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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주일예배

2016.03.06. 주일오전 -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에베소서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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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에베소서 1장 17-19절





에베소서 설교가 계속되고 있는데요. 저는 우리가 함께 하고 있는 이 여행이 저에게 뿐만 아니라 여러분게도 정말 기쁘고 유익한 그런 여행이 되었으면 합니다. 항상 그랬지만 에베소서를 설교하면서 그런 마음이 더 강하게 드는 것은 이 에베소서가 음식으로 치면 무른 음식이 아니라 단단한 음식 쪽에 속하는 말씀들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1장 중간까지 왔는데, 함께 여기까지 오시면서 에베소서가 사용하고 있는 단어들이 우리에게 굉장히 생소한 단어들이고 무슨 뜻인지 정확하게 알아차리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발견하셨을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에는 쉬운 말씀이 있고 그렇지 않은 말씀이 있는 것 같지만, 실제로 성경은 같은 말씀이라고 해도 제일 겉으로 드러나 있는 의미하고, 깊이 숨겨져 있는 의미가 많이 다릅니다. 가장 겉으로 드러나 있는 의미는 간단하고 이해하기가 쉽지만, 깊이 숨겨져 있는 의미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은 그 자체로 이해하기가 어려운 말씀들도 많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의 진리에는 우유와 이유식도 있지만 질긴 힘줄이 들어있는 소고기 같은 단단한 음식도 있다고 했던 것입니다. 


에베소서는 적어도 3장까지는 단단한 음식에 속하는 말씀들이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러니, 여러분도 적어도 거기까지는 영적으로 왕성한 식욕을 준비하셔야 하고, 또 이 질긴 음식을 씹을 수 있는 영혼의 치아를 준비하셔야 합니다. 그런 태도로 달려 드셔야 합니다. 조금 질기다고 처음부터 먹을 생각도 하지 않거나 조금 씹다가 내뱉지 마시고 끝까지 씹어 삼키겠다는 마음으로 이 말씀들을 대하셔야 합니다. 그래야 이 말씀들이 여러분의 영혼을 강하게 하고 풍성하게 해 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적으로 왕성한 식욕을 회복시켜 주셔서 에베소서 말씀들을 통해 우리를 단단하고 풍성하게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지난 주일에 우리는 바울이 에베소 교회를 위해서 기도했던 대표적인 기도제목들을 살펴 보았습니다. 바울이 기도한 것은 두 가지였는데요. 첫째는 에베소 교회 성도들에게 진리와 계시의 영을 부어달라는 것이었고 둘째는 그들의 마음의 눈을 열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성령님을 보내 주셔서 에베소의 성도들이 모르던 것을 알게 해 주시고, 이해하지 못했던 것들을 이해하게 해주시며 보지 못하던 것들을 보게 해 달라고 기도했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성도는 이런 복을 아는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성령님 안에서 새로운 눈이 열리고 이해력이 생겨났기 때문에 그것으로 모든 것을 다르게 보고 다르게 알고 다르게 이해하는 그런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많은 성도들이 새로워지고 달라진 삶을 살기를 원하지만 실제의 삶에 있어서는 믿지 않는 사람들과 그리 크게 구별된 삶을 살지 못하는 것은 그들과 보고 아는 것이 많이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도 사도 바울을 따라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에게 보고 아는 것이 달리지게 하셔서 다르고 새롭게 살아가는 은혜를 부어 주시기를 축원합니다. 


지난 주일에는 우리의 신앙에서 제대로 알고 제대로 보는 일이 왜 중요한지를 조금은 일반적인 입장에서 살펴 보았습니다. 아마 그것만으로도 우리가 성령님 안에서 제대로 알고 제대로 보는 은혜를 누리는 일이 왜 중요한지를 충분히 알 수 있었을 것입니다. 오늘부터는 본문에 나오는 바울의 기도에 조금 더 바싹 붙어서 바울이 그렇게 기도할 수 밖에 없었고, 또한 성도들에게도 그런 기도를 하도록 권면할 수 밖에 없었던 가장 중요한 이유를 조금 더 자세하게 살펴 보겠습니다. 


