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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새벽예배

2016.02.16. 새벽예배 - 성경읽기와 묵상(예레미야 39-40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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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일 : 2016년 2월 16일 화요일




때로는 사람이 누구의 말을 듣고 믿고 따르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삶은 정말 완전히 달라질 수도 있습니다. 그 말이 별로 중요한 이야기가 아니라면 그 충격이 크지 않겠지만, 그 말이 그 사람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그런 내용이라면 그 충격이 무척 클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떤 사람의 이야기를 들을 때는 그 사람이 정말 믿을만한 사람인지에 대한 분별력과 그 사람이 지금 나에게 하는 이야기가 얼마나 중요한 이야기인지, 그래서 듣고 따라야 할 이야기인지 아닌지를 분별할 수 있는 분별력을 가지는 일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물론 그 분별력을 갖추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닐 수도 있으니까요.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예레미야 39장은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분명하게 알려 줍니다. 시드기야는 사실상 유다의 마지막 왕이었지만 아무런 힘이 없는, 바벨론이 유다를 완전히 망하게 하기 직전에 임시로 세워놓은 왕이었습니다. 역시나 그는 그런 왕 답게 주변의 정세나 주변의 권력에 대해서 많은 영향을 받고 있으며, 거기에 덧붙여서 하나님의 말씀에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특히 유다의 운명과 자기 자신의 운명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지요. 그래서, 여러차례 예레미야를 불러다가 나라가 어떻게 될 것인지, 그리고 자기 자신의 운명이 어떻게 될 것인지를 물었습니다. 아주 진지하게 말이죠. 그래서 예레미야는 분명하게 전해 주었습니다. 유다는 분명히 망하게 될 것이다. 그 일을 피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바벨론에게 항복하면 아무 일이 없을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39장 4절부터 보면 시드기야는 그렇게 묻고 그렇게 들어놓고서 전혀 그 말을 따르지를 않았습니다. 군사들과 함께 야반도주를 합니다. 그러다가 결국 바벨론 군대에게 잡히게 됩니다. 바벨론 왕은 립나에서 시드기야가 보는 앞에서 그의 아들들을 모두 죽입니다. 그리고, 시드기야의 눈을 빼 버립니다. 그리고 사슬로 결박해서 그를 바벨론으로 끌고 갑니다. 정말 안타까운 일이지요. 이미 여러차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묻고 또 분명하게 들어 알고 있으면서도 그저 자기 마음대로 하다가 그런 비극의 주인공이 되었으니 말이지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그 과정 속에서는 참 많이 힘들고 고통스러웠지만 그래도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따랐더니 결국 그 난리 통에도 무사할 수 있었던 한 사람이 나옵니다. 바로 예레미야 자신입니다. 예레미야는 어제도 살펴 보았지만 정말 힘들어 하고 두려워 하면서도 하나님께서 그에게 맡기신 일을 끝까지 해 냈습니다. 그렇지만 그가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예레미야 자신의 의지나 인내 같은 개인적인 자질 덕분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임무를 맡을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해 주신 약속을 붙들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 믿음이 100퍼센트 완전하지는 못했습니다. 말씀드린 대로 두려워하고 힘들어 하며 피하고 싶어했던 적도 있으니까요. 그렇지만 그는 그래도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었습니다. 그 약속이란 바로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을 행하면 하나님께서 그를 지켜 주셔서 그 누구도 예레미야에게 손을 대거나 해치지 못하게 해 주시겠다는 약속이었습니다. 얼핏 보면 하나님께서 이 약속을 지키지 않으신 것처럼 보입니다. 그 과정에서 예레미야는 정말 많은 고난을 당하고 괴로움을 당했으니까요. 그렇지만, 우리가 성경에서 보는 ‘손을 댄다’는 말은 실제로는 죽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손을 대지 못하게 해 주신다는 말은 그 누구도 예레미야를 죽이지 못하게 지켜 주시겠다는 뜻이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정말로 그렇게 하셨습니다. 개인적인 어려움과 위기가 있었고, 또 나라가 멸망하는 위기 속에서도 안전할 수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나중에 예루살렘이 완전히 함락되었을 때, 예레미야는 바벨론의 사령관에게 특별대우를 받았습니다. 그의 손을 통해 자유를 얻었을 뿐 아니라, 함께 바벨론으로 가든지 본토에 남든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는 권한을 얻었으니까요. 


 두 사람의 운명은 정반대로 진행되었습니다. 그런데, 두 사람의 운명을 이렇게 전혀 다른 것으로 만든 것은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태도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두 사람 모두 하나님의 말씀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예레미야만 그랬던 것이 아니라 시드기야 왕도 그랬지요. 그러니까 두 번씩이나 갇혀 있는 예레미야를 꺼내서 그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해 들었습니다. 그렇지만 예레미야는 힘들고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따랐습니다. 그 믿음 덕분에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임무를 완수할 수 있었구요. 그렇지만 시드기야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분명히 항복하면 안전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고도 그 말을 존중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닥치는 대로 즉흥적으로 행동했습니다. 바로 이 차이가 두 사람의 삶의 방향을 완전히 반대로 만들어 놓았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둘 중에서 어떤 사람과 더 비슷합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따르기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그래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며 사는 쪽입니까, 아니면 분명히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기가 더 쉬운데도 그 뜻에 따르기 보다는 내 의지대로, 이 세상의 길로 가는 그런 사람입니까? 우리의 삶 속에서는 아마도 시드기야와 예레미야의 경우처럼 빠르게 그 결과가 드러나지 않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분명히 우리가 주님 앞에 서는 그 날에는 우리가 둘 중에서 어떤 사람을 더 많이 닮은 삶을 살았느냐,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취했느냐 하는 그 차이가 우리 각자의 운명에 영원한 차이를 만들어 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제대로 아는 것, 그 말씀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무척 중요한 일입니다. 그렇지만 거기서 끝나면 그 모든 일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가 말씀에 관심을 가지고, 귀를 기울여 듣는 이유는 그 말씀대로 따라 살기 위해서 입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데리고 가려는 곳으로 가는 것입니다. 거기까지 가야 하나님의 말씀은 비로소 우리 삶의 차이를 만들어 내는 능력있는 말씀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가 때로 힘들고 어려워도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서 그것이 우리 운명에 만들어 내는 영광스러운 차이를 경험하는 은혜를 누리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