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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주일예배

2015.10.11. 주일오전 - 그들과 싸우러 가려 하니라(여호수아 32)



20151011SM (#1).mp3.zip





성경본문 : 여호수아 22장 10-20절





지난 주일에 요단 동편의 세 지파에 대해서 함께 생각하면서 우리는 한 몸의 지체이기 때문에 교회 안에서는 나의 안식을 다른 이들의 안식을 위한 도구로 사용해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렇게 해야 결국 몸 전체가 누릴 수 있는 안식이 더 온전해지고 풍성해 져서 그 유익이 우리에게로 되돌아 올 수 있게 되기 때문이지요. 이 사실을 확실히 믿지 못하면 우리는 교회 안에서 조차도 자신이 손해 볼 것 같아 보이는 가치있는 행동은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결국 몸된 교회 전체가 유익을 얻고 더 행복해 지고, 그 안에서 나도 더 기쁘고 즐겁게 믿음생활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게 됩니다. 지체가 몸을 중심으로 움직이지 않으면 결국 몸도 자기 자신도 피폐해 집니다. 내가 교회의 유익을 위해서 우선 나의 안식을 손해보는 결단을 하고 움직이지 않으면 몸된 교회 뿐 아니라 나 자신의 영혼도 약해지고 궁핍해 집니다. 이론적으로 보면 틀림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실제로도 정말 그럴까요? 내가 먼저 교회를 위하면 나중에 나도 더 풍성한 은혜와 안식을 누리게 될까요? 이 원리는 우리가 안심하고 따라도 되는 그런 확실한 원리일까요?


모세는 이제 성실하게 형제 지파들을 위해서 자신의 안식을 손해보고 섬긴 후에 자기 땅으로 돌아가는 요단 동편의 지파들을 축복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8절입니다. “너희는 많은 재산과 심히 많은 가축과 은과 금과 구리와 쇠와 심히 많은 의복을 가지고 너희의 장막으로 돌아가서 너희의 원수들에게서 탈취한 것을 너희의 형제와 나눌지니라” 지금 요단 동편의 세 지파는 빈 손으로 돌아가고 있지 않습니다. 그들의 손에는 자기 땅으로 돌아가 친척들에게 나눠줄 값진 전리품들이 잔뜩 들려져 있습니다. 만약 이들이 강 이쪽으로 건너와서 형제 지파들을 위해서 수고하지 않았거나 그 수고를 중간에서 그만 두었다면 그들은 이런 것들을 얻고 누리지 못했을 것입니다. 비록 그런 것들을 보고서 그런 수고를 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들 스스로도 그 수고의 풍성한 열매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몸된 교회를 섬기는 일은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닙니다. 수고한다고 누가 알아주지도 않는 것 같고, 꼭 나만 손해 보는 것 같고, 그래서 때로는 억울하고 화도 나고 실망스럽기도 하고… 그렇지만 우리는 이런 장애물들을 훌쩍 뛰어 넘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안식이 다른 성도들을 위한 안식이 되는 것을 보는 기쁨도 누릴 수 있을 뿐아니라, 나중에 그 안식이 더 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우리에게 되돌아 오는 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몸된 교회를 이롭게 할 때, 하나님이 우리를 이롭게 해 주시는 것. 저는 이것이 우리 하나님의 성품이며 또한 우리에게 은혜주시는 방식이라고 믿습니다. 혹 우리 자신이 그 열매를 이 땅에서 따 먹지 못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해도 그렇게 속상해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 열매는 내가 속한 몸된 교회가 누리고 있고, 또 나중에 반드시 영원한 하늘 영광으로 우리에게 되돌아 올 테니 말입니다. 자꾸 나 중심이 되고, 본전 생각이 날 때마다 이 것을 생각하시며 그 시험을 이겨내시기 바랍니다. 우리 하나님은 분명히 가장 좋은 것으로 갚아 주실 것입니다. 잠시 잠깐의 안식을 손해보는 일은 우리에게 영원히 영광스러운 안식으로 되돌아 올 것입니다. 이것만큼은 틀림이 없을 것입니다. 


