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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주일예배

2015.09.06. 주일오전 -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여호수아 27)



20150906SM (#1).mp3.zip





성경본문 : 여호수아 14장 6-15절


 


우리는 지난 두 주간에 걸쳐서 이스라엘 각 지파에게 분배된 가나안 땅의 목록이 가지고 있는 신앙적인 의미와 교훈을 함께 살펴 보았습니다. 첫번째 교훈은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이었습니다. 5백년이 넘는 세월 동안 하나님은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시겠다는 약속을 차근 차근 이루어 오셨고, 결국 거의 1000년이라는 세월을 지나 다윗의 시대에 그 약속을 완전히 이루셨습니다. 때로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들이 거짓인 것 같고 부도가 난 수표처럼 여겨질 때, 우리는 이것을 생각하고 다시 한 번 우리의 믿음을 회복해야 할 것입니다. 두번째 교훈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삶과 그 삶을 이루고 있는 모든 것들은 모두가 다 우리를 위한 우리 몫의 분깃이라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나의 인생은 완전하시고 실수가 없으신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것이고 그 안에 있는 것들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 거기 놓아두신 것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삶에 대해서 불평하거나 불만을 가지거나 화를 내서는 안됩니다. 분배받은 그대로의 모습은 참 형편 없어 보일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삶은 우리가 믿음으로 살아낼 때, 그 복된 참 모습을 드러내는 약속의 땅입니다. 그러니 지금 보여지는 우리 삶을 보면서 불평과 불만만 늘어놓거나 그것 때문에 미리 좌절하고 실망할 필요가 없는 것이지요. 


 이렇게 말씀드리면 어떤 분들은 아무리 믿음으로 받아들여도 부족한 것은 부족한 것이고 없는 것은 없는 것인데 어떻게 불평과 불만을 늘어놓지 않을 수 있겠느냐고 반문하실지도 모릅니다. 맞습니다. 부족한 것은 부족한 것이고 없는 것은 없는 것입니다. 그 사실은 변하지 않고 그 사실 그대로가 우리 삶의 현실로 경험됩니다. 그런데요, 성도 여러분. 그렇다고 해서 그런 것들이 꼭 우리에게 불평과 불만거리가 되어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불만과 불평은 누가 하는 것이죠? 더 이상 방법이 없는 사람들이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전능하신 우리 아버지가 계십니다. 그래서, 그런 것들이 있다면 우리는 그냥 그 아버지께 말씀드리면 됩니다. ‘아버지, 없습니다. 아버지 부족합니다. 채워주세요.’ 하고 말입니다. 많이 부족하고 많이 없으면 우리의 말투가 더 간절해 지겠지만 그것이 꼭 불평이 되고 불만이 되게 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래도 안 주시고 안 채워주시는 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깊은 뜻이 있어서 입니다. 그 뜻은 분명히 시간이 충분히 흐르면 알게 될 것입니다. 설교를 하다가 보면 꼭 다 말씀드리지 못 하는 것이 있어서 오늘도 이렇게 지난 주일 설교에 한 마디 더하는 일로 오늘 말씀을 시작해 보았습니다. 없는 것, 부족한 것을 불만과 불평, 그리고 실망의 이유가 되게 하지 마시고 꼭 기도로 바꿔내시기 바랍니다. 


