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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주일예배

2016.02.21. 주일오전 - 너희의 믿음과 사랑을 나도 듣고(에베소서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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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에베소서 1장 15-19절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얼마나 엄청난 복을 주셨는지, 그리고 그런 복을 주신 목적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 이유는 성도가 자신에게 허락되어 있는 복되고 영광스러운 삶을 살아가려면 이 두 가지를 제대로 알고, 믿음을 통해서 그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 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창세전에 우리를 택하셨으며 예정하신 대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일을 가능하게 만드시기 위해서 피를 흘려 죄를 속하여 주셨고 우리가 하나님의 기업이 되게 하셨습니다. 성령님은 우리 구원을 보증하는 하나님의 도장이 되어 주셨고 또 하나님께 상속받을 하나님 나라에 대한 담보물이 되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구원과 영광을 확신하며 구원의 완성에 이르도록 우리를 인도해 해 주십니다. 성경은 이런 것들을 일컬어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이라고 말하며, 우리는 이미 이 모든 복을 모두 받았다고 증거합니다. 예수를 믿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복됩니까, 복되지 않습니까? 여러분은 우리 주님 안에서의 여러분의 삶이 복되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십니까? 이런 질문을 받으면 풍족하고 걱정 없는 삶이 먼저 떠오르십니까, 아니면 여러분이 구원이라는 복을 받은 하나님 나라의 영광스러운 상속자라는 사실이 먼저 떠오르십니까? 성도 여러분, 성도는요. 그저 남들이 그렇게 하는 대로 자신의 삶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렌즈를 통해 자신의 삶을 바라보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그 눈이 열려야 하지요. 그래야, 무엇이 있고 없음을 기준으로 해서 자신의 복을 평가하는 헛된 굴레에서 벗어나서 복음이 주는 참 자유를 누리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를 항상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며 살게 해 주는 힘과, 우리의 삶과 존재 자체가 하나님의 영광이 되게 해 주는 힘은 바로 이 자유에서 나옵니다. 우리가 이미 얼마나 엄청나게 복된 사람들인지를 제대로 깨닫고 실제로 그 복을 누리며 살기 시작할 때부터 우리는 우리 자신이라는 좁은 울타리를 넘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크고 넓은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인 우리는 원래부터 하나님의 영광이 되게 하기 위해서 지음 받았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이유이지요. 하나님의 형상만이 하나님의 영광을 제대로 나타낼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의 찬송이 되는 것은 원래 우리 자신의 모습, 우리답게 멋지고 영광스럽게 사는 원래의 우리 자리로 되돌아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들은 우리를 이런 삶으로 되돌려 보내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입니다. 이 복을 힘입어야만 다시 우리답게 살면서 하나님의 영광의 찬송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미 우리는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받았습니다. 천사들도 부러워하는 그런 복을 이미 모두 다 받았습니다. 이제 이 사실을 믿음으로 취하시기 바랍니다. 그 믿음만이 이 복을 여러분을 위한 여러분을 위한 것이 되게 해 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더 이상 스스로에게 복이 없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사탄의 그런 속임수에 고개를 끄덕이지 마십시오. 그런 생각이 고개를 들 때마다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하십시오. 한 번 따라해 보겠습니다. “나는 이미 하늘의 모든 신령한 복을 받았다, 이제는 이 복으로 정말 복되고 영광스럽게 살아야 한다, 하나님의 영광의 찬송으로 살아야 한다, 나는 이미 그렇게 복된 삶 속에 들어와 있다. 나는 바로 이 복과 영광을 누리기 위해 구원을 받았다” 믿습니까? 언제나 이 믿음 가운데 사시고 그 복과 영광을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기까지가 지나 주일까지 살펴본 내용인데요. 그 다음에 사도 바울은 이제 자신이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을 위해서 어떤 기도를 드리고 있는지에 대해서 말합니다. 그 내용이 1장 15절부터 19절까지에 나오는데요. 바울이 드리는 기도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에베소 교회 성도들로 인해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기도이고, 나머지 하나는 그들을 위한 간구의 기도입니다. 오늘은 이 두 가지 기도 중에서 바울이 드린 감사의 기도의 내용을 함께 살펴 보겠습니다. 


