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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새벽예배

2016.03.15. 새벽예배 - 성경읽기와 묵상(에스겔 17-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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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일 : 2016년 3월 15일 화요일





사람이 죄에 빠지면 그 죄가 만들어 내는 악한 열매도 감당해야 하지만, 더 심각한 문제는 그 죄가 그 사람의 판단력을 흐트려 뜨려서 스스로 자신에게 해가 되는 선택을 하고 누가 보아도 어리석은 선택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실 사람들은 악을 지혜로운 방법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그 악이 결국 자신에게 미치게 될 나쁜 영향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악은 항상 우리 삶과 존재 전체를 부패시킵니다. 그러지 않아도 온전치 못한 기능들을 더욱 더 형편 없이 망가뜨립니다. 그래서, 악을 통해서 유익을 얻으려는 사람들은 결국 스스로 망하는 길로 가게 되기가 쉽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현실적으로 그렇다는 것이 아닙니다. 겉으로는 잘 되는 것 같아 보이지만, 결국 죄와 악이 자기 삶과 존재에 새겨넣는 악한 형상은 점점 더 깊어지고 진해져 가게 되어 있고, 그래서 사람으로서 사람답고 아름답게 사는 일에는 완전히 실패할 수 밖에 없습니다. 


17장에서 하나님께서는 두 마리의 독수리와 백향목, 그리고 포도나무의 이야기를 들려 주십니다. 함께 읽어 보았지만 언뜻 보아서는 무슨 뜻인지 잘 들어오지가 않습니다. 그런데, 11절부터 이어지는 이야기를 읽어보면 그게 무슨 뜻인지 알 수 있고 또 무슨 교훈을 주시기 위해서 이 이야기를 들려 주신 것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첫번째 독수리는 바벨론입니다. 두번째 독수리는 애굽이구요. 첫번째 독수리는 크고 화려한 깃털을 가진 아주 멋진 독수리입니다. 이 독수리가 레바논으로 가서 거기서 백향목 꼭데기에서 돋아나는 연한 가지를 꺾어 가지고 장사하는 땅에다 가져다 놓았습니다. 이것은 바벨론이 1차로 유다를 점령한 후에 거기 사는 그래도 가진 것 있고 신분 있는 사람들을 포로로 잡아간 일을 가리킵니다. 이것은 그 땅에서 그런 사람들의 싹을 제거했다는 뜻입니다. 그 독수리는 그렇게 한 후에 그 자리에다 그 땅의 종자를 꺾어 옥토에 심었습니다. 이 종자는 뒤에 나오는 포도나무의 종자인데, 바벨론은 1차로 그렇게 그래도 괜찮은 사람들을 데리고 간 후에 이스라엘 본토에는 포도나무 종자같은 보잘 것 없는 가난한 사람들과 평민들만 남겨 놓았습니다. 첫번째 독수리가 두번째로 한 일은 바로 이 일을 가리킵니다. 첫번째 독수리는 그 포도나무 가지를 위해서 해 주어야 할 모든 것을 해 주었습니다. 수양버들 가지처럼 큰 물가에 심었다는 것이 바로 그런 뜻입니다. 이제 그 가지는 무럭 무럭 자라납니다. 그리 높지는 않지만 줄기가 굵은 그런데로 실한 나무로 성장해 갑니다. 그 나무 위에는 항상 첫번째 독수리가 날개를 드리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득 포도나무의 눈에 두번째 독수리가 들어왔습니다. 첫번째 이 독수리는 크고 깃털이 풍성하기는 했지만 첫번째 독수리만은 못했는데, 포도나무의 눈에는 이 독수리가 더 크고 강해 보였습니다. 그래서, 이 포도나무는 가까이에 있는 강으로 뻗어있던 자신의 뿌리를 거둬 들여서 두번째 독수리에게로 뿌리를 뻗었습니다. 이것은 유다백성들이 일차적으로 자신들을 점령한 바벨론의 손에서 벋어나려고 그 당시로서는 바벨론 보다 훨씬 세가 약한 애굽에게 도움을 청했던 일을 상징합니다. 애굽이 도움을 줄 수 있었을까요? 그럴리가 없지요. 애굽으로서는 그럴 생각이 없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시면 왜 그런지 알 수 있으실 겁니다. 원래 포도나무란 열매를 맺는데 그 목적이 있는 나무입니다. 그렇게 하려면 뿌리를 물가에 내리고 있어야 하지요. 그런데, 이 포도나무는 다른 물을 얻겠다고 물가에 내리고 있던 뿌리를 두번째 독수리를 향해 뻗습니다. 그렇다면 두번째 독수리가 보기에 이 포도나무는 쓸모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열매맺기를 포기했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이 일은 결국 첫번째 독수리, 그러니까 바벨론의 화만 불러 일으킵니다. 그래서, 그 독수리는 이번에는 아얘 그 포도나무를 뿌리채 뽑아 버립니다. 뽑혀져서 매마른 동풍이 불 때 말라 죽고 맙니다. 


스스로가 저지른 죄악을 버리지 못해서 그 죄로 인해 분별력이 흐려진 남겨진 유다백성들은 이렇게 어리석은 일을 자초합니다. 그런데, 이 어리석은 일은 사실 애굽과 바벨론 사이에서 저울질을 잘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 때 자신들이 당하고 있는 일들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잘못이 있습니다. 지금 유다는 징계를 당하고 있습니다. 징계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잘못 때문에 당하는 벌이고 훈련입니다. 그래서 당할만큼 당해야 끝이 납니다. 당하는 동안에는 다시 믿음을 되찾아야 하고 믿음으로 인내해야 합니다. 그래야 더 심해지지 않고 끝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유다 백성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징계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자기 힘으로, 아니 다른 누구의 손을 빌려서라도 빨리 끝내려고 했습니다. 그러다고 그런 화를 자초한 것입니다. 


꼭 징계받는 일이 아니더라도 성도의 삶 속에는 이와 비슷한 일이 많습니다. 어떤 일이든 그것이 하나님의 뜻으로 나에게 주어진 것이라면 그것은 믿음으로 기다려야 합니다. 자꾸 내 힘으로, 그리고 어떤 다른 사람의 힘을 빌어서 그 일을 빨리 해결하려고 하거나 심지어 악하거나 정직하지 않은 방법을 동원해서 그 일을 해결하려고 하면 안됩니다. 참 쉽지 않지만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 일은 가장 빨리 가장 상처를 덜 남기고서 끝이 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을 보여주면서 말이지요. 


우리는 17장에 나오는 포도나무 같아서는 안될 것입니다. 우직하게 한 곳에 뿌리를 내리고 그 일이 답답하고 미련해 보여도 때를 기다리다 보면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열매가 맺혀지게 될 것이고, 그러면 그 어려움도 끝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내가 지금 심겨진 그 곳이 물이 많은 강가임을 깨닫고 우직하게 자리를 지켜내며 주님의 때를 기다리는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