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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수요일 저녁

2016.01.28. 수요저녁 -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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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히브리서 12장 1-13절




서론 : 한 해를 정리하며


벌써 올해도 마지막 수요일이네요. 여러분의 올 한 해는 어떠셨는지 모르겠습니다. 개인적으로 보면 올 한해는 제 인생에서 최고로 무겁고 힘든 한 해 였습니다. 오늘 제가 이 자리에 서 있을 수 있는 것 자체가 저에게는 기적이요 가장 큰 은혜로 여겨질 정도로 제 삶과 사역의 모든 구석 구석이 흔들렸던 한 해 였습니다. 그래서, 아직 그 지진의 여진들이 완전히 멈추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이렇게 흔들리는 가운데서도 한 해를 또 달려왔고 그 마지막 지점에 서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정말 가슴아프도록 감사합니다. 


우리의 인생은 평생을 달려야 결승선을 통과할 수 있는 기나간 마라톤 경주입니다. 우리는 각자 달려온 거리는 다르지만 올 한 해를 달려 여기까지 왔습니다. 생활인으로서 그리고 성도로서 말이지요. 그리고 우리는 또 한 해의 경주를 눈 앞에 두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한 해의 경주를 마무리하고 또 한 해의 경주를 달음질해야 하는 시점에서 말씀을 통해서 한 해를 되돌아 보고 또 한 해의 달음질을 준비하는 기회를 가져 보려고 합니다. 


신발 속의 모래 알갱이


언젠가 한 기자가 미국의 뉴욕에서 샌프란시스코까지 약 4300킬로미터를 걸어서 완주한 사람을 인터뷰한 적이 있었습니다. 기자가 물었습니다. 그렇게 대단한 일을 해 냈는데, 걷는 동안 무엇이 가장 힘들었느냐고 말이지요. 기자는 거창하고 철학적인 대답을 기대했지만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산을 오르고, 끝없이 펼쳐진 뜨겁고 건조한 사막을 건너는 것이 가장 힘든 순간이 아니었습니다. 나를 거의 포기할 뻔하게 만든 것은 바로 신발 속의 모래 알갱이였습니다.” 


여러분은 누군가가 여러분에게 여러분의 믿음의 경주에 있어서 가장 큰 어려움, 가장 큰 장애물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무엇이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아마도 우리는 저마다 이 경주를 힘겹게 하고 고통스럽게 하는 ‘신발 속의 모래 알갱이’를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자신의 내면적인 것일 수도 있고, 혹은 환경적인 것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중간 중간에 끼어드는 피치 못할 사건들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그 모든 것을 ‘징계와 꾸지람’이라는 한 마디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말들은 우리의 인생이라는 믿음의 경주가 원래부터 포함하고 있는 고통과 어려움들을 하나님의 눈으로 표현한 말입니다. 이런 징계와 꾸지림아 있기 때문에 이 경주는 절대로 만만한 경주가 아닙니다. 행복하기만한 여정도 아니고 동네 마실나가듯이 어영부영 따라 나선다고 누구나 다 마칠 수 있는 그런 경주도 아닙니다. 이 경주 속에는 우리가 참고 견디어야 할 어려운 난관들과 감수해야할 불편함과 손해들 그리고 고통을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크든 작든 많든 적든 그 모든 것들을 견디어 내고 넘어서야만 결승선을 통과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경주 자체가 이런 특징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 경주를 끝까지 마치고 영광스러운 결과를 얻으려면 우리는 먼저 이 경주에 필요한 준비가 무엇인지 알아야 하고 그 준비를 갖추어야 합니다. 


준비 1 : 영적인 외로움을 떨쳐버려야 한다. 


첫번째로 필요한 것은 달리는 사람이 나 혼자라는 영적인 외로움을 떨쳐 버리는 것입니다. 모든 의로운 길이 그렇지만 우리 믿음의 경주도 의로운 길을 가는 것이기 때문에 그 길을 제대로 가는 사람은 생각보다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경주를 하는 사람들은 영적인 외로움을 느끼게 됩니다. 나 혼자만이 이 길을 가고 있고, 그래서 너무 외로우며, 그렇게 해 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생각과 감정에 것입니다. 이런 생각이 찾아오면 사람은 허무해지고, 무기력해 지며, 자신만 손해보고 있다는 분노까지 느끼게 됩니다. 그 길이 옳다는 것을 모르는 것도 아닌데 그저 감정이 그렇게 흘러갑니다. 그렇지만 나 혼자라는 생각은 결코 사실에서 나온 생각이 아닙니다. 


