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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새벽예배

2016.01.29. 새벽기도회 - 성경읽기와 묵상(예레미야 19-20장)


* 오늘은 도로결빙관계로 새벽기도를 모이지 못했습니다.





설교일 : 2016년 1월 29일 금요일





우리 몸은 하나이지만 여럿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부분 부분은 저마다 몸에서 나눠받은 역할이 있고 그 역할에 따라서 다 다른 이름으로 불리우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몸은 그 모든 부분 부분이 제 역할을 다해 주기 때문에 몸 전체의 기능을 다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물론 하나도 빠짐 없이 다 그렇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신앙적으로 볼 때도 우리 몸의 각각의 부분은 우리의 신앙을 온전하고 건강한 신앙이 되게 하기 위해서 각자가 맡은 기능이 있습니다. 손은 섬김고 일해야 하며, 발은 죄악된 곳이나 악인들이 가는 길이 아닌 바르고 의로운 길로 가야 합니다. 눈은 이 세상에 속한 헛되고 무가치한 것들이 아니라 참되고 소중한 것들과 우리 주님께 집중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몸의 각 부분 중에서 우리의 영적인 생활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귀’입니다. 귀가 우리 신앙생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는 이유는 이 귀가 우리 몸의 지체들 중에서 유일하게 하나님이 말씀을 받아들이는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눈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때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그 눈이 귀가 되어서 우리 속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되는 것이니까요. 우리의 머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할 때도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그 생각을 통해서 더 깊이 듣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몸을 움직여 순종할 때도,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들었다면 우리는 결국 그 말씀에 순종하게 되어 있으니까요. 


예레미야는 하나님께서 전하라고 하시는 말씀을 그대로 전했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 돌아온 것이라고는 심한 핍박 밖에 없었습니다. 제사장이면서 그 당시 성전의 총 감독이던 임멜의 아들 바스훌이 예레미야의 예언을 듣고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을 바른 방향으로 이끄는 대신에 오히려 예레미야를 잡아서 심하게 때리고 묶어 버린 것입니다. 물론 그래도 예레미야는 그 바스훌에게 계속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네가 이스라엘을 멸망하게 할 장본인이며 결국 너 자신도 타국에 포로로 잡혀 가게 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예레미야가 그 일을 한 것이 그가 즐거워서 그렇게 한 것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풀려난 예레미야는 하나님께 이렇게 항변합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권유하시므로 내가 그 권유를 받았사오며 주께서 나보다 강하사 이기셨으므로 내가 조롱거리가 되니 사람마다 종일토록 나를 조롱하나이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꼬득이셨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꼬득임에 넘어 갔습니다. 또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부름받은 예레미야가 하나님을 이길 수는 없는 일이었습니다. 또 때로는 절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지 않겠다고 버텨 보기도 했지만, 그럴 때면 예레미야의 마음이 불에 붙은 것같이 뜨거워지곤 했습니다. 그 고통이 뼈에 사무칠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매번 자기가 전하기 싫은 말씀, 그리고 사람들이 듣기 싫어하는 말씀, 그렇지만 하나님의 말씀인 것이 분명한 것들을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했습니다. 그 결과 그에게 돌아온 것은 핍박과 조롱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심지어는 친한 벗도 그런 바른 말 하는 예레미야가 실수를 하고 절망에 빠지기를 바랄 정도였습니다. 


이 일에 따르는 고통에 얼마나 심했으면, 예레미야는 자신의 출생과 생일을 저주합니다. 심지어는 자기가 태어난 소식을 아버지에게 전한 사람에게까지 저주가 임했더라면 좋았겠다고 그렇게 말했습니다. 대놓고 그렇게 하지는 못했지만 자신을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해서 그 고생을 시키고 있는 하나님께 대해서도 깊은 원망의 말을 늘어놓았습니다. 


원래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그 어떤 때에든지 환영을 받고 기쁨을 주는 그런 것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전하는 사람들에게 그 일은 무엇보다도 영광스럽고 사랑스러운 일이 되어야 합니다. 정상적인 경우에 하나님의 말씀은 성도들에게 꿀과 송이꿀보다도 단 것이고, 발의 등이고 길의 빛이 되며, 그 영혼을 만족케 하며 소생케 하는 능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현실 속에서는 그렇게 되지 않을 때가 굉장히 많습니다. 그 이유는 말씀을 들어야 하는 인간이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죄인이라는 뜻은 인간의 모든 기능이 정상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특히 영적인 기능은 더 심각하게 망가져 있다는 뜻이지요. 그래서, 그래도 성도가 하나님과 바른 관계 속에 머물러 있고 또 그 관계를 소중하게 여길 때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을 아프게 하고 힘들게 해도 그 말씀을 귀 기울여 듣습니다. 그 말씀을 받아들이고 거기 순종하려고 애쓰게 됩니다. 그렇지만 성도가 은혜에서 멀어지게 되면, 실은 그 때야 말로 말씀의 새롭게 하시고 고치시는 은혜가 가장 절실하게 필요한 때인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싫어하게 됩니다. 물론 모든 말씀에 대해서 다 그런 것이 아니지요. 너 잘한다, 아무래도 괜찮다, 나는 그래도 너에게 복을 줄 것이다, 평안해라. 힘을 내라… 뭐 이런 말씀들은 즐거워 하며 듣습니다. 그렇지만, 자신의 현재 영적인 상태에 대한 진단이나 혹은 바른 길을 제시하면서 그 길로 돌아오라는 그런 말씀들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어하고 오히려 귀찮아 하게 됩니다. 자신에게 그럴 힘이 있다면 바스훌처럼 그런 말씀을 전하는 일을 못하게 합니다.


정상적으로라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이 전하는 사람에게 부담스럽고 힘든 일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 말씀은 성도들이 믿고 사랑하는 하나님의 말씀이니까요. 그렇지만 역사를 살펴보면 그랬던 적은 거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전하는 일은 거의 항상 전하는 사람들에게 심한 부담과 고통을 가져다 주었고 두려움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이미 하나님을 믿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철저히 자기 중심적인 죄성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본능적인 귀, 거듭나지 않은 귀, 그리고 나를 중심으로 기울어져 있는 귀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거듭난 귀, 새로워진 귀, 하나님께서 열어주신 믿음의 귀를 통해서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려고 애쓰고 힘쓸 때, 우리의 귀는 우리의 복된 신앙생활을 가로 막는 역할이 아니라, 우리를 참 성도의 영광스러운 삶으로 인도하며 언제나 우리를 회복시키는 하나님의 은혜의 통로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귀는 정말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달게 들을 수 있는 귀가 닫히지 않도록 하는 일은 정말 정말 중요합니다. 그 귀가 우리를 회복시키고 복되게 하는 우리 영혼의 가장 소중한 지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각자가, 그리고 우리 광현 교회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아파도 힘들어도 달게 듣고 반응하는 복된 귀를 지니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