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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금요기도회

2016.03.04. 금요기도회 - 나는 하나님을 섬겼노라(사도행전 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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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사도행전 22장 30-23장 11절





성도는 사실 참 까다로운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그것은 성도가 한 세계가 아니라 두 세계에 속해 있으며 그 두 세계 중에서 하나도 무시할 수 없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 두 세계란 바로 하나님이 온전히 다스리시는 신앙적인 세계와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사람들이 다스리는 것 같아 보이는 현실적인 세계입니다. 그런데, 성도가 이 두 세계를 모두 무시할 수 없는 것은 단순히 성도가 이 세상에서 사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이중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성도는 신앙적인 세계 뿐만 아니라 현실적인 세계도 하나님이 다스리신다는 것을 믿는 사람들이고, 또 그곳에서도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이렇게 전혀 달라 보이는 이질적인 두 세계를 하나의 세계라고 믿으면서 살아가기 때문에 성도의 삶이 그렇게 간단치가 않은 것입니다. 


우리가 21장 중반부터 23장에 걸쳐서 계속해서 예루살렘의 바울의 모습을 보고 있는데요, 우리가 보기에 그의 모습이 쉽게 이해할 수 없어 보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는 성과 속, 신앙의 세계와 신앙 밖의 세계를 나눠놓고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게 어디든지 그 곳을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받는 하나님의 세상으로 인식하고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때로는 지극히 영적으로 보였다가 때로는 굉장히 현실적으로 보이기도 하고 그런 것입니다. 성경은 이런 것을 일컬어 ‘지혜’라고 부르는데요, 성경이 말하는 지혜는 삶에 녹아있는 지극히 현실적인 신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게 무엇인지 이해하려면 잠언을 보시면 됩니다. 잠언은 지혜서들 중에서도 대표적인 책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지혜로운 삶에 대한 책이지요. 그런데, 잠언은 사실 성경책이라는 편견을 떠나서 보면 너무나 세속적으로 보여지는 구절들도 많습니다. 이게 성경 속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맞나 하는 구절들도 굉장히 많습니다. 틀려서 그런 것이 아니라 맞기는 맞는데 굳이 성경의 진리라고만은 할 수 없는 그저 상식적인 삶의 방식들을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천부장에게 붙들렸던 바울은 그 다음 날 공회 앞에 섭니다. 도대체 바울이 무슨 죽을 죄를 지어서 유대인들이 저렇게 난리인지 알고 싶어했던 천부장이 공회를 소집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공회에 서서 스스로를 변호할 기회를 얻었습니다. 그리고는 자신의 결백을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형제들아 오늘까지 나는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 성경을 보면 바울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이야기 할 때에 종종 이런 표현을 쓰곤 합니다.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다’는 말도 이런 표현들 중의 하나입니다. 그런데, 이런 표현들을 오해하면 안됩니다. 이런 표현들은 나는 율법을 한 번도 어긴 적이 없다거나 죄를 지은 적이 없다는 그런 뜻이 아닙니다. 바울도 사람입니다. 아무리 율법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또 죄를 피하려고 해도 죄를 지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 경우에는 항상 그 죄를 하나님 앞에서 정당하게 처리했다는 뜻입니다. 정말 열심히 율법을 지키고 죄를 피했지만, 그래도 짓게 되는 죄들에 대해서는 철저히 고백하고 처리했다는 그런 뜻입니다. 이것이 바울 자신의 자신에 대한 진술이었습니다. 그러니 나는 이런데 이렇게 잡혀 올 이유가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이 그 당시 제사장이었던 아나니아의 심기를 심하게 건드렸습니다. 그래서 아나니아는 바울 곁에 서 있는 사람들을 향해서 바울의 입을 치라고 명령했습니다. 입을 친다는 것은 공적인 자리에서 거짓말을 하고 있는 사람에게 가해지는 벌입니다. 제사장이 보기에 바울은 하나님을 양심껏 섬긴 사람일 수가 없었고, 자신들을 배반하고 나사렛에서 생겨난 이단의 전파자가 된 그런 사람이었기 때문에 죄인도 그런 흉악한 죄인이 있을 수가 없는데, 바울은 자기 입으로 자신이 양심대로 하나님을 섬겼다고 말하지 그 말을 참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그 말을 듣고 곧바로 이렇게 맞받아 쳤습니다. “회칠한 담이여,-최고의 위선자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너를 치시리로다 네가 나를 율법대로 심판한다고 앉아서 율법을 어기고 나를 치라 하느냐” 바울은 지금 자신을 헤하려고 한다고 감정적이고 공격적으로 대응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이 이렇게 말한 것은 율법의 기준을 적용한 것입니다. 