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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주일예배

2015.10.04. 주일오전 - 그 책임을 지키도다(여호수아 3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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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여호수아 22장 1-9절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 자신의 인생 밖에 살지 못합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을 ‘기준’으로 놓고 모든 것을 생각하고 평가하게 되기가 쉽지요. 물론 이것 자체가 나쁜 것도 아니고 또 항상 틀리는 것도 아니지만, 이것이 자신을 제한하고 묶어놓는 역할을 할 때가 있고, 때로는 잘못된 것을 바르다고 여기고 계속해서 그것만을 고집하게 만들 수 있다는 점에서는 커다란 부작용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우리 주변을 둘러보아야 하며, 과거의 역사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그리고 내가 있는 곳은 바른 곳인지 아닌지를 판단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사람들이 이전의 그 어떤 시대보다도 가치관이나 도덕성이 혼란스러운 시대입니다. 그것은 이 시대를 사람들의 대다수가 이 시대와 자기 자신을 온 세상의 중심에 놓고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기준이 되면 내가 어디에 있고 또 바른 위치에 있는지 전혀 알 수 없게 되어 있는데,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저 내가 기준이고 이 시대가 기준이라는 그 우쭐한 기분을 즐기느라고 스스로를 미아로 만들어 버리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이런 이야기를 이렇게 늘어놓는 이유는 이것이 비단 이 시대가 앓고 있는 질병이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애석하게도 우리가 우리 자신의 영적인 상태와 신앙을 생각할 때도 똑같은 시각으로 바라볼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생각하시기에 오늘 이 시대 조국교회의 신앙은 어떻다고 생각되십니까? 조국교회는 지금 믿어야 할 것을 충분히 믿고 있고, 또 신앙 안에서 누려야 할 것들을 제대로 누리고 있다고 보십니까? 우리 교회는 또 어떻습니까? 지금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충분히 누리고 있습니까? 우리가 신앙 안에서 누리고 있는 은혜와 복들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할 수 있습니까? 그러면 나는 어떻습니까? 나는 잘 믿고 있습니까? 나는 예수믿는 맛을 제대로 알고 있고 그 능력 안에서 살아가고 있습니까? 이런 질문들을 드리면 질문 자체의 어감이 부정적이어서 그런지 대부분은 아니라고 대답하지만 실제로는 우리 교회는 이 정도면 괜찮다, 다 잘 하고 있다, 나는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고 그래서 충분히 은혜를 누리고 있다, 한국 교회에는 신앙적으로 별 다른 문제가 없고 잘 되어가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사실 우리가 내리는 우리 자신에 대한 이런 평가들은 그다지 정확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서 내리는 평가의 대부분은 그저 이 시대, 아주 좁게는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면서 내린 판단들이기가 쉽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한 그래도 정확한 평가를 내리려면 우리 자신이 아닌 다른 성도들을 보아야 하고, 특히 다른 시대를 살았던 성도들의 모습과 교회의 신앙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게 큰 눈으로 보면 오늘 우리의 신앙은 그 풍성함과 견고함 면에서 그다지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없습니다. 오늘 대부분의 성도들은 이전 세대들의 성도들이 누렸던 신앙의 영광과 풍성함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것에 대해서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들도 그리 많지 않습니다. 물론 저도 그런 사람들 중의 하나라는 사실은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열심히 따라가려고 하고 있지만 문득 문득 옛 교회와 옛 성도들이 누렸던 은혜와 기쁨에 대해서는 이해조차 하지 못할 때가 너무 많습니다. 목사가 되어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알고 누리는 것이 이렇게 일천하다는 것이 하나님께 죄송하고 여러분에게 미안하게 여겨질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제가 우리 교회에 와서 목회를 하게 되면서 저에게는 아직 다 영글지는 못했지만 교회를 향한 간절한 꿈 하나가 생겨났습니다. 그것은 우리 광현교회가 원래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주시려고 하시는 그 모든 은혜와 복들을 받아누리는 그런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소원입니다. 지금은 우선 이것이 제가 여기서 목회를 하는 가장 중요한 목적이 되어 있습니다. 부족하기만한 저 자신의 모습을 볼 때, 과연 내가 우리 교회를 그런 복된 교회로 만드는 일에 좋은 도구가 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 수 밖에 없지만 그래도 저는 우리 교회가 그런 교회로 세워져 갔으면 좋겠고, 여러분과 함께 이 교회를 그렇게 세워가기를 간절하게 소망하고 있습니다. 


