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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주일예배

2015.12.06. 주일오전 - 여호수아가 백 십세에 죽으니라(여호수아 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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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여호수아 24장 29-33절


 



올해 2월 첫주부터 우리가 여호수아서를 통해 함께 은혜를 나누기 시작했는데 이제 그 마지막 시간에 이르렀습니다. 저는 이 책을 설교하기 전에도 이 책을 읽고 묵상한 적이 있었지만 이 번에 여호수아서를 설교하면서 개인적으로 정말 많은 도전과 은혜를 받았던 것 같습니다. 제가 연초에 올해에는 여호수아서를 설교해 보아야 하겠다고 생각했던 것은 실은 제가 여호수아서에 대해서 가지고 있었던 하나의 편견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 편견이란 여호수아서는 미래를 향해 있는 책이라는 편견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생활을 끝내고 나서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 일을 얼추 마무리 지은 후, 이제 본격적으로 약속의 땅에서의 생활이 시작되는 그런 이야기를 담고 있는 책이니까요. 그래서 이 책을 여러분과 함께 살피면 그 속에서 무언가 우리 교회의 미래를 위한 이정표 같은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돌아보니 제가 우리 교회에서 2년 동안의 사역을 마치고 3년으로 접어들어가는 시점에서 무언가 말씀 속에서 미래를 위한 새로운 길을 찾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또 우리 교회에도 그런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구요. 그래서 여호수아서를 선택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제 생각처럼 여호수아서가 미래지향적이기만한 성경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여호수아서는 어떤 면에서는 굉장히 과거에 매여 있는 책처럼 보였습니다. 여호수아서 속에는 새로운 이야기들이 아니라 이전에 있었던 일들과 비슷한 일들이 반복되어 일어나고 있었고 또 그 일들이 주는 교훈도 이미 알고 있던 당연한 것들의 반복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이제 여호수아서를 끝내는 시점에서 여호수아서를 다시 생각해 보니 이 책은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미래지향적인 책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흔히들 미래를 새롭게 하려면 뭔가 아주 새로운 것이 필요할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새롭지 않은 것에는 별반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가치를 느끼지 못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미래를 새롭게 하는 것은 새로운 것이 아니라 이미 있던 것들입니다. 오래된 진리들, 오랜 세월 동안 그것이 진리라는 것이 증명된 아주 오래된 진리들의 가치를 다시 발견하고 그 진리를 오늘의 현실에 적용할 때, 그 진리가 바로 현재를 새롭게 하고 미래가 더 새로운 모양으로 다가오게 만드는 것입니다. 여호수아서가 이제 약속의 땅에서의 본격적인 역사를 눈 앞에 두고서 지난 역사를 되짚어 보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미래를 새롭게 하는 것은 바로 참된 옛 것을 되찾고 그것을 오늘이라는 무대 위에 풀어내는 일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이 새로워질 것을 요구합니다. 새로운 언약을 통해서 철저히 새로워질 것을 요구합니다. 그렇지만 그 언약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어진 요구 자체는 조상 때부터 하나님께서 반복하고 또 반복해서 말씀해 오신 것의 반복에 불과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는 믿음으로 하나님께만 순종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오래된 말씀에 대한 헌신만이 다가오는 미래를 밝고 새롭게 맞이할 수 있는 유일한 비결이라고 주님은 그렇게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요즘 미국이나 유럽 교회들이 점점 더 쇠퇴해 가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건강하게 성장해 가는 교회들이 하나씩 하나씩 늘어나고 있습니다. 얼나마 감사하고 놀라운 일인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런 교회들의 가지고 있는 하나의 중요한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 교회들이 옛 것으로 돌아가서 그 옛 것을 다시 붙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옛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성경’입니다. 