율법은 정당한 재판을 통한 정죄도 없이 사람에게 벌을 가하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래도 권위 좀 있어 보이는 재판장에 나와있는 사람이 한다는 말이 그런 율법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이야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고 있으니 율법에 정통하고 율법을 존중하던 바울로서는 그 율법을 이야기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바울의 이야기를 들은 곁에 서 있었던 사람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바울이 그 당시 대제사장이었던 아나니아를 향해서 율법의 저주를 퍼부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사실을 바울에게 말해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말을 듣자 마자 보인 바울의 반응이 조금 의외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들아, 나는 그가 대제사장인 줄 알지 못하였노라 기록하였으되 너의 백성의 관리를 비방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우리 식으로 표현해서 갑자기 꼬리를 내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가 대제사장이기 때문에 그 힘이 두려워서 그랬던 것일까요? 그리고, 그가 대제사장인 줄 몰랐다는 바울의 말은 그 두려움 때문에 위기를 모면하려고 그저 둘러댄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에 온 것은 20년만이었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의 대제사장이 바뀐 것은 10년쯤 전의 일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대제사장을 본 적이 한 번도 없었고 그래서 대제사장을 알아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그가 대제사장인 줄 몰랐다는 것은 거짓이 아니라 진짜라고 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단순히 그가 대제사장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렇게 함부로 대한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기록하였으되 너희 백성의 관리를 비방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이것은 출애굽기 22장 28절 말씀인데요. 이 구절은 모세의 율법의 일부입니다. 바울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한 것은 아나니아의 힘이 두려웠기 때문이 아닙니다. 제사장을 비방하는 것은 율법이 금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분명히 그런 식으로 자신의 직무를 감당하고 있는 아나니아라는 ‘사람’을 존중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에게 율법의 징벌을 경고했던 것이겠지요. 그렇지만 바울은 아나니아가 가지고 있는 직분의 권위와 하나님께서 세우신 권위자들을 함부로 무시하면 안된다는 율법 자체는 존중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그 율법을 기준으로 해서 볼 때, 자신의 잘못을 확실하게 인정하고 사과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권위와 힘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그것들을 함부로 사용하는 것을 보면서도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권위 때문에 그 사람을 여전히 존중하는 것은 사실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의 머리 속에서는 그 사람과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권위와 역할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저만 해도 그렇습니다. 알량한 정의감이 남달리 강한 저로서는 지도자가, 특히 종교지도자가 너무 심각하게 자신의 역할을 망가뜨리면 그것 때문에 그 사람을 더 심하게 비난하고 멸시하게 될 때가 많습니다. 그렇지만 바울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비록 아나니아가 대제사장이 되어 가지고 자기 힘만 믿고서 율법을 마음대로 어기고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그를 세우신 하나님을 존중했기 때문에 그를 비난한 자기 잘못을 분명히 인정하며 사과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도 양심껏 하나님을 섬기는 바울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잘못을 저지르지 않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볼 때 어긋난 것이 인정되면 곧바로 그 잘못을 인정하고 처리하는 그런 바울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바울에게서 불완전한 인간으로서 하나님을 섬기며 사는 바른 모습의 실례를 보게 됩니다. 일단은 하나님의 말씀을 존중해야 합니다. 그 말씀을 지키고 어기지 않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야 하지요. 그렇지만 그러다가 그 말씀에서 빗나가면 그 잘못을 정직하게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하며, 그것을 고백해야 합니다. 사람에게 잘못했다면 사람에게 사과하고, 또 하나님 앞에서 잘못하면 하나님께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그게 부족한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양심껏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될 것입니다. 대개 잘못을 하면 이런 이야기부터 합니다. ‘최선을 다했다.’고 말입니다. 물론 인정합니다. 최선을 다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랬다고 해서 잘못이 잘못이 아니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고의가 아니었다’고 말합니다. 그렇지만 고의가 아니었다고 해도 잘못이 잘못이 아니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최선을 다했고, 고의가 아니었다고 해도 잘못한 것은 잘못한 것입니다. 그것을 받아들이고 인정하고 자기 입을 열어 사과하고 용서를 구하는 것이 바른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그런 잘못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양심껏 섬기며 살아가는 방법입니다. 