제가 이런 관심과 소망을 가지고 목회를 하다보니 성경을 볼 때도 그런 눈으로 보게 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자연히 왜 현실교회와 성도들이 성경이 약속하고 있는 복과 은혜를 누리지 못하는가, 왜 그런 풍성한 삶을 살아가지 못하는가 하는 질문에 대한 답을 발견하는 행운을 얻기도 하는데요. 제가 발견한 대답들은 크게 세 가지입니다. 첫째,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신뢰하며 살아가지 못한다는 것. 둘째, 예수님과 참으로 연합된 삶을 놓치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도대체 교회가 무엇인지, 교회가 교회다워지는 일이 성도가 누리는 은혜에 있어서 얼마나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지를 모르고 있다는 것. 이렇게 세 가지입니다. 특히 이 세 가지 중에서 마지막 세번째 이유는 오늘날 그다지 많이 생각되지 못하고 있고, 생각하고 있더라도 도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손을 대야할 지 엄두조차 나지 않는 그런 것이 아닌가 합니다. 


사실 저는 이 세번째 이유를 깨닫고 나서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모릅니다. 오늘날 이 땅의 성도들과 교회들이 성경이 말하는 그런 복되고 풍성한 교회의 모습으로 회복되기에는 반대방향으로 너무나 멀리 와 버린 것 같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입니다. 부끄럽지만 저 자신에게도 성경이 말하는 교회에 대한 영광스럽고 복된 경험이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저는 교회를 교회답게 세워야 하는 일을 맡은 목사로서 커다란 결격사유를 지닌 셈입니다. 음식을 먹어 봤어야 그 음식에 대해서 설명이라도 해 줄 수 있는데, 저 자신도 그 음식을 제대로 맛 본 적이 없으니까요. 뿐만 아닙니다. 오늘 성도들은 모두가 모래알갱이처럼 신앙생활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것을 편안해 하고 당연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저 개인적으로 예수 믿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주님의 마음 속에 그려져 있는 그런 풍성한 교회를 소망하는 그 꿈을 품게 되었다는 것 자체가 저를 아프고 힘들게 했던 것입니다. 


제가 성경을 통해 참 교회의 모습을 보여주는 그런 말씀을 대면하고 또 다시 그런 고통을 느낄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그 말씀들을 통해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많이 아프지? 내가 다 안다. 나도 마음이 아프니까. 그렇지만 꼭 그렇게 해라. 그래야 풍성해 진다. 그래야 진짜 은혜가 뭔지 알고, 교회의 영광과 복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다 가지 못해도 좋아. 갈 수 있는만큼만 가 봐라.”하고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고통스러운 꿈을 저버릴 수가 없습니다. 모래알갱이를 품은 진주조개처럼 말이지요. 어찌보면 저 스스로도 이 꿈을 담아 내기에는 턱없이 부족하고, 사실 저의 성품은 이 꿈과 반대되는 경향이 너무 강한 부분도 있지만 그래도 계속 그 꿈을 꾸어 보려고 합니다. 평생 한 걸음만 걷다가 끝내더라도 교회의 풍성함을 그만큼이라도 회복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해 보려고 합니다. 해 보지도 않고 포기하면 제가 나중에 하나님 앞에서 드릴 말씀이 없을테니까요. 사실 제가 제일 두려워 하는 것은 어떤 이유로든 제가 더 이상 이 꿈을 꾸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저의 꿈은 교회를 향한 꿈이니, 저의 꿈이 틀린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곧 여러분을 위한, 여러분의 꿈이기도 하다고 생각합니다. 함께 같은 꿈을 꾸어 주시기 바랍니다. 한 달음에 끝까지 갈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한 걸음, 한 걸음 참된 교회, 풍성한 교회를 향해서 갈 수 있는만큼 함께 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 일이 대충 마무리 되고 나서, 원래 요단강 동쪽에서 이미 땅을 얻었지만 함께 강을 건너와서 다른 지파들의 전쟁을 도왔던 세 지파들인 르우벤, 갓, 므낫세 반지파가 요단강 동쪽으로 돌아가는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가 차지하고 있는 위치로 볼 때, 여호수아서는 이 이야기를 약속의 땅에 대한 분배가 마무리 지어졌음을 알려주는 그런 이야기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제 가나안 땅 위에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나라가 제대로 세워졌다고 선언하는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여호수아서가 이 이야기를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유는 이 이야기 속에는 앞으로 이스라엘이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나라로 남기 위해서 지켜야할 중요한 원리를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이 세 지파들은 이미 요단강 동쪽에서 자기 몫의 땅을 분배 받았습니다. 이 이야기는 민수기 32장에 기록되어 있는데요. 그 때 이들은 모세에게로 가서 요단 동쪽 땅을 요구했습니다. 모세는 처음에 노발대발했지요. 자기들만 아무런 희생이나 노력도 없이 좋은 땅을 차지하겠다는 뜻으로 비쳐졌기 때문입니다.  그 때 이들은 이렇게 맹세했습니다. “우리가 이 곳에 우리 가축을 위하여 우리를 짓고 우리 유아들을 위하여 성읍을 건축하고 이 땅 거민의 연고로 우리 유아들로 그 견고한 성읍에 거하게 한 후에 우리는 무장하고 이스라엘 자손을 그곳으로 인도하기까지 그들의 앞에 행하고 이스라엘 자손이 각기 기업을 얻기까지 우리 집으로 돌아오지 아니하겠사오며 우리는 요단 이편 곧 동편에서 산업을 얻었사오니 그들과 함께 요단 저편에서는 기업을 얻지 아니하겠나이다” 이 맹세를 통해서 이들의 진심을 알게 된 모세는 이들의 요구를 들어 주었습니다. 

