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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새벽예배

2016.03.10. 새벽예배 - 성경읽기와 묵상(에스겔 11-1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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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일 : 2016년 3월 10일 목요일





자신이 살아가는 땅이 고통당하는 것을 보고, 교회가 그 영광을 잃어버리고 오히려 하나님께 버림받은 것 같아 보이는 시대에는 그렇지 않은 때보다 훨씬 더 절실하게 필요해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럴 때에는 그런 현실을 정확하게 보고 비판하고 대안을 내놓을 수 있는 사람들도 있어야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 모든 아픔과 허물들을 마치 자신의 문제처럼 부둥켜 안고 하나님께 부르짖을 수 있는 사람들은 꼭 있어야만 합니다. 사실 선지자는 이 두 가지 짐을 모두 질 줄 아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허물과 죄에 대해서 가장 예리한 비판을 한 사람들도 선지자들이었고 또 그런 허물과 죄를 가장 슬퍼하고 그것을 위해서 가장 간절하게 울부짖은 사람들 또한 선지자들이었으니까요. 


우리가 11장에서 다시 한 번 만나는 에스겔의 모습이 그렇습니다. 그는 유다가 멸망하기 직전에 유다의 죄악을 알려주고 비판하는 역할을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그대로 유다 백성들에게 예언을 했습니다. 그렇지만, 그 때까지만 해도 자신이 예언해야 하는 유다의 멸망이 얼마나 급박한 일인지를 실감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가 예언을 하는 동안에 브나야의 아들 블라다가 죽었습니다. 그리고, 에스겔은 그런 그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갑자기 에스겔은 큰 소리로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오호라 주 여호와여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다 멸절하고자 하시나이까?” 그렇다면 왜 에스겔은 블라다가 죽었을 때, 이렇게 부르짖었을까요? 그의 죽음을 통해서 심판에 대한 하나님의 단호한 의지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블라다가 훌륭한 인물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이름이 가지는 의미 때문이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여호와께서 구원하신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그가 하나님의 뜻을 중요하게 여기지도 않고 지키지도 않았으며 심지어는 그 뜻을 비웃다가 죽음을 당한 것입니다. 에스겔은 그의 죽음 속에서 이제 더 이상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소망이 끊어졌다는 하나님의 메세지를 들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예루살렘과 유다에 남겨진 자까지 다 멸절하실 것이냐고, 그렇게 언약백성들을 끝내실 것이냐고 부르짖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의 부르짖음을 멸시치 않으시고, 그런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알려 주십니다. 그런데, 바로 그런 하나님의 뜻은 언제나 어둠 속에 비치는 한 줄기 빛이 되고, 절망 중에 희망이 됩니다. 그 뜻 속에는 항상 그래도 완전히 끊어지지 않는 하나님의 신실하신 은혜에 대한 약속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의 구원이 끊어졌다고 여겨질 때,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비록 그들을 멀리 이방인 가운데로 쫓아내어 여러 나라에 흩었으나 그들이 도달한 나라들에서 내가 잠깐 그들에게 성소가 되리라” 어떤 의미에서 에스겔의 예측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예루살렘과 이스라엘 본토에 남아있는 사람들은 그렇게 치실 것입니다. 그들에게 구원을 베풀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가 있는 사람들은 다릅니다. 그들은 분명히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그리로 유배를 당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그렇게 흩으셨습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하신 이유는 단지 그들을 징계하시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은 일종의 ‘구별’이기도 했습니다. 애굽으로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별해 내셨듯이, 본토에 있는 더 심각한, 하나님 보시기에 가망이 없는 악한 백성들로부터 구별해 내시고, 이제는 성전이라는 건물, 지성소라는 특정한 장소가 아니라, 비록 임시적이기는 하지만 하나님 자신이 그들의 성소가 되어 주시려고 바벨론에서 그들을 ‘불러 내신 것’이었습니다. 


다 아실 것입니다. 어려움과 고통은 사람을 정화하는 힘이 있습니다. 어려움과 고통 가운데 있을 때 사람은 자신의 잘못을 되돌아 보고 더 이상의 잘못을 저지르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더 그렇습니다. 성도는 그런 일을 당하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을 정결케 하기 위해서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며 자신의 삶 속에서 죄를 끊어내는 일을 하게 됩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친히 이런 무너진 심정과 애통한 마음을 지닌 사람들의 성소가 되어 주십니다. 그들을 용서하시고 그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속죄소와 시은소가 되어 주십니다. 그리고 그들을 새로운 씨앗과 그루터기로 삼아서 하나님 나라를 다시 시작하십니다. 뿐만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에게 그 이전에는 상상할 수 없는 은혜도 약속하십니다. 


11장 19절과 20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그들에게 한 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 영을 주며 그 몸에서 돌같은 마음을 제거하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 내 율례를 따르며 내 규례를 지켜 행하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이런 약속이 본토가 멸망한 상태에서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 가 있는 유다백성들에게 주어졌다는 것이 정말 놀랍습니다.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절망 중에 있는 그들에게,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불안한 상태에 있는 그들에게 일너 약속이 주어졌다는 것은 정말 놀랍습니다. 이 약속은 물론 그 당시 유다 백성들에게 주어진 것이지만 사실 예수님을 통해서 신약의 교회에 와서야 비로소 완전히 이루어진 어찌 보면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약속이라고 할 수 있는 그런 약속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징계를 허락하시는 것은 성도들을 벌주고 힘들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 고통을 통해서 그들을 정결케 하시고 그들에게 이런 복을 주시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영을 더 충만하게 부어주시고 우리를 하나님의 뜻에 기쁘게 순종하는 참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들어 주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일시적인 어려움을 주시는 것입니다.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고, 고통스러운 일이 있을 때, 우리가 그 일을 통해 우리 자신을 돌아보며, 더욱 더 순결하고 거룩한 삶으로 나아가려는 결단을 내릴 때, 오늘도 우리는 하나님의 동일한 은혜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님의 거처가 되어서 더욱 더 온전한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바베론으로 성도들을 찾아와서 그들의 성소가 되어 주시고 그들 가운데 하나님의 영을 충만하게 부어주신 하나님을 기억하면서 때로 우리가 처하게 되는 바벨론을 닮은 삶의 자리를 가장 영광스러운 믿음과 은혜의 자리로 만들어 가는 우리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