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현교회 설교,강의/주일예배

2015.11.08. 주일오전 - 내가... 옛적에...너희를(여호수아 36)

   

 

20161108SM (#1).mp3.zip

 

 

 

    성경본문 : 여호수아 24장 1-13절

 

   ‘하나님만 섬기라, 하나님께만 순종하라, 그리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렇게 백성들의 지도자들에게 꼭 해주어야 할 이야기를 다 마치고 나서, 여호수아는 이번에는 세겜으로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과 하나님 사이의 언약을 새롭게 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원래 하나님의 언약은 영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언약은 한 번 맺으면 또 다시 반복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과 연약을 맺는 사람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너무나 쉽게 변하고 그 언약을 잊어버립니다. 그래서 언약은 중요한 계기마다 다시 확인되어야 했고 또 다시 맺어져야 했습니다. 그래야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시 한 번 언약에 신실한 하나님의 백성의 자리로 되돌아 갈 수 있었습니다.

   오늘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우리들의 삶에도 이런 계기들이 꼭 필요합니다. 우리가 살다가 보면 우리는 우리 삶을 흔들려고 하는 일들을 만나거나 혹은 우리가 아주 중요한 계기나 분수령이라고 부를 만한 그런 순간을 만나게 됩니다. 요즘 제가 비염 때문에 치료를 받고 있는데, 다시 약을 지으려고 한의원에 갔더니 원장 되시는 집사님이 지금 저의 몸 상태를 조목 조목 이야기하면서 이제는 늙어가는 거라고 했습니다. 여기가 이렇게 되고, 저기가 저렇게 되고, 이런 저런 증상이 나타나는 것은 노화의 증상이라고 말입니다. 예전 같으면 그 이야기가 전혀 공감이 되지 않았을 텐데, 이번에는 이상하게도 자연스럽게 그 진단이 받아들여 졌습니다. 내년이면 저도 50이 되고 그러면 반 백년을 산 것인데, 그렇게 보면 이제 저도 늙는다는 말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그런 시기가 온 것이지요. 그래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제 정말 왕성하게 움직이면서 살며 일할 수 있는 날이 얼마 남지 않았구나. 목회도 15년 남짓이면 끝이 날 것이고, 그렇다면 이제 조금 더 제대로 열심히 살아야 하겠다, 이제까지와는 조금 다르게 주님의 일을 해야 하겠다 하고 말입니다. 늙는다는 매우 기분나쁜 이야기가 제 삶과 사역을 되돌아 볼 기회를 준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을 할 때, 제 마음에 떠오른 말은 이상하게도 ‘변화’라는 말이 아니라 ‘제 자리’라는 말이었습니다. 더욱 더 분명하게 목사로서의 제 자리,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제 자리로 되돌아 가야 하고 그 자리를 지켜야 한다는 것 말이지요. 사실 요근래에 저는 오늘 다 설명드리지는 못하지만 내면적으로는 굉장히 힘든 시기를 보냈습니다. 우리 교회에서 사역한 후 3년이 지나면서 저를 둘러싸고 있는 많은 상황들이 제 의지와는 상관 없이 급격하게 변동되고 또 조금은 흐트러지는 것처럼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일을 겪으면서도 결국 얻게 된 해답 또한 ‘제 자리’라는 대답이었고, 또 ‘중심’이라는 대답이었습니다. 그래서 많이 힘들기는 했지만 굉장히 감사했습니다. 그 흔들림 덕분에 오히려 흐트러진 중심을 바로 잡고 제 자리로 갈 수 있는 기회를 얻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혹시 여러분 중에서 삶과 주변이, 그리고 마음이 여러분 스스로도 어쩔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요동치고 흔들리고 계시는 그런 분들이 계시지는 않습니까? 애써 아니라고, 그럴 리가 없다고 고개를 흔들며 마음을 다잡아 보지만 여전히 여러분을 흔들고 있는 일들과 맞닥뜨리고 있지는 않으십니까? 우리는 우리의 삶에 그런 일이 왜 일어나는지 그 이유를 모두 다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아주 먼 훗날에야 그 이유들 중에서 하나나 두 가지를 깨닫고 “아 그 때 그래서 그랬구나” 할 수 있을 뿐이지요. 그렇지만 그래도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런 흔들림들은 우리를 흔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더 확실한 나의 자리, 더 분명한 중심으로 다가오라는 하나님의 부름이고, 나와 너 사이에 있는 언약을 새롭게 하자고 하시는 하나님의 초청장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에 외로움이 찾아오는 것이나, 갑자기 허무함이나 무의미함, 짜증 같은 것들이 몰려오는 것, 또 이유 없는 불안함이 엄습하는 것 또한 우연이 아닙니다. 모두가 다 우리를 잠시 흔들어서 더 온전한 제자리, 더 온전한 중심으로 다가오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사인입니다. 지금 여러분이 이런 사인을 받고 계시다면 그것을 절대로 그냥 흘려 버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꼭 선용하십시오. 