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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주일예배

2015.11.01. 주일오전 _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여호수아 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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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여호수아 23장 8-11절


 



‘하나님만 섬기고 하나님께 순종해야 하나님이 나 대신 싸워 주신다.’ 이것이 지난 주일에 함께 살펴본 말씀의 핵심이 되는 내용이었는데요. 우리의 삶이 계속해서 가나안 땅에서 살아가는 것같은 삶이 되게 하려면 우리는 이 원리를 꼭 기억하고 이 원리에 우리 삶을 맞춰가야 합니다. 이 말씀은 정말 복된 약속입니다. 그렇지만 이상하게도 우리는 이 말씀을 듣고 마냥 기쁘기만 한 것은 아닌 듯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주실 평강과 풍성함, 가나안 땅에서 사는 듯한 삶은 너무 좋은 것이지만, 그래도 내가 사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만 섬기고 하나님의 말씀에만 순종해야 하는 일은 여전히 부담스럽기 때문이지요. 항상 하나님을 삶의 최우선 순위에 두고, 세속적인 주장들과 이론들에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아가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입니다. 게다가 우리에게는 ‘그렇게 했다가 하나님이 내 편 들어 주시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 하는 불안이 있고, 미래에 약속된 100만원보다는 지금 내 손에 쥘 수 있는 50만원을 더 선호하는게 우리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무리 성경이 그렇게 이야기 해도 당장 하나님을 인생의 영순위에 놓고 하나님의 말씀에만 순종하는 자리로 선뜻 나아가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우리가 이 모든 이유와 구실들, 그리고 장벽들을 넘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삶을 살고 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선물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요? 오늘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 보려고 합니다. 


여호수아가 하나님만 섬기고 또 하나님께만 순종하라고 하면서 신신당부 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가나안의 원주민들과 결혼관계를 맺어서는 안된다는 것과 그들이 섬기는 신의 이름을 부르거나 그 신의 이름으로 맹세하거나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얼핏 보기에 이 두 가지는 서로 상관이 없는 것같아 보이지만 실은 굉장히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 당시 동족이 아닌 이방족속들과의 결혼을 하는 것은 대개 정치적인 목적때문이었는데, 그럴 때는 반드시 상대방이 섬기는 신을 인정해 주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방인들과의 결혼은 거의 분명히 그들이 섬기는 신을 함께 섬기는 일로 이어질 수 밖에 없었고 바로 이 일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방인들과의 결혼을 금지하셨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다면 언제든 누구든 이스라엘 백성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었습니다. 그 예가 바로 여리고의 성전기생이었던 라합입니다. 라합은 결국 살롬이라는 사람과 결혼해서 우리 자매들이 흠모해 마지 않는 최고의 신랑감, 우리의 엄친아 보아스의 어머니가 됩니다. 이방인들과의 무분별한 결혼은 신앙적인 이유로 금지된 것이지 인종적이거나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당시 어떤 민족이 섬기는 신은 그 민족이 가지는 힘을 의미했습니다. 센 신을 섬기면 센 능력의 보호를 받고 전쟁에서 이길 수 있습니다. 반면에 약한 신을 섬기면 그런 특혜를 누리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이미 이스라엘 백성들이 경험한 일들을 다시 기억나게 해 주면서 힘 때문이라고 한다면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을 섬길 필요가 전혀 없다고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강대한 나라들을 너희 앞에서 쫓아내셨으므로 오늘까지 너희에게 맞선 자가 하나도 없었느니라 너희 중 한 사람이 천 명을 쫓으리니 이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 그가 너희에게 말씀하신 것같이 너희를 위하여 싸우심이라” 여호수아는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힘이라면 지금 너희가 섬기는 하나님이 그 어떤 신보다도 한 수 위다. 힘을 가지고 싶어서 다른 신을 섬기는 일은 어리석은 일이다. 그 동안 너희들이 힘이 세서 강대한 나라들을 상대로 승리한 것이 아니지 않느냐? 하나님께서 그들을 내어 쫓으셨으니까 오늘까지 너희들에게 맞선 사람들이 없었던 것 아니냐?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니 다른 신 생각은 하지 말아라. 그리고 추호라도 그런 신들을 섬기게 될 가능성이 있는 일은 하지 말아라.’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오직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 가까이 하기를 오늘까지 행한 것같이 하라”고 신신당부를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여호수아는 “그러므로 스스로 조심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고 명령합니다. 엄청나게 강한 어조로 하나님만 섬기고 하나님께만 순종해야 한다고 말해 놓고서, 그 결론으로 “그러니까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앞에서 처럼 ‘그러니까 하나님께 복종하고 하나님만 섬겨라’라고 했다면 말이 훨씬 더 자연스러웠을 텐데, 그런 분위기에서 갑자기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을 그 모든 내용을 매듭짓는 결론으로 내놓는 것은 뭔가 어울리지 않는 것 같고 또 많이 약해 보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왜 여호수아는 더 강하고 확실한 말들을 다 놓아두고 사랑을 이야기하고 했던 것일까요? 