먼저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은 바울이 에베소 교회 성도들로 인해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도라면 누구나 남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이런 인사치레를 할 수 있습니다. 나는 당신 때문에 하나님께 많이 감사한다고 말이지요. 그렇지만 바울의 이야기는 그런 인사치레가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그냥 감사한다고 말한 것이 아니라 기도할 때마다 끊임 없이 감사하고 있다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한 두 번의 감사라면 몰라도 끊임없는 감사는 절대로 인사치레일 수가 없습니다. 이런 감사는 참된 감사이며, 감사할 수 밖에 없어서 저절로 터져 나오는 그런 감사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바울은 자신이 세우거나 돌보았던 교회들, 그리고 자신이 소식을 전해 듣는 모든 교회들을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간구의 기도를 드리곤 했지요. 교회마다 그래야만 하는 심각한 문제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에베소 교회를 위해서 기도할 때는 그런 눈물이 아니라 감사의 눈물을 흘릴 수 있었습니다. 그에게 들려온 에베소 교회에 대한 소식들은 바울이 탄식과 근심의 눈물을 흘리는 대신에 감사와 찬양을 올려 드리게 하기에 충분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일은 바울에게 얼마나 큰 기쁨과 위로가 되었을까요?  


성도 여러분, 신앙은 분명히 가장 내면적이고 개인적인 일입니다. 결국 내가 하나님을 믿는 것이고 내가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 신앙이기 때문이지요. 그렇지만 참된 신앙에는 항상 아름답고 향기로운 열매가 있게 마련이고, 그러한 향기와 열매는 성도가 서로 한 몸을 이루어 신앙생활을 해 나갈 때, 서로를 위한 최고의 위로와 기쁨이 되고 또 격려가 됩니다. 우리는 한 몸에 속해 있습니다. 교회라는 한 몸의 지체이지요. 우리가 가만히 우리 몸을 살펴보면 한 몸 안에 속해 있는 몸의 각 부분은 각각 그저 자신만을 위해서 존재하고 일하는 법이 없습니다. 몸의 각 부분은 서로가 서로의 유익을 위해서 일합니다. 그렇게 해서 몸이 무너지지 않게 서로 지탱하며 그렇게 세운 몸 안에서 모두가 유익을 얻는 방식으로 그렇게 살아갑니다. 우리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스스로 잘 믿는 것도 정말 중요합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한 몸의 지체이기 때문에 우리의 신앙은 서로가 서로에게 위로가 되고 격려가 되며, 믿음의 증거가 될 수 있는 그런 모양이 될 때, 정말로 영광스럽고  풍성한 신앙이 될 수 있습니다. 이 말은 우리의 신앙이 남을 위한 신앙이 될 때, 가장 바람직하고 아름다운 신앙이 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누군가가 내가 예수 믿는 모습 보고서 다시 믿음의 힘을 낼 수 있다면, 위로를 얻고 격려를 얻으며, 자기 믿음의 확신을 가질 수 있다면 그것처럼 나의 신앙을 영광스럽고 가치있게 하는 일이 또 있을까요? 우리가 이렇게 어우려져 신앙생활을 할 때, 교회 안에서 이런 일들이 풍성하게 일어난다면 그것보다 우리의 교회생활을 풍성하게 해 주는 일이 또 있을까요? 우리의 신앙이 이렇게 서로를 세우고 또 교회를 세우게 될 때, 우리는 나중에 하늘의 별처럼 빛나게 될 것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를 통해서 이런 일들일 정말 풍성하게 일어나기를 진심으로 소망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무엇 때문에 그런 끊임 없는 감사를 드릴 수 있었을까요? 어떻게 해서 에베소 교회 성도들의 신앙은 그렇게 영광스러운 신앙이 될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에베소 교회 안에는 믿음과 더불어 사랑의 증거가 풍성했었고, 이 두 가지야 말로 성도의 신앙을 참 신앙이게 만들어 주는 가장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십계명을 잘 아시지요? 십계명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모든 율법을 열 가지 계명으로 압축해 놓은 것인데요. 십계명이 요구하는 것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우선 십계명은 하나님만 믿고 하나님만 섬길 것을 분명하게 요구합니다. 언제나 하나님을 의지하며, 하나님 안에서 피난처를 찾고, 그 분만으로 만족하며, 그 분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갈 것을 요구합니다. 이것이 십계명의 앞쪽 절반을 차지하는 내용입니다. 십계명이 이렇게 하고 있는 이유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만을 믿고 신뢰하며 그 분만을 예배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에베소의 성도들 속에서 본 것은 바로 이 믿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생각할 때마다 감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 믿음을 그냥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라고 하지 않고 ‘주 예수 안에 있는 믿음’이라고 규정지어 말합니다. 바울이 이 믿음을 보고 그렇게 감사했다는 것은 성도의 믿음은 반드시 ‘주 예수 안에 있는 믿음’이어야 하는데, 그 일이 실제로는 그렇게 쉽지 않은 일이라는 뜻이 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의 믿음은 방향 없는 감정이 아닙니다. 그저 마음 속에만 있는 믿는다는 느낌이나 뜨거운 열정이 아닙니다. 우리의 믿음은 예수님을 우리의 주님으로 믿는 것이며 그 분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그래야만 할까요? 그것은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해 주실 분은 예수님 밖에 없고, 예수님만이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은혜들이 우리에게 부어지게 하는 유일한 통로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믿음은 ‘우리 주 예수 안에 있는 믿음’ 있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우리 믿음은 절대로 예수님을 벗어나면 안됩니다. 만약 우리의 믿음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세워진 그런 믿음이 아니라면 우리의 믿음은 언제나 방황하는 상태에 있을 수 밖에 없고, 예수님 안에서만 주어지는 복과 은혜는 기대할 수 없는 것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의 믿음을 확증하라는 바울의 권면을 따라 항상 우리 자신의 믿음을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나의 믿음은 과연 무엇 위에 세워져 있는가? 내 믿음은 나를 위해서 피 흘려 돌아가신 피묻은 십자가의 복음 위에 세우져 있으며, 내가 얻고 누리는 모든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 덕분에 나에게 주어지고 있다는 그 은혜로운 사실 위에 세워져 있는가? 그래서 나는 나의 믿음뿐만 아니라 실생활도 그리스도께 의지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세워가고 있는가? 나는 내 삶을 예수님을 믿는 믿음과 그 분께 대한 순종 위에 세워가고 있는가? 계속해서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들을 던져서 우리 자신의 신앙을 ‘우리 주 예수 안에 있는 믿음’이 되는 자리로 되돌려 보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참 믿음이 될 수 있고, 믿음을 통해 주어지는 풍성한 은혜를 누릴 수 있습니다. 


