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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새벽예배

2016.01.12. 새벽예배 - 성경읽기와 묵상(예레미야 7-8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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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일 : 2016년 1월 21일 목요일




‘반지의 제왕’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원래는 톨킨이라는 영국사람이 쓴 세권으로 된 소설을 영화로 만든 것인데, 제가 가장 재미있게 보았던 영화 중의 하나입니다. 영화는 그것을 가지고 있기만 하면 절대적인 힘을 주는 ‘절대반지’라는 물건을 둘러싸고 벌이지는 일들을 그리고 있는데요. 영화 속에서 이 반지는 그 반지를 지닌 사람에게 절대적인 힘을 주는 대신에 그 사람을 사악하고 탐욕적인 괴물로 만들어 버리는 그런 힘도 가지고 있어서 이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물건이기고 합니다. 그래서 이 영화는 바로 이 위험한 것을 없애는 과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저는 오늘 본문을 묵상하다가 문득 그 영화가 생각났습니다. 그 이유는 오늘날 우리가 어쩌면 우리의 신앙이나 혹은 신앙생활을 돕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들을 마치 ‘절대반지’처럼 생각하고 있지는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고 있기만 하면 괜찮고 가지고 있기만 하면 괜찮은 것으로 말이지요. 그런데, 이런 모습은 어쩌면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역사의 길이 만큼이나 오래된 습관인지도 모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그것이 분명하게 드러나는데요.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온 세상에 하나 밖에 없는 하나님의 백성들로 선택하셨습니다. 너무나 특별한 은혜이고 특권이었지요. 바로 이 사실 때문에 이스라엘은 다른 나라 민족들은 상상하지도 못했던 엄청난 복들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에 가지게 된 이런 특권들은, 모든 특권들과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독특한 의무를 부여 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이니 하나님만을 섬기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일을 돕기 위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아주 특별한 선물 두 가지를 주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성전과 율법이었습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가기 위해서 반드시 지켜야 하는 그들의 ‘법’이었습니다. 그러나, 누구나 똑같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율법을 완전히 지킬 수 있는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들에게 성막과 성전을 주셨습니다. 제사 제도를 통해 죄를 용서하시고 또 계속해서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 위해서 였습니다. 그런 점에서 율법과 성전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정말 최선을 다해서 율법을 지키려고 애썼지만 그래도 실수하고 실패했을 때, 그 죄를 뉘우치고 용서를 빌면 그 죄를 용서하시고 다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하나님의 법을 지키며 사는 자리로 되돌아가게 되어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두 가지 특별한 은혜들을 마치 ‘절대반지’처럼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언제나 자동적으로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 아래서 살아갈 수 있다는 착각에 빠진 것입니다. 서기관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에게는 율법이 있으니까 괜찮다. 이 율법이 있는 한 우리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이 율법이 우리를 축복하고 지켜줄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그러면서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는 않았습니다. 그 율법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무엇을 말씀하시고 무엇을 요구하시는지, 정말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일에 대해서 율법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말입니다. 이런 그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일에 신경을 썼을리가 없습니다. 그들의 일상은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일상이었습니다. 


제사장들은 또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성전이 있으니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시고 여기서 우리에게 은혜와 복을 베풀어 주신다. 여기 예루살렘에 성전이 있는 한 우리나라는 절대로 망할 수가 없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성전에서 우상숭배에 빠졌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삶 속에서 애써 이뤄가야 할 거룩함에는 관심이 없고, 모두가 다 자기 생각과 욕심대로 살아가는 일에만 몰두해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성전에 와서는 마음도 없이 뉘우침도 없이 형식적으로 제사를 드리며, 저기 하나님의 처소인 성전이 있는 한 우리는 영원히 괜찮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는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죄가 더 컸습니다. 하나님께서 은혜의 도구로 주신 두 가지를 오히려 죄를 합리화하는 도구와 거짓된 믿음에 빠지는 이유로 사용하고 있었으니까요. 물론 오늘 우리는 이스라엘만큼은 심각하지 않은지도 모르지만 혹시 우리에게도 이런 모습은 없는지 잘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저 무엇을 하고 있기 때문에 괜찮고, 또 이것이 있기 때문에 괜찮다고 생각하는 것은 없는지 말입니다. 예배를 드리기 때문에 괜찮고, 헌금을 드리기 때문에 괜찮고, 교회에 다니기 때문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고, 그저 내가 신앙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 사실만으로 나는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그런 생각은 없는지 말입니다. 


기독교는 삶의 종교이고 마음의 종교입니다. 예배를 드리러 올 때는, 그 동안의 자신의 삶을 들고서 와야 합니다. 말씀대로 살아가려고 애쓰고 힘썼지만 또 실패하고 넘어진 찟어지고 무너진 자기 삶에 대한 가난한 마음을 들고, 다시 용서하시고 회복시켜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기대하며 하나님께 나와야 합니다. 또 언제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그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서 애쓰며 살아야 합니다. 또 그 말씀에 자신의 속 사람의 모습을 비춰보면서 하나님 앞에서 계속해서 자기 속사람을 다루어 내야 합니다. 여전히 부족하고 불완전하지만 그래도 내 속에 더 진하게 새겨질 하나님의 거룩한 형상을 기대하고 소망하면서 말입니다. 그래야 거기 참 은혜가 있고, 참된 변화가 생겨날 수 있습니다. 참 은혜를 기대하는 가슴 벅찬 소망과 우리 속에 만들어져 가는 거룩함이 주는 참 기쁨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그런 신앙이어야, 그렇게 삶을 담아내고 또 마음을 담아내는 그런 신앙이어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 우리 신앙은 하나님과 나 사이의 의미있는 관계가 될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신앙 안에는 ‘하기만 하면’ 되고, ‘가지고 있기만 하면’ 되는 절대반지 같은 것은 없습니다. 그런 것이 생겨나게 내버려 두면 안됩니다. 우리는 오히려 그렇게 생각되는 것들이 생겨날 때마다 그런 것들을 없애야 합니다. 참 쉽지 않고, 언제나 그렇게 하기는 더더욱 어렵지만 신앙의 그릇에 언제나 삶을 담고 마음을 담아내려고 애쓰는 우리들이 되고, 또 그렇게 하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언제나 그렇게 굳어지지 않고 새 부대로 남아 있는 우리들이 되어서 언제나 새롭게 담아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과 평강 가운데 사는 우리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