참 감사하게도 일부의 목회자들은 시대의 유행을 따르지 않고 옛 신앙을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인간 중심이 아닌 하나님 중심의 신앙, 사람들의 사고방식이나 요구를 따르는 것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 중심의 신앙을 가르치지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런 교회를 중심으로 해서 회복의 역사가 일어나기 시작했고 덤으로 성도의 숫자들도 늘어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렇지 않은 교회들은 여전히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는데도 말이지요. 그 덕분에 쇠퇴일로에 있었던 교회는 더디기는 하지만 다시 일어서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왜 새로운 방법이 아니라 구식의 방법, 구태의연한 방식이 그런 놀라운 일을 일으킬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교회와 성도들을 새롭게 하는 것은 사람들이 만들어 내는 어떤 새로운 방법이나 프로그램이 아니라 옛 진리, 그렇기 때문에 변하지 않는 진리를 믿는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삭이 광야에서 물을 찾기 위해서 새로운 우물을 파지 않고 아버지 아브라함이 팠던 우물을 다시 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의 신앙생활을 은혜롭게 하고, 능력있게 하고 또 새롭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것. 그 옛 자리로 되돌아 가는 것 그것 밖에 없습니다. 누구든지 우직하게 옛 우물들을 다시 파다 보면 거기서 또다시 솟아 오르는 시원한 물줄기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이 옛 길을 따라 걸어갈 때, 하나님께서 우리 앞에서 샘물이 터지게 해 주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옛 성도들이 누렸던 은혜와 능력을 우리들에게도 주셔서 저와 여러분을 새롭게 해 주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이것이 바로 여호수아서가, 그리고 성경 전체가 알려주는 우리 자신을 새롭게 하는 증명되고 보장된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개인적으로도 영적인 회복과 은혜가 필요할 때, 다른 것이 아니라 예전의 샘으로 되돌아 가십시오. 거기서는 분명히 또 다시 샘물이 터져 나올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여호수아서를 마감하면서 우리 마음과 생각에 새겨야 할 중요한 교훈입니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시 옛 자리로 돌아가서 조상들이 팠던 옛 우물을 다시 팔 만반의 준비를 시켰습니다. 하나님과 다시 그리고 제대로 언약을 맺게 해 주었던 것입니다. 실제적으로 여호수아서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호수아서는 24장 28절이 아니라, 오늘 함께 읽은 본문을 여호수아서의 결론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호수아의 결론은 사실 굉장히 밋밋합니다. 그저 세 사람의 죽음과 장례식 이야기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성경은 여호수아에게 모세에게 붙여 주었던 “여호와의 종”이라는 명예로운 별명을 붙여 줍니다. 그만큼 성경은 여호수아를 높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성경은 그런 여호수아도 죽었고 장사지내졌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가 죽고 나서 있었던 일을 이렇게 짧게 요약해 줍니다. “이스라엘이 여호수아가 사는 날 동안과 여호수아 뒤에 생존한 장로들 곧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모든 일을 아는 자들이 사는 날 동안 여호와를 섬겼더라” 참 좋은 이야기 같지만 동시에 우리를 굉장히 쓸쓸하게 만드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이 한 구절은 한 사람의 신실한 지도자가 미치는 선한 영향력을 말해주는 동시에 참된 신앙이 끊어지지 않고 세대를 이어 흘러가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도 함께 말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수아가 살아있을 때 하나님을 잘 섬겼습니다. 그리고, 그가 죽고 나서도 여호수아와 함께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들을 보고 경험했던 지도자들이 살아있을 때는 여호와를 잘 섬겼습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여호수아는 모세보다도 나은 지도자였습니다. 물론 사람들이 전혀 다른 사람들이기는 했어도 모세시대의 이스라엘은 계속해서 하나님을 거역하고 또 불순종하였지만 여호수아가 이끌던 시대의 이스라엘은 그래도 하나님을 잘 섬기고 순종해서 약속의 땅인 가나안 땅을 많이 차지했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이 하나님 앞에 신실하게 잘 서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을 통해서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크고 의미있는 일을 하실 수 있습니다. 사실 그것이 하나님께서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식이기도 하십니다. 