성도는 그 어느 순간에도 혼자가 아닙니다. 혼자일래야 혼자일 수가 없습니다. 그저 그렇게 느껴질 뿐이지요. 1절은 우리에게 분명하게 말합니다.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혹시 지금 눈에 보이는 그 경주자는 나 혼자 밖에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경기장의 스탠드에는 이미 같은 경주를 마치고 이제는 자신들이 달렸던 그 트랙을 달려가는 나를 향해 환호와 박수를 보내는 영광스러운 관중들이 있습니다. 또 내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다른 경주장에도 똑같은 경주를 벌이는 선수들도 있습니다. 수많은 경기장에서 수많은 경주자들이 그렇게 달리고 있습니다. 혼자입니까? 아닙니다. 경주를 계속하기 위해서 제일 먼저 떨쳐 버려야 할 생각은 ‘나 혼자’ 이 경주를 벌이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우리가 혼자 경주하는 것도 아니지만 사실 혼자라고 하더라도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만약 이 믿음이 경주가 어렵고 외로워서 아무도 참여하지 않는 경주라면, 그만큼 내가 이 경주를 마쳤을 때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실 상급은 크고 영광스러울 것이 분명하니까요. 


준비 2 : 모든 무거운 것과 얽메이기 쉬운 죄를 떨쳐 버려야 한다.


두번째로 필요한 것은 우리의 몸을 최대한 가볍게 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지금 달리고 있는 이 경주가 완전군장으로 훈련장을 달리는 구보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경주는 몸과 영혼을 가장 가볍게 해야만 끝까지 달려갈 수 있는 그런 경주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 뿐만이 아니라 성경 전체가 일관되게 이야기하고 있는 믿음의 경주에 관한 설명입니다. 단거리 경주도 마찬가지이지만, 장거리 경주에는 단 몇 그람의 차이도 경기 결과에 있어서는 엄청난 차이를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만약 마라톤 선수의 신발이 100그람 정도 더 나간다고 한다면 그는 거의 세 시간을 그 무게를 더 짊어지고 달리는 것이나 마찬가지가 됩니다. 믿음의 경주는 단거리 경주가 아닙니다. 이 경주는 평생이 걸리는 긴 경주이기 때문에 작은 차이도 결과의 큰 차이를 만들어 냅니다. 그래서 믿음의 경주자는 최대한 몸을 가볍게 해야 합니다. 버릴 수 있는 것은 모두 버려서 자신을 가볍게 만들어야만 합니다. 오늘 본문은 그것을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라고 말합니다.


죄는 언제나 욕심과 욕망을 통로로 삼아 우리에게 찾아옵니다. 그리고는 우리의 과거에 는 후회와 죄책감을 남겨놓습니다. 미래에는 근심과 걱정을 놓아두지요. 후회와 죄책감은 뒤에서 우리의 발목을 잡는 과거가 만들어 놓은 장애물이고, 근심과 걱정은 우리 앞에 놓인 장애물입니다. 실제로 수많은 성도들이 이 두 가지에 묶이고 눌려서 믿음의 경주를 하면서 필요이상으로 힘겨워하고 무기력해져 있습니다. 그래서, 정상적인 경주를 계속하고 영광스러운 결과를 얻기 원한다면 어떻게든 이 두 가지를 해결해야 합니다. 이 문제에 대한 해결방법은 뒤에 전체를 정리할 때, 함께 살펴 보겠습니다. 


준비 3 : 끝까지 달리게 하는 힘의 근원을 놓치지 말라


세번째로 필요한 것은 언제든지 자신의 페이스를 지키는 일입니다. 페이스가 깨져버리면 더 이상 경기가 불가능해져 버릴 수도 있습니다. 페이스를 지키는 일은 그만큼 중요합니다. 믿음의 경주에서도 페이스를 잘 지켜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미리 지쳐 버려서 경기를 중간에 포기하게 되기가 쉽습니다. 성도가 성도로서의 페이스를 지키려면 이 경기에 필요한 힘은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경주를 시작할 믿음을 주시고 그 믿음을 끝까지 붙들어 주시는 분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이 우리 믿음의 주인이시고, 그 믿음을 온전케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성도는 항상 그 믿음의 눈을 그리스도께 고정해야 합니다. 이 말은 다른 뜻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을 할 때, 언제나 예수님께서 주시는 은혜에 의지해서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믿음의 경주의 성공과 실패는 다른 것이 아니라 내가 얼마나 예수님의 은혜에 의지해서 살아갔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또 같은 경주를 하는 다른 이들과 경쟁하려고 해서도 안됩니다. 이것은 남을 이기기 위한 경주가 아니라 죄와 싸워 이기기 위한 경주이고, 또 끝까지 경기를 마치기 위한 경주이기 때문입니다. 