참 아름다운 작별이었습니다. 요단 동편의 지파들은 자신들의 약속을 끝까지 지켜 형제지파들을 섬겼고, 나머지 형제 지파들은 그런 그들을 기쁘게 환송했으니까요. 그런데, 그렇게 요단 동편의 지파들을 자기 땅으로 돌려보내고 흐뭇한 마음으로 안식하고 있는 나머지 형제 지파들의 귀에 아주 충격적인 소문이 들려 왔습니다. 그것은 요단 동편의 지파가 자기 땅으로 되돌아가다 말고 요단 서쪽에 커다란 제단을 쌓았다는 소문이었습니다. 소문을 들은 요단 서쪽의 지파들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모두가 다 실로에 모여 들었습니다. 그 이유는 요단동편 지파들과 전쟁을 벌여 그들을 진멸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이들이 다른 곳이 아니라 실로로 모여든 이유는 실로에 성막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신명기 12장 5절을 이하를 보면 모세가 이렇게 이야기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오직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의 이름을 두시려고 너희 모든 지파 중에서 택하신 곳인 그 계실 곳으로 찾아 나아가서 너희의 번제와 너희의 제물과 너희의 십일조와 너희 손의 거제와 너희의 서원제와 낙헌 예물과 너희 소와 양의 처음 난 것들을 너희는 그리로 가져다가 드리고 거기 곧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먹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의 손으로 수고한 일에 복 주심으로 말미암아 너희와 너희의 가족이 즐거워할지니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영토 안에 단 하나의 예배장소만을 허락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정해 주시는 그 곳에 성막을 세워야 하고 모든 제사는 그 성막에서만 드려지도록 그렇게 못 박으셨던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지금 실로는 이스라엘이 유일하게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는 장소입니다. 그래서, 요단 서쪽의 이스라엘 지파들이 다른 곳이 아니라 실로에 모여든 것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또 제사를 드릴 수 있는 곳은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실로 밖에 없다는 것을 가장 강하게 주장하는 행동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실로에 성막이 있는데도 다른 곳에 제단을 세운 일은 절대로 잘한 일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성도 여러분, 그것이 나머지 형제 지파들을 그렇게 분노하게 만들고 또 당장 전쟁을 벌여 그들을 제거해야 할 정도로 그렇게 중요한 일이었을까요?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 아니라 지금까지 자기들을 위해서 목숨을 걸고 싸워준 형제들인데 말입니다. 원래 영적인 문제는 영적으로 좋은 상태에 있을수록 더 크고 심각하게 여겨지고 또 그 중요성이 제대로 파악되는 법입니다. 마치 같은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영적인 상태가 좋을 때는 자기 죄에 대해 정직하고 민감하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더 심한 죄를 지어도 전혀 그것이 죄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은 영적으로 볼 때, 최상의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어느 때보다도 이 일의 심각성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 그들의 판단으로 보면 실로가 아닌 다른 곳에 제단을 세운 행위는 형제 지파들과 전쟁을 벌여서라도 반드시 바로 잡아야만 할만큼 심각한 문제였던 것입니다. 


우리가 요단 동편 지파들을 찾아간 비느하스의 이야기 속에서도 그 이유를 들을 수 있지만 요단 서편의 지파들은 새로 제단을 세운 것을 단지 하나의 제단을 더 쌓은 것이 아니라 아얘 하나님을 거역한 일로 보았습니다. 새로 세워진 제단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들의 머리 속에 떠오른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돌이킬 수 없는 아픔이 되고 고통이 되었던 과거의 불순종의 역사였습니다. 그들은 그런 아픔을 다시 반복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비느하스가 요단 동편 지파들의 잘못을 지적하면서 들려준 이야기는 두 가지입니다. 첫번째는 브올의 죄악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정확하게는 브올이라는 곳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저지른 죄악에 대한 이야기였지요. 이 이야기는 민수기 25장에 나오는데요. 그 때 이스라엘의 남자들은 광야에서 모압사람들과 어울려 모압의 신들에게 제사를 드리고 모압 여인들과 성적인 타락에 빠졌습니다. 그 일 때문에 하나님께서 진노하셔서 하루 아침에 2만 4천 명이나 되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비느하스가 이 사건을 언급하고 있는 것은 다른 지파들이 보기에 이 제단은 결국 우상숭배로 연결될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브올의 비극이 반복될 수 있다고 본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말씀하신 그대로 하나님을 섬기지 않으면 거의 항상 우상숭배에 빠지게 되어 있고, 사실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것 자체가 우상숭배라고 할 수 있느니 이들의 생각이 틀린 생각은 아니었습니다. 


