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녹음을 하지 못했습니다.
본문 : 에베소서 1장 15-19절
지난 주일에는 우리가 에베소서를 통해서 이 편지를 받는 에베소 교회가 어떤 교회였는지를 살펴 보았는데요. 기억을 한 번 더듬어 볼까요? 에베소 교회는 좋은 교회였습니까, 그렇지 않은 교회였습니까? 그렇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참 좋은 교회였고, 또 아주 바람직한 교회였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서로를 향한 사랑이, 그것을 쉽게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풍성한 그런 교회였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참 믿음이란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인데, 에베소 교회가 바로 그런 믿음을 가지고 있었으니, 그런 점에서 에베소 교회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참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들을 위해서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하고 또 감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를 생각할 때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어떤 교회가 좋은 교회인가 아닌가를 판가름하는 기준은 겉으로 보이는 어떤 조건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크고 많은 사람들이 모여도 그 안에 믿음과 사랑, 이 두 가지가 없다면 그 교회는 좋은 교회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물론 작은 교회이면서 그 안에 이 두 가지 마저 없다면 그것은 더 비참한 일일 수도 있지만 말이지요. 성도 여러분, 꼭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좋은 교회, 바람직한 교회를 생각할 때마다 다른 것을 생각하면 안됩니다. 먼저 주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성도들을 향한 사랑을 먼저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을 기준으로 어떤 교회를 평가해야 합니다. 꼭 평가를 해야 한다면 말입니다. 그리고, 그럴 뿐만 아니라 우리들 각자가 자신의 믿음을 챙기고, 성도들을 사랑하는 사랑을 잘 챙겨야 합니다. 그 두 가지 면에서 항상 성장해 가는 그런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나도 하나님 앞에서 더 좋은 성도가 될 수 있고, 그런 우리들이 모인 우리 광현교회도 참 교회다운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에베소 교회가 믿음과 사랑을 갖춘 그렇게 훌륭한 교회였지만 그래도 여전히 사도 바울이 그들을 위해서 특별히 기도해야만 했던 것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바울로 하여금 에베소 교회를 위해서 기도할 때마다,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게 만들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믿음과 사랑의 증거가 풍성했던 에베소 교회에 무엇이 여전히 부족했길래 바울은 항상 같은 기도제목으로 기도하고 또 기도했을까요?
성도 여러분, 제가 여러분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을까요, 아닐까요?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여러분은 제가 여러분을 위해서 기도할 때, 여러분의 무엇을 위해서 기도해 주면 좋으시겠습니까? 제가 여러분을 위해서 기도하는 내용을 알려줄 때, 제가 여러분의 어떤 것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좋으시겠습니까? 자녀들, 건강, 가정평안, 직장, 그리고 물질적인 복과 성공… 이런 것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제가 그것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드리면 좋으시겠지요? 아마 에베소의 성도들도 그랬을지도 모릅니다. 그들도 똑같은 사람이니까요. 그런데,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전혀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고 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바울이 에베소 교회 성도들의 현실과 필요에 전혀 무관심했거나 그것을 위해서 기도하지 않았던 것은 아닐 테지만, 바울은 그런 이야기는 다 빼고 그런 것들과는 전혀 다른 자신의 기도 내용들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바울이 그렇게 한 이유는 분명합니다. 첫째, 그런 기도제목들보다 더 우선적이고 중요한 기도제목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둘째로 그렇게 해서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 자신도 자신들을 위해서 똑같은 기도제목으로 기도하도록 돕기 위해서 였습니다. 주님이 제자들에게 주기도문을 통해 그렇게 하셨던 것처럼 바울도 에베소 성도들에게 바른 기도, 가장 중요한 기도를 가르쳐 주고, 그런 기도를 하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했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나쁜 마음이나 욕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면 사실 그 어떤 것도 우리의 기도제목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도에는 바른 기도와 그렇지 않은 기도가 있고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기도해야할 기도제목들도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도 가려서 할 줄 알아야 하고 그러한 기도제목들을 앞세워 기도하는 연습도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 보시기에 바른 것들을 구하는 바른 기도가 되게 해야 합니다. 우리의 기도를 그렇게 성숙시켜 가야 하는 이유는 이렇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모든 기도를 다 똑같이 귀하고 중요하게 여기실까요, 아니면 특히 중요하고 귀하게 여기시는 기도가 따로 있을까요? 그렇습니다. 특히 중요하고 귀하게 여기시는 기도들이 따로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어떤 기도를 그렇게 더 귀하고 값진 것으로 여기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다른 기도가 이루어졌을 때보다 그 기도가 이루어졌을 때,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될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도 그만큼 더 유익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우리의 기도를 성숙시켜 가야 하는 첫번째 이유입니다.