     14장부터는 본격적으로 요단서쪽 땅의 분배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요단강 서쪽에서 땅을 분배 받은 첫번째 지파는 유다지파였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유다지파가 어디를 분배받았고 어디를 차지했다는 이야기를 하기 전에 먼저 갈렙의 이야기를 꺼냅니다. 이것은 성경이 갈렙을 요단 서쪽을 차지한 이스라엘 사람들 중에서 대표적이고 모범적인 사람으로 내세우고 있다는 뜻인데요. 갈렙이 이스라엘 사람이었고 또 유다지파 출신이었다면 이것은 별 의미가 없겠지요. 그런데 갈렙은 원래 유다지파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그나스 사람이고, 그나스 사람은 에돔족속에 속해 있었습니다. 그리고 에돔족속은 예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지나올 때, 따지고 보면 형제이면서도 그들의 길을 막아섰던 그런 악한 사람들인데, 놀랍게도 성경은 이런 에돔족속 사람인 갈렙을 약속의 땅을 차지한 사람의 모범으로 내세우고 있는 것입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여호수아서는 사사시대에 기록된 책입니다. 정확하게 설명하면 더 이상 가나안 정복이 진행되지 않고 지지부진해져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약속의 땅에 대한 확신이 없어져 가고 의기소침해져 있을 때 그 사람들을 위해서 쓰여진 책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런 상황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책을 읽으면서 처음 맞닥뜨리는 가나안 정복의 대표주자가 갈렙이라는 것은 이들에게 어떤 깨달음을 주었을까요?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른 이유가 아니라 그저 선택된 사람들이기 때문에 가나안 땅을 주겠다는 약속을 받았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그들은 자신들이 선택된 사람들이기 때문에 이 약속이 무조건 이루어질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을 테지요.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그게 더 이상 진전이 없습니다. 그럴 뿐 아니라 주변 나라들로 부터 심한 괴로움을 당합니다. 이런 상황은 분명히 여러가지 복합적인 마음을 만들어 냈을 것입니다. 의심과 낙심, 불안과 무기력 등. 그리고 이런 질문들이 생겨났겠지요. 우리는 선택받은 사람들인데 왜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지 않는가? 왜 하나님의 약속과 반대되는 일만 일어나는가? 도대체 무엇이 문제이고 또 답은 무엇인가? 이런 복잡한 생각을 가지고서 여호수아서를 읽는데 요단강 서쪽의 땅을 분배해 준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부분에서 처음 만나는 사람이 바로 갈렙이었습니다. 이것은 이 이야기를 읽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질문에 대한 답도 되었겠지만 적잖은 충격이 되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을 때도 이런 일들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삼대째 예수를 믿습니다. 어려서부터 교회도 아주 잘 다녔지요. 그런 점에서 볼 때, 나는 그 누구보다도 복된 삶을 살게 될 것이고 은혜도 많이 받을 것이라고 믿으며 살아왔고 또 지금도 그렇게 믿습니다. 그런데 참 이상합니다. 내가 생각하기에 내가 그렇게 복되게 살고 있는 것 같지가 않습니다. 특별히 은혜를 많이 받고 있는 것도 아닌 것구요. 그런데, 옆을 보니 예수 믿은지 얼마 안된, 내가 보기에는 그리 신앙심이 깊어 보이지도 않는 다른 성도가 나보다 훨씬 더 복되게 사는 것 같습니다. 물론 내가 경제적인 기준에서만 이런 판단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그 사람이 나보다 훨씬 복되어 보입니다. 매주일 그 사람을 지켜보고 있지만 그의 얼굴에서 배어나오는 은혜와 기쁨은 나에게는 없는 것입니다. 사실 자존심도 상하고 부럽기도 하지만 이상하다는 생각이 더 큽니다. 그리고 자꾸 질문이 생깁니다. 그렇다면 왜 저 성도는 저렇게 복되고 은혜롭게 살며 신앙생활을 하는가 하는 질문 말이지요. 그런 질문을 가지고 둘러보니 그 사람만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내가 평소에 나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면서 별다른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많은 성도들도 그 사람과 비슷하게 복되고 은혜로운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문제가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왜 내 기대나 믿고 있는 것과는 달리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더 복되게 살아가고 있을까요?  나는 이 문제의 답을 어디서 찾아야 할까요?” 문제는 꼭 이런 모양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이런 모양으로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사실 나에게는 현실적으로는 별다른 문제나 부족함이 없습니다. 계속 신앙생활도 합니다. 직장도 괜찮구요. 아내도 참 하고, 자식들도 그만하면 잘 자라주고 있고 그렇다고 건강의 문제나 그런 것도 없습니다. 말하자면 그저 평안합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마음에 만족이 없습니다. 당신은 정말 행복하냐고 물으면 선듯 그렇다는 대답이 잘 안 나옵니다. 그다지 기쁘지도 않습니다. 뭐가 문제일까요? 예수 안믿는 것도 아닌데, 왜 나는 복되고 은혜롭게 살아가지 못 하는 것일까요? 


