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현교회 설교,강의/주일오후

2015.08.30. 전교인 기도회 - 여호와께 부르짖으매(사사기 12)


20150830SE (#1).mp3.zip





본문 : 사사기 3장 7-11절


    


 모든 일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이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많은 일들은 일종의 패턴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떻게 시작되면 그 다음에는 어떤 어떤 과정을 거쳐서 어떻게 되더라 하는 것 말입니다. 그래서, 어떤 패턴이 발견되면, 그런 종류의 일은 충분히 그 과정과 결과를 예측할 수 있는 일이 됩니다. 그런데, 이런 패턴들 중에서는 좋은 패턴도 있고 그래서 좋은 패턴은 따라가야 하지만 나쁜 패턴도 있어서 그런 패턴을 따르는 일은 끝까지 가도록 내버려 둘 것이 아니라 중간에 끊어주어야 합니다. 


사사기에는 열 두명의 사사의 이야기가 나오고, 그 사이 사이에 몇 개의 이야기가 나오는 데요, 오늘 본문은 바로 그 열 두 명의 사사 이야기가 쓰어진 시대가 가지고 있는 공통적인 패턴이 무엇인지를 보여 줍니다. 어떤 이야기는 한 절로 기록되어 있고, 삼손 이야기 같은 경우에는 몇 장에 걸쳐서 길게 기록되어 있기는 하지만, 모든 이야기들은 오늘 본문, 그러니까 사사 옷니엘 이야기의 패턴을 따르고 있습니다. 사실 그러면 안되는데 말이지요. 


이스라엘 자손은 하나님을 잘 섬기다가 이웃나라로 눈을 돌립니다. 이웃의 신들이 좋아 보입니다. 이웃나라 신들을 섬기는 것이 현실적으로도 훨씬 유리할 것 같고, 자기들의 욕심도 챙길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잠시 옆으로 치워놓고 이방신들을 섬깁니다. 오늘 본문은 그 일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자기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고, 바알들과 아세라들을 섬긴지라” 이스라엘은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겨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만이 자기들의 하나님이시니까요. 그러나, 이스라엘은 자기 것으로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남의 것이 더 좋아 보였습니다. 그래서, 자기들의 여호와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바알들과 아세라를 섬긴 것입니다. 


