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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주일예배

2015.10.25. 주일오전 -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여호수아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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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여호수아 23장 1-16절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의 별명이 여럿 있지만, 그 중에서도 사람들이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별명이 있다면, 아마도 그것은 ‘과학만능시대’라는 별명일 것입니다. 사실 사람들이 자신이 사는 시대를 그렇게 부르기 시작한 것은 꽤 오래 된 일이지만 요즘처럼 그 말이 ‘정말 그렇다’고 믿어지던 시대는 없었습니다. 그것은 과학이 사람들이 상상하던 것, 아니 상상도 하지 못하던 것을 모두 현실 속으로 옮겨놓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과학의 힘이 세어지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이렇게 과학의 힘이 세어지다 보니까 과학이 자기가 머물러야 할 경계를 넘어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게 되었습니다. 원래 과학이란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눈에 보이는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서 생겨난 학문이었습니다. 우리가 ‘자연’이라고 부르는 범위 안에서 이미 일어나는 일들을 관찰해서 그 일들이 가지고 있는 법칙들을 밝히려고 태어난 학문이었지요. 그런데,  과학이 할 수 있는 일들이 점점 많아지고 또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숫자와 공식을 사용해서 아주 정확하게 설명해 내면서, 사람들은 이 과학에 이 세상의 모든 일들을 가치와 옳고 그름까지도 평가할 수 있는 권위를 부여해 주었습니다. 그야 말로 과학은 만능의 신으로 여겨지게 되었습니다. 


과학이 이런 권위까지 인정받게 된 이유는 과학이 발견해 내는 법칙들이 소위 ‘객관성’이라는 것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과학이 정말로 100퍼센트 객관적이냐 하면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일반적인 사람들은 과학이 객관적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기 때문에 과학이 이런 권능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제가 과학에 대한 이런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이런 사고방식이 심지어는 우리의 신앙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었고,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많이 위축시켜 놓았기 때문입니다. 과학은 객관적이지만 신앙은 그렇지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우리 신앙에 대한,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가 그만큼 약해졌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되기까지 우리가 스스로 확인해 보지 않은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그러면 정말로 과학은 객관적이고 우리의 신앙은 그렇지 못한 것일까요? 우리의 신앙은 근거도 없고, 이유도 없는 그저 믿는 이유가 우리 마음 속에만 있는 그런 것일까요? 우리 신앙은 어떤 확실하고 흔들림 없는 사실을 믿는 것이 아니라 확실치 않은 것에 대한 도박과도 같은 것일까요? 맞으면 좋지만 틀려도 할 수 없는 그런 것 말입니다. 물론 저는 우리 신앙의 신빙성을 과학의 잣대로 가늠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과학 밑에다 놓는 것이니까요. 그렇지만 저는 오늘 여러분에게 말씀드립니다. 우리 신앙도 과학적이라면 충분히 과학적이고 또한 객관적인 것입니다. 이 세상 그 어떤 것보다도 말이지요. 그래서 우리 신앙은 불안한 가능성을 믿고 투자하는 도박이 아니라 이 세상 어떤 것보다도 확실한 것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 일이 어느 정도 마쳐진 후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꽤 긴 기간 동안의 쉼을 주셨습니다. 약속하신 대로 약속의 땅에서 안식하게 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러는 동안 세월이 더 흘러서 이제 여호수아는 더 이상 이스라엘의 지도자로서의 임무도 계속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그랬던 것처럼 자신도 후계자를 세워야 할 때가 왔습니다. 그런데, 여호수아는 지금껏 사람을 키우지 않았습니다. 이미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와 있고, 이제는 그 땅을 차지하고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이제 이스라엘은 그 땅에서 직접 그들의 왕이신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하나님의 나라가 되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한 사람의 후계자를 세우는 대신에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을 모두 불러 모아 놓고 그들이 지도자로서 최소한 감당해야 할 역할을 일러 주었습니다. 


