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현교회 설교,강의/새벽예배

2016.01.27. 새벽예배 - 성경읽기와 묵상(예레미야 15-16장)





20160127D (#1).mp3.zip





설교일 : 2016년 1월 27일 수요일





오늘 우리는 함께 읽은 첫 구절부터 우리의 마음을 무겁게 하고 또 슬프게 만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됩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모세와 사무엘이 내 앞에 설지라도 내 마음은 이 백성을 향할 수 없나니 그들을 내 앞에서 쫓아 내보내라” 처음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통해서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실 때만해도, 그런 무시무시한 하나님의 말씀들은 아직 확정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말씀들을 듣고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이킬 것을 기대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아무리 심하게 말씀하셔도 그 말씀을 듣지 않으셨고, 오히려 하나님을 대신해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경고를 전하는 예레미야를 핍박하고 힘들게 했습니다. 점점 더 하나님도 지치기 시작하셨고, 또 예레미야도 지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에게는 생소할지 모르지만 성도들이 계속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면 하나님도 지치십니다. 질리하시고 신물나 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이구요. 15장 처음에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 그리고 15장 10절 이하에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은 이제 하나님도 그리고 그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예레미야도 그렇고 지치고 신물나 있는 상태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제는 더 이상 그 무엇도 소용이 없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자신은 고사하고 만약에 모세나 사무엘이 하나님 앞에 와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서 기도한다고 해도 하나님은 그 뜻을 돌이키실 생각이 전혀 없으시다고, 이제 그렇게 뜻을 돌이키시는데 아주 질려 버리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아얘 가나안 땅에서 쫓아 내버리시겠다고 선고하십니다. 그러면서 이런 말씀도 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디로 가야 하느냐고 물으면, ‘죽을 자는 죽음으로 나아가고 칼을 받을 자는 칼로 나아가고 기근을 당할 자는 기근으로 나아가고 포로될 자는 포로됨으로 나아갈지니라’라고 대답하라고 말입니다. 


저는 이 부분을 읽으면서 ‘어떻게 하나님이 저렇게 말씀하실 수 있지?’라는 생각을 하거나 ‘이제 큰 일 났구나’라는 생각이 들기 전에, 마음이 많이 슬퍼졌습니다. 일을 이지경까지 만들어 놓아 이제는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린 이스라엘과 그런 이스라엘을 향해서 이렇게까지 말씀하실 수 밖에 없는 하나님을 생각할 때, 참 마음이 슬프고 안타까웠습니다. 


원래 하나님은 그 당시만 해도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셨습니다. 만군의 주이시고 온 세상의 주인이시지만, 그래도 특별하게 ‘이스라엘만’ 아시는 그런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그런 하나님의 백성이었습니다. 이 세상에 하나 밖에 없는 택한 족속, 거룩한 제사장 나라였습니다. 실제로 자녀이기도 했고 신부이기도 했습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은 서로가 서로에게 이렇게 특별한 존재였습니다. 그랬던 둘 사이의 관계가 이렇게 망가져 버리다니, 아니 이렇게 망가져 버릴 수 있다니 그 사실이 참 마음 아프고 안타까웠습니다. 그리고 오늘 성도들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오늘 성도들은 이 시대의 이스라엘입니다. 그래서, 교회와 성도들은 그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대해서 가지고 있었던 그 각별한 의미를 그대로 지니고 있습니다. 아니, 그 때 이스라엘 백성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소중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미 예수님께서 교회와 성도들을 위해서 생명을 내어 놓아 그들을 다시 살리셨고, 그 안에 하나님의 영을 보내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비록 우리가 그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대놓고 우상숭배하고 하나님을 멸시하지 않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그 양상 면에서는 그 때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실제적인 면에서는 하나님을 멀리하고 있고 하나님과 충분히 의미있는 관계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 보다 세상에 속한 것들을 더 좋아하고 더 귀하게 여기고,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기 보다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자기 생활을 이어가고 있는 모습이 훨씬 더 지배적입니다. 개개인 모두가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오늘 교회와 성도들의 전반적인 모습인 것 만큼은 사실입니다. 


오늘 교회와 성도들은 어쩌면 하나님에 대해서 너무 편하고 느슨하게만 생각하고 있는 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해도, 또 내가 어떻게 해도 항상 변함 없이 그 자리에 계시면서 내가 원하는 그런 모습으로 나를 대해 주시는 그런 분으로 생각하고 있지 않은가 합니다. 그러니 하나님과 자기 사이의 관계를 예민하게 살피지 않고 그 관계가 상당히 소원해 져도 그것에 대해서 아무런 심각함을 느끼지 못한 채로 그저 살던 모습 그대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겠지요. 


하나님과 우리들 사이의 관계는 절대로 ‘적당한’ 관계가 아닙니다. 이 관계는 아주 특별하고 각별한 관계이며, 절대로 적당한 관계가 되어서는 안되는 그런 관계입니다. 그렇게 특별하고 각별한 관계로 유지될 때, 비로소 참으로 의미있고 능력있는 그런 관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너무 느슨한 채로 오랫동안 살아가면 하나님께서 나에게 질려하지 않으실까,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에 너무 오랫동안 무관심해 하면 하나님의 마음도 그렇게 되지 않으실까 하고 예민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우리 자녀나 남편, 그리고 마누라 눈치 보는 정도도 하나님의 눈치를 보지 않으면서 살아간다면 그것은 결코 정상적인 신앙인의 모습이 아닐 것입니다. 


벽 하나가 완전히 무너지는 일도 처음에는 작은 균열로 부터 시작됩니다. 하나님과 우리들 사이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에는 알아차리기 힘든 문제로 부터 시작합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을 오래 내버려 두면 그 관계는 결국 완전히 무너져 내릴 수도 있습니다. 적어도 현실 속에서는 말입니다.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관계는 절대로 질려하고 물려하는 그런 관계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항상 새롭고, 항상 생생하며, 굴곡은 조금 있을지라도 계속해서 더 깊어지고, 풍성해지는 그런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언제나 내가 하나님 앞에서 살고 있는 모습, 또 내가 하나님을 대하는 모습을 민감하게 살피셔서 결코 가지 말아야 할 자리까지는 가지 않는 우리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