준비 4 : 이 경주의 과정이 하나님의 징계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이해하라 


마지막으로 필요한 것은 이 경주의 성격에 대한 완전한 이해입니다. 믿음의 경주는 평생을 달려야 하는 최장거리 경주인 동시에 장애물 경기이기도 합니다. 여기에 우리가 달리는 이 경주의 진짜 어려움이 있습니다. 종종 말씀드리지만 우리는 누구나 올바른 길, 의로운 길을 가면 가는 길이 평탄할 것이라는 은근한 기대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렇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믿음의 경주는 뛰어 넘어야 할 장애물의 연속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 믿음의 경주를 이렇게 만들어 놓으신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로 신발속의 모래 알갱이가 경주자의 경주를 향한 의지의 검증하는 도구가 되듯이, 난관과 고통들은 우리의 믿음이 진짜인지를 검증해 줍니다. 우리 믿음이 진짜 믿음이라면 우리는 그 모든 것들을 무릅쓰고 그 길을 믿음으로 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그것 때문에 우리 믿음이 심히 흔들리고 심각한 문제가 생겨난다면, 그것은 우리 믿음이 아직은 참된 것이 아니거나 혹은 우리 믿음에 문제가 생겼다는 신호일 수도 있습니다. 


두번째는 하나님은 바로 그런 과정을 통해서 우리에게서 ‘의의 평강한 열매’가 맺혀지게 하십니다. 우리의 성품이 하나님의 성품으로 변화되고 거기서 성령의 열매가 맺히는 되는 것은 아무런 과정 없이 그냥 어느 순간에 그냥 되는 것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구체적인 과정이 꼭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 과정에는 반드시 징계 그러니까 힘든 훈련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의 믿음의 경주가 이루어지는 이 ‘세상’이라는 경기장이 어떤 곳입니까? 그 곳은 이미 악한 일들이, 반칙이 정상이 되 되어버린 그런 곳입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들이 더 많은 곳입니다. 그런데 성도는 바로 거기서 믿음의 경주를 해야 합니다. 그래서 성도는 마치 모두가 반칙을 사용하는 경기장에서 규칙을 모두 지키며 끝까지 경주를 마쳐야 하는 상황에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이 과정은 항상 우리에게 고통을 가져다 줍니다. 손해를 보고 오해 받을 것을 요구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런 모든 것들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선한 것을 선택하며 그 경주를 계속할 때, 우리 삶에서는 ‘의의 평강한 열매’들이 맺혀지게 됩니다. 그리고 이 열매가 바로 우리를, 그리고 우리의 믿음을 진짜 보석같이 빛나게 만들어 줍니다. 