여호수아는 말합니다. “나는 나이가 많아 늙었도다” 아무리 탁월한 사람도 사람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영원히 신뢰할 바도 못되고 의지할 바도 못됩니다. 오히려 이전의 지도자가 크고 훌륭하면 훌륭할수록 빈 자리는 더욱 더 커지게 마련이니까요. 이것은 부모도, 스승도, 그리고 나라를 다스리는 지도자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아무리 탁월하고 훌륭해도 그저 그 사람의 선한 역할에 감사하면서 잠정적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 이상이 되면 그 사람이 ‘나이가 많아 늙었을 때’나, 이런 저런 이유로 더 이상 지도자로서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게 되었을 때, 나도 내가 속해있는 공동체도 심각하게 흔들리게 됩니다. 목회자를 바라보는 시각도, 정치 지도자를 바라보는 시각도 다 그러해야 합니다. 잘 하고 믿을만 하면 신뢰해야 하지만 그것도 너무 지나치면 안됩니다. 그 신뢰와 인정이 절대적이 되고 맹목적이 되면 반드시 감당하기 힘든 부작용이 생겨나게 됩니다. 사실 요즘 우리 사회와 이 땅의 교회들이 앓고 있는 심각한 질병들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생겨난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이제 너희는 내가 아니라 직접 하나님을 믿어야 하며 나의 말이 아니라 직접 하나님의 말에 순종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는 그저 그 이야기만 하지 않습니다. 우선 그는 자신과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이 함께 경험했던 일들에 다시 기억하게 했습니다. 여호수아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이 모든 나라에 행하신 일을 너희가 다 보았거니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 그는 너희를 위하여 싸우신 이시니라” 이야기인 즉 너희는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전해 들은 사람들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을 직접 경험한 경험자고 증인이라는 것입니다. 정말 그랬습니다. 요단강 건너편 여리고 성 전투로 부터 시작해서 하나님께서는 번번히 이스라엘을 위해서 싸우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정말 어려운 전투들을 너무나 손쉽게 이길 수 있었습니다. 지금 여호수아 앞에서 여호수아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하나님이 자신들을 위해서 싸워주시는 싸움에 직접 참여해서 하나님이 자신들을 위해서 싸우시는 것을 모두 지켜본 사람들입니다. 그런 그들에게 ‘하나님이 너희를 위해 싸우셨다’는 말은 단순한 격려용 멘트가 아니라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한 부인할 수 없는 증언이었습니다. 


그 다음에 여호수아는 이렇게 말합니다. “보라 내가 요단에서부터 해 지는 쪽 대해까지의 남아 있는 나라들과 이미 멸한 모든 나라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제비 뽑아 너희의 지파에게 기업이 되게 하였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대신하여, 이스라엘을 위해서 싸워주셨습니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이스라엘은 도저히 자기 힘으로는 차지할 수 없는 가나안 땅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는 이미 꽤 오랫동안 전쟁이 전혀 없는 안식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것은 모두가 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해서 싸워주신 덕분이었습니다. 지금 그들이 살고 있는 땅과 그 땅 위에서 누리고 있는 평화는 과거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서 싸워주셨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여호수아는 이미 차지한 땅만 제비뽑아 그들에게 나눠주지 않았습니다. 아직 차지하지 않은 땅까지 모두 나눠 주었습니다. 