 나중에 요단강을 건너가기 전에 여호수아는 다시 한 번 이들이 모세와 한 약속을 상기시켜 주면서 그대로 이행할 것을 요구했고, 이들은 정말로 약속을 지켰습니다. 나머지 지파들이 요단강을 건너 갈 때, 그들과 함께 강을 건너갔습니다. 자기의 가족과 자녀들, 그리고 가축들은 모두 다 요단강 건너 편에 놓아둔 채로 말이지요. 물론 정황상으로 보면 지파의 남자들 전체가 한꺼번에 요단강을 건넌 것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되면 그 쪽이 무방비상태가 될테니 그럴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몇 개로 조를 나눠서 번갈아 가면서 강을 건너가서 동족들을 도왔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시작된 이 일은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렸습니다. 최소한 5년에서부터 제일 길게 잡으면 15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가나안 땅 정복을 위한 전쟁이 계속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이들은 그 동안 단 한 번도 자기들의 뜻을 바꾸거나 자기들의 약속을 소홀히 여기지 않았습니다. 이들의 신실함이 어땠는가 하는 것은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했던 말 속에 그대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여호수아는 돌아가는 이들을 이렇게 칭찬합니다. “여호와의 종 모세가 명령한 것을 너희가 다 지키며 또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일에 너희가 내 말을 순종하여 오늘까지 날이 오래도록 너희가 너희 형제를 떠나지 아니하고 오직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명하신 그 책임을 지키도다” 


요단 동쪽의 세 지파로 불리는 이 세 지파들이 끝까지 신실하게 자신들의 약속을 지켜낸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상황은 항상 목숨을 걸어야만 하는 전쟁상황이었고, 게다가 강 건너편에 아내와 자식, 가족과 모든 재산들을 남겨놓고 온 아주 불안한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상황 속에서도 이들은 변함 없이 처음에 자신들이 했던 약속을 지켰고 모세와 여호수아의 모든 명령을 수행했습니다. 저는 이들이 요단강 동쪽의 땅을 요구했던 것이 좋은 땅을 먼저 차지하고 싶었기 때문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 당시 상황으로 보면 누군가가 이미 정복한 요단 서쪽을 지키고 감당해야만 하는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어렵게 차지한 땅을 그냥 비워둔 채로 강을 건너갈 수는 없는 일이었으니까요, 아마도 세 지파는 그런 상황을 보면서 그렇다면 자신들이 그 일을 감당해야 하겠다고 생각하고 그 일에 자원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해 봅니다. 그러니, 그들은 시키지도 않았는데, 다른 지파들을 위한 전초부대와 선봉을 자처하고 나섰고, 요단강을 건너가서도 자기들이 살 땅도 아닌데, 그 약속대로 거의 10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을 변함 없이 형제들을 위해서 헌신할 수 있었겠지요. 