바울의 번째의 기도는 하나님께서 에베소 성도들에게 지혜와 계시의 영을 부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지혜와 계시의 영이라고 해서 어떤 특별한 다른 영이 따로 있고 그 영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지혜와 계시의 영은 성령님입니다. 단지 성령님께서 우리를 위해 베풀어 주시는 은혜들 중에서 우리에게 무언가를 계시하시고 또 그렇게 계시된 것을 깨닫게 해 주시는 것이 있는데, 이것을 특별히 강조하기 위해서 바울이 성령님을 그렇게 설명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바울은 왜 이 기도를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일까요? 바울은 그 이유를 이렇게 말해 줍니다.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우리가 성령님의 특별한 도우심 속에서 살아야 하는 이유는 너무나 많습니다. 그렇지만 그 모든 이유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이유는 성령님만이 우리에게 하나님을 알려 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처음 하나님을 믿기 시작할 때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내내 이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은 항상 지혜와 계시의 영이신 성령님 덕분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교독했던 시편 14편은 사람들의 일반적인 상태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 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 즉 다 치우쳐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 또 로마서 1장 20절부터 23절 말씀은 이렇게 말합니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의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치 못할지니라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과,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려주는 명백한 증거들을 이 세상 만물 속에 분명하게 넣어두셨습니다. 그 증거를 통해 하나님을 알고 믿게 하시기 위해서 였지요. 그렇지만 스스로가 하나님이 되려는 그 죄 때문에 사람이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능력이 심하게 손상되었고 그래서 스스로의 힘으로는 성경의 하나님을 찾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자연과 이 세상 속에서 무언가 자신들을 두렵게 하고 압도하는 것들을 느끼는 능력까지 완전히 망가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자연과 만물을 보면서 압도 당하고, 경외심을 느낄 수 있는 능력은 남아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인간은 그런 느낌과 깨달음을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경배로 이어지게 하지 않고 오히려 그런 것들을 느끼게 해 주는 자연과 피조물들 자체를 신처럼 섬기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상황이 이렇게 된 것이 인간이 의도적으로 선택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인간이 죄인이 되면서 생겨난 하나님에 대한 거부감과 반항심 때문에 그들을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들을 숭배하는 것을 선택한 것입니다. 성경은 이것이 우상숭배의 이유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저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참 이해가 가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믿으라고 하면 아주 강하게 하나님을 무시하면서 하나님을 믿는 일을 어리석고 무지한 일이라고 말합니다. 그렇지만, 막상 그런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참 우습습니다. 전혀 그런 이야기를 할만큼 수준 높지가 않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일이 있을 때는 손톱이나 머리카락을 깍지 않습니다. 시험을 앞두고는 미역국을 먹지 않고 속옷을 갈아입지 않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런 것들을 징크스라고 부르는데요. 사람들은 이런 것들에 생각 외로 강하게 매여 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사주팔자를 보러 다니고 무당을 찾아 다닙니다. 연초가 되면 그 해의 운세를 알기 위해서 그런 사람들을 찾는데 그 사람들의 말에 한 해를 꼼짝 못하고 살아갑니다. 하나님께 헌금 하는 일은 그렇게 비난하면서 액운을 막아 준다고 몇 백만원짜리 부적을 사서 몸에 지니고 다닙니다. 한 해 동안 물가에도 가지 않고 귀인 만난다고 동쪽만 쳐다보며 삽니다. 이사가는 것이나 결혼하는 것도 특정한 달, 특정한 날짜에는 하지 않습니다. 결혼 비용도 많이 들어가는데, 날짜 잡느라고 또 돈을 씁니다. 물론 우리들은 참 고맙지요. 우리는 거꾸로 그런 날을 골라서 이사하고 결혼하면 훨씬 싸고 편하게 할 수 있으니까요. 저는 간혹 이사를 할 때마다 제가 예수믿는 것이 얼마나 수지맞는 일인지를 확인하곤 합니다. 그렇다면 성도 여러분, 왜 인간은 이런 앞뒤가 맞지 않는 행동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것일까요? 그 크고 놀라운 하나님을 믿는 일은 어리석다고 하면서 왜 진짜 우스운 것들에는 왜 스스로를 묶어놓고 살아가는 것일까요? 그것은 성경의 설명대로 죄인인 인간에게는 스스로 하나님을 인식하고 찾아갈 수 있는 능력이 없고,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일에 대한 선천적인 거부감과 반항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정말 우리 인간의 상태를 얼마나 정확하게 짚어내고 있는지 모릅니다. 


