 자신의 잘못을 통회하면서 다시 자기 자리로 되돌아가서 도덕적이고 영적으로 거룩하고 순결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갈 수 있느냐 하는 문제에 달려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사실 오늘을 살아가는 성도들의 어깨는 굉장히 무겁습니다. 보시다 시피 우리가 살아가는 이 사회는 그 어느 곳 하나 성한 곳이 없이 헐어 있고, 부끄럽게도 교회가 그 선봉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이 때야 말로 참 성도들이 자신의 성도됨을 회복해야 할 때입니다. 그래야 우리 모두는 회복의 기회와 은혜의 기회를 얻을 수 있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나 혼자 무슨 힘이 있겠나 하지 마십시오. 어차피 하나님은 나 혼자 이 세상을 다 책임지라고 하신 적이 없으십니다. 우리는 그저 내 삶과 내 영혼을 거룩하게 지켜내기 위해서 힘쓰면 됩니다. 내가 살아가는 삶의 자리와 내가 관계 맺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최대한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가기 위해서 힘쓰면 됩니다. 그러면 오늘날 작은 요시야들을 찾고 계시는 하나님께서 무너진 성전과 성벽을 다시 세워주실 것이고,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실 것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무너진 성벽의 한 구석, 무너진 성전의 한 모퉁이라도 다시 세워지는 은혜와 영광이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가 스스로를 거룩하고 순결하게 구별하여 하나님 앞에 다시 세우는 오늘의 요시야, 자기 인생의 요시야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