그렇게 신실하게 자신들의 약속을 지키고 가족에게로,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나눠주신 약속의 땅으로 되돌아가는 세 지파 군대의 모습은 얼마나 아름답고 당당했겠습니까? 가끔씩 텔레비젼을 보면 6.25 전쟁 때 참전했던 외국 사람들 중에서 아직도 우리나라를 생각하고 그리워하는 분들에 대한 이야기가 방영되곤 하는데요. 그런 그 분들의 모습은 참 감동적입니다. 저는 그 때 그 세 지파의 모습은 그의 동족들에게 그 참전용사들의 모습만큼이나 아름답고 감동적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들의 수고와 헌신은 정말 값진 열매로 맺혀졌습니다. 여호수아는 이렇게 말합니다. 4절을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이제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미 말씀하신 대로 너희 형제에게 안식을 주셨으니 그런즉 이제 너희는 여호와의 종 모세가 요단 저쪽에서 너희에게 준 소유지로 가서 너희의 장막으로 돌아가되…” 이 세 지파의 신실한 수고와 헌신이 맺은 아름다운 열매는 바로 나머지 형제 지파들의 ‘안식’이었습니다. 이들의 수고 덕분에 나머지 형제 지파들은 그들의 수고를 좀 더 빨리 끝낼 수 있었고, 훨씬 더 풍성하고 값진 ‘안식’을 얻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 ‘안식’이라는 말이 나왔으니까 잠시 설명해 드리고 넘어가겠습니다. 안식은 그냥 뜻만 생각하면 ‘쉼’을 말하는 것이지만 성경적으로 보면 이 안식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약속하신 모든 은혜들을 대표하고 하나로 묶는 복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여호수아의 말인즉 세 지파들의 수고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약속하셨던 가장 중요한 은혜를 가져오는 통로가 되었고 그 약속을 이루는 역할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이 세 지파가 형제들을 위해서 한 일은 의미있고 가치있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얼마든지 우리 자신의 안식을 위해서 애쓸 수 있고 또 그 결과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 안에서 홀로 안식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것도 꼭 필요하고 참 귀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교회는 그렇게 ‘나 홀로 은혜’만 받으면 되는 곳도 아니고 그 은혜만 추구하는 사람들의 모임도 아닙니다.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크고 놀라운 은혜가 예수님 안에서 맺은 성도들 사이의 ‘관계’ 안에 숨겨져 있고 교회의 풍성함과 능력은 바로 그 숨겨진 은혜를 찾아 누리는데 참 교회의 복과 은혜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숨겨져 있는 은혜는 내가 나를 위해서 수고할 때가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위해서 수고하고 헌신할 때만 바깥으로 드러나게 되고 또 모든 성도들과 나를 위한 것이 될 수 있습니다. 교회 안에 이런 은혜가 이런 식으로 숨겨져 있는 이유는 다른데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교회 안에서 서로 관계 없는 개인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고 있는 지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몸에 속해 있는 지체들 중에서 그 어떤 지체도 자기 자신을 위해서 존재하거나 또 자기 자신을 위해서 일하는 지체가 없습니다. 각 지체는 모두가 몸을 위해서 있고 또 그 몸에 속해 있는 다른 지체들을 위해서 일합니다. 그렇지만 그 결과는 어떻습니까? 그 결과는 몸의 풍성함으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몸의 풍성함은 결국 그 몸에 속해 있는 모든 지체의 풍성함이 됩니다. 그 지체 또한 그 몸의 일부이니 그 혜택이 그 지체에게도 고스란히 주어지게 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서로가 서로를 위해서 헌신하고 일할 때, 비로소 그 안에 얼마나 놀라운 은혜가 담겨져 있는지를 알 수 있고 또 누릴 수 있는 그런 곳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몸일 수가 없으니까요. 