그 초정장을 들고 하나님이 계시는 지성소, 여러분의 기도의 골방으로 들어가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거기서 하나님이 나를 부르시는 ‘제 자리’, 내가 한 발짝 더 다가가야 할 ‘중심’이 어디인지 다시 찾으시고 그리로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그 흔들림을 계기로 삼아서 모든 것의 중심에 계시는 하나님께로 한 발 더 나아가고, 그 분이 우리를 부르시는 제 자리로 돌아간다면 오히려 여러분은 이전보다 더 견고하고 분명한 자리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과의 언약을 새롭게 하기 위해서 백성들을 모두 모아 놓은 여호수아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하라고 하신 말씀을 전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백성들에게 전하라고 하신 말씀은 다른 내용이 아니라 아브라함부터 지금 가나안 정복이 얼추 끝난 시기까지 그러니까 거의 700년 동안의 이스라엘의 역사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그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옛적에 너희의 조상들 곧 아브라함의 아버지 나홀의 아버지 데라가 강 저쪽에 거주하여 다른 신들을 섬겼으나 내가 너희의 조상 아브라함을 강 서쪽에서 이끌어내어…” 이스라엘의 실질적인 조상은 아브라함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처음에 대한 야이기를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대신 아브라함의 아버지인 데라로 부터 시작했는데요. 그 데라에 대한 설명은 ‘데라가 강 저쪽에 거주하여 다른 신들을 섬겼다’는 것입니다. 데라는 하나님을 몰랐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들을 하나님으로 알고 섬겼습니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그의 아들이었던 아브라함이 먼저 하나님을 알고 또 하나님을 믿었을 리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아브라함을 거기서 불러 내셨다고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무슨 뜻입니까? 아브라함이 이스라엘의 조상이 된 것, 그리고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택과 은혜 덕분이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는 출발부터 그랬습니다.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우상을 숭배하고 있는 아브라함을 불러 내셔서 그로부터 이스라엘이 생겨나게 하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이스라엘은 그 출발부터 은혜로 시작되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의 씨를 번성하게 하려고 그에게 이삭을 주었으며 이삭에게는 야곱과 에서를 주었고…”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된 이스라엘의 역사가 계속 이어져 가면서 그 안에서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져 갈 수 있었던 것은 그저 그렇게 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그리고 아브라함의 자녀들에게 그 역사를 이루어 가고, 또 하나님의 언약을 담는 그릇들, 그러니까 후손들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은 그 자손들을 보면서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하나님의 언약이 깨어지지 않고 계속되고 있다는 믿음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애굽에서 빠져 나올 때,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아론이라는 지도자를 보내셔서 400년 넘는 세월을 애굽에서 종으로 살았기 때문에 이제는 자유보다는 종으로 사는 게 더 편해져 버린 이스라엘 백성들을 일깨우시고 또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 후에 광야를 여행할 때도 하나님은 가만히 계시지 않으셨습니다. 아무 것도 가지고 나오지 않은 그 많은 최소 150만명이나 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40년 동안 단 한끼도 굶지 않게 해 주셨고, 옷도 떨어지지 않게 해 주셨고, 또 신발도 닳지 않게 해 주셨습니다. 광야에서 만난 강력한 대적들도 대신 물리쳐 주셨구요.

   이런 은혜는 요단강을 건너 와서도 계속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땅을 차지하게 하시기 위해서 이미 거기 살고 있던 원주민들을 이스라엘 백성들의 손에 넘겨 주셨습니다. 물론 그렇게 하신 이유는 단순이 이스라엘을 편애하셨기 때문만은 아니고 그들이 그만큼 악한 상태로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결국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약속의 땅에서 복된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과거였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이 야이기를 처음부터 들려 주셨던 것입니다.

