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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새벽예배

2016.01.07. 신년특별기도회 - 마음은 은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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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히브리서 13장 9절




이틀 동안 저는 여러분에게 열왕기하 4장 말씀을 통해서 은혜를 회복해야 한다, 지금 알고 있고 누리고 있는 그 은혜에 만족하지 말고 더 큰 은혜를 얻기 위해서 더 큰 그릇을 더 많이 준비하자는 메세지를 전했습니다. 혹시 여러분들 중에는 이런 메세지들이 부담스럽고 거추장스럽게 느껴지셨던 분들이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그런 분들이 한 분도 없기를 바라면서 말씀을 전했지만 말이지요. 그런데 사실 누구나 그런 것 같습니다. 한 번에 큰 은혜를 받는 일은 좋아하지만 더 큰 은혜를 받기 위해서 계속해서 애쓰고 힘쓰는 일에 대해서는 귀찮아하거나 무관심한 마음을 품게 되지요. 그래서, 지금 자신이 있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더 큰 열심을 내고, 더 깊은 헌신을 하는 것을 쉽게 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어제 기도를 하다가 저 역시 그런 모습이 남아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저는 정말 큰 은혜를 받고 그 은혜 안에 머물고 싶습니다. 더 많이 기도하고 싶고, 성경을 묵상하고 연구하는 일에 더 온전하게 헌신하고 싶습니다. 정말 하나님께 미치고 싶습니다. 저 자신에게 묻고 또 물어보아도 그게 제 영혼의 가장 크고 간절한 소원이라는 것은 틀림이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깨어지다만 저의 자아가 그 일을 방해하고 있었습니다. 그 놈의 자아가 그 귀한 일들이 진척되지 못하도록 가로 막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은혜를 회복하고 더 큰 은혜를 받는 것이 꼭 필요하다는 것을 잘 압니다. 그렇지만 이상하게도 그렇게 하는 일을 귀찮아하게 되고 그런 일들에 대해서 이유를 알 수 없는 거부감을 가지게 됩니다. 그것은 여전히 자아의 중심에 깊은 죄의 흔적을 지니고 있는 우리들에게는 이 못난 자아라도 끝까지 지켜내고 싶은 마음이 있는데, 사라져 가는 은혜를 회복하고 더 큰 은혜로 나아가는 일에는 바로 이 ‘자아’를 깨뜨리고 또 다루어 내는 일이 꼭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런 귀찮아 하는 마음이나 거부감을 이겨내고 반드시 은혜가 있는 자리, 더 깊고 풍성한 은혜의 자리로 가야 합니다. 이 은혜가 성도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는 꼭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본문 말씀을 통해서 왜 이 은혜가 우리에게 꼭 필요한지 그 이유를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가지 다른 교훈에 끌리지 말라.” 이 말만 보아서는 여기 나오는 ‘여러가지 다른 교훈’이 무엇인지 드러나지가 않지만 이 구절을 계속 읽어보면 이것이 무엇을 말하는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계속해서 말합니다. “마음은 은혜로써 굳게 함이 아름답고 음식으로써 할 것이 아니니…” 이 말씀은 이미 예수님을 믿은 유대인들, 그렇지만 아직은 복음을 완전히 복음답게 받아들이지 못해서 여전히 어느 정도 율법에 매여있는 유대인들에게 주신 말씀이니 그들 입장에서 보아야 하는데요. 그들은 예전에는 율법을 지키다가 이제는 예수를 믿는 신앙으로 넘어온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원래 유대인들이 율법 중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은 종교적인 정결함을 유지하기 위해서 지켜야 했던 ‘정결법’이었고, 그 중에서도 무엇은 먹고 무엇은 먹으면 안된다는 음식에 대한 규정은 그 정결법의 핵심처럼 여기고 있었습니다. 물론 이것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런 것들을 정해주신 것은 바로 하나님이셨으니까요. 그런데, 문제는 이들이 이 법을 지키면서 이 법을 그저 형식적으로 지키기만 하면 그것이 자신들의 ‘마음’까지도 ‘굳게 할 수 있다’고 믿게 되었고, 그 당시의 유대인 그리스도인들도 똑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사도 바울은 그렇지가 않다고 말합니다. ‘음식은 절대로 마음을 굳게 하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마음을 굳게 한다는 것은, 글자 그대로 하면 ‘마음을 강하게 만드는 것’을 의미하는데요. 속 뜻은 성도가 하나님 앞에서 확신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고, 그것 덕분에 믿음이 생겨난다는 것이며, 그래서 하나님 앞에 담대하게 설 수 있게 된다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의 이야이긴 즉, 어떤 음식을 먹거나 먹지 않는 일은 절대로 그런 역할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음식은 진짜 ‘음식’뿐만 아니라 우리가 신앙의 이름으로 행하는 거의 모든 일이 될 수 있습니다. 만약 그런 일들이 ‘나는 이 일을 하고 있기 때문에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다’라고 생각하게 한다거나, ‘이렇게 하기만 하면 괜찮은 신앙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만든다면 그게 무엇이든 우리에게는 본문에 나오는 ‘음식’이 될 수 있습니다.


