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일 : 2015년 10월 22일 목요일
오늘 나아마 사람 소발을 통해서도 다시 한 번 깨닫게 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인간이란 얼마나 어리석고 얼마나 교만한가 하는 것입니다. 소발은 자신이 왜 욥을 찾아온 것인지 어떻게 그렇게 빨리 잊어버릴 수 있을까요? 그는 다른 친구들처럼 욥을 위로하기 위해서, 아니 어쩌면 그런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그저 극단적인 고통 가운데 있는 친구인 욥을 한 번 보아야 한다는 한 가지 생각으로 거기까지 먼 거리를 달려 왔을 것입니다. 그런데, 소발은 욥의 몇 마디 말에 그는 욥에 대한 그런 마음들을 모두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는 오히려 욥을 비난합니다. 비난하며 그저 가르치려고만 듭니다.
사람이 인과응보적인 생각을 버리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항상 누군가가 어떤 힘든 일을 당하면 그가 그럴만한 잘못을 저질렀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지요. 그리고 이런 생각은 자기 자신에게 힘든 일이 생겼을 때도 그대로 사용됩니다. 물론 인과응보의 법칙은 많은 경우에 틀리지 않는 법칙입니다. 원인지어 결과라는 것은 이 세상의 가장 큰 이치 중의 하나이니까요. 그렇지만 문제는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는 것이고 이런 경우, 그것을 인과응보의 법칙으로만 이해하는 것은 그것이 나 자신이든 다른 사람든 간에 커다란 상처를 만들어 내게 됩니다. 소발을 보면서 저 자신도 그렇게 할 때가 많다는 것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목사란 항상 옳고 그름을 판별해 주어야 한다는 강박증이 있어서 인지 저도 누구에게나 자꾸 이것은 이렇고 저것은 저렇다고 가르치려고 하며, 때로는 그것이 상황을 분별하지 않고서 그렇게 할 때가 있는 것 같습니다.
사람의 이야기는 머리로만 듣는 것이 아니라 꼭 마음으로 들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상대방이 마음으로 말할 때는 반드시 마음으로 들어야 하지요. 그렇지 않으면 소발과 욥의 대화가 그랬던 것처럼 대화가 아니라 다툼이 되어버립니다. 이럴 때 상대방이 어려움을 당하고 있다면 그 일 자체가 그 사람을 더욱 더 아프고 힘들게 만들 것은 너무나 분명합니다. 욥은 머리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으로 말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모든 감정과 생각을 드러내 놓고 부르짖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소발을 그 이야기를 마음으로 듣지 않았습니다. 그저 옳고 그름의 틀 속에다 넣고 평가하고 판단하려고 했습니다. 물론 마음으로 하는 이야기도 옳고 그름이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마음에서 나오는 소리라고 해서 모두 다 선하고 그래서 모두 다 받아주어야 하는 것은 아니니까요. 그렇지만 상대방이 그렇게 힘들어 하고 아파할 때는 그 말의 옳고 그름을 따지기 전에 그 사람과 마음을 같이 해서 들어주어야 합니다. 그 입에서 무슨 이야기가 나오더라도 ‘아, 저 사람이 얼마나 힘들면 저럴까?’라고 공감하면서 그저 그 자리에 있어 주는 것이 가장 적절한 태도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차라리 그 자리를 떠나는 것이 더 좋을 것입니다.
욥은 정직했습니다. 아니면서 그런 척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자기 생각과 마음 속에 있는 의문들과 감정들을 전부 다 하나님 앞에 쏟아 놓았습니다. 물론 자신이 완전히 의롭지 않다는 것도 알고 있었고, 예전에 지은 죄가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자신이 당하고 있는 고통과 고난을 받아야 할 정도로 큰 죄를 지은 적은 없었습니다. 죄가 없다는 이야기가 아니지요. 그만한 죄가 기억이 나질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첫째 욥은 하나님께 자신의 죄를 알려 달라고 기도합니다. 저는 이것이 기도의 아주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우리는 이런 종류의 기도를 별로 드리지 않는 것 같습니다. 물론 하나님이 알려주신다고 한들 우리가 그 이유를 전부 다 이해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묻지도 않는 것은 그다지 바람직하지 않은 모습입니다. 듣지 못할 때 듣지 못하더라도 또 이해할 수 없는 대답을 듣게 되더라도 하나님께 아뢰야 합니다. 그것 자체가 하나님과 나 사이의 진지한 대화가 되고, 또 정직하고 속 깊은 교제가 되기 때문입니다. 묻고 찾지 않는 신앙은 생각하지 않는 신앙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생각하지 않는 신앙은 결코 깊이 있게 성장하지 못합니다. 그 물음은 성경을 묵상하는 일을 통해서도 답을 찾을 수 있지만, 우리의 기도도 아주 중요한 답을 찾는 통로가 됩니다. 기도를 무슨 청구서로만 사용하지 마시고 하나님을 향한 진지한 질문의 기회와 도구로도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욥이나 시편의 기자들, 선지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지요. 그러면 우리는 그 일을 통해서 하나님과 정직하게 교제하는 법을 배울 수 있을 것이고, 나아가서 하나님께서 내 생각을 더욱 더 온전하게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둘째로 욥은 자기 감정을 있는 그대로 드러냅니다. 하나님을 향해 하나님께서 왜 자신을 원수로 삼느냐고, 자신이 뭐 대단한 존재라고 하나님께서 이렇게 쥐 잡듯이 잡으시느냐고, 그냥 좀 내버려 두시면 안되느냐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원망이 아니었습니다. 분노의 표현도 아니었구요. 그저 힘들다, 너무 힘들다, 그러니 좀 내버려 두어 달라고 자기 마음을 있는 그대로 하나님 앞에서 내보인 것입니다. 우리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분명히 있지만 그것은 욥이 우리와는 다르게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감정을 전혀 숨기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흔히들 신앙을 전인적인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신앙에는 우리의 전부가 개입되고 사용되어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신앙은 마음의 일일 수 밖에 없습니다. 꼭 마음을 사용해야 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참 신앙이란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일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다른 사람을 사랑할 때도 마음을 사용해서 사랑해야 하고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도 마음을 드려야 합니다. 그래야 신앙은 딱딱해지고 거칠어지는 것을 막을 수 있고, 그 일이 우리의 일부분이 아니라 우리의 삶과 속 사람 전부를 아우르는 일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람도 마음으로 대하시고, 하나님도 마음을 실어 대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신앙이 항상 여러분 마음의 일, 여러분의 마음이 온전히 실린 일이 되게 하십시오.
우리의 신앙이 감정과 생각을 모두 아우르는 것이 되어서 우리가 전심으로 사람을 사랑하고 또 하나님을 사랑하는 균형잡힌 신앙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