   얼마 전에 우리가 잘 아는 인터불고 호텔의 권영호 회장에 대한 기사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 분은 검소함으로 너무나 잘 알려진 분이신데요. 인터불고 그룹은 스페인 회사이지만 권회장님이 설립하신 기업입니다. 인터불고 호텔은 이 그룹에 속한 한 회사입니다. 기사에 보니 인터불고 그룹 총 자산은 10조원이나 된답니다. 그런데, 이 분은 놀랍게도 프라이드를 손수 몰고 다닙니다. 헤진 남방도 세탁소에서 고쳐 입구요. 그런데 그 분이 이렇게 하시는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려고 하는 쇼가 아니라 원래 그만큼 검소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만약 이 분이 그저 그렇게 검소하고 그래서 성공하신 분이라면 별로 특별할 게 없을 것입니다. 그래 봐야 자기를 위한 일이었으니까요. 그런데, 이 분은 그렇게 아낀 것을 사회에 환원하고 있습니다. 자료를 찾아보니 지금까지 한국에 3천억원이 넘는 투자를 했고, 2010년을 기준으로 매년 5억원이 넘는 금액을 장학금으로 기부하고, 교육 기자재를 구입해서 기부하는 등 10년에 걸쳐서 100억이 넘는 금액을 사회에 환원했다고 되어 있었습니다. 권회장님은 경북 울진의 작은 어촌에서 가난하게 태어났고 그 가난이 너무 싫어서 무작정 원양어선을 탔고, 그렇게 모은 돈으로 폐선을 한 척 구입해서 원양어업에 뛰어들었는데 그 때부터 아끼고 또 아끼면서 차분히 쌓아올린 사업이 오늘에 이른 것입니다. 기자가 권회장님에게 물었습니다. 왜 그렇게 아껴서 모두 사회에 환원하느냐고 말이지요. 그랬더니 자신도 너무 가난하게 살아봤고 또 이렇게 성공하게 된 것이 혼자 힘으로 이렇게 된 것이 아니고 함께 일해 준 사람들, 그리고 자신이 살아가는 이 세상 덕분인데, 그렇다면 사회에 되돌려 주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닌가라고 반문했습니다. 가난이 주는 어려움을 알고 또 다른 사람들과 사회 덕분에 성공할 수 있었다고 믿는 그 분에게 그것을 사회에 되돌려 주는 일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요, 성도 여러분. 그렇다면 가난했다가 성공한 모든 사람들이 다 이렇게 생각하고 이렇게 살아가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 분들도 가난이 뭔지를 알고 또 다른 사람들과 또 이 세상 덕분에 성공했으니까요. 그렇지만 실상은 그렇게 하는 사람이 정말 드뭅니다. 그렇다면 왜 이런 차이가 생겨날까요? 그것은 무엇보다도 성품과 사고방식, 그리고 가치관에서 차이가 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이유기 또 한 가지 있습니다. 권 회장님은 자신의 과거를 잊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얼마나 가난하게 살았는지를 잊지 않았습니다. 또 자신이 그런 큰 성공을 이룬 것이 자기 힘이 아니라 모두가 다 자신을 도와주고 자신과 함께 땀흘린 사람들과 자신이 살고 있는 이 세상 덕분이라는 것을 잊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기억에 걸맞는 삶을 살아내려고 애썼던 것입니다. 그 분의 그 향기로운 삶은 바로 그런 애씀의 열매였고 말이지요.