우선 이 문제의 답을 찾아보기 전에 과연 우리는 어떤 것 혹은 어떤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가  그리고 하나님은 정말로 우리가 사랑할만한 분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가 사랑할만한 분이 아니라면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여호수아의 명령, 그리고 모든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요구는 억지가 될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거의 모든 것들을 향해서 ‘사랑한다’는 표현을 씁니다. 사랑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것도 사랑한다고 말하고, 사랑해서는 안되는 것들도 사랑한다고 말합니다. 심지어는 햄버거 광고에도 사랑이라는 말이 등장할 정도이니까요. 이것은 오늘날 사랑한다는 표현이 그만큼 보편화되어 있고 혼란스럽게 사용되고 있다는 증거일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사랑한다'는 말을 붙이는 대상들에게는 여전히 그것들을 하나로 묶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사람이든 물건이든, 그 어떤 것이든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바로 그 모든 것들은 저마도 그것을 사랑한다고 생각하고 또 말하는 사람에게 특별한 만족을 준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그게 무엇이든지 자기에게 만족을 주는 대상을 사랑하게 됩니다. 꼭 그런 것은 아니지 않느냐고 항변하시는 분들이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가족은, 아내와 남편은 그래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시면서 말이지요.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면 가족들 또한 나에게 어떤 만족을 주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입니다. 특히 우리의 사랑이 기쁘고 행복한 사랑이 되려면 그 대상이 나에게 만족을 주어야만 합니다. 아닌 것 같아도 그렇습니다. 


부부를 예로 들어 볼까요? 가장 최근에 결혼한 커플과 인터뷰를 좀 해 보겠습니다. 우리 우진 형제, 아내인 윤희 자매를 많이 사랑하지요? 당연한 거죠. 물으나 마나일 겁니다. 그러면 우진 형제, 만약에 말이야. 그럴리는 절대로 없겠지만 앞으로 그 사랑스러운 윤희 자매가 밥도 전혀 안해 주고, 잘 씻지도 않고, 틱틱거리고 소리나지르고, 쇼핑가면 네다섯 시간씩 끌고, 외출하면 새벽이 되어야 들어오고, 바빠 죽겠는데 화장한다고 세 시간씩 기다리게 한다면, 그런 일이 반복되고 또 반복된다면, 그 때도 우진형제가 윤희 자매를 바라보는 눈길이 지금처럼 그윽할 수 있을까요? 윤희 자매를 기쁜 마음으로 가슴 떨리게 사랑할 수 있을까요? 장담하지만 그럴 수가 없을 겁니다. 성도 여러분, 이상하지요? 그러면 왜 그렇게 될까요? 왜 지금은 저렇게 사랑하는데 그 사랑이 변하지 않고 지속되지 못할까요? 영원히 사랑한다고 해 놓고서 우리의 사랑은 왜 이렇게 쉽게 색이 바래 버리는 것일까요? 그것은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닙니다. 사랑이란 사실 그 대상에게서 얻는 만족과 비례하는 것인데, 시간이 흐르면서 상대방이 자꾸 그 만족도를 떨어뜨리는 일들을 하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실망 하고 익숙해지기 때문이 아니라 만족도가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부부지간만 그런가요? 아닙니다. 부모자식지간이나, 모든 인간관계가 마찬가지이고, 만족을 주는 모든 대상이 다 마찬가지입니다. 만족도가 떨어지는 만큼 그만큼 사랑의 크기과 깊이, 그리고 사랑이 주는 기쁨도 같이 사라지게 됩니다. 