사실 여호수아는 큰 일을 감당한다는 생각보다는 그저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을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며 감당해 내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 한 사람 덕분에 일차적으로는 그 세대의 장로들이 하나님의 함께 하심과 놀라운 능력을 경험했고, 자신들의 믿음을 단단히 세울 수 있었으며, 그래서 여호수아가 죽고 나서도 여호수아가 했던 역할들을 그들이 대신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적어도 그 세대의 지도자들이 모두 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탈선하지 않고서 자기 자리를 지킬 수 있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교회 안에서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습니다. 개인이 신앙생활 하는 것 같아도 그게 아닙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서 나를 잘 지켜내고 나의 신실함을 잘 지켜내면 그것은 나의 영광이 되고 나의 복이 됩니다. 그것으로 인해 하나님 앞에서 칭찬받게 되지요.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닙니다. 우리는 교회 안에서 반드시 이전 세대와 다음 세대를 연결해 주는 역할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교회 안에 있기 때문에 절대로 피할 수 없는 역할이지요. 그래서, 나를 지키는 일은 곧 그 다리를 든든히 하는 일이 됩니다. 우리의 다음 세대는 그 다리를 건너와서 그 다음 세대를 위해서 또다시 우리가 했던 역할을 하게 될 것입니다. 바로 이것 때문에 성도는 절대로 ‘나 하나 쯤이야’라는 생각에 빠져서는 안됩니다. 자기 신앙의 가치와 의미를 평가절하 해서는 안됩니다. 어떻게 보면 그것 자체로는 그다지 큰 가치와 의미가 없을지 모릅니다. 그저 개인적인 믿음이고 또 삶이니까요. 그렇지만 교회 안에 있으면 그 가치와 의미가 전혀 달라집니다. 나 개인의 신앙의 모습은 결국 교회 전체의 모습, 그리고 우리 다음 세대의 신앙의 모습을 결정할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믿는 부모들은 모두들 자기 자녀들이 하나님 앞에서 믿음 좋고 신실한 신앙인이 되는 것을 바랍니다. 그러나, 우리 자녀가 하나님 앞에서 신실한 신앙인이 되는 것은 그저 바램만으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이지만, 그 은혜를 전달하는 도구와 통로로서 부모가 감당해야할 역할은 절대로 적은 것이 아닙니다. 내 자녀가 훌륭한 신앙인이 되기를 바란다면요. 내가 자녀들 앞에서 신앙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최선을 다해서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모습,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을 정말 소중하게 생각하며 그것을 위해서 고민하며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적어도 그러기 위해서 애를 써야 합니다. 저는 이런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해서 크게 후회하시는 성도들을 여러번 보았습니다. 젊었을 때는 신앙의 중요함을 잘 몰랐습니다. 그저 믿는 줄만 알았지요. 그래서 자녀들 앞에서 신앙으로 사는 모습도 별로 보여주지 못하고 신앙 때문에 고민하는 모습은 더더욱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나이가 들어서 신앙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자녀들에 가장 중요한 것도 세속적인 성공이 아니라 신앙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지요. 그런데,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자기 삶으로 자녀들을 위한 신앙의 다리를 놓아주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머리가 다 큰 자녀들, 자라면서 부모를 통해 믿음을 위해서 사는 모습을 거의 보지 못한 자녀들이 부모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신앙생활을 하지 않거나 건성으로만 믿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아픕니다. 그래서 자신을 책망하며 깊이 후회합니다. 자녀의 신앙을 모두 부모의 책임으로 돌릴 수는 없겠지만 부모를 통해 자녀를 거룩하게 하는 것이 부모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이런 분들의 후회와 안타까움은 오히려 하나님 앞에서 당연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앙인이 된다는 것, 교회의 일원이 되고, 믿는 부모가 된다는 것. 그것은 결코 개인적인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순간 우리는 우리 자신의 세대와  다음 세대를 위한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됩니다. 그 역할을 감당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에게 맡기신 가장 중요한 소명이지요. 항상 여호수아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나 개인의 역할이 보잘 것 없어 보이고 중요해 보이지 않을 때, 그래서 대충하고 싶은 유혹에 빠질 때 여호수아 한 사람이 그 세대를 세우고 자신이 가고 난 후에도 오랫동안 이스라엘을 신앙에서 떠나지 않게 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다시 힘을 내시고, 다시 한 번 영혼의 매무새를 고쳐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그 역할을 제대로 잘 해내게 될 때, 우리의 작은 헌신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교회와 자녀들을 위한 의미있는 일을 하실 것입니다. 