   사람의 과거가 별 것 아닌 것 같아도, 과거는 그 사람의 전부입니다. 그 사람의 지금을 있게 한 것이 바로 과거이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전부는 아니지만 어떤 사람이 잊으면 안되는 자신의 과거를 잊게 되면 그 사람의 삶이 달라지고 됨됨이가 달라지게 됩니다. 뿐만 아닙니다. 사람은 반드시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가게 되어 있는데, 만약 어떤 사람이 자신과 관계를 맺고 있었던 특정한 사람이 자신에게 베푼 호의와 사랑을 잊게 되면 그 사람과의 관계에 어울리는 합당한 삶을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새롭게 언약을 맺기 전에 구구절절히 과거 이야기를 하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 언약은 이미 있는 것을 새롭게 하는 것이지만, 또한 미래를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앞으로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어디에 어떻게 자리매김하며 살아야 하는 지를 분명하게 하기 위한 것이니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언약을 통해서 하나님만 섬기고 하나님께만 순종하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자리로 되돌아 가야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결정을 내리는 것은 그저 내가 지금부터 그렇게 할꺼야 하는 결단만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어떤 사람의 미래의 삶의 모습을 결정하는 것은 지금까지 지나온 과거에 대한 기억과 그 기억에 어울리는 삶을 살아가려는 그 사람의 의지에서 나오는 것이니까요.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는 독특한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신앙이 항상 과거를 기초로 해서 미래로 나아간다는 것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좋은 신앙, 굳건한 신앙을 가지기를 원합니다. 그러면서도 신앙이 자신이 바라는 수준에 이르기 전에 좌절하고 포기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많이 기도하고, 또 그런 신앙을 추구해서 겨우 어느 정도 믿음이 견고해졌다고 생각할 때, 우리 삶의 옆구리를 치고 들어오는 이런 저런 어려움의 파도들이 그 믿음을 휘청거리게 하고 넘어 뜨립니다. 그런 파도가 밀려오기 전에는 그래도 믿음이 많이 단단해 졌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파도를 맞고 보니 이전과 별로 다름이 없습니다. 예전처럼 휘청거리고 예전처럼 넘어집니다. 그렇게 믿음의 좌절을 경험합니다. 우리가 살면서 이런 일을 거듭해서 경험하게 되는 것은 무엇보다도 우리 믿음이 완전할 수가 없기 때문이겠지만, 그 보다는 더 중요한 이유는 우리가 우리 믿음을 세워나가는데 있어서 잘못된 방법을 사용하고 있는데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향한 견고한 신뢰는 마치 단단한 기초 위에 세워지는 든든한 건축물과도 같습니다. 그런데, 그 단단한 기초는 바로 과거에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에 대한 기억입니다. 그 기억 위에다 믿음을 쌓아 올  

려야만 믿음은 비로소 견고해 질 수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의 과거 역사가 그렇듯이 우리도 우리 신앙의 과거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교회 공동체에게도 있고, 또 성도 개인에게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기억이라는 모습으로 우리 안에 담겨져 있습니다. 우리 중에서 안 믿어지는 예수님 믿어보려고 끙끙대고 도를 닦아서 예수님을 믿게 된 사람이 없습니다. 믿고 나서 믿음을 지금까지 믿음을 지킬 수 있었던 것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지내놓고 보면 다 하나님의 은혜이지요. 삶의 고비 고비마다 하나님께서 내 믿음을 붙들어 주셨고, 또 때로는 정반대로 너무 편해서 하나님을 믿기 어려울 때도 믿음이 사라지지 않도록 지켜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믿음을 지켰다는 것도 그렇지만 믿음이 자라났다는 것은 정말로 하나님의 은혜 덕분입니다. 우리의 삶은 그렇지 않습니까? 얼마나 자주 우리 삶은 무너질 위기에 처했었습니까? 그러나 삶이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위기 다음에는 더 단단해 졌습니다. 도저히 이렇게는 살 수 없다고 생각된 적도 적지 않았는데 지금까지 살아왔고 또 지금도 잘 살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신지 몰라도 저는 제 삶이 이렇게 서 있는 것 자체가 기적이라고 확신합니다. 스스로 너무 의지가 약해서 의지 박약아라고 불렀던 제가 수많은 격랑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침몰하지 않고 서 있으니 말입니다. 저는 스스로의 의지로 버틸 수가 없었습니다. 사실 그러려고 해 보지도 않았습니다. 저는 제 의지가 얼마나 약한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으니까요. 제가 한 일이라고는 그저 기도하는 일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면서 제가 저의 삶 속에서 경험해 온 대표적인 하나님의 은혜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 하나님은 거의 언제나 미리 저의 믿음을 준비시켜 놓으시고는 저에게 충격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렇지 않을 때는 그 일이 진행되는 중간에 그 일을 넉넉히 넘어갈 수 있도록 은혜로 마음을 지켜 주셨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값진 깨달음들을 덤으로 주시면서 말이지요.