      성도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이 있습니다. 그 약속 중에서 가장 중요한 약속은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히 영광스러운 삶을 살게 될 것이라는 약속이지만 그 약속들 안에는 이 땅에서 복되고 은혜롭게 살아가는 삶에 대한 약속도 포함됩니다. 약간 곁으로 새는 느낌은 들지만 복 이야기가 나왔으니까 잠시 성경이 약속하고 있는 복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여전히 복이라는 말만 나오면 아브라함이나 야곱, 그리고 다윗 같은 사람들이 받았던 현실적이고 물질적인 복을 이야기하면서 그것이 오늘날의 성도들에게 약속된 복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만 그들은 지금 자신이 어떤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지를 모르기 때문에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성도들에게 그런 복도 주십니다. 부자가 되게 해 주시기도 하시고 성공도 하게 해 주시지요. 그렇지만, 그런 것들은 오늘 성도들에게 ‘약속된 복’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예전에 그런 복들은 앞으로 주어질 참된 복을 가리키는 손가락의 역할을 하고 있었는데 이제는 그 손가락이 가리키던 복의 실체가 우리에게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그 실체란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십니다. 그래서 신약 시대에 성도가 누리는 복중의 최고의 복은 바로 예수를 믿는 것이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과 연합하여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삶 자체가 최고의 복입니다. 내가 예수 안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그런 눈에 보이는 복들은 주시든 그렇지 않든 변함없이 복되고 기쁘게 충만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내면적인 실력을 가지게 되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려는 진짜 복이고 오늘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꼭 받아야 하는 복입니다. 오늘 예수를 믿는 우리들은 복이라는 단어를 떠올릴 때마다 이것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하고 이 복을 얻기 위해서 애써야 합니다. 아무리 내가 하나님께 눈에 보이는 복을 받고 싶다고 해도 그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복의 실체가 아니니까요. 그건 그저 더해 주시는 것이고, 줄 수도 있고 주지 않으실 수도 있는 선물에 불과합니다. 누구에게나 보장된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예수를 믿으면서 그저 눈에 보이는 복을 추구하는 것은 방향이 잘못된 것입니다. 오늘 이 시대에 우리가 하나님을 믿으려면 이 사실을 분명히 알고서 믿어야 합니다. 그래야 괜한 오해를 피할 수 있고, 실망이 없이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진짜 복도 누릴 수 있구요. 