여호수아와 그 세대의 지도자들은 자기 역할을 제대로 잘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살아 있을 때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모두 세상을 떠났을 때부터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그 다음 세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믿음의 맥을 이어가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 점은 지금 설교를 하고 있는 저에게는 정말 당황스러운 일인데요. 결과가 이렇다면 제가 앞에서 힘써 말씀드린 것이 다 소용이 없어지고, 우리가 그렇게 힘들게 우리 다음세대를 위해서 믿음을 지키며 신앙을 따라 살아가야 할 당위성이 그만큼 약해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생각해 보면 이런 실망스러운 결과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믿음을 지키며 신실하게 순종하며 살아야 하는 이유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맡겨진 것은 그 역할 자체이지 결과가 아니고, 결국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이유는 결국 우리 자신이 하나님 앞에 바로 서기 위한 것이니까요. 


일단 우리는 그렇다면 왜 전 세대의 좋은 신앙이 다음 세대로 이어지지 못했는지 그 이유를 생각해 보아야 할텐제요. 생각해 보면 그 이유는 단순합니다. 그 다음 세대가 부모세대의 신앙을 자기 신앙으로 만들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저 부모를 따라서 신앙생활을 했지, 개인적으로 정말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가지는 데까지 나아가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오늘 교회에서도 이런 일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어릴때는 부모를 따라서 교회에 잘 다녔습니다. 신앙생활도 잘 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대학을 가고, 군대를 가고 또 취직을 하면서 더 이상 교회와 상관이 없는 사람이 되어 버립니다. 신앙과는 상관 없이 살아갑니다. 일이 이렇게 되는 이유는 다른데 있지 않습니다. 자녀가 부모의 신앙을 자기 신앙으로 만들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부모가 믿는 하나님을 자기의 하나님이 되게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 중고등부 친구들과 젊은 세대에게 권면합니다. 부모님들이 여러분의 믿음생활을 도와줄 수는 있어도 여러분 대신 하나님을 믿어줄 수는 없습니다. 그냥 부모님 따라서 또 부모님처럼 교회에 나오는 일로 만족하지 마시고 어떻게 하면 정말로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삼을 수 있을지 고민하고 노력하면서 신앙생활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여러분 자신의 하나님으로 모시고, 여러분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되셔야 합니다. 