사람은 자신에게 어떤 종류이든 만족을 주는 대상을 좋아합니다. 그것은 나쁜 것이 아닙니다. 원래 하나님께서 처음 인간을 만드실 때, 그렇게 만드셨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만족도가 떨어지면 버리고 떠나도 좋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래도 다해야 할 관계 안의 책임이 있고, 그것은 우리의 의무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일을 무슨 물건 사고 팔듯이 하면 안되지만 우리의 사랑은 원래 만족이 동기가 되어서 그 대상을 결정하도록 그렇게 되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래서 대상이 주는 만족이 크면 그 대상을 그만큼 더 사랑하게 되는 것이고, 최고의 만족을 주는 대상, 변함 없이 만족을 주는 대상이 있다면 사람은 그 대상을 가장 사랑해야 마땅합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이렇게 만드셨을까요? 왜 가장 큰 만족을 주는 대상을 가장 많이 사랑하도록 그렇게 만드셨을까요?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게 하기 위해서 입니다. 로마서를 보면 인간이 타락한 후에 인간에게 일어난 가장 큰 변화를 인간이 하나님을 몰라보게 되었다는 것으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자기 안에, 자연 속에, 그 자연이 움직여지는 모든 이치 속에 이미 하나님을 알려주는 충분한 증거들이 있는데, 죄를 지은 후에 인간은 그런 증거들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아볼 수 있는 능력이 심각하게 손상되었고, 또 일부러 그런 증거들을 거부하려는 경향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죄’라는 것은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을 부인하고 자신이 자기 하나님이 되어 살아가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아담이 타락하지 않았다면 아담의 삶은 어떠했을까요? 아담은 매순간순간 자신에게 주어지는 모든 것들이 전부 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라는 사실을 인식하며 살았을 것입니다. 자신이 들이 마시고 내뱉는 들숨과 날숨 한 번도 하나님이 계속되게 하시고 또 공기를 공급해 주시지 않으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식하면서 살았을 것이고, 이 세상 모든 것들 속에 깃들어 있는 하나님의 아름다움과 영광과 선하심을 보면서 즐거워했을 것입니다. 자기 옆에 잠들어 있는 하와를 보면서 그 안에서 은은히 스며 나오는 하나님의 형상을 보면서 즐거워 했을 것입니다. 또한 제한 없이, 그 어떤 장애물도 없이 하나님과 사귀면서 영혼까지 가득 채워 주시는 한 없는 만족을 누렸을 것입니다. 아마 이게 무슨 말인지 경험해 보신  분은 아실 것입니다. 


저도 이와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몇 차례 있었는데요. 제가 대학시절에 수련회에 참석했을 때 경험한 일입니다. 오전 예배를 마칠 즈음 기도 시간에 저는 하나님께서 저를 가득 채워주시는 경험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 채워주심 덕분에 그야 말로 더 필요한 것이 전혀 없다고 느껴질 정도였고 너무나 가슴이 벅차 터져 버릴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예배가 끝나고 밖으로 나왔습니다. 마치 주변의 풀 한 포기, 꽃 한 송이까지 저에게 말을 걸어오는 듯했습니다. 저는 낮은 언덕 기슭에 피어 있는 나리꽃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습니다. “너도 나처럼 기쁘니? 너도 나처럼 만족하니?”하고 말입니다. 그 나리꽃도 웃으면서 그렇다고 대답하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그 때, 우리가 들을 귀가 있고 볼 눈만 있다면 온 우주 만물 속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를 처음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에도 이런 비슷한 순간이 여러 번 있었습니다만, 제가 여러분에게 저의 이런 경험에 대해서 말씀드리는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가 가장 사랑하는 대상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배우자와 아이들일 것입니다. 그렇지만 어떻습니까? 아내가 있다고 외롭지 않고 허전하지 않습니까? 아이들이 옆에서 나를 기쁘게 해 준다고 해서 그것이 내 존재의 허무함까지 채워줍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이제 갓 결혼한 분들, 이제 막 아이를 낳은 부부들은 아직 잘 모를지 모르지만 앞으로 그런 경험을 점점 더 깊게 하게 될 것입니다. 제가 행복하게 사시는 여러분을 저주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게 인간입니다. 사람은 정말 역설적으로 가장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을 때, 가장 짙은 외로움을 느끼는 존재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일수록 그 사람과 나 사이에 더 이상 좁힐 수 없는 간격은 건널 수 없는 협곡처럼 깊고 넓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말씀드린 저의 경험, 그리고 돌이켜 보면 여러분도 한 번 쯤은 경험해 보았을 법한,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혼을 가득 채워 주시는 경험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두 가지를 알려 주시기 위해서 특별히 주어지는 것입니다. 첫째, 인간에게는 영혼이라는 것이 있으며 그 영혼이 만족되지 않으면 인간은 참 만족을 알 수 없다는 것. 둘째, 그런데 그 영혼을 만족시킬 수 있는 것은 하나님 밖에 없다는 것 말입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여러분들 모두에게 이런 경험을 주시기를 정말로 바라고 있습니다. 그래서, 항상 예배 중에 우리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 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게 비록 우리 중심의 기도라고 할지라도 우리 영혼은 그렇게 하나님으로 가득 채워지는 경험을 하지 않고는 정말로 하나님이 우리를 만족시키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확신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님은 우리 영혼만 만족시키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몸을 가지고 살아가는 우리의 생활 속에서도 우리를 만족시키시는 분이십니다. 성도들, 특히 남자 성도들 중에는 자신이 이미 가지고 있는 아버지 상 때문에 하나님을 제대로 믿지 못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예수를 믿기 시작하면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버지라는 것을 배우고 깨닫게 되는데, 때로 부정적인 자신의 아버지 상을 하나님께 덧입혀서 하나님을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저는 참 큰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저의 선친이 좋은 아버지였기 때문이 아닙니다. 저희 선친은 그렇게 좋은 아버지가 아니었습니다. 할아버지께서 한량처럼 사시다가 일찍 세상을 떠나시는 바람에 아버지 역할에 대해서 배울 기회가 없으셨고, 장남으로서 남은 가족의 지나친 기대와 사랑을 받으며 살았기 때문에 결혼을 하고 아버지가 되어서도 그다지 훌륭한 아버지 노릇을 못하셨습니다. 그래서 저에게는 좋은 아버지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언제인지 정확하지는 않지만 하나님이 아버지라는 사실을 생각하는데, 이 하나님은 인간 하나님과는 전혀 다른 하나님이시라는 것이 아주 강하게 다가왔습니다. 인간 아버지는 아무리 훌륭해도 결함과 일그러진 모습이 있게 마련이지만 하나님은 완전하신 분이시니 당연히 완전한 아버지이실 수 밖에 없다는 진리가 깨달아진 것입니다. 