우리도 신앙생활을 하다가 보면 이럴 때가 있는데요.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 아닌 다른 것에 눈을 돌리고, 마음을 빼앗기는 것은 반대로 생각해 보면 우리가 아직 그 분이 우리에게 주신 것과 그 분만으로 만족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는 정말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 한 분으로는 부족할까요? 천하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 만유보다 크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작은 마음을 채우고 만족시키기에 부족한 분이실까요? 만약 부족하다면, 그렇게 느껴진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진짜로 그렇게 작고 별 볼 일 없는 분이어서가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으로 충만케 되는 경험, 그 분이 나를 가득 채워주시는 것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 충만함을 계속 유지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어질 때부터, 무엇으로든 우리 자신을 채워야 만족할 수 있는 그런 존재로 지어졌습니다. 그래서, 채워져 있지 않을 때에는 무언가로 채우려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는 원래 하나님의 자리입니다. 하나님의 자리이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만 채워질 수 있습니다. 마치 하나의 퍼즐 조각은 그 조각이 들어가야 할 원래 자리에만 맞듯이 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리이기 때문에 하나님만큼 크고, 하나님만큼 풍성하지 않으면 그 자리를 채울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같은 분이 없기 때문에 다른 것으로는 결코 우리에게 참된 만족이 없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자기 하나님 여호와를 잊고 바알들과 아세라들을 섬겼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에게 노하셨습니다. 그리고는 그들을 메소보다미아 왕 구산 리사다임의 손에 붙이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8년 동안 섬기게 하셨습니다. 리사다임이라는 이름은 “두 배로 악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아마도 이 이름은 메소보다미아 왕의 본명이 아닌 듯합니다. 이스라엘이나 아니면 주변 나라사람들이 그 사람의 악함을 보고 붙여준 별명일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두 배나 악한 사람”을 택했느냐? 그것은 그가 두 배나 악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두 배나 악했기 때문에 일부러 그를 택해서 이스라엘을 두배로 괴롭히게 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경고사인은 주로 사람이나 상황을 통해 오게 됩니다. 갑자기 아무 일 없던 상황이 악화되거나 엄청난 사람이 나타나서 나를 괴롭힌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경고사인일 수 있습니다. 내가 지금 가고 있는 방향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경고사인말이지요. 물론 동일한 어려움이나 고통이 하나님께서 나를 양육하시는 과정에서 내가 꼭 배워야 할 것이 있기 때문에 주시는 믿음의 테스트 일수도 있습니다. 테스트냐 아니면 경고의 사인이냐 하는 것은 지금 나의 영적인 상태를 기준으로 판단하는 수 밖에 없습니다. 만약에 그것이 하나님의 경고사인라고 판단된 경우에는 빨리 하나님 앞에서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고 올바른 길로 돌아와야 합니다. 8절과 9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구산 리사다임을 8년을 섬겼더니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8년이 지나서야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이스라엘이 하나님께서 그 일에 개입하셔서 그들을 구하시게 할 때까지 8년이 걸렸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징계를 내리실 때, 그 잘못이 아주 심각한 것이 아니라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하나 하나의 잘못을 사건 별로 다루는 식으로 움직이시지 않습니다. 특히 한 나라, 한 민족을 이끄실 때는 더욱 그렇습니다. 죄악의 수위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범위를 넘어섰을 때, 그들에게 어려움을 주시는 방식으로 징계하십니다. 그렇게 될 때까지는 기다리시는 것이지요. 그런데, 저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징계하실 때 뿐만 아니라, 우리의 잘못으로 인해 겪게 되는 곤경으로부터 우리를 구하실 때도 똑같은 원리를 사용하시지 않는가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그저 부르짖으면, 하나님을 찾기만 하면 곧바로 구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 부르짖음이, 그렇게 하나님을 찾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그래도 충분히 진실한 것이 될 때, 움직이시는 것이지요. 왜 이스라엘이 8년 동안 단 한 번도 하나님께 부르짖지 않았겠습니까? 그들은 분명히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며 부르짖었을 것입니다. 다만 그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아직은 이스라엘의 중심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들이 하나님께로 참되게 돌이킬 때까지 기다리신 것이라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하나님께로 온전히 돌이키게 하시기 위해서 나를 징계하시는 것이 분명하다면, 우리는 속히 하나님을 향해 방향을 수정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는데 한 가지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거리가 멀수록 그렇게 하는데 걸리는 시간이 더 오래 걸린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참된 마음은 갑작스럽게 만들어 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내가 하나님을 기준으로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가를 생각하며 살아야 합니다. 조금 멀어진다 싶으면 다시 다가가고, 멀어진다 싶으면 다시 가까이 가고…… 이런 노력들을 반복해야 합니다. 그래야, 혹시 내가 깨닫지 못하는 잘못을 깨닫게 해 주시려고, 나에게 싸인을 보내실 때, 신속하게 하나님께로 돌이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행히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돌이킴을 받아 주셨습니다. 그래서, 한 사람 구원자를 통해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셨습니다. 그가 바로 우리가 앞서 살펴보았던 그나스의 아들이고, 갈렙의 조카인 옷니엘이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께서 왜 하필이면 옷니엘을 택하셨겠는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옷니엘을 선택하시고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세우신 것은 그가 훌륭한 사람이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물론 옷니엘은 개인적으로 볼 때, 무척 훌륭한 신앙인이었고 용사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옷니엘을 초대 사사로 세우신 것은 이유가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전부 하나님을 배반했습니다. 그래서, 벌을 받았습니다. 괴로움에 살려 달라고 울부짖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한 구원자를 세우시고, 그들을 구원하십니다. 그 구원자가 바로 옷니엘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다시피 옷니엘은 정통파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유다지파에 속해 있기는 했지만, 그는 겐 사람, 그러니까 이방인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입장에서 보면 굴러온 돌입니다. 그런데, 자신들보다도 더 복을 많이 받은, 그래서 어느 정도는 시기하면서도 부러워하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다른 사람은 다 놓아두고 바로 그 옷니엘을 선택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이 과정을 통해서 무엇을 배우기를 원하셨을까요? 또 우리는 이 일을 통해서 무엇을 배워야 하겠습니까? 그것은 겸손입니다. 결코 자신들의 구원자가 될 수 없는 사람이, 자신들의 유일한 구원자가 되어 자신들을 구해주는 것을 경험하면서, 그리고 그 사람에게 자신들의 운명을 맡기면서 그들은 자신들이 정통 이스라엘이라는 자존심을 내려놓는 공부를 할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스스로 겸손하지 않으면, 억지로라도 우리가 낮아지지 않고서는 안되는 그런 상황 안으로 우리를 몰아넣으실 때가 있습니다. 별로 좋아하지 않는 동료의 부하직원이 되게 하거나, 제일 싫어하는 사람의 도움을 받게 하거나, 내가 제일 자존심 상해 하는 일을 당하게 하십니다. 그런 일을 당하는 것은 참 불쾌하고 자존심 상하는 일이지요. 그렇지만 그렇게 우리의 자존심이 상할 때, 그것이 인간적이기만 한 자존심인지 아니면 그리스도인의 자존심인지 잘 구분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자존심은 결코 포기해서는 안되지만, 인간적인 자존심은 없애면 없앨수록 영적으로 그만큼 유익합니다. 먼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자존심은 죄와 관련된 자존심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인데, 하늘나라의 백성인데 어찌 함부로 죄를 지어서 자신의 가치를 떨어뜨릴 수 있겠습니까? 하늘나라의 상속자인데 어찌 불의한 재물을 탐내겠습니까? 그럴 때는 자존심을 세워야 합니다. 팍팍 세워야 합니다. 그러나, 인간적인 자존심은 다릅니다. 인간적인 자존심은 대개 내가 생각하는 내 모습과 관계가 깊습니다. 내가 이러 저러한 모습이어야 하는데, 사람들이 나를 이러 저러하게 대접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내 모습도, 사람들이 나를 대하는 모습도 내 마음에 안 찹니다. 그러니까 속이 상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상하는 것은 인간적인 자존심입니다. 이런 자존심은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래야, 행복하고 자유롭습니다. 그리고, 영적으로도 안전합니다. 자기가 정해 놓은 자신의 모습이라는 그 불편한 틀을 깨뜨리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깊고 풍성한 참 자유에 이를 수 없습니다. 


