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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주일오후

2015.12.27. 주일오후 - 여호와께서 바락 앞에서(12월 전교인 기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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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 : 사사기 4장 1-16절


    


오늘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악역으로 등장하는 민족은 가나안 왕 야빈과 그의 군대장관 시스라입니다. 성경은 야빈을 ‘철병거 900승’을 가지고 있는 막강한 군사력의 폭군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아직 변변한 무기 조차 없습니다. 게다가 아직 청동기를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스라엘을 점령하고 있는 사람들은 철로 된 병거를 900대나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상대에게 대항한다는 것은 마치 소총으로 탱크에게 대드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자력으로는 도저히 그들의 압제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상대가 이 정도라면, 하나님께서 세우시는 사사는 아마 삼손 쯤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철병거를 들어서 던져 버려야 하니까요. 그런데, 성경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 때에 랍비돗의 아내 드보라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었는데, 그는 에브라임 산지 라마와 벳엘 사이 드보라의 종려나무 아래 거하였고 이스라엘 자손은 그에게 나아가 재판을 받더라” 오른 손을 못쓰는 사람을 세우고, 이방인 목동을 세우더니 이번에는 별로 신통치 않은 한 남자의 아내를 사사로 세우십니다. 드보라는 아마조네스 같은 여전사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선지자이며 사사로 백성들을 재판하는 일만을 감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전쟁은 누가 합니까? 누가 야빈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하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또 한 사람을 세우십니다. 그가 바로 바락입니다. 성경은 그를 그저 아비노암의 아들이라고만 소개하고 있는데요. 오늘 본문을 보니 이 사람도 별로 힘센 전사 같지 않습니다. 아무튼 바락은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 전쟁을 수행했고,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그런데, 다음에 살펴 보겠지만, 결정적으로 전쟁을 완전히 끝낸 사람은 바락이 아니라 겐 사람 헤벨의 아내 야엘입니다. 야엘이 도망쳐 온 시스라의 머리에 말뚝을 박아 죽임으로써 야빈을 재기불능으로 만들어 버렸던 것입니다. 도데체 이야기가 어디서 어디로 흘러가며, 또 누가 주인공인지도 알 수 없을 정도입니다. 전혀 승리의 가능성이 없는데, 승리가 찾아옵니다. 드보라가 전쟁을 하는가 했더니, 바락이 바통을 이어받습니다. 바락이 최종주자인가 했더니 뜻밖의 여인이 경주의 마지막 주자로 결승선을 통과합니다. 아무튼 그렇게 하나님은 이 모든 사람에게 각자의 역할을 맡기심으로써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각자가 자기에게 맡겨진 일을 충실히 감당할 때, 하나님은 그 모든 일을 모아서 사람이 상상할 수 없는 큰 일로 바꾸어 놓으셨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부르짖음이 하나님께 들려졌을 때, 드보라는 이미 선지자와 사사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드보라에게 나와서 여러가지 문제에 대한 해결을 얻고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드보라가 사사로 일했던 곳을 “에브라임 산지 라마와 벧엘 사이 드보라의 종려나무 아래”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성경이 드보라에 대해서 다른 할 말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이 장소를 언급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드보라는 우리 말로 꿀벌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종려나무가 있는 곳이라면 오아시스이고, 종려나무는 흔히 성경에서 “꿀나무”라고 알려진 나무입니다. 우리가 성경에서 보는 송이꿀이라는 것도 사실은 대추야자라는 종려나무의 열매를 일컫는 말입니다. 꿀이 흐르는 꿀나무 아래의 꿀벌…… 그렇다면 그 꿀벌이 하는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꿀을 모아서 나눠주는 일입니다. 드보라의 사사로서의 사역은 꿀과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들에게 전해주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런 드보라에게로 나아왔습니다. 이것은 이미 하나님의 말씀과 통치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다시 달게 느껴지고 있었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이것은 그들의 부르짖음이 형식적인 부르짖음이 아니라 진실된 부르짖음이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구원은 언제 시작됩니까?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께로 돌이키고, 세상의 소리보다, 자신의 소리보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일 때 시작됩니다. 그 말씀을 달게 여기고, 그 말씀을 듣기를 원할 때 하나님의 구원은 시작됩니다. 하나님은 눈에 보이는 분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 분을 존중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는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우리의 태도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말씀을 존중하고 그 말씀을 기뻐하지 않는 사람은 결코 하나님을 존중하는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어떤 사람의 말을 무시하면서 그 사람을 존중하는 일이 불가능한 것과 마찬가지의 이치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달게 여기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 시작했을 때, 하나님은 꿀벌 드보라를 보내셔서 꿀보다 더 달콤한, 마음을 생기있게 하는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그것은 바락이 이스라엘을 구원할 것이라는 소식이었습니다. 드보라는 바락을 불러서 납달리 지파와 스불론 지파 중에서 만 명을 차출하여 기손 강으로 출정하라고 명령합니다. 하나님께서 야빈과 시스라를 그의 손에 붙였다고 이야기 합니다. 바락은 대답합니다. “당신이 나와 함께 가면, 내가 가려니와 당신이 나와 함께 가지 아니하면 나는 가지 않겠노라” 그 동안 많은 사람들은 바락의 이런 반응을 소극적이고 불신앙적인 반응이라고 여겨 왔습니다. 그러나, 사실 이 구절 만으로는 그의 반응이 어떤 대답인지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이렇게 보면 믿음이 없는 반응 같지만, 또 저렇게 보면 하나님을 향한 전적인 신뢰의 반응으로 보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눈에는 어떻게 보이십니까?


