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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주일예배

2015.09.27. 주일오전 - 도피성(여호수아 30)



20150927SM (#1).mp3.zip





성경본문 : 여호수아 17장 14-18절


 



사람들은 정의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정의를 추구하고 또 기뻐하는 마음이나 생각을 말하는데요. 여기서 정의란 공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정의감이란 결국 공평한 것을 바라고 또 기뻐하는 마음과 생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적어도 기회는 공정하게 주어져야 한다는 것, 힘있는 사람은 힘없는 사람을 괴롭히면 안된다는 것, 법은 가난하나 부자이거나 많이 가졌거나 그렇지 않거나 공정하게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 100원짜리 물건을 100원에 사고 파는 것, 일을 했으면 정당한 임금을 받아야 하며 일을 시킨 사람은 정당한 댓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것 등. 이런 것들을 볼 때는 평안하고 기뻐하지만 이런 것들이 깨어질 때는 불편한 마음이 되는 것이 바로 정의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건강한 국가나 사회일수록 투기나 부당이득을 방지하고 불공정한 것을 금지하는 좋은 법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요. 이것은 건강한 국가나 사회가 되려면 그 무엇보다도 정의가 잘 지켜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국가나 사회가 이런 일을 잘 하지 못하면 점점 더 사람들의 정의감이 흐려지게 되고 결국 그 사회는 정의롭지 못한 사회, 정의롭게 될 능력을 잃어버린 사회가 되고 맙니다. 그러면 사회는 결국 양육강식의 정글이 되어 버립니다.  


 이 정의감은 여러가지로 표현될 수 있는데요. 그 중의 하나가 복수심입니다. 내가 한 대 맞았으면 나도 한 대를 때려야 하고, 내가 10원 손해 보았으면 그 사람도 10원을 손해 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고 또 그렇게 되는 것을 보아야 마음이 편안해 집니다. 큰 틀에서 보면 이것 또한 정의심입니다. 그것 또한 공평을 찾고 회복하려는 마음이고 그 공평함이 있을 때 평안을 느끼는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는 중국영화가 아주 인기가 있었습니다. 오늘 같은 명절이면 텔레비젼에서 저녁에 중국영화를 보여주곤 했는데요. 그러면 그 다음 날에는 어김없이 길거리에서 슉슉거리며 이리 저리 팔 다리를 휘젓는 남자 아이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사실 남자라면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참 재미있게 보았지요. 그런데, 이런 중국영화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었던 틀이 있었습니다. 주인공이 나오고 그 주인공의 사부가 나옵니다. 주인공은 그 사부에게 열심히 무공을 배우지요. 그러던 어느 날, 꼭 제자가 잠시 자리를 비웠을 때, 무공의 대가인 악당이 그 주인공이 없을 때 사부를 찾아와 대결을 청하게 되고, 결국 그 사람의 비열함과 잔인함에 주인공의 사부는 목숨을 잃게 됩니다. 나중에 그 사실을 알게되는 주인공은 그 때부터 산 속으로 들어가 부족한 무공을 완성하게 되고, 그 다음에는 그 악당을 찾아가 사부의 원한을 갚아 줍니다. 이렇게 단순하고 천편일률적인 스토리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던 이유는 이런 영화들이 사람들의 마음 속에 있는 가장 기본적인 본능들 중의 하나인 정의심을 만족시켜 주었기 때문입니다. 악당은 벌을 받아야 하고, 원수는 갚아야 한다는 마음 말이지요. 