우리 부모세대는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야 하고 더 절실하게 우리 자녀들을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 자녀들의 신앙생활을 도울 수는 있어도 그들의 믿음까지 책임질 수는 없으니까 우리는 열심히 하나님을 믿고 섬기면서도 자기 신앙에 대해서 낮아지고 겸손해야 하며, 자녀들의 신앙의 본이 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면서도 간절하게 자녀들을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고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것이기도 할 것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하나님께 맡기는 것은 두 가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첫째는 기도입니다. 부모들은 자녀들의 신앙을 위해서 간절하게 그리고 계속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둘째는 양육입니다. 믿는 부모는 믿지 않는 부모들이 자녀들을 키우는 것과는 다른 가치관과 다른 목적을 가지고 자녀를 키워야 합니다. 절대로 자신이 자녀 양육에 있어서 하나님처럼 되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내가 모든 것을 다 해 주려고 하지 말고 최대한 하나님께서 자녀들의 삶에서 행하실 일들을 많이 남겨 두어야 합니다. 부모로서 최대한의 역할을 하려고 바둥거릴 것이 아니라 자신의 역할을 줄여 나가야 합니다. 그래야 내가 자녀들을 키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녀를 키워주시게 됩니다. 이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닙니다. 자녀만 보고 또 세상만 보면 불안해서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을 믿으면, 내 자녀를 사랑하시고 내 자녀의 삶을 인도하시는 완전하신 하나님을 믿으면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 김현우 집사님, 유민이 지금 몇 개월이죠? 유민이가 말 잘 들어요? 애 키우는 게 마음대로 되요? 아니죠? 이제 시작도 안했습니다. 아마 앞으로 더 절실하게 느낄 겁니다. 제가 집사님을 저주하는 게 아닙니다. 그게 자녀를 키우면서 배우게 되는 인생의 진실입니다. 자녀 양육. 절대로 내 맘대로 안됩니다. 맘대로 되는 것 같지요? 나중에 아이가 다 커서 발등 찍히게 됩니다. 자식은 겉 낳지 속 낳지 않는다는 옛 어른들의 말씀이 얼마나 맞는 말인지 모릅니다. 그러니 맡겨야지요. 내가 내 자녀의 하나님이라도 된 듯이 그렇게 자녀를 키우지 말고 자녀의 삶과 앞길을 모두 하나님께 맡기고 나를 겸손한 보조자의 자리로 내려보내야지요. 그저 어떻게 믿고 사는 것인지 그 모습을 보여 주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면서, 하나님께서 나를 만나 주셨듯이 내 아이도 꼭 만나달라고, 내 아이가 하나님을 자기 하나님으로 모시는 날이 꼭 오게 해 달라고 간절히 구하고 또 구하면서, 내 몫을 내가 하면 하나님의 몫은 하나님께서 하신다고 믿으면서 말이지요.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여호수아도 죽고, 요셉도 장사지내졌고, 엘르아살도 죽어서 장사지내졌습니다. 위대한 지도자들, 위대한 조상들,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의 중보가 되었던 제사장들도 다 죽었습니다. 죽어서 다른 사람의 손에 장사지내지는 일이 그 위대한 인물들의 마지막입니다. 그게 여호수아서의 결론입니다. 이들은 정말 위대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각자의 하나님 앞에서 최선을 다해서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렇지만 애석하게도 자기 자녀 세대의 믿음의 문제조차 책임지지 못했습니다. 허무합니까? 그럴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이것이 인생입니다. 인생이란 사실 이렇게 보잘 것 없습니다. 세상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을 것같이 호통치며 자신만만하게 살아가지만 결국 주검이 되고, 다른  사람들의 손에 장사지내지는 일로 마감하게 되는 것. 그러면서도 자기 자녀의 일조차 책임질 수 없는 것. 이것이 우리 인생의 진실입니다. 