바울이 말하는 ‘여러가지 다른 교훈’이란 바로 이런 것들을 말합니다. ‘이런 일만 하면 너는 신앙이 좋은거야’라고 말해 주는 것들, 그리고 ‘이렇게 하기만 하면 좋은 신앙을 가질 수 있어.’라고 가르치는 모든 주장들이 바로 ‘여러가지 다른 교훈’입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는 너무나 오랫동안 이런 교훈들을 듣고 신앙생활을 해 왔습니다. 신앙의 행위와 내용은 자동적으로 일치되는 것처럼 가르치는 그런 메세지들을 너무나 오랫동안 들어 왔지요. 그래서 우리들의 신앙은 우리들도 모르는 상태에서 이런 여러가지 ‘음식들’에 묶이게 된 부분이 있습니다. 무엇을 ‘하면’ 의롭고 당당해지지만 무엇을 ‘하지 않으면’ 그 반대가 됩니다. 우리는 그 당당함을 우리 ‘마음이 강해진 것’으로 받아들이기 쉽지만 실은 그것이 ‘나는 이런 일들을 하기 때문에 나는 의롭다’고 여기는 자기 의가 주는 만족감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그런 뿌듯한 감정은 우리의 신앙을 참된 신앙으로 만들어 가는 길에서 가장 위험하게 생각해야 할 걸림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자기 만족과 자기 의를 부추기는 여러가지 교훈에 끌리면 안됩니다. 그런 가르침들이 매우 매력적이지만 말이지요. 


성경을 가만히 보면, 성경은 절대로 ‘행위’ 자체를 무시하지 않습니다.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반드시 보여져야 하고 보여질 수 밖에 없는 신앙의 증거라고 말합니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이 본질적으로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바로 ‘마음’입니다. 그 사람의 ‘중심’이지요. 그래서, 성경은 그 행위가 그 사람의 변화된 중심에서 부터 우러나오는 행위일 때, 적어도 그런 것이 되게 하려고 애쓰는 노력의 결과로 나타나는 것일 때 그럴 때만 그 행위의 의미와 가치를 인정해 줍니다. 그럴 때는 부족하고 불완전해도 괜찮고, 겉으로 보기에는 과부의 동전 두 렙돈처럼 보잘 것 없어도 괜찮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것을 가장 귀한 것으로 인정해 줍니다. 그래서,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나 혹은 하나님에게 가치있고 유익한 신앙생활을 하려면 우리는 ‘음식’ 그러니까 ‘무엇을 하고 하지 않고의 문제’가 아니라 우선 ‘마음’에 집중해야 하고, 신앙생활을 통해서 우리의 마음의 중심을 다루어 내는 작업을 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어떻게 다루어 낼 수 있을까요? 무엇으로 마음을 강하게 하고, 하나님 앞에서 확신을 얻으며, 담대하게 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바로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주시는 ‘은혜’입니다. 은혜가 아니고는 우리에게 그런 능력을 줄 수가 없고, 은혜가 아니고는 그런 역할을 할 수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첫째로 우리의 행위에는 언제나 죄가 섞여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우리는 흔히 기도는 가장 영적이고 내면적인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우리는 기도를 하면서도 ‘자기 의’에 빠집니다. 내가 기도한다는 사실에, 또 내가 이런 기도를 드리고 있다는 사실에 스스로 뿌듯해 하고, 은근히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들과 자신을 다른 사람으로 여기기 시작합니다. 저는 지금까지 수십년간 기도를 드릴 때 생겨나는 자기 의와 싸워 왔지만 여전히 은밀하게 저를 공격해 오는 자기 의의 문제로 부터 자유롭지 못합니다. 아마 평생동안 이 싸움은 계속될 것입니다. 기도가 이렇다면 다른 일들은 말할 필요도 없겠지요. 그렇다면 우리가 우리의 그 어떤 행위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우리 마음을 강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그 어떤 영적인 일들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확신을 얻을 수 있고, 담대함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그 어떤 행위로든 우리는 우리 마음을 하나님 앞에서 강하고 담대하게 만들어 줄 수 없습니다. 