정의감의 어두운 부분이라고 할 수 있는 복수심 또한 사람들에게는 근본적인 욕구에 속합니다. 그래서, 고대 사회의 법들을 보면 대개가 복수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말을 들어 보셨을 텐데요. 고대의 법들을 보면 대개가 이런 비슷한 규정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개인에게 손해를 보고 해를 입었을 때 똑같은 것으로 갚아줄 권리를 준 것입니다. 사람들은 모두들 그것이 정당한 것이고 정의로운 것이라고 생각하니까요. 물론 아시다시피 이 말은 성경에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성경은 이 원칙을 개인이 아니라 법을 집행하는 지도자들에게 주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법을 집행하는 사람들이 자기 맘대로 과도하거나 혹은 과소한 벌을 내리는 일을 금지하는 규정이었지 개인에게 똑같이 갚아주는 일을 허용하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성경은 개인적으로 원수를 갚고 복수하는 일을 강하게 금지하고 있습니다. 레위기 19장 18절에서는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라고 말씀하고 있고 신명기 32장 35절에서는 “보수는 내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 개인적으로 복수하는 일을 금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피해자의 입장에서 보면 참 억울하고 부당한 일 아닙니까? 분명히 피해를 입었는데 왜 갚아주면 안됩니까? 그것은 개인의 권리이며 그렇게 할 때 정의가 세워지는 것 아닙니까? 그러나, 아닙니다. 복수는 개인의 권리가 될 수 없고, 그렇게 되어서도 안됩니다. 우선 절대로 복수를 통해서는 정의가 세워지지 않습니다. 복수는 한 번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복수는 복수를 낳고 그 과정에서 점점 더 커져 갑니다. 만약 복수하는 일이 한 사람에게서 시작된 일이, 그리고 작은 상처로 시작된 일이, 사돈의 팔촌까지 확대되고 목숨을 빼앗는 일까지 확대될 지 누가 알겠습니까? 또 설혹 복수하는 것, 당한대로 되갚아 주는 것이 사람의 권리라고 하더라도 사람은 되갚아 줄 때, 당한 것과 똑같이 갚아주지 않습니다. 본성적으로 한 대를 맞으면 두 대를 때려야 만족하고, 내가 입은 손해나 상처보다 더 큰 것으로 갚아주어야 마음이 편한 것이 사람이기 때문에 복수는 항상 과해 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복수는 사람의 몫이 될 수 없습니다. 당한 대로 되갚아 주는 것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하나님의 권리입니다. 그래서 적어도 하나님을 믿는 성도라면 ‘복수’라는 단어는 자기 사전에서 지워버려야 합니다. 


오늘 함께 읽은 본문은 ‘도피성’에 대한 본문입니다. 이 도피성이란 실수로 누군가를 죽이고 도망치는 사람들을 위해서 마련해 놓은 일종의 도피처였는데요. 이 도피성은 본문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스라엘 영토 안에 모두 여섯 개가 있었습니다. 모두가 다 하나님께서 직접 지정해 주셨지요. 그런데, 이 도피성들은 그 위치가 아주 특별합니다. 이스라엘 경내 어디서든지 32킬로미터 쯤 떨어져 있습니다. 우리 식으로 80리쯤 되는 거리인데요. 이 정도면 걸어도 하루 안에 충분하게 도착할 수 있는 거리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실수로 사람을 죽인 사람이 자기 가족이나 친구의 복수를 하겠다고 추격해 오는 사람을 피해서 달아나다가 중간에 지쳐 도망치는 것을 포기하거나 혹은 길에서 밤을 지내느라고 위험한 일을 당하게 될 그런 상황을 방지하기 위해서 도피성들을 그런 위치에 두셨던 것입니다. 