이런 상태에 있는 인간은 하나님을 아주 희미하게 인식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절대로 하나님을 하나님답게 알고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또 하나님을 인식한다고 해도 그 하나님을 믿고 섬길 수가 없습니다. 결국 그 하나님을 스스로 거부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하나님을 알고 또 섬기려면 지혜롭게 하시고 하나님을 볼 수 있게 해 주시는 성령님의 도우심이 꼭 필요합니다. 물론 에베소서의 말씀이 하나님에 대한 이런 기초적이고 초보적인 지식을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이 드러내 주시고 깨닫게 해 주시지 않으면 우리가 하나님을 알 수 없다는 것은 신앙의 단계나 수준과 관계 없이 똑같습니다. 우리 스스로는 하나님을 알 수가 없다는 사실은 항상 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을 드러내 주시고 또 보여 주셔야 합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을 우리가 바르게 알 수 있는 이해력을 주셔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이런 은혜가 없으면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하나님을 하나님 답게 알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반대로 하나님을 오해하게 되고 그래서 하나님을 바르게, 하나님 답게 섬길 수가 없습니다. 


성도 여러분, 성도의 신앙은 우리의 열심이나 신앙생활을 한 햇수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얼마나 많은 일을 했고, 또 어떤 직분을 가졌느냐가 결정하는 것도 아니지요. 우리의 신앙은 우리가 하나님을 얼마나 제대로 그리고 깊이 아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우리가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알게 될 때, 생겨나는 반응이고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만큼만 하나님께 반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성경은 이 말을 과연 어떤 의미로 사용하고 있을까요? 우선 꼭 알아야 할 것은 이 말이 그저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하나님에 대한 내용들을 기억하고 있고, 그래서 누가 물으면 그 내용을 술술 이야기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경이 ‘하나님을 안다’라는 말을 사용할 때는, 그런 하나님에 대한 사실들은 물론이고 그런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안다는 뜻으로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누군가를 ‘그저’ 아는 것과 ‘인격적’으로 아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아마 여러분은 제가 여러분 앞에 처음 섰을 때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 때 여러분은 저를 보고 웃고 계셨지만 저는 정말 긴장되고 떨렸습니다. 그 때 여러분은 저를 보셨고 그래서 저를 아셨습니다. 이름은 장유진이라고 하니 그런 것같고, 이렇게 보니 키는 170쯤 되는 것 같고, 머리는 엄청 큰데 애석하게도 탈모가 진행 중이고, 커다란 얼굴이 허여 멀건 것이 꼭 달덩이 같고, 서울 말을 쓰는 것을 보니 서울사람이 분명한 것 같고, 인상은 좋아 보이지만 아직 그 속이야 잘 알 수 없고… 아마 그 때 여러분은 저를 이렇게 아셨을 것입니다. 이것도 분명히 여러분이 저를 아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조금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저를 ‘그저’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벌써 3년 반이라는 시간이 지났는데요. 그 때 여러분이 저를 아셨던 것하고 지금 저를 아시는 것이 같은가요, 다른가요? 많이 다르죠? 저는 원래 저의 첫인상으로 사람들을 잘 속게 만듭니다. 지금까지 저를 보고서 저에게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진 분들은 없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제가 속이려고 해서 사람들을 속인 것은 아닙니다. 그저 생긴 것이 이렇게 생겼다 보니 보시는 분들이 자진해서 속아 주셨습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아무 잘못이 없습니다. 물론 여러분이 제 첫인상을 보고 그것을 통해서 저를 아셨던 내용들이 전부 다 틀리지는 않았겠지만, 그래도 겪어보니 어떠십니까? 말씀들은 안하시지만 ‘아이구야, 저 사람 저거 겪어보니 영 딴판이네’하시는 부분도 있으시지요? ‘별 난 구석도 참 많네.” 하는 부분도 있으시지요? 분명히 더 좋아하게 된 부분도 있으시겠지만 실망하신 부분도 있으시지요? 그런데요. 여러분, 이게 바로 인격적으로 안다는 말의 의미입니다. 경험을 통해서 성품을 알고 스타일을 아는 것 말이지요. 그게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말입니다. 성경이 하나님을 안다고 할 때, 그 첫번째 의미는 바로 이런 의미입니다. 