그렇지만, 이런 것이 우리들의 인생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인생에는 소망이 있습니다. 우리 자녀들의 삶에 대해서 불안해 하지 않을 수 있는 이유가 있습니다. 여호수아는 위대한 지도자였습니다. 그렇지만 그도 인간이기 때문에 불완전했고 죽을 수 밖에 없었으며 다른 사람들의 내면과 영혼의 문제까지는 완전히 책임질 수가 없었습니다. 그저 살아생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인 탈선을 막을 수 있는 정도였지요. 이것은 우리가 사람의 도움을 받을 수는 있어도 사람을 바라보아서는 안된다는 것을 깨닫게 해 줍니다. 사람의 역할은 아무리 대단해도 보조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게 해 줍니다. 바로 여기에 우리의 소망이 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위대한 신앙의 인물들이 그 대단함에도 불구하고 항상 불완전함과 한계를 가질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일차적으로는 그들이 인간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더 중요한 한 가지 이유가 있는데 그것은 이들은 그들 자신의 삶과 역할을 통해서 자기 뒤에 오실 한 사람, 완전한 분을 가리키는 손가락의 역할을 하는 그런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림자가 실체의 모습을 완전하게 보여줄 수 없듯이 이들 또한 완전할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우리는 여호수아가 어떤 분과 이름이 같은지 잘 알고 있습니다. 여호수아는 놀랍게도 예수님과 이름이 같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 당시에 히브리어를 사용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수님을 ‘여호수아’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참 위대한 지도자였습니다. 영적인 지도자라는 면에서만 보면 모세보다도 훌륭하게 자기 일을 해 낸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는 또 한 명의 여호수아, 자신처럼 불완전하지 않은 완전한 여호수아를 가리키는 사람이었고 또한 소망하게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완전한 여호수아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왜 사람만 믿고 사람에게만 매달리면 안됩니까? 그는 불완전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떠나고 나고 또 잊혀지게 되면 그 어떤 일도 책임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우리 예수님은 다릅니다. 그 분은 지금도 성령님을 통해서 우리의 완전한 인도자가 되어 주십니다. 우리의 영원한 여호수아로 지금도 우리와 함께 계시면서 우리의 삶을 인도하시고 책임지고 계십니다. 사람은 아무리 실망스러워도 괜챦습니다. 아프기는 해도 낙심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 실망을 통해 더 확실하게 예수님을 바라볼 수 있고, 또 예수님을 믿고 의지할 수 있다면 그 실망은 오히려 우리에게 유익한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저의 목사로서의 일차적인 목표는 여러분 모두를 참으로 예수를 믿는 믿음에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이 세상의 그 누구도, 그 어떤 방법도, 심지어는 저 자신도 바라보지 않기를 바랍니다. 저는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믿음의 눈을 열어서 예수님을, 우리의 참된 여호수아를 바라보며 살아가게 되기를 진심으로 소원하고 있습니다. 그런 일만 일어난다면 저는 여호수아처럼 사라져 버리고 잊혀져 버려도 괜찮습니다. 정말 부족하고 형편 없지만 저를 통해서 여러분이 예수님만 바라볼 수 있다면 저는 그것으로 족합니다. 저는 그저 여러분을 참 목자장 되시는 예수님께 인도하는 하루 품삯 받는 목동에 불과하고 참 여호수아이신 예수님을 바라보게 만드는 손가락에 불과하니까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눈을 열어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만 바라보게 되는 것. 그것을 여러분의 신앙생활의 목적으로 삼으십시오. 여러분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그것입니다. 교회에 나오면서 이런 저런 작은 기쁨과 위로를 얻고, 성도들과 교제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재미있게 신앙생활을 하는 것도 필요하겠지만 그것은 절대로 여러분이 신앙생활을 하는 목적이 될 수 없고 그렇게 되어서도 안됩니다. 그것이 여러분의 신앙에 중심에 있으면 안됩니다. 그런 것이 여러분에게 그렇게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은 아직도 여러분의 눈에 우리의 참 여호수아이신 예수님께서 밝히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그 분을 바라보며 뒤따르는 기쁨을 누리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다른 것이 아니라, 그 누구가 아니라, 우리의 참 여호수아이신 예수 그리스도만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자녀들에게도 다른 것 물려주려고 하지 마시고 예수님을 바라볼 수 있는 그 믿음의 눈으로 물려 주기 위해서 간절히 기도하며 애쓰는 작은 여호수아가 되기 위해서 애쓰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예수님을 참 목자로 삼아 사시고, 또 자녀들과 지체들을 그 삶으로 인도하는 주님의 손가락이 되기 위해서 그 소명을 다하기 위해서 애써보시기 바랍니다.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을 참으로 나의 하나님으로 영접하시고 말이지요. 


그 옛날에는 여호수아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에게는 참 여호수아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십니다. 우리의 삶과 믿음을 완전하게 인도하고 계십니다. 우리 모두가 이 예수를 믿으며 그 말씀에 순종하며 영원한 언약 가운데 머물러 사는 복되고 영광스러운 참 주님의 백성들의 삶을 살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