도피성에 사는 사람들은 일단 그렇게 일을 저지르고 도피성으로 도망쳐 온 사람들이 있으면 그 사람들이 정식으로 재판을 받을 때까지 그들을 보호해 줄 의무를 가지고 있었고, 그리고 그 이후에도 그 사람이 원한다면 그 당시 그 성의 제사장, 그러니까 재판관이 죽을 때까지 그 성에 머물 수 있게 해 주어야 하는 의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물론 도피성은 모든 죄 지은 자들을 위한 도피처는 아니었습니다. 사람을 죽게 한 사람 중에서도 실수로 의도하지 않게 그런 일을 저지른 사람들만이 이 도피성으로 피할 수 있었고, 또 거기서 보호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사회에서 개인적으로 원수를 갚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사람은 언제든지 분노나 혹은 정의심 때문에라도 스스로 피해자의 원수를 갚으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비록 사람을 죽게 했지만 그것이 실수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렇게 한 것이라면 그 사람은 절대로 원수 갚는 일의 희생자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러면 또 한 명의 억울한 희생자가 생겨나게 되는 것이고, 복수자들은 또 한 번 억울한 사람을 죽게 만든 장본인이 됩니다. 그렇게 되면 이 악순환은 계속되고 또 계속될 수 있고, 하나의 비극이 계속해서 더 큰 죄들을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도피성을 주신 것은 바로 이런 일들을 막기 위해서 였습니다. 실수로 가해자가 된 사람들을 보호하는 동시에, 충동적으로 원수 갚는 죄를 지을 수 있는 사람들을 그들의 죄로부터 보호하고, 또 더 많은 죄와 악이 이스라엘 공동체를 더럽히고 망가뜨리지 않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이 도피성이라는 성읍들을 이스라엘 영토 곳곳에 만들어 놓으라고 명령하셨던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반드시 정의감이 있어야 합니다. 바른 것, 공정한 것을 보면 기뻐하고 그렇지 못한 모습을 보면 불편해 하고 또 분노할 줄 아는 그런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자기 삶과 영혼을 바르게 지켜낼 수 있고, 또 자기가 사는 사회를 더욱 더 아름답고 바른 곳으로 가꾸어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런 목사님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누가 보아도 너무나 불의하고 부당한 상황이 벌어졌는데도 그 분은 전혀 감정이 동요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에 대해서 아무런 관심도 없는 것 같아 보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물었습니다. 목사님은 이런 상황을 보면서도 아무렇지도 않느냐고, 마음이 불편하거나 화가 나지 않느냐고 말입니다. 그랬더니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자기도 옛날에는 그런 일이 있을 때마다 저처럼 그랬답니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기 힘으로 어쩔 수 있는 일도 아니고 괜히 마음만 시끄러워지고 평안만 깨지니까 이제는 그저 자기 마음이나 잘 지켜야 하겠다고, 그래서 자기는 그런 일에는 일부러 관심을 갖지 않는다고 말입니다. 일견 이해가 가는 부분도 없지 않지만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이런 모습을 전혀 기뻐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기 마음의 평안을 지키려고 세상을 향해 눈을 닫고 하나님께서 주신 정의감이라는 하나님의 성품을 저버리는 일이니까요. 만약 모든 사람이 이렇게 살아간다면 이 세상은 완전히 불공평하고 불의한 일들로 채워질 것입니다. 그래서 정의감은 꼭 필요한 것이고 결코 포기되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내 마음만 편하게 하고자 하는 유혹을 이겨야 합니다. 


그러나 정의감이 좋은 것이고 또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것이라고 해도 그것을 개인이 함부로 자기가 원하는 모양으로 표현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면 이 세상은 정의라는 이름으로 다시 한 번 몸살을 앓게 될테니까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개인적으로는 원수를 갚지 말라고 하셨고, 또한 원수 갚는 일을 하나님의 일이라고 못 박으셨으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도피성을 만들라고 정해 주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스스로 재판관이 되고 집행관이 되어서 불의한 자에게 벌을 주고 싶어하는 마음, 개인적인 원한을 자기 손으로 되갚아 주고 싶어하는 마음을 포기하기가 굉장히 어렵습니다. 아담이 죄를 짓고서 스스로 왕이 되려고 한 후, 하나님께서 주신 정의심은 스스로 왕노릇하고 싶어하는 욕심과 결합되었고, 그래서 손으로 되갚아 주는 일을 정당한 나의 권리로 여기는 사고방식으로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시대에 이르면 유대교의 랍비들은 ‘눈에는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는, 하나님께서 재판관들에게만 주신 말씀을 제멋대로 개인들에게 맡겨 버렸습니다. 그러니까 받은만큼 돌려주는 한에서는 복수를 해도 괜찮고, 그렇게 하는 것이 개인의 권리라고 가르쳤던 것이고, 이것이 자신들의 입맛에 맞으니까 일반 유대인들은 그저 그 가르침에 따라 행동했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슨 말씀입니까? 아니라는 것입니다. 틀렸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뒤에 우리가 성경에서 가장 버거워 하고 불편해 하는 말씀을 덧붙이셨습니다.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빰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누구든지 너를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어떻습니까, 여러분? 이 말씀 읽을 때마다 이게 살라는 것인지 죽으라는 것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으십니까? 그렇지만 하나님 말씀이라는 것이 원래부터 그렇습니다. 어떤 방식으로든 자아가 죽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가 없고 또 그 말씀에 순종할 수가 없습니다.