비느하스가 언급한 두 번째 예는 여리고 성에서 있었던 아간 사건이었습니다. 아간이 하나님께서 모두 없애 버리라고 하셨던 물건에 욕심을 내고 손을 댔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아이성에서 전멸을 당할 뻔 했었습니다. 이것은 한 사람의 죄가 어떻게 이스라엘 전체를 위험에 빠뜨릴 수 있는지를 분명하게 교훈해 주는 사건이었습니다. 비느하스가 이 이야기 속에서 더 강조하고 있는 것은 죄 자체가 아니라 죄가 가지는 공동체적인 성격입니다. 이스라엘 안에서는 한 사람의 죄가 단 한 사람의 죄로 끝나지 않고 모두에게 치명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는 것 말입니다. 교회에 속해 있는 우리가 우리 자신의 잘못이나 죄에 대해서 절대로 작게 생각하고 나 하나 쯤이야 하면 안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교회는 그저 개인의 모임이 아니라 한 몸입니다. 그 몸의 지체인 우리 각자는 교회를 거룩하게 하는 역할을 할 수도 있지만 반대로 그 교회를 병들게 하고 힘들게 할 수도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기에 이들이 요단 강가에 제단을 쌓은 것은 이렇게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결국 이스라엘 전체를 하나님의 분노 가운데 밀어넣을 수도 있는 그런 일이었으니까요. 한창 영적으로 민감해져 있는 그들이 이 문제를 그냥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고 그래서 그들은 동족과 전쟁을 벌여서라도 죄악의 씨앗을 꼭 없애 버려야 한다는 뜻을 세우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그래도 동족과 전쟁을 벌인다는 것이 여전히 지나치다고 판단될 수 있지만, 이것이 바로 자신들을 한 몸으로 인식하고 있는 성도들이 자기들 속에 있는 죄에 대해서 가지고 있어야 할 바른 태도입니다. 그 죄가 누구의 죄이든 그 죄는 그 죄를 짓는 당사자의 문제가 아니라 공동체 전체의 문제이며 결국 공동체 전체를 어려움에 빠뜨릴 수 있다는 것을 안다면 우리는 죄를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때로는 정말 단호하게 처리하고 해결해야 합니다. 