또 한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여러분,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가장 잘 드러내는 증거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그 사람의 말입니다. 그 사람이 주로 무엇에 대해서 말하느냐, 또 무엇에 가치를 두고 말하느냐 하는 것만큼 그 사람의 본 모습을 제대로 드러내 주는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의 말이 변하면 그 사람이 변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기도는 우리 신앙의 언어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드리는 진솔한 기도보다 더 그 사람의 신앙을 정확하게 드러내는 것은 없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골방에서 드리는 기도가 바로 우리 자신의 신앙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바른 기도를 드리지 못한다면 우리의 신앙 또한 바르고 온전한 신앙이 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반대로 기도가 새로워지면 우리의 신앙도 새로워질 수 있습니다. 기도를 성숙시킬 때, 우리 신앙도 성숙해 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해야할 기도를 하고, 먼저 앞세워야 할 기도를 먼저 하는 것은 성도의 삶에서 굉장히 중요한 일이 됩니다. 바로 이런 두 가지 이유 때문에 우리는 바른 기도를 배워야 하고, 정말 중요한 기도제목들이 무엇인지를 따로 배워야 합니다. 이 일이 너무 중요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그러셨듯이 바울도 에베소의 성도들에게 자신의 기도내용을 알려주어서 그런 기도를 배우게 해 주었던 것입니다.
많은 성도님들이 기도하자고 하면 무엇으로 기도해야 할지 모른다고 하소연을 하곤 합니다. 몇 가지 기도하고 나면 더 이상 기도할 것이 없다고 말이지요. 그렇다면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요?오랫동안 예수 믿은 분들인데도 불구하고 왜 여기서 벗어나질 못하는 것일까요? 무엇보다도 기도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겠지만, 기도를 한다고 할 때도 거의 현실적인 이유로만 기도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현실적으로 무슨 문제가 있고 원하는 것이 있을 때는 그렇게 열심히 기도하가다도 현실적으로 큰 문제가 없고, 걱정거리가 없어지면 갑자기 기도할 제목이 없어져서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 모르는 그런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요 여러분, 만약 우리가 우리 자신의 영혼과 신앙을 생각한다면, 그리고 신앙 안에서 누려야 할 은혜를 생각하고 붙들어야 할 소망을 생각한다면, 또 살아내야 할 거룩한 삶을 생각하고, 그것들을 자신의 중요한 기도제목으로 삼는다면, 그런 고민은 저절로 없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도 오늘 바울이 우리들에게 알려주는 기도의 내용은 아주 커다란 유익을 줄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영혼을 위해서 어떻게 기도해야하는지 궁금해 하는 우리를 위한 하나의 좋은 가이드라인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에베소의 성도들에게 ‘나는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시고 너희의 마음의 눈을 열어달라고 기도한다’고 말하면서 그들이 마땅히 자신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주고 있는데요. 이것은 쉽게 말씀드려서 깨닫지 못하던 것을 깨닫게 하시고, 알지 못하던 것을 알게 하시며, 보지 못하던 것을 보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는 그런 뜻입니다. 에베소 교회가 비록 하나님을 믿는 믿음다운 믿음이 있었고, 성도들을 사랑하는 사랑이 분명한 그런 좋은 교회였지만 바울이 보기에 아직 그런 점에서는 많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비유적으로 말씀드리면, 성도는 눈을 뜬 사람이어야 하고 또 계속해서 뜨고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시력이 점점 더 좋아져 가야 하는 그런 사람들입니다. 아마 여러분은 예수님께서 길에서 고쳐주신 어떤 맹인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는 처음에는 아무 것도 보지 못하다가 나무같은 것들이 걸어다니는 것을 보게 되었고 그 후에는 결국 모든 것을 명확하게 보고 그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영적으로 볼 때, 성도들에게는 계속해서 이런 일이 일어나야 합니다. 신앙의 세계 안에서는 그런 것과 그렇지 않은 것에 너무나 큰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다음의 이야기들을 들어보시면 그 차이가 어떤지를 분명히 알 수 있으실 것입니다.