일반적으로 볼 때, 개인적으로 원수 갚는 것을 포기하는 일만해도 참 쉽지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거기서 멈추지 않으십니다. 우리 주님은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첫번째 항목만 예로 들어 보면, 상대방이 오른 뺨을 때렸다고 해서 나도 상대방의 오른 뺨을 때리고 그것을 정의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 말씀은 개인적인 영역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한 것이니까 절대로 공적인 영역으로 확대해서 생각하시면 안됩니다. 국가나 지도자들이 어떤 악을 행하든 거기 무관심해야 하고 아무 비판도 하지 말아야 한다는 식으로 받아들이시면 안됩니다. 또 개인의 삶에서 일어난 일일지라도 법에 호소하는 일까지 포기하라는 말씀은 아닙니다. 법에 호소하는 것은 악한 자의 악행에 대해서 개인적인 보복을 가하는 것이 아니니까요. 주님의 말씀의 요지는 받은 대로 되갚아 주어야만 한다는 그 생각, 그래야만 직성이 풀리는 그 마음을 내려놓으라는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는 절대로 악을 이길 수 없고 오히려 악을 없애고 바로잡겠다고 하다가 악을 더하게 되고, 스스로도 악한 사람이 되고 마니까요. 


사람들은 구약에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을 보면서 숨이 막힌다고 말합니다. 어떻게 그렇게 살 수 있겠느냐고 말합니다. 그렇지만 사실 그런 말씀들은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최소한으로 인간답게 살아가는 방법을 말하는 것이지 뭐 특별하게 거룩하고 고상하게 살아가는 방법에 대해서 말해 주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일반적으로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과는 차이가 많이 나지만 말이지요. 율법의 대표격이라고 할 수 있는 십계명을 한 번 잘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거기서 하라고 되어 있는 것들과 하지 말라고 되어 있는 것들은 그저 하나님의 피조물인 사람이 하나님을 어떻게 대하는 것이 마땅한지, 그리고 함께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사람으로써 다른 사람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하는 아주 기본적인 내용들을 담고 있을 뿐이지 아주 고상하고 특별한 규정들이 아닙니다. 그것은 도피성 규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도피성 규정만 보고서도 답답해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왜 다른 나라에는 없는 법을 우리는 지켜야 하느냐고, 내가 당한대로 갚아주는 것은 내 권리이고 너무나 당연한 것이 아니냐고 항변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직접 도피성들을 지정해 주셨고, 그 도피성에 대한 구체적인 규정들까지 주셨습니다. 그것은 그렇게 해야만 이스라엘이라는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 백성들의 언약 공동체가 지켜질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최소의 규정이었습니다. 이것 때문에 이스라엘 공동체가 더 선해지거나 더 거룩해 질 수 있는 그런 규정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도피성 규정은 그 규정 자체로 참 훌륭하고 지혜로운 말씀인 것은 틀림 없지만 그것 자체로 완전하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모든 율법의 마침이 되신 우리 예수님께서는 이 도피성에 대한 규정도 완성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교독문으로 읽었던 마태복음 5장의 말씀입니다. 악은 악을 악으로 되갚아 줄 때가 아니라 선으로 악을 이길 때 비로소 그 힘을 잃어버리게 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도피성에 대한 말씀들을 보다가 저는 자연스럽게 교회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참 죄송한 말씀입니다만, 오늘날의 교회는 참 공동체됨을 정말 많이 잃어버렸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이 가지는 풍성함이 어떤 것인지 기억조차 하지 못하는 기억상실증에 걸려 있습니다. 일이 이렇게 된 데에는 교회들이 너무 대형화 된 것도 일조한 점이 있지만, 더 근본적인 다른 이유도 있습니다. 성도들 조차도 개인주의적인 사고방식에 익숙해져 있고, ‘사람은 자기가 한 만큼 받고 사는 것이다’라는 세상의 원리가 교회 안에서도 그대로 통용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래도 항상 사랑을 말하는 교회 안이기 때문에 악을 악으로 되갚아 주는 일은 그리 많지 않지만, 무언가 다른 이들에게 선한 것을 줄 때는 그 사람이 준 대로만 그 사람에게 되돌려 주려는 마음이 있고, 그 마음을 따라 행동하는 것을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이것은 사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원리를 따르는 것입니다. 우리가 ‘한 대로 받고 산다’는 생각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해 줄 것을 결정할 때, 우리 마음을 살펴 보면 이것이 그렇다는 것을 대번에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보면, 김집사도 우리 아들 결혼식에 오지 않았으니까 나도 가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며 가지 않기로 결정할 때, 좋은 마음으로 그렇게 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받은 대로만 되갚아 주려는 마음으로 그렇게 하려고 하는 것이고, 그 사람을 향해서 닫히고 인색해진 마음으로 그렇게 하려고 하겠지요. 이런 마음 상태 자체가 예수님을 믿고 그 분의 은혜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는 어울리지가 않는 것입니다. 교회 공동체의 풍성함을 망가뜨리고 있구요. 