그 때부터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정말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나에게 완전한 아버지가 생겼다니 정말 기쁘고 즐거웠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완전한 아버지가 계시니 저를 낳아주신 아버지에 대한 감정도 많이 누그러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완전하신 아버지라는 것을 깨닫고 나서 그 때부터 저는 이전보다 더 깊게 하나님을 신뢰하고 순종하는 삶을 살게 되었는데요. 그러면서 저는 하나님 안에서 이루어져 가는 인생, 하나님을 따라 살아가는 인생 속에서 아버지 하나님은 실수가 없으시다는 것을 계속해서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어려움도 있었고 부족함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게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안에서 살아가는 삶은 결국에는 그런 것들 덕분에 더욱 더 온전한 삶으로 빚어져 갔으니까요. 요즘도 저를 힘들게 하는 일들이 있을 때, 고민되고 갈등되는 일들이 다가올 때,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것 또한 언젠가는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내 삶을 더 온전하고 충만하게 만드는 재료가 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이 사실을 알고 나서 저는 개인적으로 예수 믿는 맛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부족하나마 정말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나의 영혼 뿐만 아니라 몸을 가지고 살아가는 나의 인생도 충분히 만족시키시는 분이십니다. 이것은 저만의 주관적인 경험이 아닙니다. 모든 세대의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안에서 경험한 일들이고 또 고백해온 일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이런 놀라운 은혜를 실제로 누리고 살아가는 성도들이 그리 많지 않은 것같습니다. 저는 이것이 바로 오늘 우리 신앙의 가장 큰 비극 중의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내 영혼도 삶도 가득 채워주시는 은혜를 경험하지 못하고 그 은혜 안에서 살아가지 못하고 있는 것 말입니다. 이것이 성도들의 삶을 무미건조하게 만들고 성도들의 영혼에서 만족과 기쁨을 빼앗아 가고 있고, 그래서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지 못하게 만들고 있으니까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는 실제적인 만족도 필요하고 또 영적인 만족도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 두가지 필요를 변함 없이 그리고 온전히 만족시키는 것은 우리 아버지 하나님 한 분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다른 것이 아니라 나를 사랑하라는 요구를 하신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성도 여러분.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향해 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실 자격이 있으시지요?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은 전혀 억지스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아시겠지요? 그리고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우리 본성에 너무나 알맞는 것이라는 것도 아시겠지요? 


그러면 이제 마지막으로 처음에 말씀드렸던 문제,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왜 다른 요구 다 놓아두고 굳이 나를 사랑하라고 하셨는지 그 문제를 살펴 보겠습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믿는 사람들에게 하시는 요구들은 그것을 따라 살기가 정말 쉽지가 않습니다.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돈이나 성공, 안락한 삶이 아니라 하나님을 여러분의 삶의 목적으로 삼아야 한다고 말씀드릴 때, 하나님만 의지하며 살아야 한다고 말씀드릴 때, 여러분 중에는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아서 제가 드리는 말씀에 애써 무관심한 척 하려는 분들이 계신다는 것과 그런 분들은 여전히 그렇게 하기 싫어하고 계신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게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더라도 말이지요. 저는 그런 분들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옳은 것이라고 하더라도 억지로 되는 것은 없으니까요.  