여러분, 게하시를 아시지요. 게하시는 이스라엘이 참 어려운 세월을 보내고 있을 때 엘리사의 조수역할을 했던 사람인데요. 이 사람이 엘리사의 조수로 있을 때, 한 번은 아람의 대군이 밤새 이동해서 그들이 머물고 있던 성을 빽빽히 둘러싼 적이 있었습니다. 엘리사 때문에 항상 이스라엘을 침략하려던 계획이 틀어지는 것을 알고 그를 잡으려고 했던 것이지요. 늘 그러던 대로 그 날도 게하시는 아침 일찍 일어나서 문 밖으로 나섰습니다. 그런데, 문 밖을 나서자 마자 깜짝 놀라서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습니다. 잠을 자러 들어갈 때까지만 해도 한 사람도 없던 들판이 밤 사이에 아람군대의 병사와 말, 전차들로 가득 차 있었고, 자신은 그 한 가운데 포위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게하시는 엘리사에게로 뛰어들어갔습니다. 그리고는 다급하게 외쳤습니다. “으아아, 주인님, 이제 우리 어떻게 하지요?”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엘리사는 미동도 없이 그저 느긋하기만 합니다. 그리고는 알 수 없는 말만 합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우리 편이 저들 편보다 훨씬 더 많다”고 말입니다. 엘리사는 어리둥절하고 있는 게하시를 위해서 기도합니다. “하나님이 게하시의 눈을 열어 보게 해 주소서.” 그 다음에 일어난 일을 성경은 이렇게 말해 줍니다. “여호와께서 그 청년의 눈을 여시매 그가 보니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렀더라” 여러분, 왜 게하시는 파랗게 질려서 호들갑을 떠는데, 엘리사는 그렇게 여유로울 수 있었을까요? 그 이유는 엘리사는 보고 있는 것을 게하시는 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엘리사를 둘러싸고 있는 하나님의 군대는 게하시가 눈을 뜨는 순간 거기 나타난 것이 아닙니다. 원래부터 거기 있었습니다. 상황으로 보아서 아마도 아람의 군대가 그 성을 둘러싸기 이전부터 미리 와 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만약 게하시가 엘리사처럼 이미 하늘군대를 보고 있었다면 게하시의 모습은 어떻게 달라졌을까요? 아마도 게하시는 느지막히 일어나 천막 문을 열고 나오면서 씨익 웃지 않았을까요? 그리고 기지개를 켜면서 샘가로 갔을 것이고 거기서 양치질하고 세수한 후에, 다시 천막으로 돌아오면서 아람군대쪽을 쳐다보면서 조금만 기다리라는 듯이 다시 한 번 씨익 웃어주지 않았을까요? 그리고 나서 느긋하게 엘리사에게 인사를 건넨 후, 아침 식사를 준비하지 않았을까요? 물론 맛나게 식사를 마쳤을 것이구요. 성도 여러분, 이게 믿는 사람들의 인생입니다. 보면 달라집니다. 두려워 하던 것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고, 다른 반응을 하며 다르게 살 수 있습니다. 그 반응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릴 수도 있구요. 이것은 단지 영적인 이야기가 아닙니다. 지극히 현실적인 이야기입니다. 보느냐 보지 못하느냐 하는 것은 현실 속에서도 이렇게 확실한 차이를 만들어 내게 됩니다.