   저에게 미래에 대한 걱정이 생길 때마다, 그리고 이런 저런 어려움이 닥쳐 올 때마다 제가 생각하는 것은 바로 저의 현재나 미래가 아니라 과거입니다. 정확하게는 과거에 저에게 베풀어 주셨던 은혜이지요. 그러면 이내 마음에 믿음이 생깁니다. 이제까지 50년을 똑같이 해 주셨던 하나님께서 갑자기 태도를 바꿔서 ‘이번에는 속았지?’라고 저를 놀리실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한 번 되돌아 보시기 바랍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이 여러분의 인생에서 실수하신 것이 있습니까? 여러분을 실망시키신 적이 있으셨습니까? 꼭 필요한데, 없으면 절대로 안되는데 그것을 주지 않으신 것이 있습니까? 여러분을 나몰라라 하시고, 여러분을 버려두신 적이 있으십니까? 그 분은 놀랍게도 여러분의 마음의 미동이나 생각의 방황까지도 헤아리시고 그것 까지 붙들어 주시지 않으셨습니까? 그 덕분에 지금의 여러분이 있는 것이 아닙니까?   

   오늘 본문 말씀은 사실 주욱 읽어내려가기가 상당히 불편합니다. 그것은 계속해서 귀찮을 정도로 반복되며 등장하는 말들 때문인데요. 그 말은 바로 “내가 너희 조상 아브라함을…”, “내가 너희를…”, “내가 너희 조상들을…”, “나는 너희를…”, “내가 너희의 손에…”, “내가 너희 앞에…”라는 말들입니다. 제가 세어보니 ‘나'라는 단어가 15번, 그리고 ‘너희'라는 단어가 ‘27번’이나 나옵니다. 본문이 13절 밖에 안된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이건 굉장한 것이고 또한 의도적인 것이라고 밖에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비록 하나님의 말씀이 이스라엘의 과거 역사를 다시 들려주고 있기는 하지만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진짜로 강조하고 싶어하셨던 것이 따로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진짜로 다시 알게 하고 싶어하셨던 것은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서 하셨던 일들 자체가 아닙니다. 그 분이 사용하신 능력, 그 분이 행하신 기적, 이런 것들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진짜로 말씀해 주고 싶으셨던 것은 그 모든 일들이 바로 “내가 너희에게, 너희를 위해서” 한 일들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기억 속에 저장되어 있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기억들은 단순히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들’에 대한 기억들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나 사이에 일어났던 일들, 아니 하나님께서 ‘나에게, 나를 위해서’ 해 주셨던 일들과 베풀어 주신 은혜에 대한 기억입니다. 그 기억의 중심에는 나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셨던 ‘하나님’이 계시고, 또 변함 없이 그 은혜 안에서 살아왔던 ‘내’가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신앙역사를 통해서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할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역사의 중요한 고비 고비마다 이스라엘을 다시 부르시고 그들과 다시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들을 그들이 있어야 할 제 자리로 되돌려 놓으셨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의 크고 작은 고비마다 그 고비들을 통해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그리고는 우리에게 다시 제 자리로, 믿음의 자리로 돌아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동안 ‘내가 너에게 너를 위해서 해 주었던 일들과 베풀어 준 은혜를 기억하고 나와 다시 언약을 맺자고 더 단단하게 약속하자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신앙의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그 역사를 통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에게 그렇게 해 주었잖아? 너를 위해서 그 일을 해 주었던 것은 바로 나잖아? 너는 잘 몰랐겠지만 그 때 내가 너를 붙들어 주고 인도해 준 것이잖아. 그 때 너를 건진 것도 나였고, 네가 완전히 넘어졌을 때 너를 일으킨 것도 나 아니니? 너는 정말로 그것이 기억나지 않니?”하고 말입니다.

   역사를 기억하지 않는 민족의 미래는 없다고들 합니다. 우리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와 ‘하나님' 그리고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있었던 과거의 역사를 기억하지 않으면 우리 믿음의 미래도 연약해 지고 불안해 질 수 밖에 없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나의 하나님께서 나에게 베풀어 주신 과거의 은혜를 기억하면서 하나님과 새 언약을 맺는 자리로 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며 사는 제 자리, 하나님이 중심이 되시는 그 자리로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내 삶의 흔들림과 떨림을 통해 우리를 그렇게 복된 자리로 다시 부르고 계십니다. 꼭 그 부르심에 응답하셔서 새로운 언약으로 주님과 여러분을 묶어 보시기 바랍니다. 더 견고한 믿음의 자리, 지금을 살게 하고 또 미래를 살게 할 더 든든한 믿음을 준비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 주님께서 앞으로도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복되고 신실한 믿음의 역사가 기록되어져 가게 해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