      이런 복이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복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해 놓고 이야기를 계속해 보겠습니다. 아무튼 성도들에게는 하나님의 복된 약속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약속이다 보니까 우리들이 자꾸 오해할 때가 있습니다. 내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어도 그 복이 나의 것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어차피 하나님의 약속이니까 하나님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렇지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실 때, 그냥 일방적으로 알아서 하시지 않습니다. 어머니가 밥상 다 차려놓고 밥 다되었으니 와서 밥 먹어라 하시는 식으로 그렇게 약속을 이루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약속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싸우는 전쟁을 해야 한다는 전제 하에 주어진 것이었습니다. 전쟁이 없으면 약속의 땅 또한 없습니다. 가나안 땅이 눈 앞에 있어도 그 땅은 이스라엘 백성들과는 상관이 없는 곳이 되어 버립니다. 갈렙 이야기는 바로 그 사실을 알려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일부러 맨 앞에 가져다 놓으신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유다지파에 대한 땅 분배가 시작되기 직전에 갈렙은 여호수아 앞에 나아가서 45년 전,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생활을 시작하기 전, 가데스 바네아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 했습니다. 그 이야기의 요지는 하나님께서 그 때 자신에게 ‘네 발로 밟는 땅은 영원히 너의 것이 될 것이다’라고 약속하셨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지금까지 그 약속을 붙들고 살아왔다는 것입니다. 갈렙은 자신이 그 수많은 전쟁에서 살아남았고 또 이제 45년이 지난 후에도 여전히 그렇게 건재한 것은 그 약속 때문이라고, 하나님께서 그 약속을 지키주시려고 그렇게 하신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했습니다. 이 이야기는 갈렙이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약속하신 땅을 달라고 하기 위해서 꺼낸 이야기지만, 사실 이 속에는 갈렙이 자신의 인생을 바라보는 방식이 고스란히 들어 있습니다. 여러분, 갈렙이 지금까지 45년 동안 길을 잃어버리지 않고 확신에 넘치는 분명한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이 무엇 때문이지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가데스 바네아에서 주신 약속 때문이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지금 갈렙에게 그의 삶과 그가 누리고 있는 복이 가지고 있는 의미를 알려주는 역할도 했습니다. 그의 삶은 그 약속의 성취를 향해 가는 여정입니다. 그리고 그가 85세가 되어서도 여전히 전쟁을 치를 수 있을만큼 건강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 약속을 이루어 주시려고 허락하신 것입니다. 갈렙에게는 그 어떤 것도 그저 하다 보니까 우연히 자기에게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고 모두가 다 목적이 있고 이유가 있는 것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모든 성도들에게는 이미 하나님께서 주신 가장 확실하고 영원히 흔들리지 않는 약속들이 여럿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 삶을 바라보고, 우리에게 허락되는 일들을 해석해 낼 수 있는 틀이 되는 것들을 우리는 이미 다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약속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바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약속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 나라를 마치 지금과는 전혀 상관이 없고 죽고 나서야 상관이 있어지는 그런 곳으로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현재의 삶을 살아가는 동안에는 그 나라에 대해서 많이 생각하지도 않고 그 나라로 부터 별다른 영향도 받지 않지요.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우리 성도들에게는 가장 확실하고도 중요한 미래의 약속인 동시에 지금 현재의 삶을 해석하는 틀이 되고, 또 그 삶을 지탱해 주는 힘과 목적이 되기도 합니다. 어떤 성도가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맛보아 알게 되고 그래서 그 나라에 대한 참된 소망을 품게 되면 그 때부터 그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서 누릴 영원한 영광을 인생의 목표로 삼게 됩니다. 그 영광을 맛보는 순간 그런 영원한 만족과 기쁨은 하나님 나라에서만 맛볼 수 있다는 것을 자동적으로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일단 이렇게 해서 삶의 목표가 하늘의 영광에 가 있게 되면 그 다음에는 지금 자신이 살고 있는 삶의 의미가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그 이전에는 현재 자신이 걷고 있는 길의 의미를 잘 몰랐습니다.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있었더라도 거기에 대한 확신이 없었지요. 그런데, 하늘 영광이 진짜 목적이 되고 나면 지금 내가 걷고 있는 길은 그것을 얻기 위해서 걸어가는 과정이 됩니다. 그럴 뿐만 아니라 그 영광을 더 크고 찬란하게 만들기 위해서 나에게 주어진 한 번 밖에 없는 기회라는 의미도 가지게 됩니다. 그리고 그 삶 속에서 나에게 주어지는 모든 복과 은혜, 그리고 모든 삶의 조건들은 그 영광을 더 크고 아름답게 만들어갈 원재료라는 것도 알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에 대한 확실하고 살아있는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은 자기가 무엇을 목표로 해서 왜 살고 있는지 확실히 알고서 살아가게 되고, 자기 삶에 주어지는 모든 것들을 어디다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도 확실히 알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갈렙이 45년전에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을 자신의 삶의 모든 것을 해석하는 틀로 삼고서 살아갔듯이 성도들은 하나님 나라의 약속을 자신의 삶을 해석하는 틀로 삼아야 합니다. 그 흔들리지 않는 나라에 대한 약속을 중심에 놓고 지금의 삶을 바라볼 때, 그 사람의 삶은 항상 견고하며 소망이 넘치고 방향이 확실한 인생, 그리고 실망이 없는 인생이 될 수 있습니다. 