사실 성경만 읽어 보아도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는 알 수 있습니다. 사랑이 많으신 분이시다, 인자하신 분이시다, 오래 참으시는 분이시다, 창조주이시다, 세상의 주인이시다, 전능하신 분이시고 전지하신 분이시다, 거룩하신 분이시다, 영원하신 분이시다… 등등. 반복하고 또 반복해서 직접 그렇게 말하기도 하고, 어떤 사건들을 통해서 그것을 알려주기도 합니다. 이렇게 성경은 하나님에 대한 우리가 알아야 하고 알 수 있는 모든 사실들을 알려 줍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을 그저 알고 있다고 해서 그것이 하나님을 아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인격적으로 안다는 것은 그 사람에 대한 객관적인 데이터를 가지고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그 사람을 안다는 경험하여 아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관계 안에서 그 사람의 성품과 그 사람이 나의 행동과 삶에 대해서 보이는 반응의 영향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제가 결혼 초기에는 안 그랬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점점 더 제 아내의 깊은 영향력 아래로 들어가고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진짜로 알게 된다는 것은 그 분과의 관계 안에서 그 분을 알게 된다는 것이고, 그래서 하나님의 성품과 나에 대한 그 분의 반응의 영향을 받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이전과는 다른 삶을 살게 된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사용하는 하나님을 안다는 말의 두 번째 의미이고 사실 그 말의 진짜 의미이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께서 정직하신 분이라는 것을 압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정직하신 분이라는 말은 그 분이 정직하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정직한 사람을 좋아하시고 기뻐하시며, 정직하지 않은 경로를 통해서 얻어진 결과는 그것이 아무리 훌륭해 보이더라도 인정해 주지 않으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이 사실을 정말로 아는 사람이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하나님을 섬긴다면 그 사람은 어떻게 살게 될까요? 정직하려고 노력할 수 밖에 없을 것이고, 그래서 진짜로 정직해 질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이 하나님께서 은혜로운 분이시라는 것을 인격적으로 알고 있다면 어떻겠습니까? 그 사람은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 덕분에 살았고 또 지금도 그 은혜 아래서 살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향한 은혜의 얼굴을 단 한 순간이라도 다른 곳으로 돌리시면 나는 지금 당장 하나님 앞에서 쫓겨나고 하나님의 아무런 은혜도 기대할 수 없는 상태가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 분의 무한한 용서 덕분에 나는 수없이 반복되는 실수와 허물에도 불구하고 버림받지 않는다는 것도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이 다른 사람을 대하는 태도는 어떻게 변해가겠습니까? 자신이 받고 사는 은혜를 생각하며 어떻게 하든 자신도 용서하며 은혜를 베푸는 쪽으로 가게 될 것입니다. 함부로 사람을 욕하고 자기 속에서 몰아내며 멸시하는 일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일에 굉장히 조심스러워 할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이 하나님께서 중심을 보시는 분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안다면, 이 사람은 항상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 앞에서나 투명한 사람으로 살아가려 할 것입니다. 화려하고 드러나지 않아도, 남들의 인정을 받지 못해도 의도가 잘못된 선택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저 묵묵히 올곧은 삶을 살아가려고 애쓸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알고 있는 하나님의 성품이 어떤 것이든 그러한 하나님의 성품들에 어긋나는 일을 했을 때는 누가 뭐라고 하지 않아도 굉장히 마음 아파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내가 하나님의 성품에 어긋나는 일을 해서 하나님의 마음을 상하게 했다는 것을 느끼게 되니까요.