두번째 이야기는 마리아와 마르다 이야기 입니다. 우리가 흔히 마르다가 예수님께 꾸중을 들은 이야기로 알고 있는 그 이야기인데요. 이 이야기가 그런 이야기가 아닌 것은 다 아시지요? 마르다는 예수님을 집으로 모셨습니다. 귀한 분이 집에 오셨으니 마르다는 음식을 마련하느라 정신이 없었지요. 그런데, 이렇게 보니 동생인 마리아는 탱자 탱자 놀고 있습니다. 그저 예수님 발 밑에 앉아서 빙긋이 웃으며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마르다는 갑자기 부아가 치밀었습니다. 또 예수님이 야속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부탁합니다. 동생을 좀 나무래달라고 말이지요. 그 때 주님은 안타까워하시면서 말씀하십니다. “마르다. 너는 정말 많은 일로 근심하는 구나. 그렇지만 사람은 본디 한 가지든지 몇 가지만 챙기면 충분한 것이란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했으니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거야.” 마르다는 잘못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마르다는 자신이 해야한다고 생각한 일을 열심히 했을 뿐입니다. 그 일은 누군가가 꼭 해야 했던 그런 일이었기도 하구요.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과 교제하기 위해서 그 집에 들어가셨고 또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주려고 하셨습니다. 언제나 그렇듯이 받기 보다는 주려고 오셨던 것이지요. 그런데, 마르다는 그 ‘좋은 몫’을 선택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라는 좋은 몫을 선택하지 못했습니다. 마르다가 그 좋은 몫, 절대로 빼앗기지 않을 그 귀한 예수님을 선택하지 못했던 것은 마르다에게 무엇이 정말 중요한 것인지를 볼 수 있는 눈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눈이 없으면 주변 일로 분주해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정작 중요한 것은 놓치게 되지요. 그러나 눈이 있으면 그런 실수를 하지 않습니다. 항상 붙들어야 할 것을 붙들 수 있습니다. 그리고 결국 이 일은 그 사람의 영혼에 어마어마한 차이를 만들어 냅니다. 저는 사실 교회 안에서 이런 분들을 굉장히 자주 만납니다. 당사자는 굉장히 심각합니다. 그리고 굉장히 바쁩니다. 절대로 나쁜 것이 아니지요. 그런데, 정작 변죽만 울립니다. 정말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예들 중에서 가장 심각한 예는 바로 바울 자신입니다. 그는 눈을 뜨는 것이, 그리고 그렇게 눈을 뜨고 보아야 할 것을 보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너무나 아픈 댓가를 치르고 배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알기 전에도 하나님을 그 누구보다도 사랑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라면 목숨이라도 내놓을 수 있었던 그런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런 열정을 가지고 하나님을 위해서 헌신했지요. 그런데, 사실은 그 일 자체가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는 그것을 모르고 있었지만 말이지요. 그러나, 빛이신 예수님이 그를 찾아오셨을 때, 예수님께서는 바울의 눈을 뜨게 해 주셨습니다. 잘못 보는 눈을 닫으시고 열려 있어야 할 눈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똑같은 열정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 될 수 있었습니다. 만약 그런 일이 없었다면 바울은 계속해서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핍박하면서도 자신은 하나님을 정말로 사랑하며 가장 열심히 섬기고 있다고 생각했겠지요. 그런데요 여러분, 이런 일이 오늘 우리 삶에서라고 일어나지 말라는 법이 있을까요? 오늘 이단에 빠지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거기 불신자들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믿지 않는 사람들은 적습니다. 기존 교회의 중직자들도 수두룩하고 심지어는 목사들까지 이단에 빠집니다. 그들은 과연 자신들이 믿는 것이 진리라고 생각할까요, 그렇지 않을까요? 그들은 자신들이 믿는 것을 진리라고 확신합니다. 그 거짓말을 진심으로 진리라고 믿습니다. 왜 그렇죠? 눈이 닫혀 있으니까 그런 것입니다. 진짜가 무엇인지를 볼 수 있는 눈이 열려져 있지 않으니까, 거짓을 거짓으로 알아볼 수 있는 눈이 없으니까 그런 것입니다.
17세기 미국의 영적 대각성의 중심인물이었던 조나단 에드워즈라는 목사님이 계십니다. 이 분은 그 당시 영적 부흥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의 미국역사에서 사상적으로 가장 큰 영향력을 지니고 있다고 평가받는 그런 분인데요. 이 분이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두 사람이 있다고 치자. 한 사람은 날 때부터 미각이 없고 다른 사람은 있다. 두 사람은 모두 꿀을 사랑한다. 미각이 있는 사람은 꿀의 달콤한 맛을 알기 때문에 꿀을 매우 사랑하는 반면 미각이 없는 사람은 꿀의 촉감과 색깔만을 사랑한다. 두 사람의 사랑에는 공통점이 많다. 각각의 사랑은 두 사람 모두 사랑하는 것을 갈망하게 하고 기뻐하게 하며 그 대상을 얻을 수 없을 때는 실망한다. 하지만 꿀맛을 아는 사람이 꿀의 달콤함에 대해 느끼는 생각이나 감각은 그렇지 않은 사람이 꿀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생각이나 감각과 전혀 다르다. 어떤 점에서는 많은 것들이 두 사람 모두에게 공통된 것처럼 보인다. 두 사람 다 사랑하고 두 사람 다 원하며, 꿀을 얻었을 때 두 사람 다 기뻐한다. 하지만 한 사람의 사랑, 갈망, 기쁨은 다른 사람이 가진 것과는 완전히 다르다.” 에드워즈 목사님은 이렇게 말한 후에 이 원리를 성도의 신앙에 적용하면서 이런 설명을 덧붙였습니다. “이 두 부류의 다른 성도들-그러니까 영적인 감각이 있는 성도들과 그렇지 않은 성도들을 말합니다-이 영적인 대상-하나님, 예수님, 하나님 나라, 은혜, 진리, 소망 등-들을 인식하는 것은 미각이 있는 사람과 미각이 없는 사람이 꿀의 뛰어난 달콤함을 인식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차이를 보인다.”