우리가 히브리서 11장을 보면 믿음의 영웅들의 이름들이 나옵니다. 그들은 모두 이 땅의 안락함 대신에 하늘의 기쁨을 택한 사람들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11장 32절은 구약의 믿음의 영웅들의 명단을 마감하면서 이렇게 기록합니다. “내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와 다윗과 사무엘과 및 선지자들의 일을 말하려면 내게 시간이 부족하리라” 성경에 나오는 믿음의 영웅이 너무 많아서 그들에 대해서 다 기록할 수가 없어서 마지막으로 몇 명의 이름만 기록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선별해서 기록한 사람 중에 누가 있습니까? 바락이 있습니다. 사사 12명 중에서 기드온, 삼손, 입다를 선택해서 기록합니다. 그리고, 그들 중에 바락의 이름도 당당하게 기록합니다. 사사기는 바락을 사사로 부르지도 않고 있지만, 히브리서는 대표적인 사사의 이름 중에 그의 이름을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락에 대한 성경의 평가가 이렇다면, 바락의 반응은 불신앙에서 나온 반응일까요? 아니면 신앙적인 반응일까요? 신앙적인 반응입니다. 나중에 전쟁에 임했을 때에도 바락은 비슷한 행동을 합니다. 14절을 보면 드보라가 바락에게 “일어나라 이는 여호와께서 시스라를 네 손에 붙이신 날이라 여호와께서 너의 앞서 행하지 아니하시느냐?”라고 출전을 명하고서야 비로소 산을 내려갑니다. 그렇다면, 이것도 신앙적인 반응으로 보아야 합니다.


바락이 드보라가 전해 준 말씀을 듣고 바로 움직이지 않고, 조건을 달았던 것은 바락이 가지고 있는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그 전쟁이 자신의 전쟁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하솔 왕 야빈에게 이스라엘을 붙이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그래서 그에게서 이스라엘을 다시 구하실 분도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전쟁에서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또 하나님이 싸우시지 않으시면 싸우나 마나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락은 하나님의 사람인 드보라가 가지 않으면 자신도 가지 않겠다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는 그의 말 속에서 “주께서 친히 가지 아니하시려거든 우리를 이곳에서 올려 보내지 마옵소서”라고 모세의 목소리를 다시 듣는 것 같지 않습니까? 그리고, 다볼 산에서도 그는 드보라가 “일어나라”는 직접적인 명령을 내릴 때가지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소극적으로 보이는 이 모습도 하나님의 명령에 대해서 정확한 하나님의 시간에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려는 그의 겸손한 믿음을 보여 줍니다. 바락은 자신에게 승리의 부르심과 약속이 주어져 있었지만, 그 안에서도 세심하고 확실하게 하나님의 인도를 받으며 움직이고 싶어했던 것입니다. 바락은 드보라가 “여호와께서 너의 앞서 행하지 아니하시느냐?”라고 말하는 소리를 듣고나서야 병사들과 행동을 개시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앞서지 않고 하나님을 앞세우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15절은 그 날의 전쟁을 이렇게 기록합니다. “여호와께서 바락의 앞에서 시스라와 그 모든 병거와 그 군대를 칼날로 쳐서 패하게 하시매…” 이것이 바락의 겸손하고 진중한 순종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었습니다. 