      혹시 우리 성도들 중에 자신의 삶에 대해서 가치도 느끼지 못하고 의미도 알지 못하며 목표도 없는 것 같다고, 텅 빈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 사시는 분들이 계신다면 그 누구보다도 그런 분들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약속을 꼭 붙드셔야 합니다. 나이가 먹어 가면서 인생이 허무하고 이제는 쓸모 없어지고 있다고 여겨지시는 분들이 있다면 그 분들 또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약속을 단단히 붙드셔야 합니다. 내 삶의 좋지 못한 형편들 때문에 자신의 삶이 가치 없고 별 볼 일 없다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하나님 나라의 약속을 붙드셔야 합니다. 우리가 그 약속을 통해서 우리의 삶을 바라보아야만 우리는 우리 삶의 영원한 가치와 의미를 깨달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성도들 모두가 이 복을 받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가장 분명한 약속, 하나님 나라에 대한 약속을 자신의 삶을 바라보고 해석하는 틀로 삼을 수 있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갈렙에게 ‘네가 밟는 땅은 모두 네 것이 되게 해 주겠다’고 약속하셨고, 그래서 갈렙은 자기 몫의 땅을 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요 여러분, 여러분이 갈렙이라면 어떤 땅을 달라고 하시겠습니까? 평지, 그것도 물이 충분한 비옥한 땅을 달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지만 갈렙은  상식 밖의 행동을 합니다. 갈렙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 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지금 내게 주소서” 갈렙은 좋은 땅을 다 놓아두고 산지를 달라고 한 겁니다. 이 산지에는 요새들이 버티고 있고 거인족속들이 사는데 말입니다. 갈렙은 여기서 ‘그 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라고 말하고 있는데요. 갈렙의 말대로라면 하나님께서 꼭 찝어서 갈렙에게 헤브론 산지를 주시기로 약속했다는 뜻이 됩니다. 그런데 제 기억으로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 적이 없는 것같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여기 저기 성경을 찾아보았습니다. 제 기억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저 모세를 통해서 ‘네가 밟는 땅은 영원히 너와 네 자손의 땅이 될 것이다’라고만 말씀하셨지 그 산지, 그러니까 헤브론을 주겠다고 하신 적은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갈렙은 왜 이렇게 말했으며 왜 산지를 달라고 요구했을까요? 갈렙이 하나님의 말씀을 오해했거나 혹은 잘못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일까요?


       우리가 갈렙의 이야기를 계속 들어보면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 곳에는 아낙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지라도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면 내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내리이다” 갈렙의 말 속에서는 산지를 달라고 하는 요구와 이 말이 연결되어 있지만 원래 두 이 두 가지는 하나님께서 따로 따로 하신 말씀입니다. 두번째 내용은 신명기 9장에 있는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모아놓고 한 연설 속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거기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요단강을 건너가면 하나님께서 그 땅을 너희들에게 주실테니까 거기 견고한 성이 있고 아낙자손이 있어도 두려워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갈렙은 이 두 말씀을 연결시켰습니다. 왜 그렇게 했느냐 하면 그 산지에 강한 성읍이 있고 거기 아낙 자손들이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갈렙은 모세의 말을 그대로 믿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아무리 강한 성읍이 있고 거기 거인인 아낙자손들이 살고 있다고 하더라도 분명히 이길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또 하나님께서 밟는 땅을 다 자기에게 주실 것도 믿었습니다. 그런 시각에서 헤브론을 보니까 거기가 딱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약속의 땅이라고 확신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곳이 아니라 바로 그 곳을 달라고 요구했던 것입니다. 현실적인 눈으로만 본다면 그 좋은 약속을 그런 식으로 사용하는 것이 참 어리석어 보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눈을 가진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과 다른 요구를 하고, 또 다른 것을 원하게 되어 있습니다. 


       어차피 밟는 땅은 다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아낙 자손들도 이기게 해 주시겠다고 하셨고 아무리 강한 성읍도 차지하게 해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만약 이 두 약속을 진짜로 믿는다면, 철석같이 믿고 의심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어떤 선택을 할까요? 그는 절대로 쉬운 선택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현실적으로 보면 절대로 이길 수 없는 적을 선택하고 절대로 빼앗을 수 없는 성을 선택하겠지요. 어차피 자기 것이 될테니까요. 그래서 갈렙은 헤브론을 달라고 했던 것입니다. 헤브론처럼 그런 조건에 딱 맞는 곳이 없으니까요. 그런데 사실 이것은 현실적으로 볼 때도 가장 지혜로운 선택입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세요. 왜 아낙 자손들이 하고 많은 곳을 다 놓아두고 헤브론 산지에 요새를 만들어 거기 살고 있었을까요? 비록 그곳이 비옥한 평지는 아니어도 그 곳이 가나안 땅 중에서 가장 중요한 요충지이기 때문이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다른 곳에 자리를 잡고 살았겠지요. 힘이 있는 사람들은 항상 가장 좋은 곳을 차지하게 마련이니까요. 