옷니엘 이후에 이스라엘은 40년이라는 태평성대를 누립니다. 40년 동안의 평안은 옷니엘로부터 시작되었고, 그의 다스림을 받을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그렇게 40년의 평안을 가능하게 했던 옷니엘이었지만 그도 결국에는 세상을 떠났다고 말씀합니다. 성도 여러분, 세상없는 사람도 세상을 떠납니다. 모세도, 여호수아도 세상을 떠났고, 그와 같이 옷니엘도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라고 해도 사람을 지나치게 의존해서는 안됩니다. 신뢰와 의존은 다릅니다. 신뢰는 그 사람 자체를 믿는 것이고, 의존은 그 사람의 능력에 의지해서 자신이 얻고자 하는 것을 얻으려는 것입니다. 사람은 신뢰의 대상이 될 수는 있어도 의존의 대상이 될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대단한 인생이라도 한 세대이상 다른 이들을 책임질 수는 없고, 또 현실적인 문제들은 어느 정도 책임질 수 있을지 몰라도, 진짜 중요한 마음과 영혼의 문제는 책임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인생은 그 누구라도 옷니엘 이상이 되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이 아니라, 그 사람을 통해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하나님께는 아무리 의존하고 의지해도 부작용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 분은 우리의 모든 것을, 우리의 마음과 영원까지 책임지실 수 있는 든든한 산성과 바위이십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떠나서 바알과 아스다롯들을 섬깁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진노하셔서 그들을 이방민족의 손에 붙이셔서 고통과 압제를 받게 하십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이 구원을 간구하며 하나님을 찾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그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하나님의 사람, 사사를 세우셔서 그로 하여금 이스라엘을 구하고 그들을 다스리게 하십니다. 그러면 한 세대 동안의 평안이 찾아옵니다. 사사가 죽습니다. 그리고, 뒤에는 다시 이스라엘의 반역이 있고, 다시 위의 과정들이 반복됩니다. 이것이 사사기의 역사가 진행되는 동안, 열 두 명의 사사가 그들을 구하고 다스리는 동안 이스라엘이 결코 떠나지 못했던 패턴이고 싸이클입니다. 


참 안타깝기 그지 없는 일이지만 실제로 이런 반복은 우리의 신앙생활 속에도 비슷하게 존재합니다. 하나님께서 복을 주십니다. 당분간은 감사하고 기뻐하며 하나님 가까이 머뭅니다. 그러다가 점점 나태해 집니다. 하나님을 생각하는 시간이 줄어들고, 그 대신 마음과 생각을 다른 것들이 채웁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과의 거리가 멀어집니다. 그런 시간이 지속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려움과 문제들을 통해서 싸인을 보내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도와달라고, 살려달라고 하나님을 찾습니다. 어느 순간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그 문제와 어려움을 풀어 주십니다. 그리고는 평안한 시절이 계속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또 한눈을 팝니다. 


성도 여러분, 이스라엘의 패턴을 그대로 답습하는 것, 혹시 이것이 우리의 신앙생활의 모습은 아닙니까? 오늘 하나님은 이스라엘 역사의 패턴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저 이 반복되는 패턴을 아는 데서 멈춘다면 그건 아무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따라해 보시기 바랍니다. “패턴을 바꿔라” 한 번 더요. “패턴을 바꿔라” 그렇습니다. 이것이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교훈입니다. 나쁜 패턴은 따라가라고 보여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나쁜 패턴은 버리고 바꾸라고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개인이건 아니면 사회의 구성원으로서건 간에 이 패턴을 깨뜨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 깨뜨림의 방법은 우리라도 하나님을 잊어버리지 않는 것이고, 사회의 일원으로써 우리 사회에 보내시는 싸인을 보고 계속해서 하나님의 뜻으로 돌이키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이 패턴을 바꾸는 사람이 되므로 우리가 사는 가정이, 그리고 사회가 하나님께서 주시는 그만큼의 평강을 누리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