십계명의 앞쪽 절반이 하나님을 섬기고 사랑하는 방법에 대한 것인 반면에 십계명의 나머지 절반은 사람을 사랑하는 일에 대한 것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만큼 사람을 사랑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가장 중요한 계명이 무엇이냐고 묻는 율법선생의 질문에 모든 것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것과 같이 자기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이 모든 율법과 선지들이 말한 것의 전부라고 말씀해 주셨지요. 성도에게는 하나님을 믿어야 하는 의무가 있듯이 모든 사람들을 사랑해야 할 의무도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아직 죄인일 때 우리를 용서해 주셨으며, 악한 사람이나 선한 사람 모두에게 차별 없이 햇빛과 비를 내려주시는 선하신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성도의 사랑은 온 세상을 향하기 전에 우선적으로, 그리고 아주 특별하게 교회 안에서 함께 신앙생활을 하는 형제와 자매들을 향해야 한다고 분명하게 교훈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비로소 사람들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성도가 서로 사랑하는 것이야 말로 성도들의 가장 중요한 정체성이 된다는 뜻입니다. 사도 요한도 그랬습니다. 만약 서로 사랑하지 않으면 그 안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고, 성도가 서로 사랑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오늘 우리들은 사랑을 믿음과 떨어뜨려 놓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하면서 믿음만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기도 하지요. 이것은 아마도 우리가 믿음을 자꾸 우리 마음이나 지식에 대한 문제에만 국한시키기 때문에 생겨나는 일인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성경은 믿음에 대해서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사랑이라는 열매를 맺는 믿음이며, 그 열매를 통해서 자신을 드러내고 증명하는 그런 믿음입니다. 이렇게 될 수 밖에 없는 것이 본질적으로 우리의 믿음 자체가 하나님의 사랑이 씨앗이 되어 맺혀진 사랑의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믿습니다. 그 십자가를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큰 사랑을 믿지요. 사실 우리의 믿음은 그러한 하나님의 사랑에 설득되고 또 감동되어서 시작된 것이지 그냥 생겨난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은 모두 그 사랑 덕분에 예수를 믿고 함께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살게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요 성도 여러분, 그렇다면 이런 우리가 서로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죄인되고 원수되었던 우리가 그 사랑 덕분에 구원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살게 되었는데, 똑같은 아버지의 사랑 안에 있는 형제와 자매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정말 그래도 괜찮을까요?


