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현교회 설교,강의/주일오후

2015.11.29. 전교인 기도회 - 소 모는 막대기로(사사기 14)



20151129SE (#1).mp3.zip





본문 : 사사기 3장 31절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이 큰 그릇으로 평가받길 원하고, 자녀들도 큰 그릇으로 자라주길 원합니다.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큰 그릇으로 태어나서 크게 성장해서 소위 큰 물에서 노는, 큰 일을 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하지요. 그러나, 우리의 바램이 어떻든지 간에 모두가 큰 그릇으로 태어날 수도 없고, 또 큰 그릇으로 키워질 수 없습니다. 시험을 쳤는데, 100점 만점에 97점을 맞았다면 정말 잘 한 것입니다. 많이 칭찬해 줘야 합니다. 그런데, 100명이 시험을 친 중에서 99명이 100점이고 1명이 97점이라면, 99점이 아무리 잘했어도 그 아이는 꼴등입니다. 사람들이 어떤 사람의 그릇의 크기를 평가할 때 사용하는 기준은 시험등수를 매기는 것 같은 상대적인 기준입니다. 그 사람의 원래 크기로 그 사람을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어떻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9장 21절은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고 기록하고 있고, 디모데 후서 2장 20절을 보면 “큰 집에는 금과 은의 그릇이 있을 뿐 아니요 나무와 질그릇도 있어 귀히 쓰는 것도 있고 천히 쓰는 것도 있나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두 구절은 분명히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는 구절입니다. 그릇은 그릇마다 각자 쓰이는 데가 다르고, 담기는 내용물의 가치도 다르듯이, 사람도 사람마다 각자 자기가 쓰일 데가 있는데, 그것을 정하는 것은 하나님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말하는 구절들입니다. 만약 그릇이 생각이 있다면, 자신이 귀중한 것을 내용물로 담고, 귀한 대접을 받는 귀한 그릇이 되고 싶어할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릇이 그런 바램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그것을 정하는 것은 그 그릇을 사용하는 사람이지 그릇 자신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큰 그릇이 되어 크게 쓰이고, 그에 걸맞는 대접을 받으며 살기를 원해도 신앙적인 입장에서 보면, 그것을 정하는 분은 하나님이고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사용하시는 그 곳에서 용도에 맞게 사용될 수 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인간적인 차원에서 보면 매우 부당한 것 같습니다. 차별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입장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필요한 일의 분야가 다르다면, 하나님께서는 그 각각의 분야에 따라 사람에게 다른 능력을 주시고, 다르게 사용하실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생각하듯이 크게 쓰이고 귀하게 쓰이는 것이 무조건 좋은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맡겨진 일을 제대로 하면서 우리 그릇의 크기와 역할에 알맞게 살아가는 것이 우리 자신에게도 행복한 일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도 가장 영광스러운 일이 될 것이고 말이지요. 


 “ 에훗 후에는 아낫의 아들 삼갈이 있어 소 모는 막대기로 블레셋 사람 육백 명을 죽였고 그도 이스라엘을 구원하였더라” 삼갈은 이스라엘의 삼대 사사였는데요. 놀랍게도 이것이 세번째 사사에 대해서 성경이 들려주는 이야기의 전부입니다. 학자들은 아낫이 전쟁의 신 아나돗일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삼갈이라는 이름은 이스라엘식의 이름이 아닙니다. 이 두 가지를 종합해 보면 삼갈은 이방인의 아들이거나 아니면 이방신 아나돗을 섬기다가 여호와께로 돌아온 사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어떻게 보든지 이스라엘 안에서 그와 그의 집안은 결코 주류가 될 수는 없었습니다. 게다가 그가 사용한 무기는 소모는 막대였습니다. 이것은 그의 직업이 목동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직업도 보잘 것 없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삼갈은 사람들이 인정하는 큰 그릇이 아니었습니다. 아무도 관심갖지 않는 이방인, 그것도 들에서 짐승들과 살아가는 목동이었습니다. 아마 삼갈 자신도 스스로를 큰 사람으로 여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실 그의 업적 또한 다른 사사들과 비교하면 너무 보잘 것 없습니다. 바로 전에 등장하는 에훗은 모압군대 만 명을 죽이고 승리를 따냈습니다. 바로 삼갈 다음에 등장하는 여사사 드보라는 시스라의 군대와 철병거 900대를 전멸시키고 승리했습니다. 그런데, 중간에 끼어있는 삼갈은 블레셋 사람 600명을 죽였을 뿐입니다. 그러나, 어떻습니까? 비록 그의 출신이나 신분이나 그리고 직업도 보잘 것이 없었고, 그의 업적도 다른 사사들에 비하면 형편 없지만, 그래도 그는 이스라엘을 구한 구원자가 되었고, 사사로 이스라엘을 다스렸습니다. 사람의 눈으로 보기에는 어떻든지 간에 성경은 그를 그렇게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을 보면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는 겨우 블레셋 사람 600명을 구하고 이스라엘을 구한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블레셋에 군사가 600명 밖에 없겠습니까? 사사기 3장 3절을 보면 ‘블레셋의 다섯 방백’이 나옵니다. 블레셋이 적어도 이 다섯 개 나라의 동맹체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중에서 600명을 죽였다고 어찌 블레셋이 이스라엘에게 패배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겁을 먹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600명을 잃고 삼갈이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동안 이스라엘을 침공하지 못했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것이 하나님께서 삼갈을 통해 하신 놀라운 일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은 능력이 대단해서 크고 위대한 성과를 내는 사람이나 혹은 그런 일들을 통해서 이루어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무슨 일을 해도 될 수 있는대로 크게 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하나님은 작은 사람이 이룬 작은 일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크게 일할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면, 삼갈이 소모는 막대기로 600명을 죽였을 때, 호전적인 블레셋인들은 오히려 자존심이 상해서 더욱 더 기세등등하게 달려들어야 정상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작은 승리를 사용해서 블레셋 전체를 공포로 마비시키셨던 것입니다. 


