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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새벽예배

2015.10.27. 새벽예배 - 성경읽기와 묵상(욥기 21-2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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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일 : 2015년 10월 27일 화요일




어제도 말씀드렸지만 이 세상은 인간이 다 제대로 이해하고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나 복잡하고 예측할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이 세상이 우리들이 아니라 지혜와 지식이 한이 없으셔서 우리로서는 다 이해할 수도, 추측할 수도 없는 하나님께서 움직여 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사람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생각과 가치의 틀 속에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집어 넣으려고 합니다. 심지어는 그 무한하신 하나님까지 자기 머리 속에 넣으려고 하고, 또 그렇게 되지 않을 때는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다는 이유로 하나님을 믿지 못하겠다고 말합니다. 그렇지만 그것보다 어리석은 것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실 우리가 하나님을 다 이해할 수 있고,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다 헤아릴 수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믿을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는 것은 하나님이 나보다 덜 지혜롭고 나보다 지식이 부족하다는 뜻이 될텐데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을 믿어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나보다 작고 나보다 수준 낮은 신이라면 우리가 믿고 의지해야 할 가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겉으로 보기에는 욥의 태도가 훨씬 더 교만하고 거친 듯하지만 실은 욥을 위로하러 찾아온 욥의 친구들이 훨씬 더 교만하고 거칠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하나님을 다 알고 있다는 듯이, 하나님의 생각과 마음에 들어가 있다는 듯이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욥의 세 친구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그럴 듯하지만 사실은 가장 교만한 모양의 신앙이 무엇인지를 보여 줍니다. 그들은 정말 하나님을 편들고 있습니다. 그것은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가장 결정적인 면에서 잘못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그 잘못은 바로 그들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 머리 꼭데기에 올라가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목사라는 직업이 정말 위험한 직업이라는 것을 절감할 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특히 목사로서 설교를 할 때, 그 때가 저에게는 영적으로 가장 위험한 때라고 생각합니다. 그 때는 저도 모르게 성도들에게 답을 주어야 한다는 압박감에 사실 인간이 딱 뿌러지게 이렇다, 저렇다를 이야기할 수 없는 문제에 대해서 단 하나로 정해진 답을 주려고 할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목사가 항상 불분명한 이야기만 할 때, 성도들은 더 해깔릴 수 있고, 목사가 주관도 뚜렷하지 못하고 아는 것도 없다고 생각할까 두렵기 때문에 , 그리고 그래야 뭔가 대단해 보인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에 그 유혹의 힘이 굉장히 강합니다. 이런 강한 유혹 때문에 목사라는 직업이 굉장히 위험한 직업이 아닌가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야 한다는 말을 여러가지 의미로 사용하고 또 이해할 수 있지만, 우리는 이러한 점에 있어서도 하나님 앞에 겸손해야 합니다. 확실히 알 수 있는 것 까지 모른다, 분명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겸손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성경에서 이것은 이것이다, 이것은 이것이 될 수 밖에 없다라고 말씀하신 것에 대해서는 그저 그렇다고 받아들이면 됩니다. 그렇지만 그렇지 않은 것들, 그러니까 이럴 수도 있지만 때로는 저럴 수도 있는 것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에는 이렇지만 혹시라도 그렇지 않은 경우가 있을 수 있는 일들에 대해서는 단정지어서 말하면 안됩니다. 그런 것들은 확실하지 않은 채로 남겨 두어야 합니다. 정확하게 알 수 없다고 말해야 하고, 또 정확하게 알려고 해서도 안됩니다. 


제가 교회 안에서 신앙이 좋다는 분들, 그리고 신앙생활을 오래 한 분들을 보면서 가장 안타까운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런 분들 중에서는 무엇이든 너무 단정지어서, 그것도 하나님의 뜻이라는 라벨을 붙여서 말씀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틀릴 뿐 아니라 영적으로는 가장 큰 교만에 해당하는 것인데도 말이죠. 제가 예전에 은사 목사님으로부터 들은 말 중에서 항상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거룩한 무식’이라는 말입니다. 그 분은 우리가 알 수 없는 것은 알 수 없다고 말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또 알 수 없는 것은 알 수 없는 상태로 남겨 두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무식은 창피한 것이 아니라 거룩한 것이라고 말입니다. 우리는 최선을 다해서 성경을 읽고 묵상하며 하나님의 명확한 뜻을 알아가야 하고 또 하나님의 구체적인 뜻을 분별해 내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그저 그대로 내버려 두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거룩한 것이고 겸손한 것입니다. 


사람이 모르는 것이 있고, 분명치 못한 것이 있을 때, 사람은 자꾸 불안해 집니다. 그 부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이단들은 그 불안함을 이용합니다. 그렇게 불분명한 것들, 아얘 알 수 없는 것들이나 아니면 성도들이 모르고 있는 것들을 자기들만 확실히 알고 있다고 말하면서 성도들을 꼬득입니다. 그리고 성도들은 그런 꼬득임에 너무나 쉽게 넘어갑니다. 그러나, 성도 여러분. 우리는 우리가 정확하게 모르는 부분, 불분명한 부분이 있어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모른다고 해서 하나님이 모르시는 것이 아니고, 우리에게 모호하다고 해서 하나님께도 모호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이렇게 전지하실 뿐 아니라 전능하시기도 하시며, 무엇보다도 지극히 선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믿다가 또 알려고 하다가 도무지 알 수 없는 부분을 만날 때, 그 때는 두려움이 아니라 믿음을 사용해야 할 때입니다. 나는 몰라도 하나님은 아시고, 나에게는 불분명해도 하나님께는 분명하며, 선하신 나의 아버지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가장 완전하고 선하게 섭리하고 이끌어 가실 것이라는 그 분명하고 단순한 믿음을 사용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 불분명함 때문에 믿음이 흔들리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더 견고한 믿음을 위한 좋은 재료로 사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알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어야 하지만 반대로 모르기 때문에 더욱 더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불확실할 때 더욱 더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겸손하고 견고한 믿음을 가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