이 전쟁은 원래부터 하나님이 모든 전략을 세우시고 작전을 지휘하신 전쟁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바락에게 시스라의 군대를 기손 강으로 유인하라고 하셨습니다. 기손 강은 비가 내리는 계절에만 물이 흐르는 간헐천입니다. 평소에는 말라 있지만, 비가 오기 시작하면 깊숙한 진흙탕으로 변하는 그런 곳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런 곳으로 철병거로 무장한 시스라의 군대를 유인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하려고 하시는지 좀 알 것 같지 않습니까? 하늘에서는 엄청난 폭우가 쏟아지고, 이름 그대로 하나님의 벼락인 바락이 그들을 내리쳐 산산조각이 나게 하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작전이었던 것입니다. 


이 전쟁의 승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겸손하게 순종했던 바락, 드보라의 광채에 가리워 드러나지 않는 바락을 통해 이루신 하나님의 작품이었습니다. 4장 9절을 보면, 이스라엘을 구하는 전쟁에 뛰어들기 직전의 바락에게는 매우 불쾌하게 들릴 수 있는 예언 하나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네가 이제 가는 일로는 영광을 얻지 못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시스라를 여인의 손에 파실 것임이니라” 싸우기는 분명 바락이 싸울 것입니다. 그러나, 그 승리의 영광은 바락이 아닌 어떤 여인이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전혀 개의치 않았습니다. 그러면 혼자 가겠다고 말하거나, 태도를 바꾸어 하나님 앞에서 영웅적인 모습을 보이려 하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이전처럼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신중하고 겸손하게 머물러 있었습니다. 


바락에게는 자신이 영웅적인 대접을 받는 것이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원하는 것은 이스라엘의 구원과 그 구원을 통해 드러나게 될 하나님의 영광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도구가 되고,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도구가 될 수만 있다면, 그 이외의 것은 누가 자신의 영광을 취하던, 그래서 어떤 사람이 그 영광을 누리던 상관할 바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바락이 보여주는 이 믿음이야 말로 참된 믿음, 그리고 진짜 영웅적인 믿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출애굽 역사를 보면, 자신의 왕을 야빈이라고 불렀던 가나안 족속은 이미 150년 전에 거의 멸망했었습니다. 그런 나라가 다시 강대국이 되어서 이제 이스라엘을 압제자가 된 것입니다. 이런 일은 영적인 전쟁에서도 그대로 일어납니다. 우리가 아직 이 땅에 머물고 있는 한, 우리에게 사탄으로부터의 완전한 승리는 없습니다. 사탄이 또 언제 철병거를 앞세워 우리를 괴롭힐지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깨어있어야 하고 겸손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습은 하나님의 말씀을 꿀처럼 달게 여기며, 그 뜻에 겸손하게 순종하는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런 모습을 보일 때, 가장 기뻐하시며 그들을 위해서 친히 나서서 싸워 주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교만하여 스스로를 믿고 살아가려고 할 때, 하나님은 옛 원수 마귀가 우리의 영혼을 억누르도록 놓아두실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주어질 영광에 연연해 하지 않고, 그저 하나님의 영광과 교회의 유익을 나의 기쁨으로 삼고 겸손하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때, 하나님은 우리의 전쟁을 대신 앞서 가시며 싸워주실 것입니다. 사탄의 철병거를 부수고 그 승리를 우리에게 안겨 주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꿀처럼 단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손에 들린 하나님의 벼락 같은 사람들로 쓰임 받는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항상 하나님을 기대하며 사는 인생이 되게 하소서. 
  2. 항상 하나님의 영광을 사랑하며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게 하소서. 
  3. 나는 대단하지 않지만 바락처럼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 벼락같은 인생을 살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