성도 여러분, 이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지혜와 계시의 영이신 성령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게 되고, 또 그렇게 알게된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아는 사람들의 모습이지요. 이렇게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하나님을 경험하고 알게 되면서 스스로 변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오래 믿고, 또 하나님에 대해서 많이 알고 있어도 삶이 변하고 인격이 변하지 않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피상적인 지식에 머물러 있기있기 때문입니다. 장동건이 잘 생긴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을 그런 수준으로만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장동건이 잘 생겼다는 것을 안다고 해서 내가 잘 생겨지는 것이 아닌 것처럼 그래서 하나님의 어떠하심이 나의 어떠함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입니다. 


성경이 ‘하나님을 안다’는 말을 할 때, 그 말은 바로 이런 의미입니다. 하나님을 경험하여 인격적으로 알게 되고, 그래서 나의 삶과 행동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에 큰 영향을 받게 되는 것,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자신의 삶을 하나님을 향해서 방향 수정해 가는 것. 이것이 하나님을 안다는 말의 진짜 의미입니다. 우리가 여기까지 하나님을 알아야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이라고 인정해 줄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에게는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을 알아가는데는 이 일을 방해하는 아주 근본적인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사람은 몸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실 그 몸 자체가 바로 사람이지요. 그래서 사람은 자신처럼 몸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들과는 참으로 의미있는 관계를 맺지 못합니다. 사람에게 특별한 것이 되려면 몸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보여야 하고, 냄새를 맡을 수 있어야 하고, 손을 뻗어 만질 수 있어야 합니다. 그 몸을 통해 무언가를 서로 서로 주고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몸인 우리와는 다르게 영이십니다. 하나님이 계시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 분은 몸을 가지고 계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연적으로는 우리가 그 분을 볼 수도 없고, 느낄 수도 없고, 그 분과 영향을 주고 받을 수도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스스로의 힘으로는 하나님과 의미있는 관계를 맺고 그 관계 안에서 영향을 받고 변화되어져 갈 수가 없습니다. 그만큼의 인격적인 관계를 맺는 것이 애초에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과 그런 관계를 맺고, 그 안에 머물려면 무언가 하나님과 우리들 사이를 직접 연결시켜 주는 외부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처음 하나님을 믿을 때 뿐만 아니라 항상 그렇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역할을 해 주시는 분이 우리 성령님이십니다. 그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이신 성령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언제나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께 하나님께서 에베소의 성도들에게 지혜와 계시의 영이신 성령님을 충만하게 부어 달라고 기도했던 것입니다. 

 

항상 성령님 안에 거하시기를 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이신 성령님의 도움을 받으며 그 안에서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알아가시기 바랍니다. 그 앎 속에서 하나님을 참되게 믿고 섬기며 계속해서 아름다운 하나님의 모습을 닮아가시기 바랍니다. 그 은혜와 풍성함을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지혜와 계시의 영을 충만하게 부어 주셔서 하나님을 깊이 알고 그 분을 닮아가는 복을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성령충만하게 하소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부어 주셔서 하나님을 알게 하소서. 
  2. 하나님을 ‘그저’ 아는 것이 아니라 인격적으로 깊이 알게 하소서. 그래서 우리 속에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