아마 여러분도 오늘 조국교회가 얼마나 심각한 죄 가운데 빠져 있으며, 그러면서도 그 죄에 대해서 둔감해져 있는지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저는 이런 조국의 교회를 생각할 때, 가끔씩 예전처럼 오늘날도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죄를 지으면 벌을 좀 주시면 좋겠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제가 깨끗하고 흠이 없기 때문에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조국교회를 바라보는 일이 너무 아프고 힘들어서 저 자신이 그런 징계를 받게 되더라도 그렇게라도 좀 하셔서 이 땅의 성도들을 조금 더 조심하게 만들어 주시고, 교회들을 고쳐 주시면 좋겠다는 생각이 저절로 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물론 하나님의 백성들을 징계하시는 일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옛날 구약시대처럼 그렇게 자주, 그리고 심각하게, 그리고 집단적으로 매를 드시는 일은 없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는 약이 아니라 독이 되는 것 같습니다. 죄를 짓고 마음대로 살아도 아무런 징계가 주어지지 않으니 그래도 되는 가보다 하고 살아가게 되는 교회와 성도들이 늘어만 가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성도 여러분. 우리가 저지르는 잘못들, 우리가 교회 안으로 가지고 들어오는 세상의 방식들이 당장 그렇게 하는 당사자를 힘들게 하고 아프게 하지는 않을지 몰라도, 결국 그 것이 그의 죄가 될 뿐 아니라 몸 전체를 병들게 합니다. 이렇게 되면요. 당장 벌을 받지는 않을지 몰라도 그런 몸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흐를 수가 없게 됩니다. 주님의 몸만이 누릴 수 있는 풍성함이 교회를 채울 수가 없게 됩니다. 이미 은혜가 흘러야 할 혈관들이 그런 것들이 만들어낸 찌꺼기들로 막혀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교회들은 저마다 교회를 은혜롭게 하기 위해서 정말 피나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그것을 위해서 원대한 목표를 세우고 무언가 특별한 것, 성공했다고 하는 프로그램들을 가져다가 진행하고 있지요. 그렇지만 그런 노력들이 별다른 성과가 없고, 오히려 시간이 조금 지나면 계속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하지 않을 수도 없는 교회 안의 천덕꾸러기들이 되어 버립니다. 왜 그럴까요? 왜 그렇게 노력하는데도 노력하는 만큼 큰 효과도 없고, 또 그 효과가 지속되지도 않고 짐이 되기까지 할까요? 그것은 우선 교회 안의 프로그램이라고 불리는 것들이 가지고 있는 태생적인 한계 때문입니다. 이런 것들은 대개 자연스럽지가 못합니다. 많은 부분에 있어서 인위적입니다. 인위적이라는 말은 사람의 손에 의해서 이렇게 저렇게 조종되는 것이 많다는 뜻이고 그것이 일의 성패에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뜻입니다. 강하고 세련되게 홍보를 해야 하고, 사람들을 막 부추겨서 그 프로그램에 참여하도록 만들어야 하고, 때로는 그것을 하지 않으면 교회가 아닌 것처럼, 그 과정을 밟지 않으면 성도가 아닌 것처럼 그렇게까지 이야기 말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것만이 교회를 교회답게 할 수 있고, 그것만이 진짜인 것처럼 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교회와 기독교는 절대로 인위적이어서는 안됩니다. 눈에 보이는 성과를 내기 위해서 사람들과 환경을 조종하고 움직이는 그런 인위적인 방법으로는 교회를 절대로 교회답게, 참으로 은혜롭게 세울 수 없습니다. 그것은 교회가 단순히 사람들이 스스로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만든 집단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부르시고 세우신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하나님이 하셔야 합니다. 물론 사람도 최선을 다해야 하지만, 사람의 최선은 항상 하나님의 뜻과 섭리라는 범위 안에서만 그 정당성을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기 때문에 결과가 더디 나오고 또 심지어는 전혀 열매가 없는 것처럼 보여도 그 경계를 넘어가지  않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무엇을 할 때, 그것을 마치 사업을 하듯이, 장사를 하듯이 그렇게 하면 안됩니다. 그저 하는 듯, 하지 않는 듯 그렇게 해야 합니다. 뭘 하더라도 하나님의 은혜 외에는 다른 것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라고 믿으면서, 하나님이 아닌 그 무엇도 교회를 은혜롭게 하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해야 합니다. 이것이 목표위주, 성과위주의 세상에서 경쟁적인 삶에 익숙해져 있는 우리들에게는 참 쉽지 않은 일이지만 그래야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가 이끌어 가는 주님의 몸다운 몸이 될 수 있습니다. 