교회 안에 정말 사랑하기 힘든 사람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사랑하기 힘든 점들을 많이 가지고 있는지 정말 그렇게 만들라고 해도 만들지 못할 정도이지요. 우리 교회는 안 그렇지만, 정말 희안하게 못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직접 그런 사람들을 심판하려고 할 필요는 없습니다. 내가 그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 일을 통해 그 사람을 벌주려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스스로 원수를 갚지 말라고, 원수 갚는 일은 너희들이 아니라 나에게 속한 일이라고 말이지요. 우리는 정확하게 원수를 갚지 못합니다. 그래서 어떤 방식으로든 우리가 원수를 갚으려고 하면 그것 자체가 우리의 허물이 되기 쉽습니다. 그것이 우리 삶과 이 세상에 또 하나의 악을 더하는 일이 되는 것은 물론이구요. 그래서 설사 원수 갚을 권리가 우리에게 주어져 있다고 하더라도 그 우리는 스스로 원수 갚는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원수는 우리의 심판주이신 예수님이 갚아 주실 것입니다. 그 모든 판단을 마지막으로 미뤄 놓으셨다가 아주 정확하고도 적절하게, 가장 공의롭게 그에게 갚아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이 진리를 믿을 때, 우리는 미워하고 악의를 품기 보다는 그래도 그 사람을 불쌍히 여기고 사랑할 수 있는 약간의 여유를 얻을 수 있고, 그 사람을 사랑하기 시작할 수 있습니다. 


혹시 이런 말씀을 드리면 그러다가 그 사람이 중간에 회개하면 어떻게 하느냐, 그 사람이 갑자기 이상해져서 예수를 믿고 착해지면 어떻게 하느냐, 그러면 예수님도 원수를 못 갚아주시지 않겠느냐고 걱정하는 분은 안계시겠지요? 성도 여러분, 성도는 그런 못된 생각을 하면 절대로 안되겠지요? 사실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난다면 그것보다 기쁜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것이야 말로 우리가 이 세상에서 지켜볼 수 있는 최고로 행복한 기적이 될테니까요. 


군대에는, 정말 운이 좋은 경우가 아니라면, 적어도 중대에 하나씩은 소위 ‘고문관’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있게 마련입니다. 여성분들을 위해서 부연설명 드리자면 그 사람이 ‘고문관’이라고 불리는 이유는 그 사람이 군대에 있다는 사실 자체가 다른 병사들에게는 고문과도 같은 고통을 안겨주기 때문입니다. 분위기 파악 못하지요, 행동 굼뜨지요, 말귀 못 알아듣지요, 고집불통이지요… 그래서 단체 행동을 할 때, 항상 이 사람이 문제가 되어서 고통스러운 얼차레를 받고, 한 번에 끝날 일도 몇 번씩이나 반복하게 됩니다. 그렇지만. 여러분, 생각해 보면 군대는 사실 이런 고문관 때문에 정말 군대다워지는 것이 아닐까요? 이런 사람들까지 끌어안고서 전우로서 하나가 될 때, 그 군대야 말로 정말 강한 하나가 될테니까요. 