우리 주님은 도피성 정신으로 사는 것으로는 너무 부족하다고 말씀하십니다. 당한 것을 되갚아 주지 않고, 또 받은 대로만 돌려주는 그런 삶의 방식으로는 너무나 부족하다고, 그것은 성도가 살아가는 방식도 아니고, 교회 안에서 사용될 수 있는 원리는 더더욱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주님의 말씀을 요약하면 “할만큼 하고 나서 더 하라”는 것입니다. 교회 일 열심히 하지 않고 또 받기만 하려는 성도가 있어도 교회 안에서 그 사람을 계속 귀하게 여기고, 우리 집 잔치에 오지 않았어도 기쁘고 넉넉한 마음으로 찾아가 축하해 주라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를 빼앗겼다고 나도 하나를 빼앗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받지 않아도 주고, 다섯을 받았으면 열을 주라는 것입니다. 너무 과한 요구처럼 보이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 성도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하고 교회는 그런 곳이 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 성도는 성도됨의 영광을 알 수 있고, 과연 교회가 어떤 곳인지, 얼마나 크고 풍성한 은혜가 그 안에 담겨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할만큼 하고 나서 더 하는 것' 이렇게 하는 것이 참 쉽지 않고 이 세상 사람들이 다 그렇게 하지 못해도,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헤아릴 길 없는 은혜를 받았고 그 안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전혀 가망 없는 죄인일 때, 아직 하나님과 원수지간일 때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아들을 내어 주셨습니다. 그 아들의 목숨을 값으로 치루시고 우리를 용서하시고 또 살리셨습니다. 그 뿐 아니지요. 그런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시고 자녀들만이 알고 누릴 수 있는 엄청난 영적인 은혜와 복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마음 속에 주님을 알고 사랑하는 기쁨을 부어 주셨고, 언제든지 꼭 필요한 은혜를 얻기 위해 그 분의 보좌 앞으로 마음대로 달려 나갈 수 있는 특권을 주셨고, 심지어는 하늘의 영원한 영광까지 약속해 주셨습니다. 이 모든 일들이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내세울 것이 하나 없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그 어떤 일도 할 수 없을 때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할만큼 하시고 더 하신’ 은혜가 아닙니까? 정말 불공평하고 부당하게 그리고 너무 과하게 우리에게 주어진 은혜가 아닙니까? 우리가 그 부당하고 불공평한 은혜, 너무 과해서 이해할 수 없는 은혜 덕분에 살았고 또 이렇게 살아가고 있다면 우리가 어찌 서로가 서로를 위해 조금 더 베풀고 조금 더 섬기면서 그것을 부당하다고, 정의롭지 못하다고, 억울하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어찌 교회 안에서도 ‘사람은 한 만큼 받고 사는 것'이라는 이야기를 스스럼 없이 할 수 있고, 그 부족한 상식을 따라 사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길 수 있겠습니까? 