그 때 바울을 둘러싸고 있었던 공회원들은 크게 둘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한 쪽은 바리새인들이고 다른 한 쪽은 사두개인들입니다. 그 당시 이 두 종파는 그 힘으로 이스라엘의 종교적이고 정치적인 지도층을 형성하고 있었지만 사실 결코 함께 할 수 없는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원리 원칙을 중시합니다. 비록 권력을 쥐고 있었지만 로마와는 완전히 반대편에 서 있었습니다. 로마인들은 이방인인 주제에 선민인 이스라엘 백성들을 통치하고 있었으니까요. 그렇지만 사두개인들은 달랐습니다. 이들은 철저한 현실주의자들이었습니다. 로마의 통치 밑에서 권력만을 추구했던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특히 부활을 바라보는 두 종파의 입장은 완전히 달랐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바리새인들 답게 고난받는 의인의 부활을 소망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때가 되면 로마도 멸망하게 될 것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사두개인들은 그러면 망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부활을 완전히 거부하는 입장이었습니다. 부활을 믿으면서 로마세력 밑에서 권력의 부스러기를 얻기 위해서 살아갈 수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사두개인들은 참 정직하지 못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자기 이익을 위해서 언제든지 믿는 것을 이렇게 저렇게 바꿀 수 있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그런 그들의 특징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향해서 이렇게 외쳤습니다. “여러분 형제들아 나는 바리새인이요 또 바리새인의 아들이라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로 말미암아 내가 심문을 받노라” 바울은 자신이 바리새인이라는 점을 분명히 합니다. 아버지도 바리새인이라고 분명하게 말합니다. 그런 후에, 공회가 열리게 된 것은 본질적으로 자신이 부활을 믿고 소망하는 것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얼핏보면 바울은 공회를 둘로 분열시키기 위해서 일부러 그렇게 한 것처럼 보입니다. 성경을 보아도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구요. 그렇지만, 바울이 하려고 했던 것은 그렇게 그들을 싸우게 만들어서 그 틈에 빠져나기가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21장부터 그의 입장은 전혀 변함이 없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전하는 복음은 새로운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신이 믿는 것은 새롭게 생겨난 이단이 아니라 하나님의 오래된 약속의 참된 성취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바리새인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고, 나도 너희들처럼 부활을 믿고 소망한다고 말했던 것입니다. 물론 이 말은 단순히 부활을 믿는다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의 말은 이미 우리들이 믿고 소망하던 의인의 첫번째 부활이 일어났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소망이 이미 현실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그 첫번째 주인공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말을 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부활이었으니까요. 그런데, 이 일은 공회를 반으로 쪼개 놓았습니다. 서로 껄끄러워서 건드리지 않고 있었던 부활에 대한 논쟁이 너무 뜨거워서 커다란 소동으로 번졌습니다. 바울이 폭탄을 던져 넣었으니 그럴 수 밖에 없었습니다. 급기야 어떤 바리새인들은 바울의 편을 들고 나섰습니다. 자신들이 보기에 바울에게는 아무런 잘못도 없다고 말입니다. 만약 영이나 천사가 바울에게 그것을 말했다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변호까지 해 주었습니다. 이것 때문에 논쟁은 더 격해졌고 그 통에 바울이 다칠까 걱정되었던 천부장은 병사들을 투입해서 바울을 구출했서 군영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습니다. 그날 밤에 주님은 바울 곁에 서서 말씀하셨습니다.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신앙을 가지고 산다는 것은 아무 생각도 없고 지혜도 없이 살아가는 것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때로는 가장 현실적이 될 수 있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래서 신앙을 너무 좁게만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런 지혜를 가진 사람들을 오해하고 비난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정말로 신앙을 기준으로 산다는 것은 이쪽 저쪽의 비난을 다 감수해야 하는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 태도는 양쪽 모두가 보기에는 탐탁치 않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거짓이 있거나 위선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자신의 입장을 분명하게 밝혀야 하며, 그 입장을 지켜가야 합니다. 본문에 나오는 바울과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 이 셋을 비교해 보면 무엇이 신앙인지 무엇이 신앙이 아닌지를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지혜롭게 행동하기는 했지만 결코 거짓을 말하거나 위선적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그들의 신앙적이고 정치적인 입장은 달랐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든지 이렇게 또 저렇게 자기 입장을 바꾸는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두개인들은 심지어 자기가 무엇을 믿고 믿지 않고 하는 것까지도 자신의 현실적인 이익에 따라서 바꿀 수 있는 그런 인물들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사람들이고 또 자신의 부활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은 의인들, 그러니까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하나님에게 뿐만 아니라 스스로와 다른 사람들에게 정직하며 바른 편에 서는 사람들의 마지막 승리와 영생을 믿는다는 뜻입니다. 그것을 영원히 변하지 않는 소망을 붙들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사람들이 과연 자신의 입장과 이익에 따라서 함부로 이렇게 저렇게 자기 입장과 이야기를 바꿀 수 있을까요? 그럴 수는 없을 것입니다. 정말로 부활을 믿고 소망하는 사람들은 실패하는 한이 있더라도 말이나 태도를 바꿔가면서 자신의 입장을 관철시키거나 자기의 목적을 이루려고는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의롭게 세우는 방법이 아니니까요. 


성도 여러분, 신앙은 뱀처럼 지혜롭지만 비둘기처럼 순결한 것입니다. 둘 다 취하되 순결함을 포기하지 않는 지혜를 사용하며 살아가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맡기신 소명을 이루면서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사도 바울에게서 성도로 사는 법을 배우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이 두 가지 조화시킬 수 없지만 성령님의 도우심과 부활의 소망 안에서는 충분히 하나가 될 수 있는 이 두 가지 성도의 무기들을 하나로 엮어내며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힘있고 투명하게 살아가는 우리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