둘째 은혜만이 우리 마음 우리 중심에 직접 들어가 직접 작용할 수 있고 그래서 우리의 마음을 바꿔놓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님께서는 은혜를 우리 마음에 집적 적용시킵니다. 그 때 은혜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그래도 너는 하나님의 자녀라고, 그래도 너는 하나님께 받아들여졌다고, 그래도 너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으며 하나님께서는 너를 구원하시는 일에 절대로 실패하지 않으실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 속에 은혜가 있고, 또 우리가 은혜 안에 머물러 있을 때, 우리 마음은 하나님 앞에서 더 큰 확신을 누리고, 더 온전한 믿음을 얻게 되며, 은혜의 보좌 앞으로 담대하게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 없이 살고 은혜 가운데 머물러 있지 않으면 더 큰 은혜로 나아갈 힘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 은혜로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더 강하게 할 수 있는 기회를 잃게 됩니다. 그래서 성도는 반드시 은혜를 누려야 하며, 꾸준하게 더 크고 풍성한 은혜를 향해 다가가야만 합니다. 아직 다 다루어지지 않은 자아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에 대해서 거부감과 또 귀찮은 마음이 생기더라도 은혜를 향한 열정을 유지하기 위해서 애써야 합니다. 


그렇다면 은혜에는 이런 영적인 효과만 있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현실적인 면에서도 은혜는 우리 내면을 강하게 만들어 줍니다. 이것은 은혜가 주는 현실적인 유익인데요. 하나님의 은혜는 내가 하나님께 붙들려 있고 하나님 안에 있다는 확신을 확고하게 만들어 주기 때문에, 그리고 언제나 내가 거리낌 없이 하나님께 도움을 구할 수 있게 해 주기 때문에 우리의 내면을 훨씬 더 강하게 만들어 줍니다. 은혜로 꽉 차 있을 때는 정말 힘든 상황도 거뜬하게 버텨냅니다. 평안이 좀처럼 깨지지 않습니다. 울어야 할 상황인데도 웃음이 나옵니다. 은혜가 주는 꽉찬 만족 덕분에 죄를 이기는 힘도 훨씬 더 강해 집니다. 그래서 쉽게 넘어가던 유혹도 거뜬하게 이기게 만들어 줍니다. 대략적으로 말씀드렸지만 은혜가 주는 현실적인 유익은 이 밖에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은혜의 수위가 낮아질 때는 더 작은 일에도 파르르 합니다. 마음은 불안으로 채워져 가고 쉽게 낙심하게 되며 다른 사람들에게 화도 더 쉽게 내게 됩니다. 똑같은 유혹에 반복해서 넘어갑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모든 일에 유익합니다. 우리의 모든 것을 책임져 줍니다. 우리의 신앙이 참 신앙이 되게 하고, 그 신앙생활이 기쁨으로 충만한 것이 되게 해 줍니다. 그리고, 우리를 정말 사는 것처럼 살도록 만들어 줍니다. 이것은 모두가 다 은혜 안에는 우리의 마음을 강하게 해 주는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은혜 없는 자리에서 은혜 있는 자리로, 그리고 은혜가 있는 자리에서 그 은혜가 더 풍성한 자리로 가야 하는 것입니다. 


제가 아직 그 어떤 교회 안에서도 그런 모습을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저의 욕심이 좀 과한지도 모르겠지만, 저는 우리 교회의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의 넘치는 은혜 가운데 거하며 그 은혜의 강하게 해 주는 능력을 누리며 살아가는 그런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여러분의 영혼이 하나님의 은혜에 반응해서 여러분의 눈이 반짝 반짝 빛나는 그런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이것이 복된 성도의 모습이니까요.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의 마음을 하나님의 더 큰 은혜에 집중하게 해 주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가 그 은혜의 마음을 강하게 하는 능력 가운데 하나님 앞에서 맛있고 멋있는 삶을 살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렇게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의 마음이 하나님의 은혜에 집중되게 해 주소서. 내 안에 더 큰 은혜를 욕심내는 마음을 만들어 주소서. 내 안에 더 큰 은혜의 자리로 나아가는 일에 대한 거부감과 게으름을 없애 주셔서 마음을 강하게 하는 은혜 속에서 믿는 것처럼 믿고 사는 것처럼 살아가는 복을 얻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