결론 : 마지막 준비... 앞에 있는 기쁨을 바라보자


이제 내년의 경주, 그리고 앞으로 남은 경주를 잘 마치기 위해서 필요한 마지막 준비로 넘어가려고 하는데요. 실제로 이 준비가 빠지면 앞의 준비는 모두 소용없어지고 만큼 이 준비는 가장 중요한 준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이것은 예수님께서 예수님의 믿음의 경주를 끝내실 수 있게 해 주었던 것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참으시고 그 부끄러움을 전혀 개의치 않으실 수 있으셨던 비결이기도 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었을까요? 그 비결은 바로 “그 앞에 있는 기쁨을 바라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기쁨, 앞에 있는 기쁨을 볼 수 있는 믿음의 시력을 회복하는 것이 이 경주를 성공적으로 마치기 위해서 필요한 가장 중요한 준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도님들 중에는 신앙과 그 신앙 때문에 겪게되는 어려움과 감당해야 할 손해들의 관계에 대해서 오해하고 계시는 분들이 참 많습니다. 그런 것들을 신앙을 ‘위해서’ 부담해야할 ‘비용’이라고, 생각하고 그 소중한 것을 가지고 있으니까 감내해야할 ‘숭고한 희생’ 정도로 여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이런 생각부터 바꿔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신앙에서 ‘순수한 희생’은 없습니다. ‘가치있는 희생’이나 혹은 ‘내려놓음’같은 것은 없습니다. 이상하게 들리실지 모르지만 사실입니다. 만약 우리 신앙이, 그리고 하나님이 그걸 우리에게 요구한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또 다시 ‘자기 의’를 요구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에는 단지 더 큰 영광, 더 큰 만족, 완전한 기쁨을 위한 투자만이 있을 뿐입니다. 신나는 신앙생활을 하려면 이것을 이해하는 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2절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거기서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에게 예수를 바라보자고 권면해 놓고서 예수를 바라보는 것이 무엇인지를 이런 말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참으실 수 있으셨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무엇이 그 엄청난 수치와 고통을 받아내실 수 있게 해 주었고, 무엇이 그 분에게 쏟아진 하나님의 저주까지도 참고 견디게 해 주었지요? 단순히 그 분이 가지고 계신 희생정신이었습니까? 인내심이었을까요? 우리를 향한 사랑과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었습니까? 물론 이런 모든 것들도 중요한 이유가 되기는 했겠지만, 히브리서는 가장 중요한 이유를 예수님이 “그 앞에 있는 기쁨”을 바라보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가장 소망하고 계셨던 것, 가장 좋아하셨던 것,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셨던 것은 ‘하늘에서 하나님과 함께 영원한 영광을 누리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실 수 있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는 ‘자기 앞에 있는 기쁨’을 바라보며 느끼는 만족이 십자가의 고통과 수치보다도 훨씬 컸기 때문에 그런 것들을 개의치 않고 십자가를 지셨던 것입니다. 쉽게 말씀드려서 투자해야 할 것에 비해 얻을 수 있는 것이 비교할 수 없이 크다는 확신이 있으셨기 때문에 그 모든 것들을 넉넉하게 감당해 내셨던 것입니다. 


위에서 나중에 다시 살펴보기로 하고 넘어온 것이 있었지요? 그것은 바로 믿음의 경주를 다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려야 한다는 부분이는데요. 이제 이 부분을 좀더 살펴보고 오늘 말씀을 마무리 하겠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성경에서 우리에게 무언가를 요구하는 말씀을 만날 때,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성경이 무엇을 요구할 때는 결코 우리를 손해보는 길로 인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실 ‘무거운 것들’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쉽게 떨쳐 버리지 못하는 것은 그것들이 주는 기쁨과 만족감 때문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이런 말씀 앞에서 머뭇거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런 것들을 버리고 떠나라고 하시는 이유는 그렇게 해야만 우리 손에 쥐어질 수 있는 더 좋은 것, 비교할 수 없이 좋은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게 무엇일까요? 바로 ‘앞에 있는 기쁨’입니다. 


이 기쁨을 보고 또 가지려면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려야만 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것들을 벗어버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만약 우리의 눈에 ‘앞에 있는 기쁨’이 보이지 않는다면, 우리가 이 귀한 것을 볼 수 있는 영적인 눈을 뜨지 못한다면 우리는 결코 무거운 것들과 얽매이기 쉬운 죄들을 벗어 던지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주는 만족과 찰나의 기쁨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을 찾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도에게는 이 눈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하늘의 영원한 기쁨을 여기서 볼 수 있는 눈이 꼭 필요합니다. 우리 주님께서도 이 기쁨을 보셨기 때문에 십자가를 지실 수 있으셨다면 우리는 말할 필요도 없지 않겠습니까? 만약 우리가 이 기쁨을 모른다면, 이 은밀한 기쁨을 모른다면 우리는 이 경주를 기쁘고 가볍게 그리고 끝까지 달려갈 수 없을 것입니다. 


무슨 경주이든 무엇을 위해서 달려야 하는가 하는 목적이 중요합니다. 목적없이 힘들게 훈련하고 목적 없이 최선을 다해 달릴 수 없으니까요. 우리 신앙의 경주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신앙의 진짜 목적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무엇 때문에 우리 삶의 마지막 까지 우리 삶의 경주, 우리 믿음의 경주를 계속해야 하지요? 바로 ‘앞에 있는 기쁨’ 때문입니다. 하나님만 우리에게 주실 수 있는 영원한 기쁨과 만족 때문에 우리는 이 경주를 계속해야 하는 것입니다.  


한 해의 달리기를 마무리하고 또 한 해의 달리기를 준비하실 때, 꼭 ‘앞에 있는 기쁨’을 보게 해 달라고, 그 기쁨을 더 확실하게 볼 수 있는 ‘눈’을 뜨게 해 주시고, 시력을 회복시켜 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내년 한 해도 그 기쁨을 얻기 위해서 필요한 모든 준비를  잘 갖추고 또 다시 주어진 한 해 만큼의 경주를 잘 달려가는 영광스러운 경주자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