 우리 주님 이 세상에 계실 때, 한 번은 안식일에 38년된 병자를 고쳐주신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그저 자기가 누릴 은혜만 알고 그 은혜만 지키면 된다고 생각하던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비난하고 정죄했습니다. 안식일에 금지된 일을 한다고 말이지요. 그 때 우리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말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에는 아무 일도 하면 안되니까 그 누구도 그 어떤 일도 해서는 안된다고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비난한 것이지요. 그렇지만 그들이 모르고 있었던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들을 그렇게 안식하게 해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그 안식일에도 쉬지 않으신다는 것이었습니다. 자신들의 그런 안식이 하나님께서 당신의 안식을 손해보시고 그들을 섬겨 주시기 때문이라는 것을 몰랐고, 주님 명하신 안식일을 참 안식일 되게 하려면 내 안식을 손해 보더라도 안식이 필요한 사람에게 안식을 주어야 한다는 것을 몰랐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배의 자리에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예배를 통해서 영혼이 풍성해 지고 또 새롭게 되는 은혜를 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날 온전한 예배를 드리게 되면 그 은혜로 일주일을 너끈히 은혜 가운데 살며 승리할 수 있고, 또 더러는 아얘 인생이 새로워지고 온전해 지기기도 하는데요. 그렇다면 성도 여러분, 이 주일날 우리는 왜 이런 은혜를 누릴 수 있을까요? 이 놀라운 복과 안식은 어떻게 해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일까요? 그것은 비유적으로 말한다면, 지금 하나님께서 그 어느날 보다도 열심히 우리를 섬겨주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은혜의 식탁을 베푸시고 앞치마를 두르시고 서서, 앉아있는 우리가 은혜의 식사를 다 마칠 때까지 우리를 섬겨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완전한 안식을 손해보시고 일하시는 덕분에 우리가 그 은혜를 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우리의 안식을 손해보는 일이 꺼려지고  나 아닌 다른 이들의 안식을 위해서 무언가를 하는 것이 번거롭다고 생각될 때마다 기억해야 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내가 지금 그렇게 지키고 싶어하는 그 안식이 하나님께서 당신의 안식을 손해보시면서 나에게 주신 은혜임을 기억한다면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바리새인 같은 마음을 다스릴 수 있을 것이고 그 안식을 더 크고 온전한 안식을 위한 도구로 사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약간의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본성상 다 똑같습니다. 자기 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인간은 누구나 다 자기 안식을 손해보기 싫어합니다. 또한 영적인 일에 게으른 인간은 더 크고 풍성한 안식과 은혜가 약속되어 있다고 해도 굳이 그것을 위해서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은 무언가를 하는 일을 싫어합니다. 주일날은 그저 쉬고 싶고, 교회 안에서는 그저 받고 싶어하지요. 그래서 우리가 일단 우리의 안식을 손해보고 함께 형제와 자매된 성도들의 안식을 위해서 일하려면 의지가 필요하고 결단이 꼭 필요합니다. 그저 우리를 주저 앉혀 놓으려는 우리 안에 있는 못된 습성을 이겨내야만 나의 작은 안식을 더 고상하고 값지게 사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호수아는 형제들에게 안식을 선물하고서 떠나는 세 지파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직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그 책임을 지키도다” 자신의 안식을 손해보고 뒤로 미뤄 놓고서 다른 형제지파들의 안식을 위해서 수고하며 싸우는 것. 이것은 참 아름답고 가치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세 지파가 끝까지 짊어져야 할 책임이기도 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책임을 지고 있는 그런 사람들입니다. 내가 나의 안식을 손해보는 일이 있더라도 다른 지체들을 안식하게 해 주어야 하는 책임을 맡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아름다운 책임을 우리에게 맡기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책임을 다할 때, 우리 안의 안식도 풍성해질 것이고, 그래서 나의 안식도 더 풍성해 질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르우벤, 갓, 그리고 므낫세 반 지파의 아름다운 모습을 함께 묵상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모습을 통해서 오늘 교회가 까맣게 잊고 살아가고 있는 참 은혜와 안식의 통로를 다시 한 번 찾아 보았습니다. 세 지파는 자기들의 안식을 손해 보고서 다른 형제 지파들의 안식을 챙겨 주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안식이 자기 자신들만의 불완전한 안식이 아니라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함께 누릴 수 있는 참되고 온전한 안식이 되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형제들의 안식 안에서 자신들을 위한 영광스러운 안식을 찾았습니다. 


교회를 섬기다 보면요. 항상 그렇습니다. 꼭 나만 수고하는 것 같고, 나만 일하는 것 같고, 다른 사람들은 아무 일도 안하는 것 같고…. 사실 이것이 시험꺼리가 되어서 주일날이면 항상 화가 나 있는 분들이 계시는데요. 그렇지만 성도 여러분, 그거 아십니까? 그게 정말 잘 하시는 겁니다. 하나님 보시기에는 그게 정말 아름다운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남들보다 더 수고하고, 때로는 자기 안식을 잠시 내려놓고 손해 보더라도 다른 이들의 안식이 되어 주는 것. 교회 안에서 그것보다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것은 없습니다. 그게 우리를 위해서 일하셨고 또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의 안식을 위해서 일하시는 우리 아버지 하나님을 흉내내며 사는 것이고, 주님의 몸된 교회를 풍성하게 하는 일이니까요. 


오늘 여러분의 작은 안식을 다른 지체들을 위한 더 크고 풍성한 안식의 재료로 사용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예배당 건물을 떠나는 여러분의 뒷모습이, 형제들에게 안식을 선물하고 떠나는 세 지파의 뒷모습처럼 아름답고 영광스럽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속에 이런 성도가 한 사람 한 사람 늘어나게 될 때, 우리 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닮은 참된 안식이 풍성한 그런 주님의 몸이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 생각과 마음을 새롭게 하셔서 서로가 서로에게 안식을 선물하는 귀한 지체들이 되게 해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교회가 예수그리스도의 몸됨을 회복하게 하소서. 

내 안식을 고집하지 말게 하시고, 내 안식을 형제와 자매들의 안식을 위한 섬김의 도구로 사용하게 하소서. 

그래서 우리 교회가 몸된 교회의 풍성함을 회복하고 누리는 참 행복한 교회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