아직 내 땅도 아닌 남의 땅을 제비 뽑아 나눠 가진다는 것은 참 우습고 황당한 일이지만 그렇게 하는 것이 여호수아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그 곳들 또한 하나님께서 주시기로 약속한 땅이고 앞으로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해서 싸우실 것이라면 결국 그 곳 또한 이스라엘의 땅이 될 것이 너무나 분명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호수아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기로 약속하셨던 모든 땅을 넘겨 주실 것을 확실히 믿고 있었습니다. 아직 밟아 보지도 못한 땅을 미리 나눠줄 정도로 완전히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여호수아의 이 믿음은 근거가 없는 것입니까? 그저 ‘꿈은 이루어진다’는 식으로 자신의 신념으로 자신을 세뇌시키고 있는 것입니까? 그의 믿음은 그저 하나의 주관적인 확신에 불과한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여호수아의 이 믿음은 너무나 확실한 근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의 믿음은 과거에 이미 반복해서 경험하고 또 경험한 일들 위에서 얻어진 믿음이었으니까요. 앞서 말씀드렸듯이 과학이 그토록 신뢰를 얻고, ‘과학적’이라는 말이 모든 것의 가치를 평가하는 기준이 되어버린 이유는 그 과학의 내용이 되고 기둥이 되는 과학의 법칙들이 반복되고 또 반복되는 일들을 연구해서 얻어진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한다면요. 여호수아의 믿음도 우리가 ‘과학적이고 객관적’이라고 부르기에 충분하지 않을까요? 단순히 한 두 번 일어난 일을 통해서 증명된 것이 아니라 요단강 앞에 왔을 때부터만 계산한다고 하더라도 십 수년 동안, 그것도 죽고 사는 문제가 걸린 치열한 전쟁터에서 계속 반복되고 또 반복된 일들을 기초로 하고 있으니 말이지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 그가 너희 앞에서 그들을 쫓아내사 너희 목전에서 그들을 떠나게 하시리니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그 땅을 차지할 것이라” 여호수아의 이 믿음은 허망한 것도 아니었고 근거가 충분치 못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의 믿음은 믿을 수 있고, 또 믿어야만 하는 이유가 충분하기 때문에 믿게 된, 굳이 표현한다면 ‘과학적인 지식’과도 같은 그런 믿음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우리의 믿음도 똑같습니다. 한 번 여러분이 어떻게 해서 예수를 믿게 되었고 또 지금까지 그 믿음을 지켜올 수 있었는지 되돌아 보시기 바랍니다. 분명히 그것이 지금까지 아무런 이유도 근거도 없는데, 그저 여러분이 여러분의 믿음을 꽉 붙들기 위해서 애쓴 결과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제가 성도들로 부터 예수를 처음 믿게 된 일에 대한 이야기들을 들어보면 자신이 어떻게 해서 예수를 믿게 되었는지 모르겠다고 없다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참 많습니다. 무슨 이야기이지요? 예수님을 믿는데 자기가 한 일이 없다는 뜻일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에게는 예수를 믿어야 할 이유보다 믿지 못할 이유가 훨씬 더 많았다는 뜻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을 믿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성도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을 믿게 되었을 때, 내가 예수님을 믿지 못하게 방해하는 여러가지 일들이나 장애물들과 누가 싸웠습니까? 내가 싸웠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이 싸우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대신해서 우리 믿음을 방해하고 또 공격하는 우리의 대적들과 싸우셨고, 또 이기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를 믿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처음에 예수 믿을 때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간혹 들어보면 자신을 교회로 이끌었던 친구나 혹은 함께 신앙생활을 하던 더 믿음 좋아보이던 친구들도 다 교회를 떠났는데 이상하게 제일 흐지부지하던 자기 자신만 남았다고 말씀하시면서 신기해 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요, 성도 여러분. 그건 신기한 것도 이상한 것도 아닙니다. 