       믿음으로 보고 믿음으로 선택하는 사람들은 때로 상식대로만 보고 상식대로만 선택하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참 어리석고 미련해 보일 수 있습니다. 믿음을 기준으로 삼는 것은 현실적으로는 사서 고생하는 것처럼 보이니까요. 그렇지만 저는 그것이 정말로 지혜로운 선택이라고 믿습니다. 왜냐하면 믿음의 사람만이 하나님의 뜻을 정확하게 분별할 수 있는데, 하나님은 가장 지혜로우신 분이시니까 당연히 그렇게 될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결국 믿음으로 하는 선택이 마지막에 가서는 현실적으로도 가장 지혜로운 선택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결국 갈렙과 그의 사람들은 헤브론을 차지했습니다. 산 위에 세워진 난공불락의 요새에서 최고의 난적을 몰아내고서 말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약속대로 된 것입니다. 그 덕분에 그들은 가장 든든한 곳에서 살아가게 되었고, 이스라엘 전체의 입장에서 보아도 가장 중요한 요충지를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성도에게는 영원한 구원과 하늘의 영광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하늘과 땅이 바뀌어도 바뀔 수 없는 약속입니다. 그렇다면 성도 여러분, 이 약속을 기준으로 놓고 보면요. 저와 여러분의 미래는 확실합니까, 불확실합니까? 안전합니까, 불안합니까? 그 무엇보다도 확실하고 안전합니다. 우리는 결국 영원한 구원을 얻을 것이며 하늘의 영광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거기까지 가는 동안 만나는 일들이 그 약속을 망치고 좌절시킬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지요? 우리가 살면서 무슨 일을 만나도 이미 정해진 성도들의 진짜 미래는 바꿀 수 없습니다. 참된 성도는 분명히 영원한 구원을 얻고 하늘 영광을 누리며 살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은 틀림 없는 것이지요? 그리고 우리는 이것을 분명히 믿으며 살고 있지요? 그렇다면 뭐가 불안하고 뭐가 두렵습니까? 살다가 보면 내 앞 길에 산지가 있을 수도 있고, 거기는 도저히 내 힘으로 어쩔 수 없는 거인이 버티고 서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래도 약속은 이미 주어져 있습니다. 밟는 곳은 어디든지 우리 것이 되게 해 주시겠다는 약속, 그리고 하늘나라를 나의 영원한 약속의 땅이 되게 해 주시겠다는 그 깨지지 않는 약속은 이미 주어져 있습니다. 내가 그 약속을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않는 한, 그 약속은 분명히 이루어질 것입니다. 산지의 요새라도 정복할 것이고, 거인들이라도 이겨낼 것입니다. 오히려 그것이 우리 영광을 위한 재료가 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의 믿음은 그저 믿거니 하는 그런 믿음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됩니다. 그런 믿음으로 만족하면 안됩니다. 그러면 힘이 없고 능력이 없습니다.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약속이 놀랍게 이루어지는 것을  보지 못합니다. 우리의 믿음은 반드시 확신이 되어야 합니다. 갈렙의 믿음처럼 말이지요. 우리의 믿음은 우리를 가만히 있지 못하게 하는 믿음, 앞으로 나가서 하나님께 약속된 복을 요구하는 믿음, 그리고 그 복을 얻기 위해서 기꺼이 싸우게 하는 그런 확신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세상보다도 견고한 약속이 있습니다. 영원한 구원과 하나님 나라의 영광에 대한 약속이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갈렙에게 주셨던 약속보다도 더 확실한 약속입니다. 세상이 흔들리고 모두가 흔들려도 여러분은 꼭 이 약속 안에서, 이 약속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을 향해 외치십시오.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저 평지가 아니라 저 산지가 나의 분깃이 되게 하소서.’ 하고 말입니다. 그리고 믿음을 가지고 여러분 앞의 대적들과 담대하게 싸우십시오. 그러면 여러분 앞을 가로 막은 산지는 여러분을 위한 강한 산성이 되어 줄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더 큰 승리와 영광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우리 앞의 모든 대적들이 사라지고 우리 앞에 영원한 약속의 나라가 열릴 때까지, 이 확실한 길을 가며 정해져 있는 승리의 싸움을 싸우는 오늘날의 갈렙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