얼마 전에 우연히 텔레비젼에서 성인 남자들의 취미생활에 대한 프로그램을 시청했습니다. 그 날은 미국 영화인 스타워즈 시리즈를 좋아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방영되었는데요. 스타워즈를 좋아하는 사람들 중에서는 피규어라고 부르는 영화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의 인형이나 동상을 모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제 기억에 남는 것은 두 사람입니다. 한 사람은 아얘 스타워즈 피규어 박물관을 만들었습니다. 건물 가격은 따로 하구요. 그 안에 있는 인형들의 가격만 5억이랍니다. 미쳤다고 하시겠지만 이건 일도 아닙니다. 또 한 사람은 그냥 자기 집에 실제 크기의 인형들만 수집하고 있는 사람이 있었는데요. 이 사람은 한 술 더 떠서 자기가 아얘 그런 인형들을 주문제작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진행자가 그렇게 하는데 얼마나 들었느냐고 하니까 그렇게 주문제작하는 데에만 10억이 들었다고 했습니다. 이 사람은 정말 더 미친 것 같지요? 맞습니다. 어떤 의미로건 미치지 않고서야 그런 별 것 아닌 것에 그런 거액을 투자할 수가 없을 테니까요. 그렇다면 이 사람들이 누가 그렇게 해야 한다고 누가 시켜서 억지로 한 일일까요? 아닙니다. 너무 좋아서 너무 기뻐하면서 한 것입니다. 그걸 하나 하나 모을 때마다 세상을 가진 큰 만족을 느끼면서 말이지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나만 믿고 나에게만 순종해야 한다’는 삶과 신앙을 위한 원칙과 법칙들을 주시고 그대로 살아야 한다고 하시면서 그 모든 것들을 ‘나를 사랑하라’는 말로 요약해 주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아무리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도 하나님만 섬기고 하나님께만 순종하는 것은 쉽게 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을 정말로 사랑하게 되면 이야기가 달라 집니다. 그렇게 되면 그 사람은 이전에는 부담스럽기만 했던 요구들을 기쁘고 즐겁게 행할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언제 진짜로 하나님만 섬기고 하나님의 말씀에만 순종하면서도 그 일을 기뻐하고 즐거워 할 수 있을까요? 그게 돈이든, 성공이든, 안락한 삶이든 그것을 목적으로 삼아서는  안된다는 말씀, 하나님만이 우리 삶의 목적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을 듣고서도 기뻐할 수 있을까요?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게 될 때입니다. 하나님을 기쁘게 사랑하고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랑의 기쁨이 우리 삶과 영혼을 가득 채우게 될 때입니다. 


우리의 삶과 영혼을 모두 그리고 언제나 만족시킬 수 있는 것은 하나님 한 분 밖에 없습니다. 뿐만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 지를 증명해 보이셨습니다. 우리가 우리 영혼과 우리 삶에 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들을 생각할 때,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하고 깊이 묵상할 때, 우리 영혼은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그리고 하나님이 얼마나 사랑스러우신 분이신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그 분을 사랑하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리까지 못 가는 이유는, 이런 하나님 우리를 위해서 생명을 내어 주시고, 우리의 삶과 영혼을 만족시키시는 하나님을 생각하고 묵상하는 일에 대해 너무 무관심하고 게으르기 때문입니다. 별 만족도 주지 못하는 것들, 계속해서 우리를 불안하게 만드는 것들에 대해서는 그렇게 많은 시간을 쏟아 붓고 고민하고 생각하면서, 정작 우리의 모든 것 되시고, 그래서 우리를 만족하게 하시는 우리 하나님에 대해서는 거의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위대한 일, 큰 일 하지 못해도 우리의 믿음이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되는 그 자리까지 가게 하는 일만큼은 꼭 해야 합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온전한 사랑을 받기에 합당하신 분이십니다. 그럴 자격이 있으신 분이십니다. 하나님만이 우리를 참으로 만족시켜 주시기 때문입니다. 이제 함께 하나님을 사랑하십시다. 모두 함께 그 자리까지 가 봅시다. 그러면 정말 좋겠습니다. 


가장 사랑스러우신 분, 그래서 제대로 알면 사랑할 수 밖에 없는 분. 우리의 여호와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는 우리가 되어서 사랑의 기쁨으로 거룩한 순종의 길을 가는 우리들, 그 은혜 안에 항상 거하는 우리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