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현교회 설교,강의/새벽예배

2015.10.08. 새벽예배 - 성경읽기와 묵상(느헤미야 4-6장)



20151008D (#1).mp3.zip





드디어 성벽을 다시 쌓아올리기 시작했습니다. 다들 먹고 살기도 힘든 상황이었지만 그래도 성벽을 쌓는 일에 참여했고 그래서 좋은 분위기에서 성벽재건이 시작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제 말씀드린 대로 이 일을 몹시도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그 대표주자가 바로 산발랏이라는 사람이었습니다. 처음에 산발랏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벽을 재건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뭘 하겠나 싶어서 별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진짜로 성벽을 쌓아올리기 시작하자 그것에 대해서 화를 내면서 이스라엘 사람들을 비웃었습니다. 이 반응이 참 재미있습니다. 원래 비웃음이란 분노와는 상관이 없는 감정입니다. 비웃음은 다른 사람들을 한참 얕잡아 볼 때 나타나는 태도이고 분노는 다른 사람들을 얕잡아 보는 일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감정이니까요. 그런데, 어떤 때는 이 두 가지 감정이 한꺼번에 생겨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경우에는 둘 중의 한 가지 감정은 가짜입니다. 어떤 감정이 가짜일까요? 비웃는 감정이 가짜입니다. 비웃음 뒤에 분노를 숨겨놓은 것입니다. 


힘이 없는 약한 사람들은 항상 자신들만 강한 사람들을 두려워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힘이 센 사람도 힘이 없는 사람을 두려워 합니다. 언제 그럴까요? 아무 일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무언가 목적을 가지고 그 일을 이루려고 움직일 때, 그 때는 스스로 강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두려움을 가집니다. 그렇지만 처음에는 그 두려움을 숨기고 싶어합니다. 여전히 강한 자라는 것을 드러내고 싶어하니까요. 그래서 그 두려움을 약한 자들을 향한 비웃음 속에 숨기곤 합니다. 그 비웃음이 심하고 극단적일 수록 강한 사람들이 느끼는 두려움이 크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뜻을 따르려고 할 때, 하나님의 백성들은 거의 다 세상에 비해서 열세에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을 두려워 하면서 미리 겁을 먹고 주눅이 들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무엇을 해 보기도 전에 먼저 포기해 버리고 말지요. 실제로 성도들이 실제 삶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의 원리에 따라 살아가는 것을 때로는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그것은 아얘 현실과 상관이 없는 이상에 불과한 것으로 치부하는 것도 그래서 이지요. 그렇지만, 우리 약한 성도들이 정말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기 시작하면 그 때는 이 세상도 성도들을 두려워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한 번에서 끝나지 않고 일관성을 보일 때 그들은 굉장히 두려워 합니다. 겉으로는 비웃을지 몰라고 그 비웃음 속에는 커다란 두려움이 들어 있게 마련입니다. 물론 우리는 세상과 비교하면 약한 자들이 맞습니다. 힘도 부족하지요. 그렇지만 지레 겁 먹을 필요가 없습니다. 세상도 우리를 두려워 하니까요. 그러니 우리만 세상을 두려워 한다고 생각하고 지레 값지고 의미있는 삶을 살아가는 일을 포기할 필요가 없습니다. 