성도가 성도를 섬기고 사랑하는 일을 무슨 거래하듯이 그렇게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한 만큼만 돌려주고 받은 만큼만 하고 산다’는 세속적인 방식은 성도와 교회가 살아가는 방식이 아닙니다. 그것은 은혜가 없는 사회에 사는 은혜를 모르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삶의 방식이지 은혜가 전부이며 은혜로 살아가는 곳에서는 통용될 수 없는 저급하고 부족한 원리이기 때문입니다. 원수 갚지 않는 것이 억울하게 여겨지고, 더 많이 베풀고 더 많이 섬기는 삶이 부당하다고 여겨지실 때는 원수 갚는 일은 하나님의 소관이라고 생각하시면서 그 불편한 마음을 다스리시구요. 할 만큼 하시고 더 하시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주님 안에서는 그게 바른 것이고 그게 복된 것이고 지혜로운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야 성도의 영광을 알고 교회의 풍성함을 알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받은 대로 돌려준다는 생각은 아얘 잊어버리시기 바랍니다. 은연 중에 우리의 무의식 속에 박혀 있어서 교회 안에서 조차 나를 인색하게 하고 냉정하게 만드는 그런 생각은 이제 제거해 버리시기 바랍니다. 적어도 교회 안에서는 좀 더 하시구요. 조금 손해보고 사십시오. 그렇게 하는 일이 별로 불편하지 않을 때까지 계속 연습하시기 바랍니다. 남들 안 한다고 나도 안한다 하면 그 사람들이 부끄러워질 때 나도 부끄러워질 것입니다. 그 사람들이 매마른 삶을 살 때, 우리 자신도 매마르게 살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오늘은 추석인데요. 추석이라 한 말씀 드립니다. 어떻게 주로 오늘 친척들을 만나시나요? 그 분들 중에서 참 너무한다고 생각되시는 분들 계시지요? 그런 분들에게 더 주고 더 베푸십시오. 목사님은 몰라도 너무 모른다고 저를 욕하셔도 좋습니다. 한 번 할만큼 하시고 더 해 보십시오. 당한 대로 갚아주려고 하지 마시고, 그렇게 못한다고 불편해 하지 마시고 요구하기 전에 내어 주시고, 더 내어 주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런다고 뭐가 나아지지는 않을지 모르지만, 적어도 식구들이 더 편안해 지고 우리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입니다. 너도 거기서 나처럼 사는 구나 하고 말이지요. 


이제 도피성의 정신을 따라 사실 뿐만 아니라, 그 정신을 넘어서서 오 리를 가자하면 십 리를 가 주는 우리 주님의 방식, 천국의 방식에 따라 사는 연습을 시작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교회 안에서 본전생각하지 않고서 이렇게 할만큼 하고 더 하는 삶을 살기 위해 애쓸 때, 하나님은 우리 교회를 예수님의 충만하심으로 충만하게 해 주실 것이고 우리를 그 안에서 가장 복된 성도들로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우리 교회 가운데 이런 놀라운 은혜가 풍성해 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