위에서 잠깐 그릇 이야기를 드렸습니다. 하나님께는 큰 그릇도 필요하고 작은 그릇도 필요합니다. 큰 그릇에는 큰 것을 담으실 것입니다. 작은 그릇에는 작은 것을 담으실 것입니다. 담으시면 담으시는 대로 그릇은 그것을 담기만 하면 됩니다. 우리는 작은 그릇이 되고, 작은 것을 담겨지는 것을 별로 내켜 하지 않고 큰 그릇이 되어 큰 것을 담는 것을 좋아하지만, 삼갈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담겨지는 것의 크기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담으시는 것을 담을 수 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알려 줍니다. 삼갈은요 그저 삼갈이기만 하면 됩니다. 삼갈이 옷니엘이나 삼손이 될 수 없고, 그렇게 될 필요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삼갈을 삼손이 되라고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삼갈이 삼갈의 소임을 다했을 때, 하나님은 그것을 사용하셔서 이스라엘을 구하는 완전한 도구로 사용하셨습니다. 작은 사람의 작은 일이 하나님의 큰 일이 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사람은 상대평가를 해도 하나님은 절대평가를 하십니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와 다른 사람을 비교하시면서 왜 네가 저 사람보다 못하냐고 추궁하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단지 우리에게 우리 자리를 지키며, 우리에게 맡겨진 몫에 충실했느냐고 물으실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몫을 다하면 나머지는 하나님께서 다 하십니다. 이것이 성도가 꼭 알아야 하고 또 삶에 적용해야 할 가장 중요한 진리입니다. 실제로는 이것을 믿지 못하고 삶으로 옮겨내지 못해서 하나님의 일을 하다가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어기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나 사회, 가정에서 우리의 역할이 때로 우리에게 별 것 아니라고 여기질 수도 있습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칭찬해 주지 않는 일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쓰시는 일은 바로 그런 일들입니다. 하나님은 능력이 없는 분이 아닙니다. 그 분은 그 분 혼자의 힘으로도 그분이 원하는 모든 일을 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일에 우리를 사용하시는 것은 그 일에 우리의 힘이 꼭 필요해서라기 보다는 그 승리의 기쁨과 영광을 당신의 자녀들과 나누고 싶어하시는 아버지의 풍성한 마음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뭔가 큰 일을 하려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스스로 크게 되려고 할 필요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삼손을 만드신다면, 나는 삼손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나에게 삼갈이 될 것을 요구하신다면 삼갈이 되어야 합니다. 삼갈로 만족하고 삼갈의 자리에 머물러야 합니다.  