비웃음으로 안되자 산발랏은 정말 못된 계획을 세웠습니다. 자기 패거리들과 짜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습격하려고 한 것입니다. 그렇게 몇 명을 죽이면 낙심해서 더 이상 성벽을 재건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것 또한 성공할 수 없었습니다. 미리 그 사실을 느헤미야가 알게 되었고 오히려 이전보다 더 든든한 방비책을 세우는 동시에 공사도 계속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 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편에 있을 때, 그리고 하나님의 뜻에 따를 때는 다른 것은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정말 일어나면 안될만한 위험한 일이면 하나님께서 그 일을 막아 주실 것입니다. 그 위험을 우리에게 알려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면 예상되는 어려움과 위험을 최소화할 수 있는지, 그리고 계속해서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을 해 나갈 수 있는지 그 방법을 찾아내고 또 그렇게 하기 위해서 애쓰면 됩니다. 개인도 그렇지만 교회도 그렇습니다. 오늘 교회들도 자꾸 옳은 방법이나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방법이 아니라 되는 방법을 찾습니다. 그것은 욕심 때문이기도 하지만 두려움 때문이기도 합니다. 되는 방법은 그야 말로 되는 방법이라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의 방법은 그렇게 생각되지 않고 보장이 없는 방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고, 그렇게 해서는 되지 않을 것 같다는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실 교회의 이런 모습 때문에 교회는 사회에서 더 이상 존중받거나 두려워하는 대상이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보기에도 이미 교회가 자기들과 너무 닮아 있다는 것을 아는데 그들이 우리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또 두려워 할 이유가 없는 것이지요. 그러다 보니 뭔가를 결정할 때, 이제 세상은 결코 교회를 그 고려 대상에 넣지 않습니다. 이런 상태로라면 교회가 겉으로 보기에 잘 된다고 해도 무슨 가치가 있고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느헤미야는 두려움 때문에 해야 할 일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그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습니다. 해야 할 일에도 최선을 다해서 임하면서 말이지요. 예루살렘 성벽재건을 반대하는 사람들의 반대와 위협이 더욱 더 노골적이 되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습니다. 한 번은 산발랏과 게셈이 협상을 빌미로 느헤미야를 만나자고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오면 죽이려고 했던 것이지요. 그리고 또 한 번은 제사장 스마야에게 뇌물을 주어서 백성들의 느헤미야에 대한 신뢰에 치명적인 흠집을 낼 수 있는 일을 꾸미려고 하였습니다. 그것보다 이스라엘 공동체를 안에서 부터 무너뜨릴 좋은 방법은 없었으니까요. 그러나, 느헤미야는 이 두 번의 위기를 모두 넘길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가 성실하고 정직하게 행동하는 방식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산발랏과 적당히 타협하면 일이 쉬워질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음모였지만 스마야의 말대로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 성전으로 피신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느헤미야는 우직하게 나같은 사람이 나 하나 살자고 그렇게 할 수 없다고 자기 자리를 지켰습니다. 그래서 두 번의 위기를 모두 넘길 수 있었습니다. 


참 쉽지 않은 일이지만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는 사람에게는 이런 모습이 꼭 필요합니다. 우직하고 정직하게 한 번 정한 길을 포기하지 않고 타협하지 않고 가려는 모습, 그리고 다른 사람들 앞에서 부끄러움이 없이 행동하려는 중심이 있어야 합니다. 바로 이런 변하지 않는 선한 태도는 그 사람에게 방패가 되어 주고 무기가 되어 줍니다. 이렇게 선택하며 사는 사람들에게는 악한 계획 자체가 먹혀 들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를 위해서 기도해 주십시오. 그리고 이 땅의 목회자들을 위해서 기도해 주십시오. 될까 안될까를 두려워 하지 전에 우직하고 정직하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변함 없이 가야할 길을 가는 그런 목회자들이 되게 해 달라고 꼭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결국 정말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성벽이 겨우 오십이 일만에 완공되었던 것입니다. 이 소식을 들은 이스라엘과 느헤미야의 대적들은 낙심했습니다. 느헤미야와 이스라엘 백성들을 통해서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는 일은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느헤미야와 백성들이 포기하지만 않으면 그 성벽은 반드시 다시 세워지게 되어 있었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가 교회답게 회복되고 세워지는 일은 무엇보다도 우리 하나님의 소원이고 가장 바라시는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결국 하나님께서 그 일을 이루실 것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믿고 우직하게 우리에게 맡겨진 소명을 다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 일을 이루실 것이고, 우리는 회복된 교회의 빛나는 영광을 보게 될 것입니다. 교회의 대적들이 스스로 낙심하고 두려워 하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 광현교회가 두려움과 낙심을 이기고 주님 이루시는 영광스러운 회복을 보는 복을 누리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