다른 친구들은 어떻게 해서 그렇게 가지 말아야 할 길로 가 버렸는지 몰라도, 제일 늦게 예수 믿고 제일 흐지부지했던 내가 그래도 지금까지 신앙을 붙들고 있는 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삶의 구비 구비를 되돌아 보면요. 그 고비마다 하나님이 나를 지켜 주셨습니다. 내가 나를 지킬 수 없고, 내가 내 믿음을 붙들 수 없을 때, 시험을 이기지 못하고 넘어질 수 밖에 없었을 때, 그 때 하나님이 나를 대신해서 싸워 주셨기 때문입니다. 내가 질 수 밖에 없었던 그 싸움을 하나님이 대신 싸워 주시고 또 싸워주셨고, 그 싸움에서 승리하셨기 때문에 지금 여기에 우리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 뿐만이 아니지요. 우리들 중 많은 숫자가 ‘기적’과 ‘섭리’라고 부르는 일들을 경험하면서, 그런 일들 덕분에, 그리고 그것을 증거삼아 여기까지 왔습니다. 한 두 번이 아닌지라 결코 우연이라고 말할 수 없는 그런 일들 말입니다. 그것도 우리 주님이 우리를 위해 싸워주신 것입니다. 그 분의 지혜와 능력으로 우리의 현실 속에서 우리를 넘어뜨리고 무너뜨리려는 공격으로부터 우리를 지켜 주신 것이지요. 이런 것들을 생각할 때, 우리에게는 하나님을 믿어야 할 이유, 믿을 수 있는 이유가 충분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주님께서 처음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어김이 없이 우리의 믿음이 위기와 위험에 처할 때마다 우리를 위해서, 우리를 대신해서 싸워주셨고, 또 승리하셨습니다. 그 증거가 무엇이지요? 바로 나 자신이 증거입니다. 한 번 따라해 볼까요. “나의 믿음이 내 믿음의 증거다”, 한 번 더요. “나의 믿음의 가장 확실한 믿음의 증거다” 그 증거야 사람마다 더 확실할 수도 있고, 덜 확실할 수도 있지만 지금 우리에게 믿음이 있다는 것은 우리가 앞으로도 하나님을 믿어야 하고 또 믿을 수 있는 충분한 증거가 됩니다. 하나님은 앞으로도 우리를 위해서, 우리를 대신해서 싸우실 것입니다. 우리의 삶을 지켜 주시고, 우리의 믿음을 지켜 주시기 위해서 싸우실 것이고 또 이기실 것입니다. 믿습니까? 이 믿음에서 흔들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믿음은 그 근거가 확실한, 경험이 증명해 주는 아주 객관적인 것입니다. 


앞에서 제가 과학적인 원리와 법칙들은 계속 반복되는 똑같은 일들을 관찰하고 연구해서 얻어내는 것들이고, 그래서 ‘객관적’이라는 신뢰를 얻게 된다고 말씀드렸는데요. 그런데 엄밀하게 말씀드리면 이 원리와 법칙들이 어떤 조건에서나 항상 똑같은 결과를 내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만약 10미터 높이에서 새의 깃털 하나와 볼링공 하나를 떨어 뜨리면 어느 것이 먼저 떨어질까요? 그렇습니다. 볼링공이 먼저 떨어집니다. 정말 수준높은 문제인데 정말 잘 맞추셨습니다. 그러면, 이제 조금 쉬운 문제를 내 드릴까요? 그렇다면 이 두 가지를 공기가 전혀 없는 진공상태에서 떨어뜨리면 과연 어떤 것이 먼저 떨어질까요? 답은 동시에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냥 생각하기에는 당연히 볼링공이 훨씬 더 무거우니까 볼링공이 먼저 떨어질 것 같지만 실제로 떨어뜨려보면 놀랍게도 두 가지가 동시에 떨어집니다. 그 이유는 공기 저항이 없는 상태에서는 물체가 떨어지는 속도는 중력 가속도와 시간에만 의존하기 때문인데요. 여기서 중력 가속도라는 것은 지구 위에서는 어디나 똑같고 공기를 없애 버려 저항이 사라진 상태이니까 볼링공과 깃털이 동시에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진공상태라는 조건이 만족되어야 깃털과 볼링공이 동시에 떨어지는 일은 반복해서 일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앞서서 하나님께서 과거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서 대신 싸우시는 일이 반복되어 일어났고, 그래서 차지하는 것이 불가능했던 가나안 땅을 차지하고 살게 되었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이미 반복해서 일어난 일어난 일이기 때문에 미래에도 그런 일이 계속해서 일어날 것을 충분히 믿을 수 있다는 것도 생각해 보았구요. 그런데 이 일이 항상 변함 없이 일어나는 일이 되려면 반드시 갖춰져 있어야 할 조건이 있었습니다. 그 조건이란 바로 하나님만을 섬겨야 한다는 것과 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조건이 계속 유지되지 않으면 모든 땅을 차지하고 그 땅에 오래도록 평화롭게 사는 일은 일어나지 않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 조건은 갑자기 끼어든 것이 아니었습니다.