교회도 그렇지 않겠습니까? 교회 안에 있는 얄미운 사람, 받아들이기 힘들고, 친하고 싶지 않은 사람… 이런 사람들을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일이 정말 정말 어렵지만 그렇기 때문에 교회는 교회다운 교회가 될 수 있는 것이 아닐까요? 우리가 거부할 수 없는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도 교회 안에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그러셨을까요? 왜 하나님은 아주 신앙 좋고 상식적인 사람들, 천사 같은 사람들만 모아놓지 않으시고 그런 사람들도 함께 교회 안으로 불러 모아 놓으셨을까요? 하나님의 뜻은 분명합니다. 그 사람을 용납하며, 용서하고 끌어 안으라고 그러신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까지 하나로 끌어 안을 수 있는 그런 훈련을 하라고 그러신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교회 안에 있는 고문관들을 끌어안고 사랑하는 훈련을 받고, 사회로 나아가 거기서 만나는 또 다른 고문관들을 용납하고 사랑하며 살라고 말이지요. 그렇게 우리가 그들과는 전혀 다른 곳에 속해 있다는 사실을 그들에게 증명해 보이며 정말로 하나가 되어 살라고 그러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 합니까? 꼭 사랑해야 합니까? 성도를 사랑하고 또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까? 그렇습니다. 그 사랑이 믿음을 증거하는 열매이고, 그것이 우리 신앙의 반쪽을 차지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교회만큼 그 사랑을 연습하기 좋은 곳이 없습니다. 대부분의 교회는 이익으로 묶여져 있지 않기 때문에, 나의 사랑 안에 사심이 있는지 없는지를 검증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곳이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서 많이 사랑합시다. 사랑하는 연습을 많이 합시다. 교회 안에서 서로 사랑하지 못하면 우리는 밖에 나가서도 사랑하지 못할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게 신앙의 반쪽을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서로를 사랑한다고 할 때, 사랑하는 일에 실패하지 않기 위해서 꼭 기억해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첫째, 흔히 생각하듯이 미워하지 않는 것이 사랑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미워할 수 밖에 없는 사람을 미워하지 않는 수준까지 가는 것만해도 대단한 일입니다. 그렇지만, 사랑은 미워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사랑이지 미움의 반대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미워하지 않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하겠지만 결국에는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굴복되어서 그 미운 사람을 끌어 안고 사랑하게 되는 것을 목표로 삼고서 끊임 없이 거기까지 가기 위해서 애써야 합니다. 


둘째, 사랑하는 일은 감정이 필요한 일이 아니라 의지가 필요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분명히 아는 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누군가 사랑하기 힘든 사람을 만나거나 마음이 사랑이 없을 때, 우리는 하나님께 사랑을 달라고 기도합니다. 물론 이렇게 하는 일은 꼭 필요합니다. 참된 사랑은 우리 안에서 자연스럽게 흘러 나올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내가 사랑하려고 마음을 기울여 애쓰지 않으면서 사랑이 내 속에 생기게 해 달라고 기도만 하는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그렇게 하면 절대로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랑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명령에 순종하려면 의지의 결단이 꼭 필요합니다. 싫든지 좋든지 그것과 상관 없이, 명령대로 하기 위해 의지를 더해야 하고 몸을 움직여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사랑하라’는 명령을 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감정이 없을 때도 사랑하라고 말이지요. 


세째, 완전한 사랑만 사랑이 아니라는 것을 잊으면 안됩니다. 불완전한 것도 사랑이구요, 하다가 좌절하는 것도 사랑입니다. 우리는 사랑을 너무 이상적으로만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도달하지 못하는 것들은 아얘 사랑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그런 사랑은 해 보려고 시도조차 하지 않지요. 그러나 그렇지가 않습니다. 우리는 불완전한 인간입니다. 불완전한 우리들에게 애초에 완전한 사랑은 불가능합니다. 우리에게는 단지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명령만이 있을 뿐이고, 우리는 그저 명령에 순종하기 위해 마음을 기울여 애쓰는 일 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사랑에 대해서 겸손해 질 때, 오히려 우리가 사랑하기 힘든 사람들을 사랑하는 일이 가능해 질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은 분명히 하나님을 믿으라고 하셨지만 동시에 서로 사랑하라고도 하셨습니다. 이 두 가지가 합쳐져야 비로서 참 신앙이 된다고 하셨지요. 그렇지만 이 둘을 하나로 만드는 일은 참 쉽지가 않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어려움이지요. 그런데요. 성도 여러분, 이 둘을 하나로 만드는 방법은 이미 오늘 본문 안에 들어 있습니다. 그것은 그저 나만 생각하면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과연 어떻게 하면 함께 신앙생활하는 형제와 자매들이 내 신앙의 모습을 보며 하나님께 감사하고 또 신앙의 용기와 위로를 얻을 수 있을까 그것을 고민하면서, 그 고민을 품고 기도하고 애쓰면서 믿음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의 신앙은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동시에 성도들도 사랑하는 온전하고 균형잡힌 신앙으로 다듬어져 갈 수 있습니다. 따라 해 보겠습니다. “나 때문에 / 다른 성도들이 / 하나님께 감사하게 하자” 한 번 더요. “나 때문에 / 다른 성도들이 / 하나님께 감사하게 하자” 


우리 모두의 신앙이 예수님 안에 있는 믿음과 모든 성도들을 사랑하는 사랑이 어우러진 그런 신앙이 되기를 바랍니다. 성도들의 감사의 이유가 되고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그런 신앙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주신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 속에서 우리의 믿음이 이런 신앙으로 완성되어져 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