그런데요. 31절 마지막 부분을 보면 삼갈에 대해서 “그가 이스라엘을 구원하였더라”라고 말하지 않고 “그도 이스라엘을 구원하였더라”라고 말합니다. 별로 좋은 평가는 아닌 것이 분명합니다. 이야기인 즉 삼갈같은 사람도 그런 역할을 했다는 뜻이니까요. 그렇다면 왜 성경은 삼갈이 이스라엘의 구원자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마지막에 이런 부정적인 평가를 덧붙여 놓았을까요? 그것은 다른 곳에 있는 삼갈에 대한 이야기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사사기에는 삼갈에 대한 기록이 두 번 나옵니다. 여기 3장 31절과 5장 6절에 나옵니다. 그런데 5장 6절은 삼갈에 대해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낫의 아들 삼갈의 날에 또는 야엘의 날에는 대로가 비었고 길의 행인들은 오솔길로 다녔도다 이스라엘에는 마을 사람들이 그쳤으니 나 드보라가 일어나 이스라엘의 어머니가 되기까지 그쳤도다” 그가 사사로 다스리던 때에 사람들은 넓은 길로 다니지 못하고 오솔길로 숨어 다녔습니다. 마을에서 사람들을 찾아보기가 힘들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이런 모양이 되었던 것은 삼갈이 이스라엘을 다스릴 때, 하나님의 뜻대로가 아니라 자기 마음대로 권력을 휘두르며 다스렸기 때문입니다.  


삼갈의 처음과 나중은 너무 달랐습니다. 작은 사람으로, 작은 일을 통해서 하나님의 큰 일을 이루는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시작했지만 나중에는 교만하여 져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보고 인도해야 할 이스라엘을 자기 욕심을 채우는 도구로 사용했던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자기 그릇에 만족하라고 하는 말을 별로 탐탁치 않아 하실 수도 있습니다. 또 그릇은 크게 해야 하는 것이 아니냐고 물으실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을 섬기는 우리가 항상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는 크게 쓰이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제대로 바르게 쓰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크게 쓰시려고 하신다면 크게 쓰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큰 일이냐, 작은 일이냐는 전적으로 그 분의 선택에 달려있습니다. 그런데, 귀하고 천하게 쓰이는 것은 다릅니다. 앞에서 인용한 디모데 후서 2장 20절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큰 집에는 금과 은의 그릇이 있을 뿐 아니요 나무와 질그릇도 있어 귀히 쓰는 것도 있고 천히 쓰는 것도 있나니” 하나님의 집에는 귀히 쓰는 그릇도 있고, 천히 쓰는 그릇도 있습니다. 어디에 쓸지는 물론 전적으로 하나님 마음이지만 우리 쪽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 도 없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죽은 그릇이 아니라 살아있는 그릇이고, 인격이 있고, 의지가 있는 그릇이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 구절인 디모데 후서 2장 21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이것이 답입니다. 귀히 쓰이고 천히 쓰이는 문제는 전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의 태도에 달려 있습니다. 그릇의 주인되신 하나님은 깨끗한 그릇에 귀한 것을 담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가장 깨끗하게 준비된 그릇에 작지만 가장 중요한 것을 담으실 것입니다. 


삼갈은 처음에는 비록 볼품없었지만, 하나님께서 거기에 작지만 귀한 것을 담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계속해서 자신의 깨끗함을 유지하지 못했습니다. 스스로를 더럽혀서 나중에는 하나님의 영광을 욕되게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깨끗한 그릇이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아무 것이나 담아도 되는 가치 없는 그릇이 되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깨끗한 그릇으로 남아있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거기 담긴 하나님의 영광이 계속해서 빛나기를 원하십니다. 


처음에는 귀했지만 나중에는 천해지는 사람들을 많이 보게 됩니다. 그들은 그릇을 영광스럽게 하는 것은 거기 담긴 내용물이지, 그릇 자체가 아니라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릇에 귀한 것이 담겨져 있을 때는 그 귀한 것이 그릇의 영광이 됩니다. 그러나, 그릇 자체로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면 우리는 그저 작은 빈 그릇에 불과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그릇인 우리가 처음부터 끝까지 명심해야 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작은 그릇이어도 좋고, 그래서 거기 담길 하나님의 일이 작은 것이어도 괜찮습니다. 그런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모든 문제는 자꾸 큰 일에만 관심을 가지기 때문에 생깁니다. 그 대신 작은 일, 별 것 아니라고 생각되고 그래서 대충해도 된다고 생각되는 그 일을 제대로 하시기 바랍니다. 내 일상 속에 세세한 일들, 회사에서, 가정에서, 그리고 교회에서 주어지는 일들, 사람들을 만나서 나누는 대화까지… 그 모든 작은 일을 아름답게 하시기 바랍니다. 작은 일을 제대로 하는 것이 우리 몫입니다. 큰 일은 주님이 이루어 가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몫으로 돌려드릴 때, 하나님은 우리의 작은 일을 크게 쓰실 것입니다.


구원과 승리는 항상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두신 그 자리에 온전하게 남아있으면 됩니다. 주님 만나는 그 날까지 자신을 깨끗게 하므로, 주님의 작지만 소중한 일들을 감당해 내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