잠시 이스라엘의 과거 역사를 생각해 볼까요? 성도 여러분, 어떻게해서 이스라엘은 여리고성 전투로 부터 시작된 거의 모든 가나안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었고, 심지어는 산 위에 요새를 만들어 살고 있는 거인족속들까지 내쫓을 수 있었지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대신해서 싸워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계속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대신해서 싸워주셨을까요? 그것은 그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에 순종하면서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들은 쳐다 보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주변이 정말 신들의 전시장이라고 부를 수 있을만큼 다양한 신들로 가득 차있는 환경이었지만 그들에게로 눈길을 돌리지 않았고 그 신을 섬기는 사람들을 따라 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계속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서 싸우셨고, 그 덕분에 그들은, 아직 미완성 상태이기는 하지만, 약속의 땅에서 안식을 누릴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것을 역으로 증명해 주는 사건이 바로 아이성 전투였구 말이지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않고, 최악의 경우 일시적으로 우상을 숭배한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택함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실 자체가 완전히 무효화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이 아닌 우상을 섬기며,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지 않을 때, 그들은 그 조건이 만족되어야만 가질 수 있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와 선물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대신 싸워주시지도 않을 것이고, 그러면 그 땅에서 누리는 평안도 사라져 버리게 됩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원래 구원을 얻은 후 우리의 삶은 점점 더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서 사는 것과 같은 그런 모양이 되어야 합니다. 더 풍성해지고 더 평안이 넘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살아보면 안 그렇습니다. 대다수가 안 그렇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대부분 하나님을 믿고 나서도 그저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성도 여러분, 우리는 꼭 질문해 보아야 합니다. 과연 그것이 성도에게 당연한 것이고 정상적인 것인가 하고 말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믿음은 우리에게 점점 더 풍성한 삶을 살게 해 주고, 점점 더 큰 자유를 주며, 점점 더 든든한 평안을 주어야 정상입니다. 그런데, 우리 삶 속에 이런 일이 계속해서 일어나지 않고 멈춰져 있는 것은 하나님이 더 이상 나를 위해서 싸워 주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하나님이 더 이상 나를 위해서 싸워주시지 않는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만 섬기고 하나님께만 순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우선순위에 두고서 그 분의 말씀을 삶의 가장 중요한 원리로 삼아 살아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가 발견해야 할 아주 중요한 교훈이며 영적인 원리입니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과 경쟁하며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려고 끊임 없이 우리를 유혹하는 강력한 하나님의 경쟁자들에게 둘러싸여 있습니다. 가나안 땅의 온갖 우상에 둘러싸여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말이지요.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에게 너희는 나만 섬기라고 하십니다. 그 어떤 것도 나의 자리에, 그리고 나보다 중요한 자리에 두어서는 안된다고 말씀하십니다. 네 자녀나 너의 행복도, 너의 성공도, 그리고 돈이나 편안함, 친구나 인간관계도 그 어떤 것도 그 자리에 가게 해서는 안된다고 말씀합니다. 