눈이 닫혀있고 마음이 닫혀있는 성도라고 해서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심지어는 에베소 교회 성도들처럼 어떤 면에서는 좋은 신앙, 바람직한 믿음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상태에만 있으면 보고 인식하는 것에 있어서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과 그렇게 큰 차이가 나질 않습니다. 그래서 성도이기 때문에 꼭 보아야 하고, 또 볼 수 있는 정말 복된 것들을 놓치게 됩니다. 사람은 없는 것은 보지 못합니다. 사람이 어떤 것을 볼 수 있다는 것은 그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게 현실이거나 혹은 현실의 일부이기 때문에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성도가 영적으로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한다는 말도 비슷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없어서 못보는 것이 아닙니다. 있는데 볼 수 있는 눈이 없으니 못 보는 것입니다. 게하시의 경우처럼 말이지요. 한 번 실습해 볼까요? 눈을 한 번 감아보시겠습니까? 눈을 감은 채로 한 번 대답해 보세요. 여러분, 지금 세상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다구요? 전혀 보이지 않는데 있는 줄 어떻게 아시죠? 혹시 이 세상은 우리가 눈을 감을 때마다 사라졌다가 눈을 뜨려고 하면 다시 나타나는 것이 아닐까요? 실제로 우리가 잊고 지내서 그렇지 볼 수 있는 능력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그것은 있어도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경우에는 없어서 못 보는 것이 아니라 있지만 못 보는 일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혹시 믿음의 눈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 궁금해 지실 때는 이 일을 다시 한 번 떠 올려 보시기 바랍니다.
성도는 지혜와 계시의 영을 받아야 하고 마음의 눈이 열려지는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성경이 진짜 복이라고 말하는 것, 진짜 은혜라고 말하는 것이 ‘나의’ 복과 ‘나의’ 은혜가 될 수 있고, 성경의 진리가 정말 나와 상관있는 진리, 나를 힘있게 하고 자유케 하는 진리가 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성경은 그 어떤 이야기를 할 때보다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힘주어서 가장 벅찬 기쁨으로 표현합니다. 그렇다면 성도들도 성경에서 하나님 나라에 대한 내용을 접할 때 가장 크게 기뻐하며 흥분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그렇다면, 왜 성도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때에도 전혀 움직이지 않고 흥분하지 않습니까? 왜 그 얼굴에 기쁨이 보이지 않고, 그 마음 속에 소망이 회복되지 않습니까? 똑같은 이유 때문입니다. 아직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는 눈이 없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신앙의 눈이 열려있는 만큼, 그래서 볼 수 있는만큼 누릴 수 있는데, 그 눈이 아직 열리지 않았으니 여기 이미 열려져 있는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고, 그래서 하나님 나라와 상관 없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바울이 우리에게 가르쳐 준대로 기도해야 합니다. 그 은혜를 받기 위해서, 하늘이 열리고 삶이 열리게 해 주는 그 놀라운 은혜를 받기 위해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보내주시고 또 그렇게 우리 마음의 눈을 열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지금은 볼 수 없지만 희미하게 보게 해 주시고, 지금은 희미하게 보이지만 확실하게 보게 해 주시고, 또 완전하게 보일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 눈을 열어주실 것이고, 더 확실하게 열여주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열린 눈으로 우리의 삶과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며 분별력 있고 생명 넘치는 복되고 확신한 신앙생활을 하는 성도들이 되게 해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