지난 목요일에 교회 보일러를 교체했습니다. 그 동안 가스 냄새도 좀 나는 것 같고 그래서 혹시 가스 배관쪽에 문제가 있는가, 아니면 보일러에서 가스가 새는가 하고 이렇게 저렇게 이유를 찾았는데, 드디어 이주일 전에 보일러가 완전히 멈춰 버렸고 틀기만 하면 눈이 따가울 정도로 독한 가스만 내뿜어서 기사를 불러서 체크를 해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이제 수명이 다 되어서 아주 망가져 버렸다고 했습니다. 바꾸지 않으면 오히려 위험한 상태가 되었다고 해서 교체를 했습니다. 그동안 괜히 죄없는 가스만 의심했는데, 결국 문제는 보일러 자체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기사분이 저에게 상태를 설명해 주면서 '저기 저 부분이 보일러에서 제일 중요한 부분인데, 저기가 슬슬 막히다가 이제 완전히 막혀 버려서 못쓰게 되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아마 그것 때문에 지금까지 난방을 해도 별로 따뜻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또 노 전도사님은 사시는 집 이야기를 하면서 지난 해에 난방배관 청소를 했더니 그 이전보다 훨씬 더 따뜻해 졌다고 하면서 교회도 아마 배관청소를 하면 훨씬 더 보일러 효율도 좋아지고 따뜻해 질 거라고 팁을 알려 주기도 했습니다. 기회를 봐서 배관청소도 한 번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면 올 겨울은 난방비도 좀 덜 들고 좀 더 따뜻하게 보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교회를 은혜롭게 만들어 보려고 애쓰고 힘쓰는 모든 노력들이 별다른 열매 없이 끝나게 되는 이유는 그렇게 하기 위해서 교회들이 의존하고 있는 프로그램들이 대부분 은혜의 방식을 따르지 않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근본적이고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의 은혜가 흘러야 할 교회의 혈관들이 이미 다른 것으로 꽉 막혀 있기 때문입니다. 막힌 보일러 관처럼 말이지요.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막힌 난방 배관을 청소하듯이 그 혈관들을 청소하는 일입니다. 청소해서 교회의 혈관 안에, 신앙의 혈관 안에 있으면 안되는 것들을 빼내는 일입니다. 교회도 성도도 참 은혜를 알고 또 그 은혜 가운데 살아가려면 다른 어떤 방법을 쓰기 전에 이 일부터 해야 합니다.  


오늘 교회 안에서는 현실론이 원론보다 더 힘이 셉니다. 무엇이 옳은가, 무엇이 하나님 앞에서 바른가를 생각하기 전에 무엇이 ‘되는 방법인가’를 먼저 찾습니다. 그리고 아무리 옳고 하나님 앞에서 바른 것이라고 해도 그것이 우리가 ‘현실적’이라고 생각하는 범위에 들어오지 않으면 아얘 따라가 보려고 조차 하지 않습니다. 성도 개인도 그렇고, 교회도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저는 이것이 바로 오늘 조국 교회와 성도들이 가장 시급하게 청소해야 할 더러운 찌꺼기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다른 죄와 문제들도 많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 하나가 결코 작다고 할 수 없지요. 그렇지만 사실 이렇게 항상 믿음과 하나님 보다는 현실을 앞세우고 결과를 앞세우는 사고방식이 우리의 삶과 교회 안에 다른 죄스러운 것들을 끌어들이는 근본적인 이유가 되고 있는 만큼 우리는 무엇보다 우선 우리 신앙의 혈관을 막고 있는 ‘현실과 효율’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어 있는 찌꺼기들을 청소해야 합니다. 


사실 요단 강가에 제단을 세운 일에 대한 요단 서쪽 지파들의 대처는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반응 자체만 놓고 보면 상당히 바람직 했습니다. 그들의 행동은 죄로 인한 아픔과 비극을 더 이상 반복하지 않고,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지켜 내겠다는 확실한 의지의 표현이었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자신이 아닌 다른 개인들의 죄에 대해서는 최대한 관대한 마음을 유지해야 할 것입니다. 물론 죄를 죄로 여기지 않으면 안되겠지만 말이지요. 그러나, 자기 자신이나 교회 안의 죄에 대해서는 절대로 관대한 마음만 가지고 있어서는 안됩니다. 그러면 그 죄가 자신을 물들이고 교회 전체를 오염시켜서 결국 하나님의 은혜가 힘차게 흘러야 할 신앙의 혈관을 막아 버리고 그러면 우리는 주님의 은혜와 멀어져서 은혜에 궁핍한 자들이 되고, 점점 더 하늘 영광을 잃어버리는 방향으로 갈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죄는 그 모양이라도 버리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죄 자체가 나쁜 것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죄가 우리 삶과 교회을 망가뜨리고 무너뜨리는 이유가 되기 때문입니다. 교회와 성도는 요단 서쪽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자기 안에 죄, 자기 속으로 파고 들려고 하는 죄에 대해서 최대한 민감하고 단호해야만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지키는 방법이고, 하나님의 은혜를 지켜내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 그리고 오늘 조국교회 안에 요단 서쪽 지파들을 닮은 모습들이 회복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가 죄에 지지 않고 죄를 이기는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들이 되어서 주님이 깨끗한 혈관을 통해서 흘려 보내주시는 새 생명의 은혜들을 풍성히 누리는 복된 교회와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