또 우리는 항상 하나님 말씀의 자리를 빼앗으려는 이 세상의 온갖 말과 주장들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주장들은 모두 다 현실 속에서는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효과적이고 유익해 보입니다. 이것 때문에 더 많은 사람들이 그 길을 따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런 말들이 아니라 내 말에만 순종해야 한다고 요구하십니다. 당신의 말씀의 가치와 무게를 사람의 말이 가지는 가치와 비슷하거나 못한 것으로 보면 안된다고, 그래서 하나님 말씀대신 세상의 말들을 선택하면 안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게 하면 내가 너희와 함께 할 수 없고, 내가 너희 대신해서 싸워줄 수가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풍성함도 평안함도 더 이상 누릴 수 없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혹시 요즘 나의 삶이 푸석푸석하고 나의 영혼이 지쳐 있다면 바로 이 이유 때문은 아닌지 우리는 스스로를 잘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빨리 하나님만 섬기고, 하나님께만 순종하는 바른 자리로 되돌아 가야 할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굉장히 자주 나오는 말이 있습니다. 16절 속에 무려 열 두 번이나 나오는데요. 그 말은 바로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라는 말입니다. 여호수아는 본문에서 많은 것들을 이야기 했습니다. 과거의 하나님의 은혜, 지금 이스라엘이 누리는 복, 그리고 앞으로 이루어질 하나님의 약속, 그리고 하나님을 섬기는 방법이나, 하나님을 거역했을 주어질 징계들…. 정말 많은 것들을 이야기 했지요. 그렇지만 그 모든 이야기 속에서 반복하고 또 반복해서 힘주어 말합니다. “너희 여호와 하나님이…” “너희 여호와 하나님께서…” “너희 여호와 하나님께…” 열 두 번이나 말하고 또 말합니다. 이것이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진짜로 해 주고 싶었던 말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의 마음 속에 지워지지 않게 새겨넣어주고 싶었던 진리였습니다. “여호와 하나님만이 너희의 하나님이다”라는 것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만을 섬겨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만 순종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그렇게 해야 할 아무 근거도 없지만 묻지도 말고 따지지도 말고 무조건 그렇게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만 섬기라고 하시는 것, 하나님 말씀에만 순종하라고 하시는 것은 하나님만이 그렇게 말씀하실 충분한 자격과 이유를 가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이스라엘에게는 그렇게 말씀하시고도 남을만한 충분한 근거가 있기 때문입니다. 어떠십니까? 성도 여러분. 우리가 우리의 과거를 돌이켜 보면요. 우리도 똑같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너는 나만 섬기라'고 ‘내 말에만 순종하라’고 요구하실 이유와 근거가 이미 충분하지요? 하나님은 ‘나만 너의 하나님 여호와다’라고 주장하실 자격이 충분한 분이시지요? 내가 우리 하나님을 그렇게 불러도 좋겠지요? 그렇게 부르며 그렇게 의지해도 좋고, 그렇게 의지하며 그렇게 순종해도 괜찮겠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만 믿고 하나님께만 순종해야 할 이유는 결코 부족하지 않습니다. 이미 우리에게는 그렇게 해도 괜찮은 이유, 아니 그러게 해야 마땅한 이유들이 충분합니다. 그 믿음을 ‘과학적’이라고 불러서 손색이 없을만큼 차고 넘치는 증거들이 있습니다. 우리 이제 하나님을 적당한 자리에 모셔놓고서 멀찌감치서 하나님을 믿지 마십시다.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 여호와'의 자리에 모시고서 날마다 매순간 그렇게 부르면서 그렇게 하나님을 믿으십시다. 그 하나님만 믿고 그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십시다. 절대 손해 보지 않으실 것입니다. 절대로 속는 일, 실망하는 일 없으실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정말 ‘나의 하나님 여호와’라고 부르며 섬길 때, 우리 삶에는 이미 충분한 믿음의 증거들이 더욱 더 넘치게 될 것이고, 하나님은 항상 나를 위해, 나를 대신하여 싸워 주실 것입니다. 내가 내 힘으로 이길 수 없는 삶의 전쟁에서 말입니다. 


우리 모두가 우리 하나님을 향해 “나의 하나님 여호와"라고 외쳐 부르며, 하나님만 섬기고 하나님께만 순종하기 위해서 헌신하는 참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어서 주님 주시는 안식과 평강을 끊임 없이 누리고 사는 복된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